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pYeQl5bScX8



Did you ever hear the tragedy of Darth Plagueis the Wise?

현자 다스 플레이거스의 비극에 대해 들어봤나?




텐큐 치마타는 자신이 왜 지금 달의 도시의 응접실에 앉아있는 것인지 대관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차를 마시나요, 텐큐? 저는 꽤나 자주 마신답니다. 제 스스로 차 애호가라고 자부할만큼은요.”


와타츠키노 토요히메는 격식을 갖춰 정갈한 백자 다관을 들어 텐큐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고풍스러운 의자에 자세를 곧게 하고 앉은 텐큐는 부담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차는 좋아하는 편이에요. 실크로드라던가 무역상들의 전통적인 교역 상품이기도 했고, 동서고금 항상 사랑받는 음료니까요.”


입이 잘 안 떨어져서 딱딱하기 그지 없는 대답만 내놓는 것 같아서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지 괜히 더 긴장하게 되는데 자신이 왜 여기 앉아있는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이 차는 ‘와타츠키 비취색 2022년’이라고 해요. 달의 음료는 모두 의약품과 동일하게 완전히 청정한 방식으로 조제되지만 그 중에서도 이건 와타츠키 가문의 노하우와 첨단 설비가 총집약된, 1년에 단 20봉만 나오는 최고급 말차죠. 부디 즐겨주시길.”


텐큐는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온기가 느껴지는 찻잔을 조심스레 입에 댔다. 와타츠키 비취색 2022년의 맛과 향은 지상의 여는 것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미지근하지도 않은 온기와 개울처럼 깔끔한 목넘김에 지금까지 먹어본 가장 향긋한 허브티보다도 훨씬 상큼한 내음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다만, 그 맛은 굉장히 쓴맛이 짙었는데 어지간한 탕약보다도 써서 너무 쓴맛이 강했다. 차를 마실수록 평정심을 되찾아줬는데 그럴수록 왠지 더 손이 안 갔다.


“달의 도시에서 받은 융숭한 환대에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그런데 저는 사실 제가 달의 도시에 초대받은 까닭을 아직 잘 모르겠어요.”


“텐큐, 우리 달의 백성이 당신을 초대한 것은 지상에 도사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위협 때문이랍니다.”


사뭇 막연한 대답에 텐큐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토요히메는 진지한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이야기는 세이란이라는 한 달토끼 병사의 심대한 규율 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과거 달의 도시의 사변 중 지상에 파견된 달토끼 부대의 척후병이던 세이란은 지시 없이 부대를 이탈한 후 본부와의 연락을 단절한채 지상에 남몰래 잠적한 전적이 있습니다. 자의적인 부대 이탈만으로도 군사재판에 회부될 만하지만 당시에는 상황이 종료되고 뒷수습에 전력하기에도 빠듯했기에 일괄로 실종자로 처리하고 말았죠.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의 과오를 헤아리기는 커녕 무모하기 이를 데 없게도 최근 남몰래 달의 도시에 복귀해 달의 도시의 기물 하나를 가로챈뒤 다시 지상에 내려갔습니다.”


토요히메가 소맷자락에서 부채를 꺼내들어 그걸로 탁상을 세번 가볍게 내려치자 방 안쪽 문이 살며시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주색 예복을 차려입은 묘령의 달토끼는 주먹 두개만한 크기의 옥구슬을 토요히메 앞에 내려놓고 말 없이 목례하고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세이란이 지상에 가져간 물건은 바로 달의 보옥이라는 도구입니다. 보다시피 달의 보옥은 외견상 옥구슬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평범한 옥구슬과는 다르게 달의 보옥은 더러움을 제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요. 세이란은 이를 이용해 지상에 달토끼의 이상향을 구축하려한 모양입니다만 그러기도 전에 달의 보옥을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응? 그럼 제 앞에 있는 옥구슬은 뭐죠?”


“바로 거기에 불미스러운 엇갈림이 있었습니다. 세이란은 달의 보옥을 되찾기 위한 수색 끝에 그 자신의 옥구슬과 흡사한 것을 찾고 이를 다시 창고 원래 자리에 돌려놓음으로써 이번 일에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토요히메가 접은 부채를 들어 옥구슬을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양단하자 옥구슬은 양배추처럼 정확하게 두동강이 났다.


“세이란이 가져다 놓은 이 옥구슬은 진짜 달의 보옥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허접한 모조품이었으니까요. 일반 달토끼는 못 느낄지 몰라도 달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미세한 차이점이 분명했죠.”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토요히메는 부채질을 두어번 해 두동강 난 옥구슬을 핑거 스냅이라도 한듯이 소립자 단위로 분해해 치워버렸다. 그 광경을 얼떨떨하게 바라보던 텐큐는 이렇게 반문했다.


“그럼 지상에 진짜 달의 보옥이 남아있다는 건가요?”


“그 말이 옳습니다. 달토끼 전용 텔레파시 회선을 통해 강제로 세이란을 달의 도시로 소환해 취조한 결과 보안을 강화하고 달토끼들의 일탈을 예방하는 데는 성과를 보았지만 달의 보옥을 회수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이란의 취조기록과 환상향으로부터의 첩보를 통해 달의 보옥의 위치를 특정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위치는 바로 마법의 숲 속 키리사메 마리사라는 인간의 주택입니다.”


“네? 마리사네요?”


뜬금없이 등장하는 친숙한 이름에 살짝 반갑기까지 했다. 토요히메는 그런 반응을 유심히 눈여겨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면식이 있는 자인듯 하니 얘기가 빠르겠군요. 정보에 따르면 그 인간은 달의 보옥으로 미숙하고 위험한 실험을 반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달의 보옥이 잘못된 손에 넘어가 지상에 부주의하게 방치된 상태가 계속된다면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참화로 귀결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죠. 해서 저는 당신에게 한가지 의뢰를 할려고 합니다.”


차 한잔을 비우고 차를 새로 따르며 토요히메는 입을 열었다.


“청컨데 달토끼 세이란과 함께 지상에 내려가 달의 보옥을 회수하고 그 소유권을 회복해주지 않겠습니까? 지상인들에게 달의 보옥의 원래 소유주를 소상히 밝혀줄 적임자는 유서 깊은 이치가미인 텐큐라고 저는 믿고 있는데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텐큐는 황망함을 감추지 뭇했다.


“어.. 제가요? 뭐, 마리사 그 도적같은 애를 응징하는 건 저도 환영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실물을 봐야 뭘 할 수가 있는데… 차라리 토요히메씨가 가지고 오시면 안되나요?”


