두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특히 대공황이 강타했을때, 군에 들어가는 것은 아이비리그에 입학하는 것 만큼 큰 성과였다. 그 행운의 소수에게, 미 해군에 있다는 것은 하루 세끼의 밥, 잠잘 곳, 후에 민간인이 되었을때 써먹을 수 있는 전문 지식을 익힐 기회를 받았다는 것과 같은 말 이였다. 대공황기의 많은 미국인들은 또 다른 경제 불황이 닥칠 것을 염려했다. 그 결과 많은 이들, 심지어 전쟁 포로였던 이였더라도, 정년퇴직시기까지 군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1941년 12월, 진주만이 공격당하고 미국이 2차대전에 참가하게 되면서 미 해군에 입대하는 것은 더 쉬워졌다. 새로운 함정들이 건조되기 시작하며 국가가 생존을 위해 노력함에 따라 모든 군종이 신병들을 원했다. 제때 밥을 먹을 수 있고, 머리 뉘일 곳이 있다는 곳에 더해 진주만에 대한 복수가 입대를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떤 이들에겐 해군에 징집되는 것은 육군에 들어가는 것의 대안이였다.


평시엔 나이나 건강 문제가 있는 이들은 면제되었다. 대부분의 시비즈, 해군 건설대대원들은 40대 혹은 그 이상의 나이였고 그중 일부는 질병 또한 있었다. 그들은 원래라면 복무가 허가되지 않았으나, 그들의 기술이 절실히 필요했기에 복무가 허가되었고 적극적으로 모병되었다. 이것과 같이 어느 나라의 군대에서도 너무 어리기에 복무가 허가되지 않을 20만명의 십대들(젊은 여성 일부를 포함해)이 그들의 나이를 속이고서 2차대전 내내 군에 입대했다. 그들 중 대다수는 투표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죽을 것 이였다.[1]


이 개인 중 하나, 켈빈 그라함은 12살이였다. 그는 미 해군에 텍사스에서 온 더 나이든 십대들(나이 들었다는 것은 16살과 17살을 의미한다)과 함께 입대했다. 그가 신병훈련소를 수료했을 땐 13살 이였고, 포수로서 USS 사우스다코타(BB-57)에 타고 솔로몬 제도로 향했다. 과달카날 주변에서의 수많은 전투 도중 소년은 부상당했다. 그러나 사우스다코타가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을때, 그의 나이가 밝혀졌다. 그는 용맹함으로 훈장을 받았음에도 거짓말을 했다는 죄로 영창에 입소되었다. 그는 전역처분 되었으나 명예전역은 허가되지 않았다, 그말인즉슨 그는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했다. 그들이 마침내 인정받기까진 수년이 걸릴 것 이였다.[2]


다른 어린 수병인 B. L. 페팃은 1928년 텍사스 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겨우 10개월일때 사망했고, 대공황의 여파로 페팃은 어린 시절의 대다수를 방과 후와 주말에 허드렛일을 하며 그의 가족을 도와야만 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지 1년 뒤, 페팃은 해군에 입대하기 위해 나이를 속였다, 군에 등록된 바에 의하면 그는 1924년생이였다. 13살때 페팃은 이병으로 복무를 시작했으나, 그가 전역할때인 종전시엔 그는 장성한 16살로 전기병과 병장이였다. 


페팃은 그의 신병훈련소에서 유일한 십대가 아니였다, 그가 생활관에서의 첫날밤을 회상했을때, 다른 어린 소년이 훌쩍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많은 이들에게 전쟁에 나서는 것은 그들이 처음으로 집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 이였고,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가족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페팃은 1943년 1월에 훈련소를 졸업했으나 그는 고작 8학년이였기에 어느 해군 학교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는 함대 유조선 USS 텔울라(AO-50)으로 즉시 보내졌다. 승선한 뒤, 페팃은 전기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으나, 그는 태평양에서 전후방을 왔다 갔다만 하는 비전투함에서의 복무를 불행해 했다.


1944년 3월, 전기병과 일병일때 페팃은 새로 건조된 함정으로 전출되었다. LCI(L) 750은 구축함이 아니였으나 대형 보병 상륙정은 전투를 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났을때 그녀는 두 개의 배틀스타를 수훈 받았고, 뉴기니 서부, 모리타니 섬, 필리핀 상륙에 참가했다. 페팃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LCI(L) 750에 머물렀다. 해군이 그가 나이를 속였음을 알았을 때, 그는 전역이 아닌 면직되었다.


