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문 글쟁이가 아니라서 필력이나 스토리 진행에 어색한 부분이 있을수도 있음

그래도 소설책 다읽고는 너무 소설쓰기 좋은 소재들이 많아서 한번 만들어봤음



띄어쓰기 빼고 6천자나 나오네 ㅁㅊ

이분량으로 3~4부까지 나올듯 아마? (내가 게으르지만 않는다면)





주의)소설 더 트릭컬의 내용을 바탕으로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이용해서 쓴 소설입니다

소설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스포당하고 싶지 않은 챈럼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물방울이 땅을 적시는 소리에, 땅에 몸이 반쯤 파묻힌 채로 나는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야?'

'왜 땅에 묻혀 있는 거지?'

'난 누구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눈을 뜬 뒤로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피어났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우선 땅에 파묻힌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은 작은 나무들이 빨간 열매를 맺고 있다.

 

...배고프다. 배고파서 움직이기도 힘들다.

뭐라도 먹고 싶다.

 

열매가 달린 나무로 다가갔다. 열매를 따서 입에 가져가 망설임 없이 베어 물었다.

 

츄릅.

 

열매에서 시큼한 맛이 났다. 솔직히 맛있진 않다. 그래도 물이 차 있어 먹을 만했다. 이것 말고 딱히 먹을 수 있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열매를 몇 개를 더 먹었다. 

 

다시 주변을 바라보았다. 자잘한 나무들과 그 주변에 핀 꽃과 풀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이런 곳에 홀로 있는 거지?'

'왜 이런 곳에서 파묻혀 있었던 거야?'

다시 복잡한 생각이 떠오를 무렵,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치기가 무섭게 나무들이 마르기 시작했다.

푸른 나뭇잎은 바싹 말라 손을 대기만 해도 바스라졌고, 빨갛게 익은 열매는 순식간에 수분을 잃고 쪼그라들었다.

땅에 핀 꽃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들었고, 방금 전까지 푸른 나무가 갈색의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먹을 게 전부 사라졌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가지밖에 남지 않은 나무 뿐이었다.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는 땅이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한 나는, 결국 어딘가에서 주저앉았다.

배가 고파졌다. 하지만 배고픔을 달래 줄 열매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리에, 아니 온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그대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스르륵, 눈이 감긴다.

 

'이대로...끝이야?'

 

생각할 힘도 사라지면서,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비가 오고 있었다.

분명 말라 비틀어진 가지 뿐이었던 나무는, 비가 오자 거짓말처럼 다시 푸른 이파리와 빨간 열매를 맺었다.

 

비가 오는 동안은 먹고 살기 부족함이 없는 땅이 되었다.

하지만 비가 언제 그칠지 모른다. 비가 그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말라버릴 것이다. 나무도, 나무에 맺힌 열매도, 나도.

 

다시 정신을 잃기 싫었다. 계속해서 움직이고 싶었다. 계속해서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움직였다. 나무에 달려가 열매를 따 모으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동안은 몸이 가볍게 움직였다. 그래서 쉬지 않고 움직였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땅과 나무는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다행히도 내가 딴 열매는 마르지 않았다.

배가 고파 움직이기 힘들어질 때 열매를 하나씩 먹었다. 언제 또 비가 올 지 모른다. 그렇기에 열매를 무작정 먹을 수가 없다.

 

열매 덕분에 정신을 잃지 않고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열매가 다 떨어질 때까지 비는 오지 않았다. 

'...젠장.'

또 몸에 힘이 들어가지가 않는다. 눈이 감긴다.

 

나는 또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비가 오고 있었다...

아니, 비가 와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나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열매를 모아야 한다. 더 많이 모아야 한다.

더 빠르게 나무로 달려갔다. 쉬지도 않고 열매를 땄다.

지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열매를 많이 모으기 위함이 아니었다. 기분이 너무 상쾌했다.

 

비가 그쳤다.

이전보다 몇 배는 많은 열매를 모았다.

 

열매를 먹으며 버텼다. 이 많은 열매를 다 먹으려면 얼마나 지나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이렇게 오래 버틴다 한들, 결국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지?

 

 

 

하늘이 서른 번 정도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열매가 다 떨어졌다. 이번에도 못 버티는 건가?

 

제발 비가 내리기를 바라며 마지막 열매를 입에 가져다 대는 순간, 물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 이마를 때렸다.

 

'어?'

 

착각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다른 물방울이 각자 내 머리, 팔, 다리를 때리더니, 이윽고 눈앞의 땅과 나무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렸다.