“환상향엔 사방에 눈이 깔려있습니다. 그것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피차 불편한 입장이라는 점은 여전하기에 저나 다른 달의 사자가 환상향에 진입하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닐테죠. 저로서도 불필요하게 지상인과 조우하는 일은 가능하면 최소화하고 싶고요. 다방면으로 고려해봤을 때 당신의 협조를 구하는 편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판단입니다.”


토요히메는 탁상 위에 손을 괴며 텐큐를 응시했다.


“도와주실 건가요, 텐큐? 당신이 제 유일한 희망입니다.”


달의 도시에 부른 이유가 이런 것이었다니. 텐큐는 솔직히 좀 의외였지만 이런 의뢰라면 거절하기에도 어려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유명한 도적 마리사의 수집품을 가져오겠다는 장담을 어떻게 무턱대고 할 수 있을까? 섣불리 답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텐큐의 모습에 토요히메는 부채로 다시 가볍게 탁상을 세번 치고는 말했다.


“물론 사례도 넉넉히 해드리겠습니다.”


아까 그 묘령의 달토끼가 이번에는 어깨 너비의 상자를 안아들고 들어왔다. 그녀가 텐큐와 토요히메의 옆에서 큼지막한 상자의 뚜껑을 여니 그 안에는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이자나기 오브젝트가 차곡차곡 빽빽하게 한가득 채워져있었다. 텐큐는 자기 찻잔에 남은 말차 한모금을 단숨에 들이키고 낼름 선언했다.


“까짓거 한번 해보죠.”



마법의 숲은 푸르른 수목으로 가득찬채 세찬 바람을 맞으며 나날이 울창해졌다. 매캐한 마기가 감돌아 인적 드문 이곳을 보기 드문 한쌍의 신과 달토끼가 걸어가고 있었다.


“계속 그렇게 말 한마디 안 하고 가는 거야?”


불안감에 젖은 토끼처럼 고즈넉한 숲 이곳저곳을 흝어보던 세이란은 단답했다.


“임무 중엔 잡담 금지야.”


이리저리 내걸린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헤치며 텐큐는 달토끼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했다.


“간단해. 달의 보옥을 찾아서 그걸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기만 하면…”


“너한텐 단순히 심심풀이 의뢰일지 몰라도 나한테 이건 임무라고! 알겠어?”


아무래도 역효과였던 모양이다. 상당히 날선 반응이 돌아오자 신이라도 괜한 말을 했다며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세이란은 묵묵히 걸어나갔고 시원한 바람소리와 맑은 새 울음소리 사이로 가라앉은 분위기가 맴돌았다. 반영구적인 굳은 침묵을 깬건 다시 들려온 친절한 목소리였다.


“이게 나 혼자만의 의뢰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반드시 성공해서 달로 돌아갈려고. 그게 우리의 공동의 목표인 거잖아.”


그러자 앞서 방어적으로 나온 세이란도 마음이 편치 못했기에 재빨리 사과했다.


“함부로 소리질러서 미안해. 나도 알고 있어, 누굴 탓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는 걸. 하지만 다시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평소의 쾌활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침울하게 자포자기한 모습에 텐큐도 섣불리 위로를 건네지 못했다. 이윽고 어느덧 다다른 목적지에 세이란의 일정한 발걸음이 잦아들고 전형적인 마녀의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착이다.”


“응. 딱 보니까 알겠네. 저기가 마리사네 집이구나.”


둘은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양옥의 정문으로 다가가 친절하게 노크를 반복해봤지만 아무런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목청 높여 마리사를 불러봐도 마리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라, 지금 집에 없는 거 같은데. 그러면…”


“…플랜B로 변경한다.”


“응? 플랜B라니 그게…”


“돌파한다!”


그렇게 연호하며 세이란은 떡메를 양손으로 치켜 들고 정문을 냅다 내려찍었다. 집 정문은 수수깡처럼 부서져버렸다. 


“잠깐, 이게 무슨 짓이야! 마리사가 돌아오면 이 난장판을 뭐라고 설명하게?”


“그때까지 기다릴 시간 없어. 이대로 진입해 달의 보옥을 확보할 거야.”


“맙소사 이건 절도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장의 신이 절도를 할 수는 없어!”


“절도는 내가 하는 거지. 너는 망이나 보고 있어.” 


대경실색하는 텐큐를 뒤로 하고 세이란은 거침없이 마리사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텐큐는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세이란을 따라갔다.


집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는데 넓은 거실 구석구석에 온갖 잡동사니의 산이 쌓여있었고 이런데서 사는 게 가능한가 의문스러울 정도로 정리정돈이 안 되어 있었다. 발 딛을 틈도 찾기 어려워 도대체 마리사 얘는 어디서 뭘 이렇게 긁어모으고 다니는 건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세이란은 괴상한 마도구와 마도서와 마법약과 마법 소재와 마법 기구와 마법 뭐시기가 잔뜩 쌓인 문 맞은편 벽쪽 책장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칸에서 멈칫하더니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단숨에 잡아챘다. 세이란이 손에 잡아든 펜던트는 약간의 가공을 거치긴 했지만 달의 보옥을 원형으로 하고 있었다. 달의 보옥이 맞다는 걸 거듭 확인하는 순간 긴장이 확 풀려 벽에 풀썩 기대면서 세이란은 안도의 한숨처럼 내뱉었다.


“찾았어.”


“아, 그게 달의 보옥이야? 생긴 게 좀 다른데.”


“나도 처음에는 그래서 못 알아봤지만, 달의 도시 특제의 물건이 확실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똑바로 일어나 세이란은 바로 옆에 있는 텐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자!”


얼떨결에 그 손을 붙잡고 덩달아 부서진 정문을 지나 환한 햇볕이 반기는 집 밖으로 달렸다. 그렇게 의뢰는 생각보다 싱겁게 해결되나 싶었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려고?”


가슴이 철렁하며 제발 잘못 들은 거길 바라며 돌아본 지척에 빗자루를 짚어들고 선 그 목소리의 주인은 아니나 다를까 언제나의 평범한 마법사, 키리사메 마리사였다.


“딱 걸렸네? 두 명이나 현장 검거를 하다니 운이 좋은걸.”


그 말대로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어떠한 변명이라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세이란은 들고 있던 달의 보옥을 텐큐에게 넘기며 떡메를 양손으로 잡았다.