이는 페팃에게 많은 문제를 만들어냈다. 그는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전역증이 없었기에 직장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텍사스 하원의원 알버트 토마스와 신문이 그의 문제를 다뤘고, 그는 명예전역을 해 G.I 빌에 따라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고등학교를 졸업해야만 했고, 그가 해군에 입대하기 전에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194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1952년에 텍사스 A&M 대학을 전기공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그 후 몇년간 페팃은 해군과 전기 기술자로 일하며 연을 유지했으며 그리고 그는 지중해의 6함대에서 레이더 사격관제 시스템에 대한 웨스턴 일렉트릭 현장 기술자로서 6개월간 지냈다.


리차드 존슨은 14살때 해군에 입대했으며 그 당시 사진들에선 더 어려보였다. 페팃처럼 존슨은 해군 유조선에서 복무했으나 그는 무언가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탈루가(AO-62)에 타고 있었으며 그의 시간은 일상적이진 않았다. 그는 1전대, 함상 부대에 들어갔으며 전대의 발동정 키잡이이며, 두개의 40mm 대공포중 하나의 포장이 되었다. 탈루가는 전투함이 아니였으나 그녀는 충분한 전투를 거쳤는데, 다른 함선에 급유중일때 공격을 받곤 했다. 그녀는 또한 울리히 환초에서 다른 유조선, 미시시네와(AO-59)와 함께 있던 와중 유인자폭어뢰, 카이텐에 공격당해 화재가 발생하였다.


후에 다시 울리히에 정박중이던 와중 탈루가는 몇번의 카미카제에 공격받는 함대를 목격하였고, 이중 하나는 항모 란돌프(CV-15)의 피격이였다. 1944년 12월, 필리핀 해안에서 탈루가는 홀시의 태풍으로 알려진 전쟁 중 최악의 태풍에 휘말렸다. 윌리엄 F. "불" 홀시의 3함대는 가운데에서 우측에 위치해 있었다, 구축함 3척이 전복되어 그들의 승조원 대다수와 함께 침몰했고, 많은 함정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항모들이 갑판에 주기해 두었던 항공기들은 쓸려나갔다. 탈루가는 살아남았으나 존슨과 그의 전우들은 그 사건을 전투처럼, 어쩌면 더 길었기에 강렬하게 기억했다. 


탈루가에게, 드리고 태평양의 다른 모든 해군들에게 전쟁의 마지막 달은 더 파란만장했다. 오키나와는 2차대전의 마지막 주요 전투였으며 태평양 전역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일본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미군과 그 동맹군에게 던짐으로서 그들의 본토에 대한 침공을 단념시키려 했다. 가미카제는 연합군 함선들이 입은 피해중 대부분이였으며, 만명의 미 해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1945년 4월 16일 아침, 탈루가는 이중 10번의 공격을 받았다. 대다수는 격추되었으나, 하나가 유조선을 덮졌다. 존슨은 기관총탄이 그 주변의 갑판을 두드리는 것을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항공기는 그의 머리 20피트 위의 주 마스트를 가격했고 30만 갤런의 항공유가 저장된 곳과 매우 가까운 요갑판(역주: 선수루와 선미루 사이의 갑판) 앞 부분에 추락했다. 몇몇 인원들이 죽거나 부상당했지만 탈루가는 살아남았다.


몇 년 후 함의 친목회에서 존슨은 그의 옛 장교중 한명에게 왜 그와 같은 아이를 나이든 이들이 있는 함과 포반원들을 지휘하게 했는지 물었다. 그는 답했다, "네 나이땐 겁먹기엔 너무 어리고, 많이 생각하지 않고서 행동할 것이라 우린 생각했다." 존슨은 해군에 11년간 더 머물렀으나 아내와 네명의 아이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전역한 후 경찰이 되었다. 그는 메인주 햄톤의 경찰서장까지 진급하였고, 35년 뒤 퇴직했다.


https://www.usni.org/magazines/naval-history-magazine/2015/december/too-young-be-sc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