 

처음으로 정신을 잃지 않은 채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걸 본 이후로 열매를 따는 것에 더욱 익숙해졌다. 비가 오고 나서 다음 비가 내리기까지 버텨도 먹지 않고 남는 열매가 생기기 시작했다. 비가 올 때마다 그 양이 늘어나더니, 결국 이전에 수확한 열매의 절반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비가 올 때 한번은 열매를 수확하지 않아도 버틸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말라버리는 이 황무지에서 나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서만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수확한 열매의 일부를 가지고 어디로든 떠났다. 이 곳의 환경과 다른 곳을 찾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너무 오래 떠나 있을 수는 없었다. 챙겨둔 열매가 다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기 전에는 다시 열매를 모아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몇 번을 떠났지만 다른 환경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수분을 잃고 갈라져버린 땅과 메마른 가지만을 남긴 나무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루는 모험을 나서고 열매가 얼마 남지 않아 돌아가려고 하려는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나무들의 가지에서 잎이 나고 열매가 맺기 시작했다. 촉촉해진 땅에서 순식간에 식물이 나고 꽃을 피웠다.

 

그리고 나의 몸에도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달리고 싶다.

어디로든 마음껏 시원하게 달리고 싶다.

보금자리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어디를 가도 환경이 똑같다면, 그곳에서 새로 열매를 모아 살아가도 상관없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달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무 사이를 재빠르게 지나가며, 차가운 공기와 빗방울을 가르며 기분 좋게 달렸다.

 

비가 내리는 동안은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았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열매를 따는 것도 잊은 채, 점점 빠르게 속도를 올리며 정신없이 달렸다.

 

정신을 차리고 멈추니 비가 그쳐 있었다. 

'얼마나 오래 달린 거지? 아차, 열매는?'

생각하기가 무섭게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 자리에 그대로 엎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정신을 잃었다.

신기하게도, 정신을 잃으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비를 맞으며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마자 반사적으로 나무에 달려가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이제는 열매 따는 일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다음 비가 오기 전까지 버틸 만큼만 열매를 모아두고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아 쉬었다.

 

눈앞에 조금 특이한 것이 보였다.

나무기둥이 누운 채로 층층이 쌓여 있다.  

신기하게 생긴 구조물에 나는 다가갔다. 문이 달려 있었다. 문을 밀어보니 안쪽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아늑한 공간이다. 하늘이 막혀 있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다. 제각각의 형태를 가진 가구들도 있다.

 

‘너무 살기 좋은 곳인데?’

이날부터 나는 이 곳을 나의 집으로 삼았다.                           

 

집은 열매를 보관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비와 바람도 피할 수 있었다. 

열매를 충분히 먹다 보면 잠이 몰려왔다. 이전에는 잠도 마음대로 잘 수가 없었다. 자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집 덕분에 마음 편히 잘 수가 있다.

 

얻은 건 집만이 아니었다. 집 안에서 신기한 도구를 하나 발견했다.

집 한 구석에 길고 날카로운 물체가 희미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손잡이가 달려 있다. 

‘칼?’

엄청 긴 칼과 칼집이 구석에 놓여있었다. 손을 가져가 대기만 해도 베여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칼이었다. 칼을 양손으로 들고 휘둘러보았다. 휘익 하고 공기를 가르며 나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이때부터 나는 이 칼을 내 무기로 삼았다. 어디를 가든 간에 꼭 칼을 챙기고 다녔다.

특히 열매를 수확할 때 정말 좋은 도구였다. 칼집에서 꺼낸 칼을 나무에 휘두르면 한 방에 나뭇가지가 이쁘게 잘려 나갔다. 가지에 달려있는 열매를 일일히 따지 않아도 되었다. 가지가 잘린 나무는 다음 비가 내리면 잘린 단면으로 순식간에 새 가지를 뻗었다. 

 

어느새 이 곳에서 사는 것에 완전히 적응되었다. 집에 모아둔 열매는 바닥날 일이 없었다. 비가 세 번 내리는 동안 열매를 모으지 않아도 될 정도로 풍족하다. 

 

허나 이내 무기력해졌다.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비가 내리는 동안 나무에 열린 열매를 모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할 게 없다고 집에서 잠을 자고 싶진 않았다.

이러면 굶주려서 정신을 잃는 거랑 뭐가 다른거지?

 

계속해서 여행을 떠났다.

이곳의 환경과 다른 곳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비가 내릴 때 한 방향으로 무작정 달려나갔다. 어디라도 가고 싶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열매도 잊고 무작정 달려나간 나는 결국 정신을 한 번 잃고 나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 지 완전히 까먹을 무렵, 드디어 새로운 일이 생겼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열매를 충분히 모으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때였다.

 

“부스럭”

‘어라?’

어디선가 풀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비가 내리며 난 소리라기에는 너무 큰데?

