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변화 채널

"우와아~"


기쁜 듯이 떠들며 달리기 시작하는 소년.

가뿐한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멀어진다.


"히로키! 달리면 위험하잖아!"


어머니인 리호가 달려가는 아들에게 말을 건다.


"괜찮아~!"


소년은 일단 멈춰서 뒤돌아보곤 그렇게 말하고 다시 달려갔다.

'정말,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니까.

넘어지면 다칠지도 모르는데'

리호는 곤란한 듯 쓴웃음을 지으며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오랜만에 멀리 나왔으니까. 즐거워도 어쩔 수 없지."


리호의 남편 히로카즈가 웃으며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따라왔다.


'당신은 히로키에게는 유하다니까.'

리호는 입을 조금 삐죽거린다.

언제나 잔소리를 하는 것은 리호의 몫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가끔은 아빠가 주의를 줘도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넘어지거나 하면 다칠 거야."


"하하하…약간의 상처는 남자애한테는 훈장이야."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빠란 존재는 이런 것일까

부상에 따라서는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있을텐데...

물론 남자아이는 활발한게 좋다고는 하지만, 다치면 아픈 것은 아이다.

리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있잖아, 아빠, 봐봐~!"


먼저 고지대에 도착한 히로키가 부모님께 손을 흔들어 부르고 있다.


"어우, 지금 간다."


손을 들어 화답하는 아버지 히로카즈.

오늘은 가족끼리 하이킹.

고원의 고지대까지 드라이브 온 것이다.

이곳은 경치가 좋은 것에 비해 숨겨진 장소인 것 같아 오늘도 세 사람 외에는 별로 사람이 없다.

리호도 아침 일찍부터 도시락을 싸는 것은 꽤 힘들었다고는 하지만 하이킹 자체는 즐기고 있었다.


"우와, 경치 좋다."


높은 지대에서 펼쳐진 경치에, 리호는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온 보람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주변에 번듯한 시설이 있는건 아니라서

사람들이 별로 안 오지만, 경치는 좋다는 얘기가 사실이었지."


남편 히로카즈도 멀리 산줄기가 펼쳐진 경치에 감동한다.

가족끼리 하이킹 가기 좋은 장소가 없냐고 동료에게 물었는데, 이곳을 가르쳐 줘서 다행이다.

히로카즈는 문득 옆의 리호를 본다.

콩깍지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내는 아름답다고 히로카즈는 생각한다.

결코 미스콘테스트에 나올 만한 미인은 아닐지 몰라도,

건강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30대 중반으로 아직 젊기도 하다.

아들 히로키에게도 좋은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도 좋은 아내다.

그런 리호가 이렇게 옆에 있어주는 것은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응? 무슨 일 있어?"


남편의 시선을 알아차리는 리호.


"아, 아냐..."


무심코 쑥스러워져 히로카즈는 시선을 돌렸다.



"아빠, 저쪽에도 길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히로키가 조금 내려간 위치에 있는 숲속을 가리킨다.

언뜻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면 분명 오솔길 같은 것이 숲 속에 있었다.

하지만 오솔길 끝은 숲 속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음… 마을 사람이 다니는 길일 수도 있어."


"가보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지만, 히로키는 들뜬 얼굴로 돌아봤다.

정말 히로키,

그냥 숲길이잖아.

아무것도 없는 게 뻔한데.

약간의 탐험을 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히로키에게, 리호는 다소 어이가 없다.



"그래 좋아, 가볼까?"


하지만, 리호의 생각과는 달리, 남편 히로카즈는 히로키와 함께 그쪽 길로 내려가 버린다.


"어? 잠깐만!"


황급히 말리려는 리호였다.


"괜찮아. 출입 금지 같은 건 아닌 것 같고,

민가에 보면 미안하다고 하면 되겠지. 히로키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싶고."


그러면서 이미 아버지와 아들은 언덕을 내려가 그 오솔길로 향하는 중이다.


"아니, 그치만..."


"괜찮아."


덧붙여 리호는 만류하려고 하지만, 두 사람은 듣는 기색은 없다.

정말, 히로카즈 씨도 이런 점이 있었군요.

숲 속에서 길을 잃으면 어떡해?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괜찮다고는 생각하지만...

리호는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고는 포기하고 둘을 따라가기로 했다.



남편과 아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뒤를 따라가는 리호.

언덕을 내려온 곳에서 펼쳐진 숲을 손으로 헤치며 들어갔다.

그곳은 확실히 오솔길이라고 할 수 있게 길이 제대로 나 있었다.

숲속의 초록 향기에 싸여 있으면 기분이 좋다.

나무에서 새는 햇빛도 비춰져 너무 멋지다.

근데 벌레가 있을 것 같은 게 마음에 걸렸다.

방충제 스프레이는 뿌려왔고 배낭 안에도 넣어왔지만, 리호는 벌레를 싫어했던 것이다.



"여기라면 사슴벌레나 장수풍뎅이 같은 것도 있겠다."


"잠자리채 갖고 올걸 그랬어."


"그렇지. 다음에 올 때는 가져오자."


완전히 남자아이 둘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그런 대화를 하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남자들끼리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리호는 또 쓴웃음을 짓는다

잡는건 좋지만, 잡아온걸 보여주거나 하면 어떡하지...

히로키는 리호가 벌레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꺄악 비명을 지르는 것이 즐거운지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보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그러면 크게 화를 내줄 테니까.



"저기...아직도 가는 거야? 슬슬 돌아가는 게 낫지 않아?"


좁은 길의 폭도 변하지 않고 아무도 만날 수 없는 숲 속의 오솔길은

점점 안쪽으로 유인되고 있는 것 같아 리호는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데서는 도시락을 펼쳐서 먹을 수도 없잖아.

돌아가서 전망 좋은 곳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 리호는 생각했다.


"그럴까… 앞에 뭐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히로키, 돌아갈까?"


"뭐야? 돌아갈 거야? 조금만 더 가보자. 뭔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모처럼 아버지가 돌아갈 마음이 들었다는데, 히로키는 먼저 슉 가버린다.


"잠깐, 히로키!"


리호가 불러도 듣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약간 커브를 이룬 길 끝에서 나무들 사이로 히로키의 모습이 사라진다.


"어쩔 수 없네... 히로키~!"


히로키를 쫓는 히로카즈.


"정말..."


리호도 어쩔 수 없이 다시 따라가기로 했다.



"어?"


히로카즈가 놀랐다.

굽은 길 끝에 히로키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어디 갔지?

길을 벗어나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 버린걸까?


"여보?"


따라오던 리호도 히로카즈가 멈춰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 히로키는? 히로키는 어딧어? 히로키?"


리호도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황급히 이름을 부른다.


"히로키? 어디 있어?"


두 사람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나무들 사이로 몇 구의 검은 사람의 형체가 나타난다.


"우왁!"

"꺄악!"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두 사람.

나타난 것은 온몸이 시커먼 전신 타이즈를 입은 듯한 차림을 한 남자들로

놀랍게도 눈도, 코도, 귀도, 없는 훤칠한 시커먼 얼굴로

마치 움직이는 마네킹 인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익!"

"키익!"


새까만 남자들은 입도 없는데도 기묘한 소리를 지르며 히로카즈와 리호를 재빨리 에워쌌다.

어떻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표면이 가면를 쓴 듯한 느낌은 전혀 없었고, 검은색 삶은 달걀처럼 반들반들하고 밋밋했다.


"뭐야, 너희들은!"

"싫어, 오... 오지 마!"


리호는 남편의 그림자에 숨어서 몸을 움츠리고

히로카즈는 손에 든 바구니를 앞에 두고 몸을 지키려고 했다.



"기치치치칫! 네놈들, 이 곳에 왔으니 가만히 돌려보낼 수는 없겠구나."


남자들과는 다른 더욱 섬뜩한 목소리가 나며

나무들 사이로 이형의 사람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와악!"

"히이익!"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는 히로카즈와 리호.

특히 벌레를 싫어하는 리호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기절할 정도였다.

거기에는 짙은 갈색에 검은색 반점무늬 마디가 있는 몸을 반들반들 빛내며,

긴 더듬이를 흔들흔들 흔들고, 팔이랑 옆구리, 다리 옆에서

여러 가닥의 가느다란 곤충 다리가 스르륵 꿈틀거리는

거대한 그리마 같은 것이 인간처럼 서 있었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그리마는 다리가 난 바깥쪽에 인간 같은 팔로 겨드랑이에 소년을 안고 있었다.


"앗, 히로키!"

"안돼! 히로키! 히로키를 돌려줘!"


"기치치치칫! 아무래도 이 아이의 부모님인가?

뭐 좋아, 여기서 소란피우는 것은 곤란해. 어쨌든 데려가!"


"키익!"

"키익!"


아들을 되찾으려던 히로카즈와 리호에게 검은 마네킹 남자들이 덤벼들었다.


"빌어먹을! 놔!"

"싫어! 놔!"


필사적으로 그 손을 피하려는 히로카즈와 리호.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은 남자들의 강한 힘에 짓눌려 끌려가듯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




"으... 음…"


마루의 서늘한 감촉에 잠에서 깨는 리호.

아무래도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리호, 괜찮아?"

"엄마!"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남편의 얼굴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아들의 얼굴이 날아든다.


"여보, 히로키, 어디 다친데 없지?"


리호는 몸을 일으켜서 두 사람을 부둥켜 안으려 했다.