“차라리 잘됐어. 텐큐, 너는 달의 보옥을 가지고 돌아가. 내가 이 마법사를 붙잡아두고 있을테니까.”


비장하게 후방 사수를 자처하는 세이란이었지만 텐큐는 그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내가 뒤에 남고 너가 도망을 가야지 내가 도망을 가고 너가 뒤에 남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


어쨌든 1면보스인 세이란에게 환상향의 흑백 이변해결사를 상대하라고 등떠미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탄막부터 꺼내기 전에 먼저 대화라는 해결책을 시도해볼 필요가 있어.”


“이 상황에 무슨 대화가 통하겠어? 내가 지상에 오고 배운 게 한가지 있다면, 그건 ‘닥치고 탄막해라’라는 거야.”


“어, 환상향이라고 모든 분쟁의 조정이 탄막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야, 아마도. 지금 우리가 실로 어색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야말로 우리는 마리사에게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는지, 왜 그랬는지를 설명해야해.”


“나는 탄막으로 하는 대화라도 환영이다만.”


농담조로 얘기하면서 마리사는 둘이 서있는 부서진 정문 앞을 향했다. 경계하는 세이란에게 두려워할 것 없다고 양손을 들어보이며 다가간 마리사는 집 앞에 서서 이렇게 영창했다.


오스티움 레파로.”


마리사가 짧게 읊조리자 바닥에 산산이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천천히 떠올라 차례차례 합체하더니 온전한 문의 형상으로 복구되고는 경첩에 다시 고정됐다.


시간이 역행하듯이 박살난 문이 눈앞에서 저절로 멀쩡하게 고쳐지는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세이란이 감탄스럽게 중얼거렸다.


“너 진짜 마녀가 맞긴 하구나.”


“이렇게 차려입고 마녀가 아니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마리사가 씩 웃으며 한손으로 모자의 챙을 쓸어넘겼다.


“그런데 정리정돈 마법은 아직 없나봐?”


“그건… 가성비가 별로야.”


대충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렸다.


“보아하니 그걸 가지러 온 모양이지?”


마리사는 텐큐가 들고 있는 달의 보옥을 손으로 가리켰다. 텐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마리사는 단언했다.


“그건 빌린 거라서 내가 주고 싶다고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마리사 너는 항상 그렇게 말하잖아. 죽을 때까지만 빌려간다고.”


“미안하지만 이건 정말로 빌려온 물건이라서 말이다. 더군다나…”


두말할 것도 없다는듯 마리사가 곧장 길고 높게 휘파람을 불자 숲속에서 무언가가 성큼성큼 쇄도해왔다. 기세좋게 수풀을 뚫고 나온 운동체는 엄청나게 큰 개처럼 달려오는 요괴였다.


“애로롱~! 지옥의 삼두견 에노베로스, 여기 등장!”


누구도 이 대사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찾아내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압도적으로 썰렁한 분위기에 에노코는 더 이상 기세 좋지 못하게 물었다.


“읏, 이거라면 먹히지 않을까 싶어서 임팩트 있게 등장해봤는데, 그렇게 별로야? 다시 해볼까?”


“…아니 에노코. 나보다 곱절은 나이 더 먹은 요괴가 인간형으로 무리수 개그 남발하는 걸 봐야하는 호러는 이 정도로 충분해. 어서 이리 와봐.”


“개그 아닌데…”


텐큐와 세이란과 에노코를 서로에게 소개해준 마리사는 자기가 에노코에게서 달의 보옥을 빌려서 연구를 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마리사는 텐큐 손에서 슬쩍 달의 보옥을 낚아채 에노코에게 토스했다.


“봐봐. 에노코, 던져!”


“오케이!”


에노코는 넘겨받은 달의 보옥을 있는 힘껏 하늘 높이 던졌다. 텐큐와 세이란이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마리사는 가만히 지켜보라고 손짓했다. 환상향 끝까지 날아가며 희미해지던 작은 점은 어느 순간 다시 뚜렷해지더니 원근감을 역주행하며 용수철처럼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초고속도로 날아오는 달의 보옥을 에노코가 캐치볼하듯이 점프해 안정적으로 접수했다.


“보다시피 이 달의 보옥은 주술적인 힘으로 에노코에게 귀속되어 있어. 마치 어빌리티 카드가 거래를 통해 취득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것처럼 이 달의 보옥도 현재 상태로는 에노코에게서 1km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강제력이 작용하고 있어.”


“그런 거라면 소유권을 없애면-”


텐큐는 시장의 신의 능력으로 달의 보옥을 무주물로 만들었다. 하지만 잠시 에노코의 달의 보옥을 만지작거리던 마리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말하자면 저주 같은 거라서 그 소유주가 누군이지랑은 무관하게 작동해. 다만 그 저주 자체가 에노코랑 매우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지.”


“그럼 그 저주를 해주할 방법은 없는 거야?”


“내가 하고 있는 연구가 이 주술을 해주하거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야. 아직까지는 실마리를 찾지 못했지만 앞으로 4~5년 정도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한 달토끼는 그렇게 시간이 많지가 않았다.


“4, 5년?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어! 다른 방법은 없어?”


“달리 방법이 있다면 주술의 시전자를 직접 찾아가는 거겠지. 그게 누군지는 알고 있지만 별로 권고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야. 닛파쿠 잔무를 만나기 위해서는 지옥을 방문해야할테니까.”


“설령 지옥에 가야한대도 상관없어. 이 임무에 실패한다면 나를 기다리는 건 지옥보다도 더 끔찍한 미래일테니까.”


“나도 이 정도 선에서 의뢰를 포기할 생각은 없어.”


결연한 의지를 내비치는 둘을 감명깊게 다시 보며 마리사는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 그럼, 다들 여기 달의 보옥 위에 손을 올려. 적절히 조작하면 이게 포트키 역할을 해서 우리들을 잔무에게로 이동시켜 줄 거야.”


마리사가 내민 달의 보옥에 텐큐, 세이란, 에노코가 모두 손을 올리자 마리사는 모종의 주문을 읊었다. 그리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3, 2, 1… 가동.”



다시 나무가 서있었다. 이파리 한점 없이 헐벗은 나무는 외로이 황량한 대지에 뿌리박고 흑백 지평선 위로 무응답의 가지를 뻗어냈다. 그늘 한 터 내어주지 않는 삭막한 나무의 뒤를 따라 넓고 편평하게 베인 나무 밑동들이 연이어졌고 어두운 그루터기들은 암석 같이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삭막한 나무에 가장 가까운 그루터기 위에 무심한 표정으로 한 오니가 앉아 있었다.