 

“부스럭”

같은 곳에서 또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비가 온 사이 자라난 풀더미가 보였다.

 

“부스럭”

풀더미가 크게 흔들렸다. 나는 직감했다…무언가가 있다.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 열매를 빼앗아가려고 하는 녀석인가? 위험한 녀석일지도 몰라.’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이곳에 온 건가? 근처에서 나 말고 다른 누구를 본 적이 없는데…’

‘녀석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먼저 달려들면 어떡하지? 으…’

 

잠깐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먼저 달려들자.’ 였다.

숨 죽인 채 서서히 몸을 낮추며 달리기 준비 자세를 갖춘 뒤, 그대로 수풀로 달려들었다.

 

“누구냐!”

“잠ㄲ…으아악!”

 

내가 달려들 때의 반동으로 나와 수풀 속 누군가는 서로 엉겨 붙어 땅바닥을 몇 바퀴 굴렀다.

 

“으아아 살려주시오! 소인이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요!”

“너 뭐야? 왜 여기서 숨어있었던 거야?”

“그냥 길 가다 비가 와서 쉬고 있었던 것뿐이오! 나쁜 의도는 전혀 없소!”

 

녀석을 위에서 덮치고 있던 나는 천천히 녀석을 살펴봤다.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에 양옆으로 길게 빠져나온 귀, 이마에 나 있는 신기하게 보이는 뿔, 화려해 보이는 옷과 모자를 쓰고 있었고 한 손에는 악기를 들고 있었다. 내가 들고 다니는 칼 같은 무기는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다.

 

“누…누구야?”

“소인, 에...에피카라 하오…그것보다, 이것 좀 놔줄 수 없소?”

 

다른 누군가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 이 열매! 달달한 물이 차 있어 꽤나 먹는 맛이 있다오!”

“먹을 만하다니 다행이네. 여기는 그 열매 말고는 먹을 게 하나도 없거든.”

 

에피카. 세상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음유시인.

이곳 저곳을 떠돌며 다양한 이야기를 남기는 그녀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며칠 동안 머물며 그녀는 나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이곳에서 계속 지내고 있던 것이오? 비가 오지 않으면 모든 게 말라버려 살기 힘들 것 같다만.”

“응, 그래서 비가 올 때 열매를 따서 모아놔야 해. 그렇지 않으면 굶주리다 결국 움직이지 못하게 되거든.”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고?! 이 얼마나 끔찍한 소리오!”

“그래도 비가 오는 순간만큼은 몸이 가벼워져.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아.”

“그…그럼 여기서 얼마 동안이나 지낸 것이오?”

“글쎄? 이젠 생각나지도 않는데…”

“히.히익…”

 

에피카가 놀랍다면서도 경외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에피카한테 찰싹 붙어있는 작은 녀석들이 보인다. 얘네들 이름이 에피콘…이라고 했나?

 

“그나저나 넌 어떻게 여기서 버텨온 거야? 배고플 텐데?”

“음…소인은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오.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소.”

“조금 부럽네… 여기 작은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에피콘 말이오? 그렇다오! 언제나 나를 따르는 귀여운 친구라오!”

“생긴 게 너무 특이해 보이는데, 얘네 정체가 뭐지?”

“…크흠, 소인이 재밌는 이야기가 떠올랐는데, 한번 들어보지 않겠소?”

 

갑자기 말을 돌리는 건 뭘까. 그래도 상관없나? 에피카와 이야기하는 건 너무 재미있었으니까.

 

“그렇게 갓 자란 수인은 홀로 사악한 뱀 수인을 물리쳤다오. 사악한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자는 자취를 감춘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소. 세계의 평화가 그렇게 찾아온 거지.”

 

에피카는 정말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다양한 인물들의 일대기, 서로 간의 갈등과 다툼, 영웅적인 서사 등등… 

혼자 살아가던 나에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여러가지 의미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곳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단 말이지?

 

“저기, 에피카.”

“음? 왜 그러시오?”

“나도 저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불가능이란 없소, 그대여! 내 삶의 주인공은 그 자신뿐,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지!”

“하지만, 여기는 그런 이야기 속 사건이 생기지가 않는걸. 평소에는 말라 비틀어진 나무와 갈라진 땅뿐이고, 비가 온다고 해도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는 게 고작이라고. 다른 곳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땅은 찾을 수가 없었단 말이야.”

 

에피카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생각에 잠겼다. 내 기분도 뭔가 묘했다. 남한테 나의 생각을 털어놓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에피카는 그새 표정을 피고 나한테 말했다.