히로카즈도 히로키도 함께 껴안고 셋이서 무사함을 서로 기뻐했다.



"죄송해요... 내가 더 안쪽으로 가자고 해서..."


"울지마, 히로키. 네 잘못이 아니니까."


참다못해 울음을 터뜨린 아들을 위로하는 리호.


"그렇지. 나쁜 건 우리 모두를 가둔 그놈들이야. 그건 그렇고 놈들은 도대체 누구야?"


히로카즈도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나…나 괴물을 봤어. 커다란 그리마 같은 거야..."


이호가 공포와 함께 회상했다.


"아, 나도 봤어. 저게 도대체 뭘까?"


리호와 히로카즈(弘和)가 얼굴을 마주본다.

저런 거대한 그리마는 본 적이 없고 게다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그리마와 인간이 섞인 그리마 인간과 같았다.

뭔가 나쁜 장난에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나도 봤어. 갑자기 덮쳐서 눈을 떴는데 여기였어."


아무래도 히로키는 갑자기 길 끝에 저 그리마 괴물이 있어서

비명도 지르지도 못하고 기절한 모양이다.


"아무튼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다. 자, 문제는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어떨지..."


히로카즈가 일어서서 방 안의 모습을 살핀다.

스산한 콘크리트로 만든 방 같고, 의자도 테이블도 아무것도 없다.

벽에는 창문도 없고, 문도 들여다볼 창문도 없는 철문으로,

히로카즈가 열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천장은 조명이 박혀 있는지 희미하게 빛나고 어둠이 내려앉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완전히 갇혔어."


방을 다 조사한 히로카즈가 홧김에 문을 차다.


"아, 맞아."


리호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경찰에 전화를 걸어봤다.

배낭이나 바구니는 빼앗겼지만, 몸에 차고 있던 지갑이나 스마트폰은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곧 절망감이 밀려왔다.

스마트폰의 전파가 차단되어 있는 것 같고,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았다.

밖으로의 연락 수단은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화장실에 가고 싶다든가 등으로 사람을 부르고,

그 녀석에게 열쇠를 빼앗아 나가는 수밖에…"


"그런 것은 위험해. 만약 상대방이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게다가 혼자 온다고는 할 수 없고..."


히로카즈의 말에 리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기뿐만이 아니다.

저 검은 남자들은 매우 힘이 셌다.

자신들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힘없이 바닥에 걸터앉는 히로카즈.

리호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생리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찾아오고, 리호는 곧 요의를 느끼게 된다.

어쨌든 화장실조차 없는 방으로 그림자가 지는 곳도 없다.

있다고 해서 거기서 볼일을 본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리호는 남편에게 요의을 전했지만, 히로카즈라고 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문을 두드려 밖에 있을지도 모르는 무리들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이족보행을 하는 거대한 그리마 인간이 들어온다.


"힉!"

"우왓!"

"와앗!"


설마 이 괴물이 올 줄은 몰랐던 우리들 셋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기치치치칫! 화장실 가고 싶다고. 너희들도 배설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 아아... 그, 아내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해. 가능하면 나와 아들도 부탁한다."


노란 겹눈이 반짝이고 머리에서는 긴 더듬이가 흔들리며

양쪽 겨드랑이의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스르륵 꿈틀거리고 있는

바로 인간과 그리마를 섞은 듯한 괴물에게 히로카즈는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셋이 함께 이 방을 나갈 수 있다면 어떻게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기치치치칫! 우선 여자, 와라!"

"꺄악!"


갑자기 리호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뭘 하는! 으악!"


그리마 인간에게 붙잡힌 리호를 황급히 떼어놓으려 했던 히로카즈이지만

그리마 인간의 팔에 순식간에 밀려나고 만다.


"여보!"

"기치치치칫! 넌 얌전히 있어"


그리마 인간은 리호를 방에서 꺼내 문 밖에 있던 저 검은 마네킹 남자에게 건넨다.


"그런... 두 사람도 화장실을."


리호는 어떻게든 뿌리쳐 떨어지려 했지만

마네킹 남자의 힘은 세서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기치치치칫! 너희들은 이거라도 쓰고 있어!"


한 명의 마네킹 남자가 들고 있던 상자 같은 것을 집어들어 방 안에 집어넣는 그리마 인간.


"빌어먹을! 리호를 놔!"


히로카즈가 뒤쫓아 뛰쳐나오려 하지만 그보다 빨리 철문이 눈앞에서 닫혀버린다.


"그런... 여보!"


손을 뻗어 남편을 부르는 리호.

하지만 무심하게도 남편과 아들은 방 안에 남겨졌다.


"기치치치칫! 저건 간이 화장실이다. 남자뿐이라면 저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 너무해요! 지나치잖아요!"


리호는 험악하게 그리마 인간을 노려봤다.


"기치치치칫! 그렇게 말하지 마. 화장실 가고 싶지? 데려다 준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단단한 손으로 리호의 턱을 들어올리는 그리마 인간.


"위... 위치를 알려주면 혼자 갈 수 있어요."


거대한 턱을 좌우로 벌리는 그리마 인간에게 정신을 잃고 싶을 정도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리호는 어떻게든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기치치치칫! 꽤 괜찮은 여자다. 점점 마음에 든다. 따라와."


리호의 턱에서 손을 떼고 빙글빙글 돌아서는 그리마 인간.

걸을 때마다 겨드랑이 양옆에 나 있는 가느다란 다리도 스르륵 꿈틀거리고 있다.

정말 그리마와 인간이 섞인 생물 같고 벌레는 싫다,

특히 그리마 같이 다리 많은 벌레를 싫어하는 리호는 공포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마 인간이 걸어가는 뒤를, 리호는 팔을 뒷짐진 채 마네킹 남자에 의해 끌려 갔다.

복도는 바로 끝이 다시 쇠로 된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역시 마네킹 남자들이 망을 보듯 서 있었다.

자세히 보면 마네킹 남자들의 허리에는 벨트가 감겨 있고,

큰 벌레 얼굴 같은 무늬가 붙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마크일까.

본 적도 없는 마크라고 리호는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복도에도 밖을 볼 수 있는 창문이 하나도 없다.

어쩌면 여기는 지하인지 뭔지도 몰라.

어두컴컴한 조명밖에 없어 잘 모르겠지만 대체 무엇을 위한 건물일까.


"기치치치칫! 여기다"


그리마 인간이 문을 열고 리호를 안으로 넣는다.

역시 어두컴컴하고 좁은 방으로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어? 화장실?"


"배설용 구멍이다. 사용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참아라. 기치치치칫!"


그렇게 말하고 문을 닫는 그리마 인간.


"앗? 잠깐..."


무슨 말을 할 기회조차 없다.

잠시 서 있던 리호였지만 어쩔 수 없이 거기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기치치치칫! 그쪽 아니다. 이쪽이다."


화장실을 나와 방으로 돌아가려던 리호를 그리마 인간은 다른 방향으로 데려간다.


"어? 어디로?"


이러다 남편이나 아들과 떨어져 버리면 두려워하는 리호였지만

마네킹 남자가 말없이 따라오라고 재촉한다.

거역해 봤자 마네킹 남자가 쉽게 리호를 붙잡아버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리호는 그리마 인간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나... 나를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야? 너희들은 누구고?"


"치치치치치칫! 우린 버그 겔랑. 잠자코 따라오는 것이다."


"버그 겔랑?"


"그렇다. 우리는 버그 겔랑. 머지않아 우리가 세상을 어둠으로부터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버그 겔랑의 괴충인 그리마 겔랑이다. 기치치치칫!"


가슴을 펴고 턱을 울리는 그리마 겔랑.

리호는 아연실색한다.

버그 겔랑이니 괴충인이니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 조직이 정말 있단 말인가?

텔레비전이나 영화 촬영이 아닐까?

우리들은 어떻게 되어버리는 거야?


"으아아아아아악!"


안쪽에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헉? 방금 그건..?"


엉겁결에 발길이 멎는 이호.


"기치치치칫! 쓸모없는 것이 처리됐거나 실험 재료가 뒈지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마 겔랑이라고 자칭한 그리마 인간이 담백하게 말한다.


"어?"


도움이 안 돼?

실험 재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기치치치칫! 걱정하지 마. 우리는 네가 마음에 든다.

너에게는 기회를 주겠어. 조금 전 수령님께도 허락을 받았다."


파랗게 질린 리호를 돌아보며 그리마 게란이 턱을 벌린다.


"기회를? 나에게? 남편과 아들은?"


"기치치치칫! 그렇다... 네 나름대로 해도 좋다."


"내... 나름대로?"


"기치치치칫! 그래. 얌전히 따라와."


다시 걷기 시작하는 그리마 겔랑.

리호는 잠자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키익!"

"키익!"


입구 좌우에 서 있는 마네킹 남자들이 오른손을 들어 그리마 겔랑과 리호를 맞는다.

입구 문을 빠져나와 방으로 들어간 리호는 거기에 죽 늘어선 투명한 유리통 같은 것을 눈치챈다.


"힉!"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키는 리호.

그 유리통에는 연한 녹색 액체가 채워져 있었고 안에 벌거벗은 인간이 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포르말린에 절인 인간의 표본 같지 않은가.

아니, 인간만이 아니야.

몇 개의 내용물은 반쯤 검게 변색되어

그야말로 지금도 등 뒤에 잠자코 따라오고 있는 마네킹 남자를 쏙 빼닮은 것도 있다.

그 중에는 여자도 있는 것 같다.

