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폴빠, Aka, Loar

삽화: 팀디얍, 투플

기획 책임편집: Loar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나도 정확하게 모른다. 다행히 이번에는 도끼질로 잠을 깨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깬 나는 이전의 일이 생각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세상을 관찰했다. 


주변의 풍경은 전과 비슷했다. 내 본체를 중심으로 요정의 마을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안에서 잠든 요정들과 비슷하게 생긴 요정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생활했다. 다만 새로운 요정들에겐 제대로 된 종교가 있었다.


[세계수 교단]


지식이 전수되지 않았겠지만 새 요정들도 나를 세계수라 부르며 찬양했다. 하지만 맹목적이고 과격한 믿음을 보여주진 않았다. 내가 했던 말처럼 내 주변에 둘러앉아 기도를 한답시고 낮잠을 자는 게 다였다. 자다가 배고프면 밥을 먹으러 가고, 그러다가 또 자고, 먹었다. 내가 바란 대로다. 무의식중에 내 바람이 새 요정들에게 깃든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여왕이라는 직위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위상은 예전과 달랐다. 여왕은 그저 골치 아픈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동네북 같은 존재였다. 어떤 요정은 여왕에게 짬처리 시킨다는 표현을 썼다. 짬이 뭘까? 


나는 계속 깨어 있지 않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깨어 있는 동안 변화한 숲을 구경하고 질릴 때쯤 잠들었다. 그들에게 끼어드는 일 없이 그저 관찰했다. 처음에는 과거의 내 실수로 벌어진 일과 비슷한 일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 다행히도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소소한 다툼은 여전히 존재했다.


“너희 요정들은 항상 그렇게 드러난 것만 신경 쓰지! 사실 보이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몰라! 이 단세포들!”


“햇볕을 잘 받고 가지를 잘 뻗는 게 더 중요해! 너희 마녀들이야말로 매일 땅속에서만 지내니까 우중충한 거야!”


새 요정들은 시간이 지나며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낮에 태어난 요정들은 지상에 사는 걸 선호했고, 밤에 태어난 요정들은 빛이 들지 않는 지하에 사는 걸 선호했다.

잠들었다가 일어날수록 나뉘는 게 심해졌는데, 나중엔 아예 서로 다른 종족처럼 되었다. 지상에 사는 요정은 여전히 요정이었지만 지하에 사는 요정은 ‘마녀’라고 불렸다.


어느 순간부터 마녀는 완전히 요정과 떨어져 나가서 독립해버렸다. 마녀들은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가 내 뿌리 근처에 새 터전을 마련해 살았다. 요정과 마녀가 가끔 다투긴 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내버려 두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중재하고 해결했다. 그렇게 세상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빛이 나타났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빛의 기둥이었다. 에린이 나타났을 때와 똑같은 빛의 기둥 말이다. 자다가 깨길 반복하는 동안 차츰 식었던 마음에 급격하게 불길이 일었다. 

나는 황급히 빛의 기둥이 떨어진 곳을 찾았다.


그곳에 에린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종족이 있었다. 수백 명이나. 처음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귀가 뾰족하고 길었다. 


“와아아아아! 드디어 탈출했다!”


“고, 공기! 신선한 공기에요! 쿰쿰한 지하의 공기가 아니라 지상의 공기라고요오옷!”


“아하하핫! 나는 자유다!!! 이제 그 뭐 같은 휴대폰 안 만들어도 돼!!”


새로 나타난 종족은 사실 미친 게 아닐까? 샘솟아 오르던 호기심이 잠시 사라질 정도로 당황했다. 이대로 얘들 지켜봐도 괜찮겠지? 별문제 없을 거야. 아마.


“으갸갹! 여긴 무슨 촌동네야!? 왜 Why-fi가 안 잡혀? 내 하이패드가 먹통이라니!”


“화내는 박사님…… 멋있습니다.”


미친 꼴을 구경하고 있다가 한 가지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이 애들. 에린이랑 같은 말을 쓴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야? 설마 탈출에 실패한 건가? 또 우릴 잡으러 오는 건 아니겠지?”