 

“그대여, 너무 상심하지 마오! 그대는 지금까지 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이 아니오? 매번 같은 일상이더라도,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오! 생각해 보시오. 언젠가 갑자기 하늘에서 구원자가 내려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세상을 바른 길로 이끌어줄 수도 있는 법이지!”

 

에피카는 항상 긍정적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너무 낙관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그런 에피카의 행동이 싫지는 않았다. 

“말뿐이지만, 그래도 위로가 되네. 고마워, 에피카.”

 

 

 

에피카가 떠나는 날이 왔다.

에피카를 따라가면 이 황무지도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잠깐 해봤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난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에피카의 여정에 방해가 될 거 같아,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

“응? 뭔데?”

 

떠나기 직전 에피카가 문 앞에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름, 그대의 이름을 듣고 싶소! 이렇게 좋은 이를 만났는데 그냥 잊을 수는 없지!”

 

이름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네.

혼자서 힘들게 살아오는 동안 내 이름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남에게 내 이름을 알려줄 일도 없었다.

 

“이름…그런 거 없는데.”

“한번 생각해보시오! 소인, 에피카란 이름도 어느 새 머릿속에서 팟-하고 떠올랐다오! 그대의 과거를 한번 되짚어보시오! 소인, 그대 이름이 너무 듣고 싶소!”

 

에피카가 저렇게까지 부탁하는 걸 보니 정말로 내 이름을 찾아서 에피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도 좀처럼 생각나지가 않는걸. 나의 과거라…조금씩 옛날 생각을 해보면 될까?

 

매번 다른 땅을 찾아다니는 장면. 결국 다른 땅은 찾지 못했다.

비가 오는 동안 열매를 따는 장면. 이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신나서 무작정 달리는 장면. 정신 잃는 줄도 모르고 빗줄기를 가르며 시원하게 달렸지.

굶주려 정신을 잃기 직전의 장면. 하늘은 우중충하지만 수분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땅에 반쯤 파뭍혀 있는 장면. 이게 내 처음의 기억인데…

 

누군가에게 안겨 어디론가 움직이는 장면.

 

???

처음 느끼는 기억이다.

땅에 파묻히기 전의 기억…대체 뭐지?

갑자기 수많은 장면이 내 머릿속에 들어온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순간 서 있기가 힘들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 그대, 괜찮소?! 너무 무리하지 마시오! 소인 때문에…”

“…괜찮아, 그리고 고마워 에피카.”

 

다행히도 머리가 아픈건 금방 사라졌다. 갑자기 떠오른 장면들의 기억은 다 희미해졌지만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기억해 냈으니까. 몸을 일으키고 에피카를 바라보았다.

 



“울프루. 내 이름은 울프루야. 꼭 기억해 줘.”

“울프루라! 정말 고맙소! 그대 이름,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이 얼마나 지나도, 소인이 반드시 기억하겠소! 그대의 이야기, 절대 잊지 않겠소!”

 



그렇게 에피카는, 처음으로 나를 반겨준 존재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다시 말라버린 나무만이 있는 땅에서는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전과 다른 점은,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었다는 것이다.

 

‘매번 같은 일상이더라도,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오! 생각해 보시오. 언젠가 갑자기 하늘에서 구원자가 내려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세상을 바른 길로 이끌어줄 수도 있는 법이지!’

 

에피카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그래, 이렇게 척박한 땅에서도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그 희망은 생각보다 빠르게 눈앞에 나타났다.

 

에피카가 떠나간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 집 꼭대기로 올라갔다. 조금 높은 곳에 있으니 좀 더 멀리 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마른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너머에는 짙은 안개가 껴서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제각기에서 조그마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장면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반짝이는 것들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다 문득 특이한 빛을 보았다.

 

유독 더 밝은 빛이 보였다. 다른 빛들과 다르게 점점 커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진짜로 커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빛은 이쪽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어?

 

‘번쩍!’

 

다행히도 그 빛이 나한테 떨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내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안개 쪽으로 떨어졌다. 빛이 떨어진 궤적을 따라 거대한 빛 기둥을 만들며 안개를 갈랐다. 눈이 부셨다. 밤이었지만 잠시 동안 낮이 된 것마냥 환한 빛이었다.

 

빛 기둥이 사라지고, 시야를 가리던 진한 안개가 걷히며 그 사이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무가 보였다,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거대한 나무가, 밤이라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가지마다 빽빽하게 나 있는 잎 덩어리를 가진 나무가.

 

무슨 상황인지 생각할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눈앞에 새로운 환경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세월 동안 찾지 못한 환경이 눈 앞에 나타났는데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는 없지.

 

“저곳으로 갈 거야. 무슨 일이 생기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가고 말겠어.”

정신을 차린 이후로, 처음으로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