이게 도대체...


"기치치치칫! 이건 버그 드레이를 만들어내는 장치야"


그리마 게란이 늘어진 유리통 사이를 지나간다.


"버그 드레이?"


리호도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기치치치칫! 맞다. 지금 네 뒤에 있는 놈이 버그 드레이다.

이곳은 납치해 온 적당한 인간을 버그 드레이로 변화시키는 장치다."


"뭐, 인간을?"


리호는 깜짝 놀랐다.

설마 이 버그 드레이라고 하는 마네킹 남자들이 원래는 인간이었단 말이야?

리호는 뒤를 힐끗 돌아본다.

이 무언으로 따라오는 버그 드레이도 원래는 인간이었다는 것일까?


"어? 설마... 나... 나를..."


이호는 깜짝 놀랐다.

화장실 뒤에 이리로 데려온 것은 이 유리통에 자신을 넣을 생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기치치치칫! 걱정하지 마. 이놈들은 명령에 따르기만 하는 인형 같은 존재일 뿐이야.

너를 그렇게 만들 생각은 없다."


그리마 겔랑은 그렇게 대답한다.


"그럼 왜?"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일까?

의문스럽게 여기는 리호.


"기치치치칫! 기회를 준다고 했잖아. 너는 괴충인이 된다. 우리와 같은 괴충인이 될 거야."


"뭐?"


리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기치치치칫! 이것은 인간을 벌레와 융합시켜 괴충인을 낳는 장치다.

말하자면 번데기 같은 거. 이 안에서 너는 괴충인이 되는 것이다."


유리통이 늘어선 안쪽에 놓인 캡슐 모양의 기기 앞에서 그리마 겔랑은 멈춰섰다.

아무래도 이 캡슐이 그 장치인 것 같았다.


"괴... 괴충인?"


리호의 무릎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보고 괴물이 되라는 거야?

그것도 제일 싫어하는 벌레로?


"그렇다. 우리는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마음에 들었다.

너는 아름다운 여자다. 그리고 우리는 예전부터 암컷을 갖고 싶었어.

너는 우리처럼 괴충인이 되어라. 괴충인이 되어 우리의 암컷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괴롭히고 죽이는 것은 즐겁다구. 기치치치칫!"


"그런...싫어! 싫어요! 싫어엇!"


리호는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흔들며 그 자리를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곧 뒤에 있던 버그 드레이가 그녀를 붙잡고 말았다.


"싫어...도와줘!"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리호.

벌레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



"기치치치칫! 왜냐? 넌 선택받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야.

괴충인이 되어 우리의 암컷이 되어라! 우리와 함께 버그 겔랑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싫어요! 절대로 싫어요! 당신 따위의 암컷이 될 수 없어요!

난 남편도 아이도 있어요! 절대 싫엇!"


만약 여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괴물의 암컷이 될 수는 없다!

리호는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버그 드레이를 뿌리치려 했다.

히로카즈 씨나 히로키를 배신할 수도 없고, 벌레가 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다.



"기치치치칫! 그런가... 하지만 네가 거부하면 그놈들은 죽는다"


번쩍번쩍 빛나는 오른손의 날카로운 손톱을 보여주는 그리마 겔랑.


"뭐?"


무심코 리호의 움직임이 멈췄다.


"네가 거부하면 말이다.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괴충인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놈들을 죽일 거야. 그 애새끼는 틀림없이 고기가 부드러워

찢는 맛이 있을 것 같다. 기치치치칫!"


턱을 좌우로 벌리고 웃는 그리마 겔랑.


"그, 그런... 너무해! 비겁해요!"


남편과 아들이 인질로 잡힌 것을 깨닫는 리호.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서 계속 거부하면 두 사람은...

이 괴물들은 그야말로 거침없이 두 사람을 죽여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리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내가 괴충인이 되면... 두 사람은 풀어줄 수 있나요?"


리호는 험악하게 그리마 겔랑을 노려봤다.


"기치치치칫! 너한테 달렸다."


"두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기치치치칫! 우리는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잠시 말이 없더니 이윽고 리호는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어요. 괴충인이 되겠습니다."


쥐어짜는 듯한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리호.


"기치치치칫! 그거면 됐어. 뭐, 너도 곧 괴충인의 훌륭함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치치치치치칫!"


그리마 겔랑은 그렇게 말하며 리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입고 있는 것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캡슐 앞에 서게 되는 리호.

천천히 캡슐이 열린다.

안에는 뭔가 노란 젤리 같은 것이 가득 차 있었다..

이 위에서 잠을 자라고 하는 건가?

리호는 조심조심 발을 들여다 놓았다.

진흙처럼 푹 들어가 달라붙어오는 듯한 감촉이다.

하지만 따뜻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기치치치칫! 무서워할 것 없어. 그 안에 누우면 된다."


리호는 체념을 하고 캡슐 속 젤리 위에 눕는다.

몸이 반쯤 가라앉아 왠지 푹신푹신한 느낌으로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

여보... 히로키... 미안해요..

나는 이제 괴충인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두 사람을 도울 수 없다.

두 사람을 구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기치치치칫! 넌 나와 같은 그리마의 괴충인이 되도록 세팅해놨어.

뭐, 나도 그랬지만 곧 괴충인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리마 겔랑은 그렇게 말하고 캡슐 뚜껑을 닫았다.

아아...설마...

하필이면 저 괴물과 같은 그리마라니……

리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뚜껑이 닫히고 깜깜해지는 동시에 젤리가 캡슐 안에 가득 차기 시작하며,

리호의 얼굴도 몸도 덮어갔다.


"웁...꾸르륵."


코도 입도 가려져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리호.

하지만 젤리가 입에서 기관으로 들어가 폐에 이르면 신기하게도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거짓말... 숨 쉴 수 있어?

리호는 놀랐지만 서서히 호흡에 익숙해져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젤리에 싸인 몸은 포근해서 너무 기분이 좋아.

마치 목욕탕에서 전신욕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만, 어떤 일이 되어도 그 두 사람만은……

괴물이 된다고 해도 마음만은……

여보...

히로키...




*****




"아빠..."


방구석에 무릎을 껴안고 웅크리고 있던 히로키가 툭 중얼거린다.


"응?"


이쪽도 방벽을 등받이로 하고 다리를 내던지고 앉아 있던 히로카즈가 대답한다.


"엄마…늦네"

"아…그렇구나……"


그것은 히로카즈도 느끼고 있던 것.

화장실에 간 것 치고는 너무 늦은 것이다.


"혹시 엄마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 거야?"

"그렇지 않아… 봐봐, 엄마는 여자니까 여러모로 시간이 걸려."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면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히로카즈.

돌아오지 않다니...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아니, 도대체 무엇을 당하고 있는걸까...

나쁜 상상만이 머리를 스쳤다.


"엄마…"

"괜찮아... 엄마는 분명 돌아올 거야. 괜찮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음…"

희미하게 빛이 들어온다.

머리가 몽롱하다.

어느새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캡슐이 열렸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왜 이런 곳에서 자고 있었을까?



"아…"

캡슐을 잡고 손을 쭉 당기니, 상반신이 젤리 안에서 끌려나왔다.

몸에 달라붙은 젤리가 주르르 떨어지니, 바깥 공기에 몸이 닿았다.

바깥 공기 냄새가 느껴지고, 그 밖에도 누군가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가 있는 걸까?



"키치치치칫."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지?

리호는 이상하게 생각한다.

어디서 들려오는 거지?


"기치치치칫! 아무래도 융합이 끝난 것 같군. 캡슐 밖으로 꺼내 줘."


이쪽은...

귀에 익은 목소리.

왠지 그 목소리가 리호에게는 기분 좋게 느껴진다.

그리마 괴충인 그리마 겔랑의 목소리다.


"키치치치칫"


또...

이 소리는 뭐지?



"키익!"


몸을 힘껏 들어올리는 듯한 감각으로 하여금

양옆에서 부축할 수 있도록 캡슐 밖으로 반출되었다.


괜찮아요...

혼자 잘 일어설 수 있다.

리호는 비틀비틀거리는 다리로 어떻게든 서려고 했다.


왠지 내 다리가 아직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아서, 마치 처음 하이힐을 신었을 때 같았다.

게다가 양쪽 옆에 나 있는 다리들도 아직 움직임이 제각각이어서 어색했다.

좌우에서 버그 드레이들이 받쳐주는 게 고맙게 느껴졌다.

버그 드레이는 이런 경우에도 쓸모가 있다.

후훗...

편리한 녀석들네요...



겨우 움직임이 익숙해지고 균형이 잡히자

그녀는 스스로 버그 드레이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 보았다.

미세한 상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아주 작고 많은 이미지들이 하나로 뭉치면서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눈에 문제는 없는 것 같아.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짙은 갈색에 검은 반점이 섞인 외피.

마디가 이어진 듯한 몸에는 팔과 겨드랑이, 양측으로

여러 개의 가느다란 다리가 뻗어, 스르륵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리나 허리 부근은 서로의 외피가 겹쳐진 관절처럼 되어 있었고,

발을 보면 발끝이 둘로 갈라지고 단단한 발톱이 나 있었으며,

뒤꿈치는 높은 하이힐처럼 되어 있었다.

양손도 외피에 싸여 있고 칠흑같은 손가락 끝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뾰족하게 자라나 있었다.

가슴에는 모양이 좋은 둥근 반구 두 개가

칠흑빛 윤기가 나는 동심원형 마디로 덮혀 솟아 있었다.