“그럴 확률은 없습니다. 저희가 떠날 때 자폭장치를 발동시켰으니 절대 따라올 수 없을 겁니다.”


에린이 가르쳐준 그 언어가 분명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만 가르치고 글을 가르치진 않았다. 그래서 이 세상의 글자는 에린이 가르쳐준 글자와 달랐다. 즉, 저들은 에린과 같은 세상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 


내 신경은 온통 새로운 종족에게 쏠렸다. 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들을 계속 지켜보았다. 이 유사인간들은 자신을 ‘엘프’라고 불렀다. 바로 실체화해서 엘프들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과거의 실수가 생각나서 참았다. 


엘프들은 허름하고 꾀죄죄한 모습이었지만 신기한 장치들을 많이 들고 있었다. 어떤 장치는 단추만 누르면 알아서 땅을 팠고, 어떤 물건은 나무에 갖다 대기만 해도 나무가 잘렸다. 그들은 그런 장치를 이용해 놀라운 속도로 무언가를 만들어갔다. 그들이 금세 만들어낸 것은 마을이었다. 기존에 숲에 있던 다른 종족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숲의 다른 종족도 엘프와 만났다. 요정이 가장 먼저 만났는데 숲을 마구잡이로 개발하는 엘프를 경계했다. 숲을 아끼는 요정은 엘프와 빈번하게 분쟁을 일으켰다. 계속 분쟁이 발생하자 엘프가 먼저 접고 들어가서 요정과 협정을 맺기로 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실체화했다. 이걸 어떻게 안 보고 버텨? 물론 정체를 밝히지 않고 평범한 요정인 척을 했다. 요정들 틈에 끼어서 엘프와 요정의 협정을 구경했다.


“이게…… 뭐야?”


“저희가 더 이상 지상 영역을 개발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입니다, 요정족의 여왕.”


“계약서가 뭔데?”


“아, 죄송합니다. 아직 그럴 문명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나 보군요. 그냥 약속이 담긴 종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상한 건 없는지 읽어보고 마지막 장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참, 서명이 뭔지는 아시죠?”


“이, 이걸 읽으라고?”


요정 여왕은 한 뼘 정도 되는 두께의 종이 뭉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대충 훑어보다가 귀찮다는 듯이 마지막 장까지 넘기고 서명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엘프는 참 영악했다. 엘프 마을로 돌아간 엘프들이 떠드는 말을 들었다.


“역시 약관은 길게 만드는 게 최고야. 귀찮아서 대충 보고 서명해 버리잖아.”


“아무튼 받았으니 됐지. 그러면 이제 지하 개발을 속행하자구!”


협정 이후에 엘프들이 지상 개발을 멈추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하에서 영역을 몰래 개발하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마녀들과 마찰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아직은 마녀의 마을과 꽤 거리가 있었다.


엘프는 지상의 마을보다 지하의 시설을 더 거대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들의 기술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엘프들의 지하 시설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정확히는 엘프들이 내 시선을 차단한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황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관찰할 수 없으니 직접 실체화해서 일반 요정인 척 그들에게 접근했다.


“아, 그거? 마력중화 장치잖아. 요정들이 마법을 쓰는 거 보고 연구하다가 개발했어.”


“마력중화 장치요? 아, 이것도 좀 드시면서 일하세요.”


“어이구, 뭘 이런 걸 다. 일단 주니까 받기는 하지만 내가 원래 이런 엘프는 아니에요. 음, 요정이나 정령이 쓰는 마법이 다 마력을 기반으로 하더라고. 그래서 마력의 흐름이 통하지 못하도록 아예 차단해버린 거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내 힘으로 지하를 볼 수 없다는 건 알겠다. 대신 그렇게 해서까지 감추려고 하는 게 뭔지 궁금해졌다.


“지하에 뭐가 있냐고?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마 시장님이나 박사들 정도만 알걸?”