“마리사 또 왔느냐. 거기다 이번에는 손님을 더 데려왔군.”


“너 보러온 손님들이다.”


“에노코도 오래간만이구나.”


“안녕하세요 잔무님! 잘 지내셨어요?”


“오냐.”


구면인 마리사와 에노코하고는 가볍게 안부를 나누고 손님들을 맞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명은 토끼, 그것도 달토끼인 것 같군. 네 이름이 뭐지?”


“세이란. 그냥 세이란이야.”


“그래, 지옥에 온 걸 환영하네 세이란. 그리고 다른 한명은…”


“텐큐 치마타. 시장의 신입니다.”


텐큐의 자기소개를 듣고 잔무는 한동안 뭔가 곰곰이 되짚어보더니 이내 감탄을 터뜨렸다.


“아하-, 환상향 토지문서를 죄다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린 그 신이군.”


“어, 그것도 맞긴 한데 그 일은 어떻게 수습은 됐는데요.”


“물론 수습이야 했지. 하쿠레이 레이무가 말이야.”


곤란한 표정의 텐큐 앞에서 짖궂은 웃음을 지으며 잔무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인가?”


달의 보옥과 세이란에 관해서 달의 도시에서 마법의 숲, 그리고 지옥에 이르기까지 텐큐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잔무는 그 소상한 설명을 군말 없이 끝까지 경청하더니 텐큐가 이야기를 마친 후 가장 먼저 텐큐와 세이란이 듣고 싶어할 부분부터 답해줬다.


“그 주술은 물론 내가 건 게 맞다. 여차저차 손을 좀 봤다만 원본도 분명 달의 보옥이지. 하지만 주술 자체는 여러가지 주술을 뒤섞어 급조한 것이기 때문에 시전자 본인이라도 풀기 어려워.”


“주술 시전자도 못 푸는 주술이라니 그게 말이 되나요?”


“애초에 그 주술은 풀릴 걸 전제로 한 주술이 아니다. 오히려 에노코랑 거머리같이 달라붙을 수 있도록 즉석에서 주술이 먹혀들게끔 조합하는데 초점을 뒀지. 어떤 주술을 어떤 순서로 덮어씌웠는지는 마리사에게 이미 전달한 바 있지만 이런 뒤죽박죽 쌓인 라자냐 같은 주술을 해주하는 건 최고의 전문가에게도 긴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니 에노코한테서 달의 보옥만 떼어가는 건 현재로서는 요원하다고 해야겠군. 아니면 달의 보옥과 함께 에노코까지 입양하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만.”


“뭐라고요 잔무님?”


“그보다 앞에 한 말 중에 달의 보옥을 무주물로 만들었다고 한 부분이 걸리는데 내가 들은 게 정확한가?”


“네. 정확하게 소유권을 없애버렸죠.”


“그러면 달의 보옥에 원래 소유주가 누구인지도 이제는 의미 없어져버린 것 아닌가?”


“…!!!”


텐큐는 머리가 한대 띵하게 얻어맞은듯 맑아오더니 순간 번지점프를 한 것처럼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바본가. 어떻게 이걸 이제야 눈치챌 수 있지? 속으로 온갖 만감이 교차하면서 사색이 된 텐큐는 무의식적으로 혼잣말했다.


“어쨌든 의뢰는 달의 보옥을 가져오는 거였으니까 달의 보옥만 가져간다면…”


“그게 안 되니까 나한테 찾아온 거잖나.”


의뢰고 뭐고 다 망쳐버렸다는 절망감에 텐큐는 주저앉아버렸다.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하지만 본인의 의뢰는 실패하면 그만이더라도 세이란의 임무는 그렇지 않았다. 그 생각이 텐큐를 괴롭게 했다.


“그나저나 그런 시시한 물건 하나 때문에 시시콜콜 따지고 든다는 거구나. 달의 도시는 완전무결한 극락정토이니 부동의 세계 일등적 지위를 영예롭게 누린다며 폐쇄주의로 일관하더니 막상 외부가 요란하니 잠을 못 이루겠는가. 월인들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무리들이로군, 그렇지 않아?”


못마땅하다는듯 혀를 차며 잔무는 세이란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왔다. 달토끼의 눈을 바라보며 잔무는 탄식에 가깝게 진술했다.


“가엾은지고, 달의 도시에 이변이 생길때마다 달토끼가 군말 없이 감수해야 하는 수고로움만 늘어나는구나. 네 사정이 그렇게 된 데는 내 책임도 있다. 달의 보옥 하나가 지상에 돌아다니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 내 불찰이다. 그동안 혼자서, 많이 힘들었지.”


안쓰러운 눈빛으로 잔무는 가냘픈 손을 뻗어 세이란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구나. 정말로, 정말로 미안하구나.”


모두가 충격 받은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상황에 세이란은 쓰다듬는 손을 내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세이란의 입에서는 특별히 긍정의 말도 부정의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눈에 차츰 물기가 맺혔다. 설움이 응집되어 한줄기 소나기로 내리려는 무렵 얇다란 손이 볼에서 떨어지고 현실감 있는 목소리가 고요를 깨트렸다.


“일전의 이야기와 문제의 근원, 금후의 방책을 포함해 달의 보옥을 잘 맡아놓겠다고 내 명의로 친서 한장을 써주마. 일단 그걸 가지고 달의 도시로 돌아가보거라. 그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세이란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텐큐는 보다 회의적이었다.


“친서가 달의 보옥을 대체할 수는 없어요. 아무리 설명을 잘한다고 해도 임무를 실패하고 달의 도시에 돌아가면 세이란은 용서받지 못할 거에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세이란을 달로 되돌려보낼 수는 없어요.”


예상 밖의 반대에 세이란은 곤혹스럽다는듯 텐큐를 말렸지만 쟁점에 있어서 납득할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텐큐는 순순이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잔무는 귀찮다는듯이 주문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거라, 그대들은 해야할 일을 다 마쳤으니 달의 도시에서도 임무가 실패했다고 질책하지 못할 거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신의와 성실을 위해 작금의 상황에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가능할지 스스로 되돌아볼 지점이 아니더냐?”


그런 속편한 소리로 쉽게 포기할 수 있겠냐고 하려던 텐큐는 불현듯 말문이 막혔다.


과연 여기서 이렇게 아웅다웅 말다툼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식으로 고집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기나 할까.