이게... 나?

마치 그리마 같은 육체.

아아... 그런...

나는 그리마가 되어버렸어...

그리마 겔랑의 말대로, 나는 그리마가 되어 버렸다...

자신의 몸이 변해버린 것에 조금 슬픔을 느끼는 리호.

하지만 이상하게도 싫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내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적어도 그리마에 대한 혐오감은 사라져 있었다.


"키치치치칫."


또...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기치치치칫! 오오, 이 얼마나 멋진 모습의 괴충인 탄생이 아닌가?"


불쑥 눈앞에 나타나는 그리마 괴충인

그리마 겔랑의 모습이다.

긴 더듬이가 흔들흔들거리고

양쪽으로 난 가느다란 다리가 사라락 반갑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키치치치칫"


"기치치치칫! 이빨이 스치는 소리도 좋은 소리다."


이빨이 스쳐?

리호는 새삼스럽게 손가락을 대고 자신의 입의 움직임을 확인해 봤다.


"키치치치칫"


그러자 무의식중에 이빨과 이빨이 서로 비비면서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가야말로 인간 그대로의 입술 모양 같았지만,

치아는 완전히 변화하여 들쭉날쭉한 날카로운 이빨로 변해 있었고,

그것들이 비벼지며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건 내 소리였어...

그런...

내가 이런 소리를 내고 있었다니……


"키치치치칫"


하지만 내지 않으려고 해도 입이 저절로 움직여 이빨끼리 비벼지는 것이었다.


"어, 어째서? 키치치치칫"


말하려고 하면 이빨이 또 비벼지면서 소리가 난다.

아무래도 말할 때 자연스럽게 나는 소리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리마 겔랑도 말할 때마다 '기치치치칫' 하고 소리를 내지 않았었나.

그와 똑같구나.

그런...

나도... 이 괴충인과 똑같은...

그리마가 되어 버렸다...



"기치치치칫! 축하해.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로써 너도 버그 겔랑의 괴충인이 된 것이다."


그리마 겔랑이 반갑게 리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괴충인...

아니야...

나는 인간...

비록 모습은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나는 인간이야...

필사적으로 그렇게 믿으려는 리호.

마음까지 괴충인이 될건가요?

리호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타이른다.


"너는 나와 같은 그리마다. 그렇지... 그리마 길라라고 이름을 붙이는 게 좋겠어.

버그 겔랑의 괴충인 그리마 길라다. 기치치치칫!"

"키치치치칫! 그리마... 길라?"


아니야...

리호는 부정한다.

나는...

나의 이름은...

리호는 생각하려고 했지만 왠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마 길라라는 이름이 스르르 몸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마치 예전부터 그 이름이었던 것처럼.

나는...

나는 그리마 길라...

나는 괴충인 그리마 길라...



아, 아니야!

리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나는 괴충인 따위가 아니야!

몸은...

몸은 확실히 그리마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나는 리호... 리호다!

그리마 길라따위는...

자신의 이름을 겨우 떠올리는 리호.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짙은 갈색과 검은 반점 마디로 뒤덮힌 그리마.

그야말로 그리마와 인간이 융합된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리호라는 이름조차 어딘가 다른 사람의 이름처럼 느껴지고,

그리마 길라라는 이름이 좀 더 자신의 이름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었다.

아아...

그런...

나는...

마음까지 괴충인이 되어버린거야?



푹 주저앉아 버리는 리호.

울 것 같이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마의 겹눈은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눈을 감을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아아... 나는 정말로 그리마가 되어버렸구나...

리호는 슬펐다.



"기치치치칫! 무슨 일이야?"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그리마 길라에게 그리마 겔랑은 당황했다.

뭔가 융합 과정에 문제라도 있었던 것일까?

모처럼 이런 아름다운 괴충인이 완성됐는데, 잃고 싶지는 않았다.


"괜, 괜찮은가, 그리마 길라... 기치치치칫!"


어딘가 당황하면서 그리마 길라에게 다가가는 그리마 겔랑.

그 어깨를 만져도 될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네에... 괜찮아요. 키치치치칫.....

나, 나는... 나는 그리마가 되어버렸군요..."


슬픈 듯이 고개를 숙이는 그리마 길라.


"기치치치칫! 맞아. 근데 아무래도 너에게는 아직 인간의 의식이 짙게 남아 있구나.

음… 융합 시에 인간의 의식이 남는 경우가 있긴 한 것 같지만...

뭐, 걱정마라. 그에 익숙해지면 곧 의식도 달라질 것이다.

괴충인이 된 것을 기쁨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기치치치칫!"


그리마 겔랑은 그리마 길라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그런 것일까?

언젠가는 이 몸에 익숙해져서 괴충인으로 살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되어 버리면... 더는...


"키치치치칫... 두 사람은... 그 두 사람은 풀어 주는 거죠?"


그리마 길라가 고개를 들었다.


"기치치치칫! 두 사람이라니?"


그리마 겔랑이 놀란 듯 손을 움츠렸다.


"그 인간 남자 둘 말이야. 내가 괴충인이 되면 풀어준다고 약속했잖아. 키치치치칫."


시치미 떼는 듯한 그리마 겔랑에게 그리마 길라는 말을 강하게 했다.

그 약속이 없었다면 괴충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기치치치칫! 아아, 그 둘이구나. 안심해라.

네가 앞으로 제대로 버그 겔랑의 괴충인으로 일한다면

네 마음대로 하게 해주겠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키치치치칫... 그... 그건... 너무해! 약속이 다르잖아!"


깜짝 놀라는 그리마 길라.


"기치치치칫! 아니지.

아무래도 너는 아직 완전히 괴충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으니까.

완전한 괴충인이 되면 너에게 그 두 사람을 맡겨 주마."


"완전한... 괴충인?"


"기치치치칫! 맞다. 몸도 마음도 괴충인이 되었을 때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너는 그 몸의 좋은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마 겔랑이 짙은 갈색의 외피에 덮인 손을 내밀었다.

속은 것 같아 불만이었지만, 그리마 길라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




*****




"기치치치칫! 그렇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지 마라.

말했지? 너도 곧 괴충인이라는 것에 익숙해질 거야."


"키치치치칫... 그래요?"


그리마 겔랑을 따라 걸으면서도 그리마 길라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몸은 변해버렸지만 마음까지는 변하고 싶지 않다.

그 두 사람이 이 모습을 받아주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두 사람을 사랑하는 암컷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급속도로 저 말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들쭉날쭉한 이빨은 사냥감의 고기를 물어뜯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냄새를 느끼는 것도 코가 아닌 긴 더듬이가 감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호흡도 등에 있는 기공에서 하고 있었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이 감각에 익숙해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분명 나는 이 위화감을 느끼면서 앞으로 괴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마 길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이것은 히로카즈 씨와 히로키를 위한거야..



"기치치치칫! 여기다"


잠시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었더니 그리마 겔랑이 멈춰섰다.

그곳에는 튼튼한 철문이 있고 좌우에 버그 드레이가 서 있었다.


"키치치치칫... 여기는?"


검고 어두운 원형의 겹눈이 문을 바라봤다.


"기치치치칫! 여긴 괴충인 훈련장 같은 거다. 이 몸도 어느 정도 훈련은 필요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리마 겔랑은 턱을 으쓱거려 버그 드레이에게 문을 열게 했다.

그곳 역시 어두컴컴한 큰 방이었지만,

군데군데 기구 같은 것들이 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괴충인용 트레이닝 기구일지도 모른다.



"기치치치칫! 와라."


실내로 들어가는 그리마 겔랑을 그리마 길라는 따라갔다.

어쨌든 지금은 그를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표면상으로는 괴충인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기치치치칫! 이거 구부려봐라."


그러면서 내미는 굵은 쇠막대기.


"어?"


그리마 길라는 깜짝 놀랐다.

이런 굵은 쇠막대기를 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키치치치... 무... 무리다. 나는 못해요."


"상관없으니 구부려봐라. 기치치치칫!"


고개를 흔드는 그리마 길라에게 그리마 겔랑은 막대기를 밀어붙였다.

어쩔 수 없이 막대기를 받는 그리마 길라.

굽히라는 말을 들어도...

게지기라는 막대기를 양손으로 잡고 어떻게든 구부려 보려고 힘을 주었다.

어?

또 놀라는 그리마 길라.

마치 철사를 구부린 것처럼 쇠막대기가 쉽게 ㄱ자로 구부러진 것이었다.

확실히 조금의 힘은 필요했지만, 설마 구부러질줄은...



"기치치치칫! 어때? 구부러졌지?"


"어, 네… 설마 구부러지다니... 키치치치…"


스스로 이 철막대기를 구부린 것이 뭔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철막대기는 구부러진 것이었다.


"기치치치칫! 그게 괴충인의 힘이다.

너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힘을 가진 선택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마 겔랑의 말에 오싹한 쾌감을 느끼는 그리마 길라.

확실히 이런 힘은 인간일 때는 생각할 수 없는 힘이었다.

이것이 괴충인의 힘...



"기치치치칫! 다음은 이거다"


그리마 겔랑은 이번에는 쇠판자를 가져왔다.


"기치치치칫! 내가 들어준다. 네 손톱으로 이걸 꿰뚫어 봐."


"키치치치... 내 손톱으로?"


"맞아. 너의 그 날카로운 손톱으로. 기치치치칫!"


그 말을 듣고 그리마 길라는 자신의 손을 봤다.