일반 엘프들에게 알아낸 정보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나는 방법을 바꿔서 요정의 사절인 척하며 자칭 ‘시장’이라는 엘프들의 수장에게 접근했다. 엘레나라는 이름의 엘프였다. 시장은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지만 그들의 기술력에 대해 칭찬을 하며 구슬리니 금방 알아서 밝혔다.


“우리는 그저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을 뿐이야. 지하에 차원 도약 장치를 건설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차원 도약?”


“뭐 말해도 이해 못 할걸? 대충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치라고만 알아 둬.”


“혹시 그럼 처음 여기에 올 때도 그걸로 온 거야?”


“당연하지! 그 빌어먹을 인간 놈들에게서 탈출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어!”


“인간?”


시장은 증오에 찬 눈길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한동안 인간에게 온갖 저주와 욕을 퍼붓던 시장은 겨우 진정한 후에 대답했다.


“그런 씹어먹어도 시원하지 않을 종족이 있어. 너는 말해줘도 이해 못 하겠지만.”


“혹시 그래서 인간들이 쓰는 언어로 말하는 거야?”


“그래! 수십 년을 갇혀 살면서 원래 쓰던 엘프어도 잊어먹었다고! 으으, 지독한 놈들…… 응?”


엘프 시장의 눈이 갑자기 동그랗게 변했다. 그리고는 날 이상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넌 내가 쓰는 말이 인간 언어인 건 어떻게 알았어?”


“어? 어, 어…….”


실수했다. 내 정체가 여기서 들키면 곤란한데.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 신났어.


“그, 그냥 지나가다가 다른 엘프들의 말을 엿들었어. 우, 우연히!”


“우연히?”


“앗! 나, 나도 참. 해야 할 일을 잊고 있었네! 급한 일인데! 그럼 이만!”


나는 황급히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엘프의 마을을 빠져나오자마자 실체화를 풀며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날 이후로 지하 시설은 물론 지상까지 내가 살펴볼 수 없게 되었다. 반응을 보니 내 정체를 들키진 않았더라도 시장의 의심을 산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있을 순 없었다. 엘프들과 인간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장치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만약 엘프들이 말하는 고향이 다른 세계라면…… 꼭 밝혀낼 필요가 있었다.


힘을 더 써서 억지로 마력 중화 장치를 뚫어볼까 고민했지만 포기했다. 바로 정보를 얻지 못하면 괜히 경계심만 더 키울 테니까 말이다. 대신 아주 조금씩 천천히 뿌리를 뻗어 지하 시설에 본체를 접근시켜보기로 했다. 본체로 접근한다면 마력을 막아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 매일매일 조금씩 뿌리를 뻗었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차가운 금속 벽에 닿는 느낌이 났다. 속으로 기뻐하며 외벽을 살짝 찌그러트려 틈을 만들고 마력을 그 안으로 흘려보냈다. 지하 시설은 예전보다 더 넓어졌다. 그런데 엘프들이 보이질 않았다. 단순히 자리를 비웠을 뿐인지 몰라도 일단 돌아다니기는 편하겠다. 나는 조심스레 안을 탐색했다.


길고 좁은 복도를 여럿 지나며 헤맨 끝에 엘프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그곳을 살펴보니 시설에서 보지 못했던 엘프들이 다 모여있는 듯했다. 그들 가운데 있는 건 전에 본 엘프 시장이었다. 시장은 이상하게 생긴 큰 구조물 옆에 서서 외쳤다.


“드디어 장치를 완성했다! 이 장치만 있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물론이고 전에 처참하게 실패했던 지구침공도 재개할 수 있어!”


지구라면…… 에린이 자신이 왔다고 말하던 곳이었다. 맙소사.


“처음 이 미개한 숲에 떨어졌을 때는 정말 절망뿐이었지! 여기에는 차원 이동 장치에 쓰일 특수화학연료 ‘Z68-A-레노’를 찾을 수 없는 환경이었으니까!”