차츰 의심이 의지를 잡아먹고 애당초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개연성이 없이 종잡을 수 없어 무작위적 서순의 엔트로피 난수 같이 정신줄을 놓았다. 텐큐는 그만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런 반문도 할 수 없었다.


실시간으로 허무감에 빠져드는 텐큐를 보다못한 세이란이 끼어들었다.


“둘 다 그만해. 텐큐, 편들어주는 건 고맙지만 이번에는 잔무 말대로 하는 게 맞아. 그리고 잔무, 달토끼인 내 눈에는 보여. 네게서 나오는 귀기 서린 파동의 위상이.”


잔무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콕콕 가리켜보였다.


“그거 참 훌륭한 시력이군, 그렇지 않아?”


“어이, 그런 걸 하지 말라는 거잖냐.”


마리사가 팔괘로를 잔무에게 겨누었다. 미동도 없이 얼마간 마리사를 똑바로 떠보듯 응시하던 잔무는 금세 귀찮다는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뒤돌아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달의 사자를 상대로 세이란에게 보호를 제공할 수 없으니 지키지도 못할 약속 따위는 할 수 없어.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판단했을 뿐이다.”


현기증을 느끼며 텐큐는 그래도 다른 누군가는 가능하지 않겠냐고 간신히 발음했다.


“넓디넓은 지옥에서도 달의 도시의 내정에까지 끼어들만큼 앞뒤 가리지 않는 자들은 손에 꼽지. 그리고 만일 어찌저찌 그들과 접촉한다고 한들 그들은 그대들에게 빚진 게 없는데 그들을 그대들이 원하는대로 어떻게 설득시키겠다는 거냐?”


“그래, 쓸데없이 말썽을 키우고 싶지 않아. 너나 다른 사람들까지 말려들 필요 없는 일이야.  이게 맞는 방법이니까 걱정할 거 없어. 괜찮아 텐큐.”


이게 최선이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걸까. 텐큐는 분명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당사자의 적극적인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일단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터벅터벅 원래 앉아있던 그루터기에 다시 돌아가 잔무는 손으로 아까 쓰던 파일철을 더듬었다. 그러나 파일철을 찾기도 전에 잔무의 손은 능숙하고 작위적으로 덥치듯 겹쳐오는 장갑 너머의 손에 정지했다.


“이걸 찾으시나요, 잔무님?”


우아한 손놀림으로 파일철과 만년필, 편지지, 편지 봉투까지 내미는 장갑 낀 손의 주인은 아무 낌새도 없이 동석해오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잘 아는 얼굴, 요모츠 히사미였다. 지나치게 달라붙는 눈 가린 꺽다리에 거리를 두며 잔무는 무뚝뚝하게 응대했다.


“음, 그래 고맙다 히사미.”


“흐흐흐흐, 언제든지 말씀만 해주세요. 잔무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저의 기쁨이니 말씀만 하신다면 혼인관계증명서라도 얼른 대령하겠사옵니다.”


“그런 건 필요없다.”


대번 일축하고는 글을 쓰려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히사미는 손을 엄청 꽉 부여잡고는 놓아주지를 않았다.


“저기, 히사미? 손 좀 놓아주지? 편지를 쓸 수가 없다만.”


“그게 말이죠, 잔무님… 사실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홍조를 띄우고 가성으로 부리는 아양에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지만 심호흡을 하며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뭐라고 말하는지 일단 들어보기는 하기로 했다.


“저도 요즘 잔무 수치가 떨어져서 많이 힘든데, 저도 뺨 좀 쓰다듬어주시면 안되나요…?”


그냥 다 집어치우자.


“네 엉덩이를 걷어차주기 전에 헛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돌아가렴.”


정색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궁서체로 경고했지만 히사미는 당연하게도 들어처먹질 않았다.


“어멋! 그것도 좋아요~!”


“아- 그러셔-.”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뜻대로 해주는 수밖에. 잔무는 두말하지 않고 그루터기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자세를 잡더니 붙잡은 손을 힘껏 휘둘러 히사미를 메치며 발차기를 날렸다.


잔무의 발은 히사미의 엉덩이에 직격했고 오니의 완력을 싣고 그녀를 하늘 높이 길게 사출했다. 이상야릇한 교성을 내지르며 빙빙 도는 히사미는 포물선을 그리며 지평선 너머로 별똥별처럼 사라져갔다.


슬랩스틱 코미디도 아니고 이상의 두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하던 텐큐는 이윽고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달려가 따져물었다.


“이게 무슨 짓거리에요? 차란다고 사람을 시야 밖으로 걷어차면 어떡해요?”


“음, 보기보다 튼튼한 요괴니까 괜찮을 거다.”


좀 궁색한 변명을 하며 잔무는 겸연쩍게 재차 자리를 잡고 편지지를 잡아들었다.


“괜찮고 말고 이전에, 애초에 저 여자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죠?”


“쟤는 스토커 비스무리한 건데 매번 상상도 못한 장소에서 시도때도 없이 나타나 못살게 구는 아주 고약한 요괴지. 발로 차여도 싸.”


“저 여자가 스토커라면 못 따라오게 막으면 되잖아요?”


“못해. 살생은 불법에 어긋나거든.”


‘네가 살아있는 건 환상향의 스펠카드룰 덕분이야’ 같은 소리에 잔무에 그게 무슨 말이냐며 스토커가 확실하다면 어디 가두어두던가 격리를 하면 될 거 아니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나도 그런 식의 부질없는 시도를 반복해봤지만 그런 방법은 히사미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무간지옥에 던져놔도 알아서 빠져나오는 요괴를 어떻게 붙잡아두겠나?”


“그건, 말이 안되죠. 세계에서 가장 엄혹한 감옥을 자기 마음대로 드나들다니 그건 불가능해요.”


만년필을 굴리던 잔무는 피식 웃었다.


“시장의 신이여, 그대는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가늠조차 못하리라.”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 수가 있다는 거죠?”


“본인은 그게 식지 않는 사랑의 힘이라고 주장해. 하지만 내 소견에 따르면 그건 도를 넘은 스토커의 집착 올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야. 눈 가리고 다니더니 진짜 눈에 뵈는게 없는 건지.”


서슴없이 귀에 속삭여대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음담패설을 떠올리며 잔무는 진저리를 쳤다.


“그렇군요…”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텐큐는 어쩐지 잔무가 갑자기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아직 베일에 싸인 이야기는 다 드러난 게 아니었다. 글씨 서걱거리는 소리에 말씨가 얹어졌다.