짙은 갈색과 검은 반점의 외피에 덮인 손에는 분명 날카로운 손톱이 나 있었다.

이것을 사용해서... 꿰뚫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리라고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키치치치... 에잇!"


힘차게 튀어나온 그리마 길라의 손톱이 쇠판을 뚫는다.

날카로운 손톱이 널빤지를 관통하는 감촉이 너무 기분이 좋다.

이렇게 굉장하다니...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기치치치칫! 어때? 괴충인의 힘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키치치치칫! 네, 맞아요. 정말 대단해요.

이렇게나 내 힘이 굉장하다니... 키치치치칫"


그리마 길라는 자신의 손톱을 반한 듯 바라본다.

인간이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

이렇게나 힘이 있다니 즐거워진다.

그리마 길라는 이 힘을 더 시험하고 싶다고 느끼고 있었다.



"기치치치칫! 그럼 이것도 시도해 보는 건 어때?"


쿵하고 놓이는 약간 큰 내화 금고.

보통 같으면 사람 두세 명이 들고 다닐 만한 것을 그리마 겔랑은 혼자 가져왔다.

그것만으로도 괴충인의 힘의 세기를 알 수 있다.


"키치치치칫! 이것도 구멍을 내라고?"


"기치치치칫! 아니, 이건 너의 다른 능력을 시험할거다."


"키치치치... 내 다른 능력?"


도대체 무슨 능력일까?



"기치치치칫! 여기 서봐"


"키치치치... 이, 이렇게?"


시키는 대로 금고를 향해 서는 그리마 길라.


"하앙!"


휙 등뒤로 돌아갔더니 갑자기 팔을 뻗어 가슴을 주무르는

그리마 겔랑에게 그리마 길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키치치치치치...뭐, 뭐야? 그... 그만해... 하아아앙"


동심원형 마디로 뒤덮인 게지기라의 가슴.

그 끝에서 젖꼭지 같은 돌기가 얼굴을 내민다.


"기치치치칫! 역시 생각했던대로다. 그리마 길라의 가슴은 참을 수 없어."


"그만.... 하아응"


그러면서도 그리마 길라도 가슴이 주물러지니 기분이 좋아진다.


"키치치치...하앙... 뭔가... 뭔가 이상해..."

"기치치치칫! 괴충인에게 모유는 필요 없으니까.

암컷 괴충인의 이곳은 대개 독액 주머니로 되어 있는 법이지. 너의 것도 그렇다."


"하아앙.... 뭐, 뭐라고?"


그리마 겔랑에게 주물러진 가슴이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그와 동시에 돌기 끝에서는 보라색 액이 흘러내린다.


"하아아앙"


이윽고 돌기는 그 액을 힘차게 날려 금고로 퍼붓는다.


"하아아응… 아... 앗?"


순식간에 녹아가는 금고.

액이 뿌려진 부분이 걸쭉하게 녹아가는 것이다.


"키치치치... 뭐,뭐야? 뭐야?"


"기치치치칫! 산이다. 뭐, 소화액의 일종이지.

수컷인 우리는 입에서 독액을 토하는데, 암컷인 너는

여기서 소화액의 산을 낸다는 것이다. 산을 내는 것은 기분이 좋지?"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리마 길라의 가슴을 주무르는 그리마 겔랑.


"하아앙... 산을... 키치치치…"


그리마 길라는 두근두근거리는 기분을 점점 느껴간다.

수컷에게 가슴이 주물러지는 쾌감, 녹아가는 금고를 보았을 때의 열락,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가슴에서 산을 뿜어낸다는 쾌락.

그것들이 서로 겹쳐서 그리마 길라를 유열로 데리고 간다.


"기치치치칫! 어때? 더 주물러줬으면 좋겠나?"


"아읏... 네... 키치치치..."


쾌락에 이빨로 소리를 내는 그리마 길라.

괴충인이...

괴충인이 이렇게 멋진 것이었다니...



대충 능력을 확인한 후에 그리마 겔랑에게 식사를 권유받는 그리마 길라.

거절할 수 없는 그녀는 마지못해 그리마 겔랑과 식사를 함께 한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페스토 형태의 식사.

그리마 겔랑이 말하길 이것은 단순한 영양 공급을 위한 것이고,

맛있는 것은 생물의 고기라고 한다.

그리마는 육식이니 너도 고기를 먹게 된다는 것이다.

리호는 별로 채식주의 같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다는 것에 특별히 의문을 가질 것은 없었지만,

그리마 겔랑이 조만간 너에게도 고기 맛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 말에는 조금 즐거움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식사 후에는 그리마 겔랑 옆방으로 안내되었다.

원래의 방으로 돌아갈 수 있는 모양은 아니었고,

아무래도 앞으로는 이곳이 현재의 주거지가 될 것 같았다.

좀 어둡고 침침해서 으스스 했지만, 어딘가 감촉에 맞는 듯 아늑했다.

그리마 길라는 일단 방구석 매트가 깔린 자리에 누웠다.

왠지 피곤해.

단숨에 인간으로부터 괴충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그 둘, 히로카즈와 히로키에 대해서는 신경이 쓰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언젠가 내가 괴충인으로 인정받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보다도...


"키치치치..."

그리마 길라는 이빨을 비비며 자신의 손을 본다.

손끝에서 뻗는 날카로운 손톱

이 손톱이 이렇게 날카롭고 강한 줄 몰랐어.

쇠판자도 일격에 때려내는 힘.

아마 건물 벽 같은 것도 허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치아의 세기도 놀라웠다.

처음 접은 쇠막대기를 쉽게 물어뜯어 버린 것이다.

괴충인이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힘이 기분 좋아.



"하아아응"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그리마 길라는 자신의 가슴을 주물렀다.

그리마 겔랑에게 문질러 비벼졌을 때의 감촉이 되살아난다.

히로카즈에게 만져졌을 때도 그렇게 기분이 좋았을까?

생각이... 나지 않아...


"하아아아응... 좋아... 이 몸... 좋아..."


딱딱한 외피로 덮여 있을 텐데, 물컹물컹 주물러지는 두 개의 유방.

곧 끝에서 돌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걸쭉한 산이 쏟아져 나온다.

기분좋아.

이 정도면 곧 산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금고도 녹이는 강력한 산.

그런 산을 내가 낼 수 있다는 것에 그리마 길라는 기뻤다.


"키치치치... 아아아앙"




*****




손목시계밖에 시간을 알 길이 없지만, 지금은 벌써 심야.

아버지에게 기대듯이 히로키는 잠들어 있었다.

울고불고 매달리다가 지쳤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이 방에 갇힌 지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괴물이 가져다 준 자신들의 바구니 속 도시락을 먹고 배를 채웠지만,

그 외에는 물도 식사도 주지 않았다.


아내 리호의 몫은 남겨뒀지만 리호는 끌려간 채 돌아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다른 방에 감금되어 있다든가 하면 좋겠다고 히로카즈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뭔가 곤욕을 치르고 있지는 않았을까?


설마...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아내가 살해당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아침이 되면 괴물이 얼굴을 내밀지도 몰라.

그때 아내를 만나게 해달라고 해보자.

아무리 그래도 심하다.

어떻게든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그 때는 셋이서 모여...

리호...

무사하게 있어줘...

그렇지 않으면 히로키가...

히로카즈는 아들을 살짝 껴안았다.




*****




"키치치치... 내가 해줬으면 하는 일?"


그리마 겔랑에게 불려지는 그리마 길라.

여하튼 그녀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기치치치칫! 너도 버그 겔랑의 괴충인이니까. 너도 일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나는..."


그리마 길라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 자신은 버그 겔랑에 속했다는 생각은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히로카즈와 히로키를 위해 하는 일이지,

진심으로 버그 겔랑의 괴충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괴충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두 사람을 풀어줄 수 없었다.

안 할 수는 없잖아.

그리마 겔랑에게 제대로 괴충인으로 인정받으면

그 두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테니까.



"키치치치… 그래서 뭘 하면 돼요?"

"기치치치칫! 뭐 쉬운 일이다."


또 어제와는 다른 방으로 안내하는 그리마 겔랑.

그건 그렇고 여기는 여러 개의 방이 있는 것 같아.

아무래도 이곳은 버그 겔랑의 아지트라고 불리는 곳답게

그 밖에도 괴충인이 몇 마리 더 있다고 한다.

조만간 다른 동료들도 만나게 한다고는 하나

현재 괴충인은 그리마 겔랑밖에 보지 못했다.

나머지는 온몸이 시커먼 마네킹 같은 버그 드레이뿐.

다만 버그드레이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다는 것으로,

그리마 길라의 시중은 암컷 버그 드레이가 해준다고 한다.

암컷 버그 드레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좀 기대가 되기는 했다.



"키치치치... 여기는?"


그리마 길라는 순간 여기가 그 히로카즈와 히로키가 있는 방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낯선 두 중년 남녀가 겁먹은 듯 서로 껴안고 있었다.


"히익!"

"괴, 괴물이 두 마리?"


여자를 감싸안듯이 껴안는 중년 남자.

여자도 새파란 얼굴로 그리마 겔랑과 그리마 길라를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이 두 사람은 누구일까?

왜 이렇게 공포에 질려 있는 걸까?



"키치치치... 이 둘은?"


"기치치치칫! 이놈들은 이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어서 잡아온 인간이다.

노예, 노동에도 적합하지 않은 녀석들이다. 너는 이것들을 처리하도록 하겠다."


