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에 들고,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의 불빛만이 홀로 거리를 비추는 새벽 4시. 도쿄 인근 모 편의점에 트럭 하나가 도착했다. 트럭 기사는 점주에게 골판지 상자를 하나 배달하고선, 결제를 마친 뒤 유유히 그 자리를 떴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평소처럼 잡다한 음료나 상품이 담긴 상자 여러 개가 아니라, 냉장고가 담긴 것마냥 크고 무거운 상자 하나가 배달되었다는 것이다.

점주는 상자를 가게 안에 여차저차 들이고선, 칼로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기 시작했다.

마치 그 안에 사람이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상자가 열리고, 점주는 그 안에서 완충제와 얇은 '매뉴얼' 한 권, 서류가 든 봉투 한 장, 그리고 무언가의 무선 충전기를 꺼냈다. 그러자 상자 안에서, 흑색 장발을 한 장신의 어여쁜 소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한때 소녀였던 '와카나 레이'의 모습을 한, 편의점용 휴머노이드 CSR004-REI였다.


소녀의 모든 신체는 유기물 대신 플라스틱, 혹은 금속의 집합체로 변경되었고, 안테나로 치환된 양쪽 귀와 외부에 드러나는 구체관절은 그 사실을 숨길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반신은 로봇 청소기와 같은 바퀴로 대체되어, 한 때 허벅지가 있던 부분은 여러 음식물을 수납할 수 있는 간이 선반으로 대체되었다.

자신 앞에 나타난 충격적인 광경을 놔두고, 점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매뉴얼을 휘릭, 휘릭 넘겨댔다. 그러고는 귀찮다는 듯이 레이, 아니, 'REI'의 귀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전원 버튼이였다.

경쾌한 로딩음과 함께 눈을 뜬 REI가 점주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이는 허리 모터가 장착되어 있지 않은 REI가, 자신의 소유주이자 회사 다음으로 가장 먼저 따라야 할 존재에 향한 인사이자 복종의 표시였다. 


"삐빗. LAXSON 편의점용 휴머노이드 CSR004 - REI, 재기동 실시합니다. 소유주님, 본인 확인을 위해 사원증을 스캔하여 주십시오."

"뭐? 사원증? 잠깐...에잇."

"사원증을 스캔하여 주십시오."

"아니 이게 어디갔어...분명 지갑에..."

"사원증을..."

"좀 닥쳐! 휴, 찾았다. 뭔 놈의 깡통이 이리 시끄러운 거야..."

자신 앞에서 반복적인 기계음을 내뱉는 존재가, 과거에는 또 하나의 인격체였다는 사실을 잊은 채, 폭언을 내뱉으며 사원증을 꺼낸 점주. REI는 흰자위만 존재하는 카메라 아이로 사원증과 점주의 얼굴을 동시에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삐빗. 사원증 확인 및 빅 데이터로 분석한 소유자의 이미지 일치. 이 시간부로 당기는 본사의 리콜 혹은 점주의 변경이 확정되기 전까지, 현 점주 '나카지마 소세키'의 소유물로서 인정됩니다.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자질구레한 소리는 됐고, 그 소름 끼치는 흰자위나 어떻게 좀 해 봐라. 으으."

"삐빗. 메인터넌스 모드 테스트를 아직 전부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당기 구입 시 동봉된 매뉴얼을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젠장할, 인건비 줄여준다길래 냉큼 샀더니, 본사한테 사기만 당한거 같잖아!! 귀찮게스리.."

무감정한 반응의 REI 앞에서 화를 내던 점주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매뉴얼을 - 아까보다는 더 꼼꼼하게 -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주는 REI의 왼쪽 안테나에 달린 버튼들 중 팝콘 모양을 눌렀다.

" [인스턴트 쿠킹 모드] 실행. 본 기능은 LAXSON에서 유통되는 식품을 조리할 때 사용합니다. 점주님, 조리할 식품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

"...컵라면 아무거나."

"삐빗, 수신 완료. 입점된 '컵라면' 카테고리 중 가장 재고가 많은 물품을 무작위로 선택하였습니다. 조리 예상 시간은 3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작 컵라면 끓이는 데 저걸 써야 하나?"

푸념을 늘어놓는 점주를 뒤로 하고 두 다리, 아니, 두 바퀴를 끌며 컵라면 진열대로 향하는 REI. REI는 컵라면 뚜껑을 절단선에 딱 맞게 열고선 스프를 털어넣고, 온수를 받아 젓가락으로 뚜껑을 밀봉하는 일련의 과정을 '기계적으로' 수행했다.