“자고로 지옥에 오면 지옥식으로 일하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해. 거기서 각종 일을 도맡아서 하다 보면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실로 쏜살같이 날아가 버리고 돌아본 세월은 어느 순간 너무 까마득해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조차 잊혀져 버리지.”


아니, 어차피 허무에 침잠한대도 재차 간구할 미련마저 여의고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깨달을 때까지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매일을 지연해왔을 뿐이니 지옥 밖에서도 삶이란 현실에서 박리된 언표에 불과했다.


“헌데도 처음 지옥에 발을 들이던 그 날의 심경을, 각오를 여지껏 잊지 않을 수 있는 데는 처음 만난 그날부터 한결같이 나를 졸래졸래 따라더니던 히사미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그러니까,”


편지 작성을 다 마치며 마지막에 친필싸인으로 끝맺었다.


“제멋대로 따라오는 요모츠시코메 한명에게 곁에 자리 한 켠 못 내줄 이유는 없다는 거다.”


편지봉투에 편지지를 접어넣고 편지를 봉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여전히 이해가 잘 안 갔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정도는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듯말듯한 표정의 텐큐에게 잔무는 편지를 건넸다.


“어서 받게나.”


“아, 네.”


한 손에서 다른 손에게로 편지가 전해지는 그때 난데없이 느릿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제법 종교가답게 말하는 걸.”


빈정대는 어투로 말하며 마리사는 삐딱하게 잔무를 꼬나봤다.


“종교가들은 늘상 세상의 불운과 시련이 모두 그들의 것인양 행세하면서도 세상의 진리 역시 그들의 교리에서 나온다고 설파하지. 하지만 나는 내 친구가 종교가라서 잘 알아. 종교가가 하는 말은 믿을 게 못된다는 걸.”


예고도 없이 날라온 통한의 일침에 잔무는 심히 당혹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궁서체로 타박했다.


“하쿠레이 무녀는 환상향의 관리인으로서 불철주야 환상향의 안녕을 위해 여념없이 힘쓰고 있거늘, 너는 그 친구되는 자로서 응원해주지는 못할망정 망령되이 비방과 폄훼를 일삼고 있으니 통탄스럽기 짝이 없구나.”


“에, 걔가? 글쎄, 허구한 날 신사에서 차나 홀짝이고 있는 애가 환상향에 기여를 하면 얼마나 할지 모르겠는데. 여차하면 이변해결도 내가 하면 그만이지.”


마리사가 뻔뻔하게 굴자 잔무는 기가 차다는듯이 말했다.


“너는 네 자신이 마법사면서 종교가를 아주 업신여기는듯이 입에 담아도 되겠느냐?”


“하-? 종교보다 마법이 낫지. 내가 아는 종교가 마법사 여럿이 있지만 걔네들도 종교적인 마법을 썼으면 썼지 마법적인 종교를 쓰지는 읺는다고.”


“나는 네가 경전 하나라도 제대로 읽고 그렇게 말하는건지 정녕 궁금하구나.”


“아직은 먼저 읽을 책들이 많아서. 빌린 것 다 읽고 시간 나면 생각해볼게.”


잔무는 마리사를 ‘이 고오얀 놈’하는 눈빛으로 흘겨봤지만 더 이상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지옥에서의 용건은 전부 결론이 났고 이제 넷은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야할 일만 남게 되었다. 잔무는 이번에는 특별히 자신이 다 함께 단번에 귀환시켜주겠다며 처음 지옥에 올 때처럼 손을 모두 달의 보옥에 올려놓게끔 했다.


넷은 달의 보옥을 가운데에 둔채 모여서고 잔무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잔무도 그에 화답했다.


“그럼 다들 잘가시게나. 죽어서 지옥에서 다시 보지는 맘세.”


그리고 귀환 주문을 발동하기 직전, 잔무는 짖궂은 웃음기를 눈가에 머금고 깜박할 뻔했다는듯이 덧붙였다.


“아, 마리사 너는 예외고. 너는 나중에 내가 삼도천에서 직접 픽업해주마.”


“잠깐! 그게 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마리사가 미처 뭐라고 따지기도 전에 잔무는 곧바로 주문을 발동해 그들을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마법의 숲, 4명의 인영은 처음 떠났던 자리 그곳으로 전이했다. 하지만 처음 떠났을 때와는 넷의 입장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마리사는 얼이 다 빠져서 믿기지 않는다는듯 중얼거렸다.


“조금 전에 뭐라고 그랬어, 날 보고 삼도천에서 픽업하겠다고? 지옥에 데려가겠다 이 말인가? 이게 무슨 소리야! 지옥행이라니! 내가, 내가 지옥행이라니!”


그런 남의 마음도 모르는듯 에노코는 신나게 떠들었다.


“헐, 마리사 너 방금 잔무님한테 스카웃된 거 아니야? 마리사 너 완전 계탔다, 계탔어!”


“어, 있지 에노코, 보통 이런 상황에는 계탔다고 하는 게 아니라…”


“엿됐다고 하지.”


옆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사는 절망하며 절규했다.


“난 한 번만이라도 행보카고 시픙데 왜 나 마리사는 햄보칼 수가 업서!”


겟세마네라도 부르는양 목청높여 울부짖는 마리사의 비애에 심심한 위로를 전하면서도 텐큐와 세이란은 이만 가봐야했다.


“마리사, 오늘 정말 너무 고마웠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다음에 도움이 필요한 일 있으면 불러. 내 손 닿는 데까진 얼마든지 도와줄테니까. 아니면 잔무한테 다시 따지러 갈 때 불러도 좋고. 나도 같이 가서 한마디 하게.”


“너도 힘내라. 화이팅.”


본체만체 하는 마리사에게 손을 흔들며 이별하고 둘은 최후의 목적지로 떠나갔다.


그날 밤 대학원에 납치된 대학생처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마리사의 옆을 애지중지 지키며 에노코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과연 꽤나 고역스러운 경험이었겠어요, 텐큐.”


그리고 또 다시 달의 도시에 이젠 익숙해질 것 같은 응접실에, 이번에는 세이란과 나란히 앉아 토요히메와의 면담 시간에 당도했다. 요전번의 말차의 여분이 남았다 하여 차 한 잔씩 돌리고 텐큐의 적절히 요약된 보고를 주의깊게 청취한 토요히메는 텐큐에게 연민을 표했다.