"어? 처리?"


그 말에 그리마 길라는 순간적으로 되물었다.


"그래, 처리야. 이런 쓸모도 없는 것들. 먹일 필요는 없지! 기치치치칫!"


신나게 웃는 그리마 겔랑.


"그, 그런..."


그리마 겔랑의 말은 명백했다.

처리란 이 두 사람을 죽이라는 것.

그걸 그리마 길라에게 시킨다는 것이었다.



꿀꺽 침을 삼키는 그리마 길라.

눈앞에서 겁에 질린 남녀는 어쩌면 자신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불쌍한 녀석들을 처치해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그리마 길라의 마음 속에서 기묘한 흥분이 솟아오른다.

이놈들은 노예, 노동에도 적합하지 않은 무능한 녀석들.

하등한 인간 중에서도 더 쓸모없는 무리들이다.

그런 녀석들을 처리하는게 뭐가 나쁘다는 말인가.

버그 겔랑에 쓸모없는 인간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눈은 매우 기분 좋다.

그녀에게 자신의 우위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오싹할 정도의 쾌감.

두근거릴 정도의 흥분.

꼴사납고 무력한 인간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손톱으로 찢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팔을 뜯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가슴에서 산을 꺼내 녹여버리는 것도 좋을지도 모른다.

왠지 되게 재밌을 것 같아.



"키치치치..."


이빨에서 소리를 내면서 여자를 향해 손을 뻗는 그리마 길라.


"히익!"


"그, 그만해!"


남자가 여자를 감싸려고 앞으로 나섰다.

그것이 그리마 길라한테는 어쩐지 무척이나 부아가 치밀었다.

나를 방해하려는 거야?

인간 주제에...

하등한 인간 주제에...

사람 주제에 감히 나를 방해할 생각인거야?



"으아악"


그리마 길라가 가볍게 털어내기만 해도 남자는 방구석까지 날아가 버렸다.


"키치치치칫! 방해하지 마!"


짜증난 듯 큰 소리를 내는 그리마 길라.

사람 주제에 쓸데없는 짓을 하니까 그래.

벽에 부딪혀 머리를 싸매고 있는 남자를 보고는

그리마 길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기분이다.

하등한 인간은 얌전히 있으면 돼.



"히익!"


힘차게 여자를 끌어당기는 그리마 길라.

중년의 시시한 여자라, 확실히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았다.

보기 흉한 여자다.

그리마 길라는 여자를 끌어안듯 세우고는 그 손톱으로 옷을 찢어댔다.


"싫어!"

"그, 그만해!"


남자의 목소리와 여자의 비명이 교차하고,

그것이 다시 그리마 길라에게 흥분을 안겨주었다.

이 꼴사나운 녀석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갸아아아악!"


그리마 길라의 손톱이 여자의 살갗을 찢어간다.

얼마나 부드럽고 무방비한 피부인가.

이렇게 쉽게 베어낼 수 있다니.

힘도 거의 필요 없을 정도야.


"키치치치..."


그리마 길라는 무심코 이빨을 비볐다.

피가 튀고 여자의 한쪽 팔이 찢겼다.

조금만 힘을 주고 비틀면 쉽게 뜯어낼 수 있었다.

인간에게 상처를 주는 것 따위의 간단한 일.

이것이야말로 식은 죽 먹기 일지도 모른다.

딱딱한 외피에 덮여 있지 않다니 한심하네.



여자의 비명소리가 사라지니 고개가 푹 숙여졌다.

아무래도 죽어버린 모양이다.

어?

이렇게 쉽게 죽는 거야?

아직 한쪽 팔을 떼고 내장을 끌어낸 정도는 아니었어.

어쩜 이렇게 시시할 수가.

이렇게 쉽게 죽다니 역시 인간은 하등한 존재야.


"아아... 아아아..."


공포와 슬픔의 눈으로 그리마 길라를 보는 남자.

맞아.

아직 이쪽이 있었어.

이쪽은 수컷이라 조금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암컷처럼 쉽게 죽으면 재미없어.

주위에 퍼지는 피 냄새가 그리마 길라를 흥분시킨다.


"키치치치..."


그리마 길라는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머지않아 남자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이쪽도 죽어버린 것 같아.

다리와 팔을 비틀고, 가슴을 손톱으로 꿰뚫었더니 죽고 말았어.

흥...

바닥에 구른 남자의 머리를 발로 짓밟았다.

뭐, 조금은 즐길 수 있었을까.


"기치치치칫! 잘했다고."


그리마 겔랑이 말을 걸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인간을 무참히 죽일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그러니 참으로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키치치치... 이런 것으로 다행일까?"


이제야 흥분이 가라앉았다.

발밑 바닥은 피투성이였고, 시체와 살점이 널려 있었다.


"방을 더럽혀버렸어. 버그 드레이에게 청소를 시켜야지. 키치치치칫."


그런 일도 그들의 일이라는 것을 그리마 길라는 이해하고 있었다.



"충분해. 훌륭했다. 기치치치칫!"


"고마워. 그런데 칭찬받을 일은 아니었어.

버그 겔랑에 도움이 되지 않는 쓰레기 따위는 처리하는게 당연하지? 키치치치..."


고개를 돌려 미소짓는 그리마 길라.

그 미소에 그리마 겔랑은 정말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기치치치칫! 그렇지. 쓸모없는 인간 따위는 처리하는 것을 한한다.

근데 배고프지 않아? 식사라도 같이 먹자"


"좋아요. 함께 할게요. 가요. 키치치치..."


내민 그리마 겔랑의 팔을 반갑게 받아들이는 그리마 길라.

두 사람은 즐거운 듯 손을 잡고 피냄새 가득한 방을 떠났다.




*****




"키치치치...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심야 거리를 달리는 한 대의 원박스카 의자에서 흔들리고 있는 그리마 길라.


"기치치치칫! 심야 드라이브를 가고 싶은 참인데,

일을 하게 되었군요. 너도 도와줬으면 좋겠다."


맞은편 자리에 앉는 그리마 겔랑이 그 긴 더듬이를 답답하게 바닥까지 늘어뜨렸다.


"키치치치... 그렇다면 제대로 말해 줬으면 좋았는데."


"기치치치칫! 미안해. 가기 싫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삐걱삐걱 그리마 겔랑의 발톱이 머리의 외골격을 긁었다.


"끼치치치... 그렇지 않아요. 확실히 말하는건 한다. 키치치치..."


불만스러운 듯이 이빨을 비비는 그리마 길라.

이젠... 별로 하기싫다는 말은 안하는데...



이윽고 원박스카는 어느 대학 앞에서 정차했다.


"기치치치칫! 여기부터 앞서 실력을 보일 장소다.

저 건물까지 눈치채지 못하도록 접근하는 것이다."


"저 건물까지?"


"그렇다. 저기는 이 대학의 약학 연구소라나.

우리 버그 겔랑에 불편한 약품을 개발 중이라고 한다.

그 연구를 망치는 것이다. 우리 손으로 말이야. 기치치치칫!"


"키치치치... 그런 것이군요."


그리마 겔랑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마 길라.

저 건물 안에서는 버그 겔랑에 불편한 약품을 개발 중이라고 한다.

그것은 버그 겔랑을 방해한다는 것.

버그 겔랑의 활동을 방해하려 하다니...

왠지 화가 난다.

인간 주제에...

하등한 인간들 주제에 버그 겔랑에게 맞서다니 용서할 수 없어.



원박스카의 그림자에 숨듯 땅을 기어가기 시작하는 그리마 길라.

몸 양옆에 있는 가느다란 다리들이 매끄럽게 움직이며

그리마 길라의 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하앙...

이 얼마나 멋진가...

인간같이 하찮은 것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움직임.

버그 겔랑의 괴충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움직임이다.

그녀는 선택된 것이다.

위대한 버그 겔랑의 괴충인으로 뽑힌 것이다.

그것은 그리마 길라에게 있어서 매우 기쁜 일이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건물 콘크리트에 시원하게 구멍을 내고

그리마 길라는 그 속으로 파고든다.

건물 바닥은 어둡고 습하지만 그리마 길라에게는 오히려 기분이 좋다.

겹눈은 희미한 빛도 포착하고 그 이상으로 촉각이 주위의 모습을 전해준다.

어둠을 이렇게 기어다니는 것은 정말이지 기분이 좋다.


"키치치치..."


나도 모르게 이를 비빈다.

기분이 좋다.

일사천리로 앞으로 기어갈 수 있어.

땅을 기어다니는 것이 즐거워.

두 발로 걷는 것보다 움직이기 쉬울 정도야.

그리마 길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그리마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제 버그 겔랑에 거스르는 무리들을 처치하러 가는 재미도 느낀다.

후후후...

그리마 길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의 뒤에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그리마 겔랑이 잇따르고 있었다.



연구동 바닥에 구멍을 뚫어 얼굴을 내밀고 주위를 살피는 그리마 길라.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으로 바닥에 구멍을 내는 것 쯤 간단한 일.

이곳은 아무래도 연구실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이 시간은 역시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실내는 캄캄하다.

물론 게지기라에게는 그게 편하다.


"키치치치... 아무도 없어요."


"기치치치칫! 좋아, 잘했어, 그리마 길라"


그녀가 실내로 기어나옴과 동시에 그녀가 뚫은 구멍으로

바스락 기어나오는 그리마 겔랑.

그 말에 그리마 길라는 기뻐졌다.