"약 2분 54초 뒤 조리가 완료됩니다. 온수에 화상을 입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컵라면은 됐고, 다음 기능."

"삣. [음료 디스펜서 모드] 실행. 테스트 중이므로, 디폴트인 점내 비치된 MXX 커피 열 캔을 비축하겠습니다."

점주가 와인잔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누르자, REI는 이번엔 캔커피가 보관된 곳으로 이동하였다. REI는 하반신 속에 차곡차곡 캔커피를 채워넣은 뒤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본 기능은 특정 시즌 이벤트 상품, 혹은 시즌별 매출량이 높은 상품을 보다 빠르게 손님들께 공급하고자 설치되어 있습니다. 내부 냉장고가 적정 온도로 기능하고 있으므로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남은 테스트 중 [스토리지 모드]와 [배리어스 모드], 그리고 [퍼스널리티 모드]에 대해선 당기가 직접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스토리지 모드]의 경우, 당기가 메인터넌스나 리콜 등의 사유로 장기간 이동해야 할 경우 전원을 끄는 대신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배리어스 모드]의 경우 아직 특별한 기능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향후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손님분들을 위한 더욱 능동적인 기능 설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

"지금부터 사용 가능한 [퍼스널리티 모드]의 경우, 당 기체의 전신이 되는 지원자 '와카나 레이'의 원래 인격을 어느 정도 재현 가능합니다. 손님과 점주에 대한 반항/공격 행위는 원천 봉쇄되어 있고, 대신 재현된 인격에 과다한 부하를 줄 경우 소프트웨어 전체가 고장날 위험이 있으며, 이로 인한 손해와 신체적 부상의 책임은 모두 점주에게 있음을 명시합니다."

피곤하다 못해 죽은 눈으로, 점주는 대꾸 없이 퍼스널리티 모드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REI의 눈동자의 색이 돌아오더니, 이윽고 아까보다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점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삐빗... 아.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와카나 레... 삐빗. 수정. CSR004 - REI입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어, 어... 그래. 잘 부탁한다."

"하하, 아무리 모드가 다르다지만, 아깐 조금 딱딱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이제부터 신세 많이 지겠습니다!"

순간 점주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깍듯한 건 여전하지만, 아까보다 말투도, 표정 변화도 훨씬 부드러워진 REI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REI의 얼굴을 바라보던 점주는, 이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선 REI에게 질문을 건넸다.

"저기, REI..."

"무슨 일이신가요?"

"그... 이런 걸 묻긴 좀 그런데... 너 우리 회사에 개... 아니아니. 여기 오기 전 뭘 했나?"

"..."

"REI?"

"아, 죄송합니다, 잠깐 원인 불명의 쇼트가 났네요. 친구들이랑 밴드를 하다 알바를 구해야겠다 싶어 '제 의지로' 지원했는데, 개조되고 나니 썩 괜찮더라고요. 그보다는 지금, 손님들과 LAXSON 편의점에 충성하고 봉사할 생각으로 가득해요. 아, 물론 점주님께도요!"

에너지 넘치는 REI의 말투보다 점장을 긴장케 만든 것은, '원인 모를'쇼트가 일어났을 때의 REI의 표정이었다. 점장은 REI, 아니, '와카나 레이'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물론 음원 차트를 점령하다시피 하다, 의문의 보컬 실종 사건으로 무기한 휴지기를 가진 걸즈 밴드.

실종된 Raise A Suilen의 보컬이자 베이스가, 편의점용 로봇으로 개조되어 자신 앞에 서 있었다.

"점장님?"

"아, 아니... 아니다. 어서 손님 맞을 준비나 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그 뒤로 편의점은 성업이 계속되었다. 초기 모델의 기능적 불완전성보다 존재만으로 신기한 로봇 점원, 그것도 미인 로봇의 등장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REI도 일체의 고장 없이 점원으로서의 역할을 능숙히 수행해냈다. 가끔씩 매점 내에서 새 보컬을 구한 RAS의 음악이 들릴 때만 제외하고선.

편의점용 휴머노이드 CSR004 - REI가 프리즈할때 지은 표정을, 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직접 양덕한테 그림 커미션받은것도 모자라, 아예 우물을 팠습니다.


캐릭터는 뱅드림에 나오는 '와카나 레이'고, 같은 뱅드림 출신 '야마부키 사아야' 커미션 받짤도 보나스의 의미로 올리고 갑니다. 빠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