“꽤나 다사다난하기는 했죠.”


돌이켜 보면 상식을 파괴하는 수준의 장면이 많았다. 사실 자기자신도 일부분에서는 지나치게 막나갔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의뢰만 성공했다면 이렇게 좌불안석이지는 않을텐데 그 점이 유일하게 아쉬웠다.


“그렇다면 예의 그 친서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 여깄어요. 잠깐만요.”


텐큐는 서둘러 편지를 품에서 꺼냈다. 단번에 편지를 받아간 토요히메는 주저하지 않고 봉인을 뜯고는 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세이란도 텐큐도 편지를 읽는 동안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편지를 내려놓은 토요히메가 둘에게 내놓은 한 마디는 견책도 힐문도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토요히메는 웃으며 박수를 쳐줬다.


상황 판단이 안되던 텐큐가 점차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던 말던 갑자기 우르르 방에 밀려들어온 달토끼들도 박수를 치며 축하의 말을 건네주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개꿀잼 물카인가 싶을때쯤 토요히메가 다시 입을 열었다.


“텐큐, 당신에게 부여된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결과물을 무사히 가져왔군요. 달의 사자의 리더의 이름으로 이치가미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뭐라고요?”


곧이어 박수소리도 점차 잦아들고 달토끼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방은 금세 조용해졌다.


“설명이 필요한 것 같군요.”


“네. 이게 무슨 일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되거든요.”


텐큐가 강하게 긍정하며 의문을 제기하자 토요히메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겠죠. 다시 사건을 거슬라 올라가 처음부터 성심성의껏 소명해보겠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고 토요히메가 운을 뗐다.


“맨 처음 달의 보옥 하나가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봅시다. 저는 모조품이 달로 흘러들어온 경위뿐만 아니라 모조품 자체에 대한 검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오니의 손을 탄 물건이라는 걸 금방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추후 세이란의 취조 기록과 종합해봤을 때 그 출신은 높은 확률로 지옥이 될 터였고요. 달의 보옥이 미신고 분신물로 환상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시정해야할 일이지만 그 결과로 지옥의 옥리가 환상향의 후견인으로 나선다면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토요히메가 부채를 꺼내 펼쳐보이자 이번에는 응접실 안쪽 문을 열고 점잖은 달토끼 둘이 금속질 서빙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완벽한 속도 조절로 정확히 텐큐 옆에 도착한 서빙 카트 위에는 층층이 달의 보옥 여러 개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하지만 고작 달의 보옥 하나 때문에 지옥과 불화를 빚을 필요는 없는 일입니다. 달의 보옥은 단순 공산품이기에 그 본연의 가치가 현저하게 희소한 물건은 아니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보기 좋게 모조품까지 준비해 놓지도 못했겠죠. 따라서 저는 달의 보옥을 회수하는 데 성공하는 걸 기본 목표로 두되 이것이 난망할 경우에 대비한 대안 역시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기본 목표가 실현 불가능해졌을 때 차선책으로 달의 보옥의 소유권에 대해 변경을 가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토요히메가 듣는 귀는 더 필요없다고 하자 두 점잖은 달토끼가 목례하고 다시 서빙 카트를 밀어 방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텐큐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러면, 하필 저를 수탁인으로 지목한 이유가 그것인가요?”


“그렇습니다. 텐큐가 이 의뢰를 수락한다면 저로서는 유실된 달의 보옥을 회수해도 그만, 아니면 아예 그 소유권이 말소돼버려도 그만, 어느쪽이든 상관없는 결과가 되므로 달의 사자를 직접 지상에 파견하는 문제를 우회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래서는 결국 달의 보옥이 지상에 남아있게 되잖아요.”


“말했다시피 달의 보옥이 그리 대단한 물건은 아니랍니다. 그 자체로는 지상에 심각한 파괴를 초래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지도 못하고요. 기본적인 문제는 명목적인 것이지 실질적인 것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명목적인 문제에 명목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죠.”


“그렇다면 지상의 참화를 우려한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천한 지상인들이란 봉래의 약 하나 푯대에 올려놓았다고 서로 죽고 죽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어리석은 죄인들일지언데, 달의 보옥이 지상에 떨어졌다고 하니 자연히 이번에는 지상에 어떤 풍파가 일어날지 내심 걱정이 들던 건 사실이니까요.”


드라이한 어조로 지상의 더러움에 대한 뿌리깊은 경멸을 피력하면서도 토요히메는 물론 신성한 이치가미는 그와 구별되게 예우받을만 하다고 부연했다.


“비록 우리 달의 백성은 오래전 지상에 대해 가망을 버렸지만 지상이 더욱 더러움이 넘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달의 사자의 리더로서 개인적으로 이런 사소한 문제라도 허투루 넘어가서는 기준을 잡지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간접적인 형태로나마 대응하는 것이 올바른 처사라고 여겨졌습니다.”


잔무의 친서를 들어보이며 토요히메는 말을 이어갔다.


“때문에 차선책을 고를 경우 달의 보옥에 손을 댄 오니에게서 문제의 소지 없이 달의 보옥을 철저하게 간수하겠다는 보장을 받는 것이 부차적인 목표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달의 보옥을 안전하게 관리하겠다고 지옥의 옥리에게 확답을 받았으니 임무도 완수된 셈이죠.”


“하지만 그건 제 의뢰가 아니었잖아요. 제가 받은 의뢰는…”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이 말을 멈춰세웠다. 그제서야 퍼즐의 마지막 피스가 짜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럼 이게 세이란의 임무였나요?”


“거기에 포함되지요. 세이란의 임무는 양쪽 중 어느 방법으로든 모든 목표를 달성하되 그 과정에서 동행인에게 자신의 이중의 임무를 들키지 말 것이었습니다. 이번 임무는 세이란에 대한 징계를 겸한 것이기도 하기에 둘에게 다른 목표를 부과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효과를 의도한 것이었죠. 그 때문에 텐큐에게 모든 내막을 밝힐 수 없었던 점은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듣고보니 몇몇 부자연스럽던 행동들이 비로소 이해가 됐다. 텐큐는 말없이 조용한 세이란을 돌아봤다.


“…속여서 미안해”


세이란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 걸로 사과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텐큐는 일단 토요히메에게 먼저 물었다.


“어쨌든 임무는 다 완수된 거 아닌가요? 세이란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물론 다행스럽게도 세이란은 주어진 임무를 다 마쳤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독방에 이감되고 최종 판결이 나올때까지 기다려야겠죠. 세이란의 처분은 판결에 따라 결정될 겁니다.”