역시 칭찬을 받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키치치치... 고마워요. 하지만 나에겐 쉬운 일이야."


그렇게 말하고 그리마 길라는 자신의 손톱을 봤다.

정말 이 손톱은 멋지다.

이 손톱으로 이번에는 인간을...


"키치치치..."


괴충인의 굉장함을 그리마 길라는 느끼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

비명을 지르는 경비원들

연구 중인 약품도 연구 성과를 거둔 자료도 모두 손톱으로 찢어 산으로 녹여 나간다.

컴퓨터를 파괴하고 데이터도 읽을 수 없게 만든다.

버그 겔랑에게 맞서는 어리석은 인간이 하는 일 따위는 지워버리는 것이다.

하등한 인간들에게 보답을 해주는 것은 기분이 좋다.

그리마 길라는 그리마 겔랑과 함께 연구소를 파괴한다.

얼마나 즐거운지...

인간들을 죽이는 것이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다.

최고의 기분이야.



울려 퍼지는 경보와 창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을 등지고

그리마 겔랑과 그리마 길라는 그 자리를 떠난다.

재빨리 땅을 기어 거리의 원박스카로 돌아온다.

그리마 길라는 기어다니듯 원박스 옆문을 통해

차 안으로 들어가고는 손을 뻗어 그리마 겔랑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 올리듯 그를 차 안으로 끌어들이자,

그리마 겔랑이 들어와 문을 닫았다.



"기치치치칫! 고마워. 그리마 길라."


"키치치치… 천만에요."


킥킥 웃는 그리마 길라.

이런 일은 동료끼리라면 당연한 일.

그런데도 감사의 말을 해주다니.

그리마 겔랑은 성실하다니까.


원박스카는 심야의 길을 달려간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우후후...

지금쯤 가봤자 이미 늦었어.

그리마 길라는 일을 마친 만족감과

그에 따른 기분 좋은 피로를 즐겼다.




*****




"건배!"


짠하는 가벼운 소리가 울리며 플라스틱 병이 가볍게 부딪친다.

그리마 겔랑은 그 병의 빨대로 빨아 마시듯이,

그리마 길라는 그대로 병을 기울여 내용물을 마셨다.

그리마 길라의 입가가 인간일 때와 같은 형상이었기 때문에

빨대를 사용하지 않고도 마실 수 있던 것이었다.


달콤한 액체가 목을 축였다.

약간 알코올도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기치치치칫! 임무는 성공이다. 잘했어, 그리마 길라.

이제 우리도 수령님께 너를 괴충인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보람이 있었다는 거야."


"키치치치... 고마워. 그리마 겔랑.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기뻐."


수령님은 아직 만난 적이 없지만 그리마 겔랑의 말로는 아주 위대한 분이라고 한다.

이 버그 겔랑을 지배하고 모든 괴충인 위에 서는 분이란다.

그런 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영광이자 괴충인으로서 기쁜 일.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날 날이 기대된다.

그리마 길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치치치칫! 그래서 어땠나?"


옆에 앉은 그리마 겔랑이 말을 건넸다.


"키치치치... 어? 어땠냐니?"


"재미있었나? 기치치치칫!"


퍼뜩 생각난 그리마 길라.

확실히 그리마 겔랑의 말대로 즐거웠던 것이다.

벽에 구멍을 내고 마루 밑을 기어다니는 것도,

기자재를 파괴하고 가슴에서 산을 뿌려 녹이는 것도,

손톱으로 도망치려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도 모두 즐거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괴충인이기 때문에 그 즐거움이고,

괴충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인간으로는 맛볼 수 없는 즐거움.

그 사실을 그리마 길라는 깨달은 것이었다.

나는...

나는 이제...

마음까지 괴충인이 되어버렸다는 건가?



"키치치치... 그, 그건..."


그리마 길라는 말문이 막힌다.

즐겁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 된다.

오히려 진심으로 즐거웠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그것을 말해 버리면 나는 이제...



"기치치치칫!"


슥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마 길라 앞에 선 그리마 겔랑.


"아..."


그 날카로운 손톱이 난 손으로 그리마 길라의 턱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그대로 그리마 길라를 세우더니 그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기치치치칫! 즐거웠지? 어떤 생각으로 고민 할 필요가 있나?

너는 버그 겔랑의 괴충인이다. 즐겨도 당연한거 아니냐."


"키치치치... 그것은..."


다르다고 말하려는 그리마 길라.

그런데 뭐가 다르다는 거지?

그리마 길라의 육체는 이제 인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저런 무방비로, 추하고 연약한 생물이 아니다.

손톱의 일격에 간단하게 죽고, 몸을 보호하는 외피조차 없는 꼴사나운 생물.

그런 하등 생물을 죽이고 즐기는게 무엇이 안 되는 것일까...

그리마 겔랑의 말대로 나는 버그 겔랑의 괴충인이지 않은가...



"아... 잠깐..."


껴안고 키스하려는 그리마 겔랑을 누르고 고개를 돌리는 그리마 길라.


"기치치치칫! 왜 그래? 뭘 망설이지? 우린 파트너다."


"키치치치...나...나, 나에게는..."


"기치치치칫! 그 인간들이냐? 왜 저런 녀석들을 신경 쓰지?

저 녀석들이 너한테 뭐라는 거야? 하찮은 하등생물 아닌가?"


그리마 길라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저 둘은 나에게 있어서… 뭐지?

뭐라고 하는 거야?


왜 나는 그 인간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했을까?

예전에는 나도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제 인간과는 달라...

지금의 나는 버그 겔랑의 괴충인 그리마 길라.

그리마의 괴충인이야.

인간따위와는 다르다...



"웅…"


그리마 겔랑의 턱이 그리마 길라의 입술에 서로 겹쳐진다.

딱딱한 턱이 그리마 길라의 부드러운 입술에 부드럽게 짓눌린다.

얼마나 멋진 달콤한 키스인가.

그리마 길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치치치칫! 이제 그 인간들은 잊어버려라.

너는 우리 암컷이다. 나야말로 너의 소중한 수컷이다."


"키치치치... 아... 네에…"


그리마 겔랑의 말이 맞다.

내가 뭘 망설였을까?

나는 무엇을 힘들어했을까?

나는 뽑힌 것이다.

위대한 버그 겔랑의 괴충인으로 뽑힌 것이다.

인간이라는 하등한 생물이었던 몸을 버리고 이런 훌륭한 육체로 거듭난 것이다.

나는 이제 인간따위가 아니야.

괴충인 그리마 길라.

이 멋진 모습으로 만들어준 그리마 겔랑이야말로 나의 소중한 파트너가 아닐까.



"우응…"


다시 한번 이번에는 스스로 그리마 겔랑에게 키스를 하는 그리마 길라.

그의 몸을 그 손으로 꼭 껴안았다.

단단한 외피가 밀착되어 서로의 걸음걸이가 얽힌다.

아아... 얼마나 멋진가.

이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파트너.

나는 그리마 겔랑의 암컷.

괴충인 그리마 길라야.



"기치치치칫! 어때? 둘이서 즐기지 않을래? 듬뿍 예뻐해 준다."


"키치치치... 네, 기꺼이"


그리마 겔랑의 말에 그리마 길라가 미소짓는다.


"기치치치칫! 그렇다면 이 쪽으로 와라."


침실로 초대하는 그리마 겔랑.

하지만 그리마 길라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키치치치... 네. 하지만 그 전에 부탁이 있어요."


"기치칫! 부탁이라고?"


"응, 정말 중요한 부탁이야. 키치치치..."


그리마 길라의 눈에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




"아빠..."


슬픈 눈으로 아버지를 보는 히로키.

배고픈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히로카즈에게도 어쩔 수 없었다.

감금된 지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하루에 한 번씩 나오는

페스토 형태의 맛도 무미건조한 음식에만 의지하는 것이었다.

매번 다른 식사를 내달라고 하거나 아내인 리호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기는 했지만,

저 검은 마네킹 남자들은 말이 통하는지도 의심될 정도로 전혀 말을 듣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일까...

히로카즈도 머리를 싸매고 있을 뿐이었다.



달그락 소리가 나고 철문이 열린다.


"힉"


작게 비명을 지르며 히로카즈의 그림자에 숨는 히로키.

여느 검은 마네킹 같은 버그 드레이가 아니라 저 그리마 괴물이 들어와 겁에 질린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은 그 배후에 또 하나, 짙은 갈색에 검은색 반점 무늬의 몸에

양쪽으로 가는 다리를 스르륵 움직이는 두 번째 그리마의 괴물이 있지 않은가.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마 겔랑과 함께 두 사람의 방으로 찾아오는 그리마 길라.

공포에 질려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아이와

아이를 감싸듯 뒤에 감추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이름은 히로카즈와 히로키.

소중한 사람이었을 텐데 이렇게 만나니 그런 마음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

오히려 버그 겔랑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쓰레기로밖에 보이지 않잖아.

정말 나는 이 하등 생물들을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했을까?



반대로 겁먹은 표정의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마 길라는 두근거림을 느끼게 된다.

얘네들은 하등한 생물.

몸을 보호할 방법이 없는 약한 녀석.

그래서 강한 우리에게 겁을 먹는다.

그 겁에 질린 표정을 보는 것은 매우 기분이 좋다.

더 겁나게 하고 인간을 괴롭히고 싶다.

그리마 길라의 마음에는 그런 감정이 피어나고 있었다.



"기치치치칫! 아직 건강해 보이는데?"