텐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보답이 이런 거라고? 임무를 완수했다는 걸로는 아무것도 못 해냈다는 얘기인가? 입맛이 썼다. 결국 이런 식의 결말이 되다니. 자기 혼자 물먹는 거라면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한번 덜미가 잡혔다고 이렇게 최후의 운명까지 묵살되어야 한다는 건가.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세이란은 언제부터 그렇게 체념하고 있었던 걸까. 그런 말이 입안에서 아른거렸다. ‘귀관의 헌신은 보답 받았는가?’


그때 토요히메가 까맣게 잊고 있던 얘기를 꺼내왔다.


“저번에 보여준 이자나기 오브젝트는 잘 포장되서 준비되어 있습니다. 의뢰 성공에 따른 사례금은 어떻게 받아가실래요? 바로 수령하실 건가요? 아니면 따로 배송해드릴까요?”


허탈하기까지 한 그 질문에 텐큐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받은 의뢰는 달의 보옥을 가져오는 것이었고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그 의뢰에 대한 사례는 필요없습니다.”


무기력한 목소리로 거절하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에 텐큐는 역으로 제안을 걸어보았다.


“차라리 다른 걸 사례로 받겠어요. 대신 세이란, 달토끼 세이란을 의뢰에 대한 사례로 데려가겠습니다. 다른 대가는 필요 없으니 세이란을 제게 주세요!”


그 말을 들은 세이란은 제 귀를 의심해야 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세이란이 기함했지만 토요히메는 살짝 안타깝다는 어조로 허나 일말의 여지도 없다는듯 냉정하게 단정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달의 도시의 공무는 철저하게 시스템에 의거하여 운영되는 것이므로 개인의 월권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단칼에 부정당했음에도 텐큐는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짜내 보았다. 뭔가 어떻게든 해볼수만 있다면… 하지만 달의 도시에 내정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발언권이 있겠는가. 설령 달에서 자기 얘기를 들어본다고 한들 결국 그걸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칼의 싸움이 아닌 말의 싸움으로도 스스로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젠장, 뭐 하나라도 내가 해볼 수 있는 게 없을까. 이렇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달의 도시는 복지부동이고 달의 사자도 초지일관이고, 달의 도시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고. 빌어먹을 달의 도시의 시스템 같은 걸 알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차라리 이게 시장의 문제였다면…


아니면 이런 생각조차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애초에 그 시스템이 여기서 세이란이 선호할만한 선택지를 고려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아예 시스템을 우회하는 것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실낱같은 가능성이 보이자 눈이 번쩍 뜨인 텐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니요, 달의 도시는 세이란에 대해 아무런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세이란과의 약속, 합의, 급부, 보증에 따른 권리와 의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명시적 계약이든 묵시적 계약이든 이 시간부로 달의 도시와 세이란과의 계약관계를 전부 무효화하겠습니다! 시장의 신의 이름으로!”


세이란은 귀가 쫑긋해지더니 입이 떡 벌어졌다. 텐큐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믿기지가 않았다. 경악스러워하는 세이란과 달리 토요히메는 성급히 응답하지 않고 차분하게 호주머니에서 수첩 형태의 단말기를 꺼냈다. 그리고 신속하게 뭔가를 타이핑하고 스크롤링하더니 재미있다는듯이 미소를 지었다. 벌떡 일어나 소리친 게 슬슬 무안해질 때쯤 토요히메도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그것이 이치가미가 말하는 것이라면, 당신의 소관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 달의 백성의 명예겠지요.”


토요히메는 세이란에게 건너가 경쾌하게 어깨를 두드려줬다.


“세이란, 제대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제 달의 도시에 머무를 권리가 없으니 가능한 조속히 퇴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달의 도시에 당신이 다시 나타나다면 그때 당신은 침입자로 간주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했으리라 믿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엉겁결에 따라서 일어나는 세이란을 뒤로 하고 토요히메는 텐큐에게 나긋나긋한 미소를 보냈다.


“사례비는 이걸로 결산하겠습니다. 텐큐, 당신도 청문회에 끌려나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서 돌아가보는 게 좋을 거에요.”


“그래요. 그래야겠죠.”


아직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지라 현실감이 없었지만 머리보다 입이, 입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옆에 선 세이란에게 손을 뻗으며 텐큐는 외쳤다.


“가자!”


이걸 무슨 감정이라고 해야할까. 고맙다? 은혜롭다? 큰 빚을 졌다? 단순히 그런 표현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건 그러니까, 구원받는다는 거구나. 그 이상 말할 게 없었다. 세이란은 망설임 없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응!”


맑은 푸르른 눈을 엿보며 토요히메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붙들은 손에 이끌려 지체하지 않고 출구로 발길을 돌렸다. 


거칠 것 없이 한걸음에 응접실 대문을 밀치고 나가는 둘의 뒤로 토요히메의 고별사가 들려왔다.


“부디 평안한 귀가 되시길.”


그리고 문이 닫히는 둔중한 마찰음과 동시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어쨌든 저 안에 두고 온 분실물 같은 게 있을리는 없었으니까. 약속이라도 한듯 부리나케 천정이 높은 밝은 복도를 따라 내달리던 텐큐는 다만 무엇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토요히메가 따른 자신 몫의 차를 남긴 채 자리를 비운 것이 못내 아까웠다. 그 복잡한 이름의 차가 그리 귀하다고 하던데 그것도 나름 손님에 대한 대접으로 꺼낸 것 아닌가. 그렇지만 발걸음은 저절로 그녀를 응접실로부터 멀리 인도했다. 그도 그럴게 그 말차는 정말이지, 너무 사무치게도 쓰디썼다.


생각해보면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여유도 없고 배포도 없는 자신이 앞뒤 가리지 않고 일어나 맞설 수 있는 그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걸까. 어쩌면 그건 아마도 처음부터 버릴 수 없던 그런 회상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한때 지난한 인고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염원 한가지가 눈에 아른거렸다. 책임이나 의무, 신의, 명예 같은 거창한 명분은 아니다. 분노나 슬픔, 후회, 죄책감 같은 대단한 이유도 아니다. 그럼 왜일까? 다른 무엇도 아닌 자기가 찾고자 하는 한가지 오직 그 결말만이라도 봤으면 했었으니까. 그러니 그뿐이다. 이것이 내가 바랬던 해피엔딩이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md0ge7jNZ8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