"우,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거야? 제발... 풀어 줘.

여기 일도 너희 일도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다. 믿어줘."


남자가 그리마 겔랑에게 간청한다.

불쌍한 인간

강한 자에게 매달리는 것만으로 살 수 있는 하등한 생물.

보기 흉한 존재다...



"기치치치칫! 그건 내 파트너에게 달렸구나."


"파트너?"


"기치치치칫! 맞다. 너희들한테도 소개하지.

내 파트너이자 위대한 버그 겔랑의 괴충인 그리마 길라다."


그리마 겔랑이 자랑스럽게 그리마 길라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키치치치..."


파트너라는 말을 들으니 기뻐지는 그리마 길라.

그녀에게도 그리마 겔랑이야말로 소중한 파트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그 증거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 그렇구나. 저기, 부탁한다. 이제 아이도 한계다.

우리를 풀어줘. 그리고 아내를... 리호를 만나게 해줘."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히로카즈에게

그리마 길라는 뭔가 이상해진다.

리호를 만나게 해줘?

리호...

그건 예전에는 내 이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단어가 늘어선 것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었다는 것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애초에 이 남자는 눈앞에 있는 내가 누군지나 알고 있는 걸까?

촉각도 없는 하등한 인간은 알 리 없을지도 모른다.

꼴사나운 생물이다.....


"키치치치... 저기, 그 리호라는 암컷을 만나고 싶어?"


시선을 맞추듯 구부리는 그리마 길라.

히로카즈의 얼굴이 정면에 오지만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남자는 이제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남자인 것이다.

오히려 그저 하등한 생물이며 버그 겔랑에 도움조차 되지 않는 남자인 것이다.

이런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반대로 왠지 혐오감이 드는 것 같았다.



"만나고 싶다. 만나게 해줘. 부탁해.

리호를 만나게 해줘. 아내 리호에게... 크헉."


리호리호라고 계속 외치는 남자를 손등으로 후려갈기는 그리마 길라.


"아빠!"


히로키가 아버지에게 달려간다.


"리호리호... 시끄러워. 리호라면 네 앞에 있잖아. 키치치치칫!"


일어서서 부자를 멸시하듯 내려다보는 그리마 길라.

얘네들은 하등한 녀석들.

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으... 어? 리호? 엇?"


얻어맞은 뺨을 누르면서 히로카즈는 그리마 길라를 올려다본다.


"리호… 너는 리호야?"

믿을 수 없다.

그 리호가 그리마의 괴물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키치치치... 응, 맞아.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너희와 같은 하등 생물이 아니야.

게다가 이제 리호라는 이름도 아니야.

나는 그리마 길라. 위대한 버그 겔랑의 괴충인 그리마 길라다. 키치치치칫!"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이를 비비는 그리마 길라.

그래.

나는 이제 인간따위가 아니야.

나는 뽑혔어.

그리마 겔랑 덕분에 나는 위대한 버그 겔랑의 일원으로...

괴충인 그리마 길라로 다시 태어난거야.

그리마 길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고민하던 내 자신이 바보같다.

자신은 얼마나 행운이었을까.

그리마 겔랑이 만약 자신을 선택해주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에 섬뜩했다.

그와 같은 멋진 괴충인에게 파트너로 선정된 것은 최고의 행복.

나는 그의 파트너.

그리마 겔랑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야.

"키치치치칫!"



"그런... 설마... 리호... 쿨럭!"


"아빠!"


성큼 다가온 그리마 길라에게 다리로 걷어차이는 히로카즈.


"키치치치... 넌 바보야? 말했잖아. 나는 더이상 그런 이름이 아니야.

나는 그리마 길라야."


검고 둥근 겹눈이 차갑게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 으윽..."


아픔에 웅크리는 히로카즈

히로키도 아버지 곁에서 떨고 있었다.



"기치치치칫! 그리마 길라, 네 부탁이라고 해서 여기 데려왔는데

이 녀석들한테 아직도 미련이 있는 거 아니었나?"


그리마 겔랑은 남자들을 대하는 그리마 길라의 행동에 다소 놀란다.


"키치치치…아아. 달라. 그렇지 않아. 나는 내 기분을 분명하게 하고 싶었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그리마 겔랑에게 그리마 길라는 그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다.


"기치치치칫! 마음을 확인한다고?"

"응... 내 안의 이 녀석들에 대한 마음을..."


그리마 길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래...

여기 온 건 정답이었어.

그리마 길라는 눈앞의 남자들에게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 자신에게 만족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위대한 버그 겔랑의 괴충인 그리마 길라야.

인간과 같은 하등한 생물에 호의를 가질 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호의를 가지는 것은...

우후후후...

그리마 길라는 그리마 겔랑의 팔을 꼭 껴안는다.

이 멋진 수컷뿐이야.



"기치치치칫! 그래서 답이 나왔나?"

"응. 물론. 저기, 그리마 겔랑... 나 이제 이 녀석들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 키치치치..."


냉혹하게 내뱉는 그리마 길라.


"기치치치칫! 정말이야? 얘네들을 처치해도 정말 좋나?

네 소중한 녀석이였던 거 아닌가?"


그리마 겔랑이 몇번이고 확인한다.

아까 남자를 걷어차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미련이 없어졌다고 봐도 되는가?


"우후후...물론이죠. 나에게 중요한 것은 파트너인 당신.

괴충인 그리마 겔랑이다. 키치치치칫"


황홀하게 몸을 들이대는 그리마 길라에게 그리마 겔랑은 기쁘게 생각한다.

드디어 이 암컷은 내 것이 된 것이다.

괴충인으로 개조한 보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치치치칫! 그렇다면 이놈들은 네 손으로 처치하는 게 좋겠어."


"어?"


놀라서 고개를 드는 그리마 길라.


"기치치치칫! 이전에 말했지?

네가 괴충인이 되면 얘네들은 네 맘대로 하게 해주겠다고"


"키치치치... 아아... 그런 말이었군요."


그리마 겔랑이 하는 말의 뜻을 지금 이해하는 그리마 길라.

그 말은 이놈들의 처리을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리마 겔랑에서 벗어나 남자들에게 다가가는 그리마 길라.


"키치치치..."

그대로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우후후... 기분 좋아...

외골격 마디 틈이 약간 벌어지면서 젖꼭지 같은 돌기가 얼굴을 내민다.

산을 낼 준비가 된 것이다.

하아아앙...

게지기라가 가슴을 주무르며 그 가슴을 예전 남편에게 돌려간다.


"아앙아흣... 키치치치칫!"


외골격 틈새 돌기에서 산이 힘차게 뿜어져 나간다.


"그아아아아아악!"


산을 뒤집어쓴 히로카즈가 비명을 지르고 그 몸이 심한 화상으로 문드러져 녹는다.


"아, 아빠! 우아아아앙!'


눈앞에서 주르륵 소리를 내며 녹아가는 아버지를 보고 울부짖는 히로키.


"아하하하... 정말 기분이 좋은 걸. 인간을 녹이는 건 최고야. 키치치치…"


비명에 겹치듯 그리마 길라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 다음은 너야. 키치치치..."


그리마 길라의 겹눈이 히로키를 인식했다.


"싫어! 엄마아!"


그것은 그리마 길라를 향해 말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 없는 과거의 리호를 향한 것이었을 것이다.


"키치치치... 유감이네. 나는 이제 네 엄마가 아니잖아.

나는 그리마 길라. 인간의 아이 따위는 눈에 거슬리네요."


천천히 히로키에게 다가가는 그리마 길라.


"히이이..."


아아, 두근두근거린다...

이 공포에 질린 아이의 얼굴.

이것이야말로 괴충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쾌락일지도 모른다.

그냥 산으로 녹여 버리다니 아깝다.

너는 내 손톱으로 듬뿍 잘게 잘라줄게.


"키치치치..."


그리마 길라는 그 날카로운 손톱이 난 손을 소년에게 내리찍었다.




*****




철문을 열고 방에서 나오는 두 괴충인.


"기치치치칫! 꽤 즐겼잖아. 자기 아이를 저렇게까지 잘라내다니."


그리마 겔랑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인간 죽이는 걸 그렇게나 즐기게 되다니, 기대할만하지 않을까 싶다.


"키치치치... 아냐. 저 하등 생물들과 나는 이제 아무 상관이 없어.

나는 단지 버그 겔랑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 쓰레기를 처리했을 뿐이야.

과거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복도를 걷는 그리마 길라.

이것으로 더 이상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싫은 과거는 묻어버려 경계를 짓는다.


"기치치치칫! 이제 완전히 몸도 마음도 괴충인이 된 모양이군."


"당연하죠. 나는 위대한 버그 겔랑의 충인 그리마 길라야. 키치치치..."


"기치치치칫!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리마 길라"


"나야말로 잘 부탁해요. 그리마 겔랑.

저기, 아까의 권유는 아직 유효해?

나 너랑 침대에 같이 들고 싶어. 키치치치칫!"


그리마 길라가 재차 그리마 겔랑의 팔에 자신의 손을 감아 간다.


"기치치치칫! 나로 좋은거야?"


"그럼.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소중한 파트너니까요. 키치치치..."


그리마 길라는 그리마 겔랑의 옆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이제 그와 함께 버그 겔랑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리마 길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리마 겔랑과 몸을 겹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끝-




*****




원본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18008440


최면세뇌 챈에서 활동하는 챈럼인데,

누가 여기도 올려달라고 해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