그 말을 듣고 있는 엘프들 사이에서 Why-fi 없다고 더 절망한 건 아니냐는 등의 잡담이 들렸다. 시장은 의도적으로 그 소리를 무시하면서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다 옛날 일이야! 저 바보 같은 요정들이 기생충처럼 들러붙어 사는 세계수가 바로 연료로 대체 가능한 마력 원천이라는 분석이 끝났거든! 차원 이동 장치에 연결만 하면 돼!”


아니, 어떻게 알았지? 요정이나 정령이 쓰는 마법이 내 마력을 원천으로 삼은 건 그 아이들도 거의 모르는 일인데. 그걸 엘프들이 알아낼 수가 있나?


“선임 박사-시장님! 하지만 저희가 세계수에서 에너지를 빼 올 방법이 있습니까? 요정들이랑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협정도 맺었잖아요?”


“이 바보야! 협정이 무슨 상관이야? 연료 전선 박아버리고 차원을 이동하면 어차피 여기랑 빠이빠이라고!”


“아하!”


질문한 엘프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시장 옆에 있던 냉정한 인상의 엘프가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가 접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제히 엘프들의 시선이 그 엘프에게로 옮겨졌다. 예전에 내가 사절로 위장했을 때 시청 로비 데스크에서 다섯 번이나 퇴짜를 놓았던 시장 비서라는 엘프였다. 아마 아멜리아라고 했던가? 


“다들 이전에 일어난 가짜 요정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그 가짜 요정은 요정의 사절이라고 속여서 시장님에게 접근했었습니다. 저희는 그것의 정체를 밝혀냈습니다.”


응? 그거 나잖아? 아니 그래도 내 힘을 쓰진 않았으니까 내 정체까지는 모르겠…….


“그것은 바로 이 엘리아스 숲의 아바타였습니다.”


지 않네. 들켰어!!!


내 혼란만큼이나 엘프들 사이에서 혼란한 분위기가 퍼졌다. 자기들끼리 웅성대는 엘프들을 보며 아멜리아가 짧게 헛기침을 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크흠! 이 엘리아스는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 같은 겁니다. 자체적으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숲을 건드릴 때마다 반응하지요.”


“하하하! 그거 지구의 가이아 설 아닙니까? 그런 헛소리 같은 이론을 이 세상에 대입하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몇몇 엘프들은 시장 비서를 비웃었다. 재들이 부럽다. 나도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비웃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게도 아멜리아의 말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그녀는 비웃음에도 표정의 변화 없이 막대기를 들었다. 삑- 하는 소리가 나며 뒤편의 새하얀 벽면에 어떤 그림이 바로 나타났다.


“여기를 보아주십시오. 엘리아스의 지하 조감도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고요? 보기엔 그냥 무식하게 크기만 한 평범한 나무입니다만?”


“여기 보이십니까? 나무뿌리 하나가 기형적으로 늘어나서 자라 있습니다. 평범한 나무라면 이렇게 자라는 게 불가능하지요. 이 뿌리는 저희 비밀 연구시설을 향해 매일 조금씩 접근하고 있습니다.”


비웃던 엘프가 입을 다물었다. 입이 없는 나도 그 엘프와 심정이 비슷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다 지켜보고 있었어!? 원래는 내가 감시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감시당하고 있었다니? 심지어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뿌리가 길어지는 주기를 계산해볼 때 적어도 오늘이나 내일 정도에 이 연구시설에 닿을 겁니다. 그곳에 전선 플러그를 꽂으면 차원 이동 장치의 동력을 바로 코앞에서 얻게 되는 거죠. 괜히 케이블 연결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을 마친 아멜리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엘프들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받은 엘프들은 침묵을 지키면서도 기대에 차올랐다. 그때 한 엘프가 침묵을 깨며 질문했다. 조금 전에 Why-fi 어쩌고 하던 엘프였다.


“이거 시운전은 어떻게 합니까? 안정성은 확실히 검증되었나요?”


“그, 그거야 당연히 안전하지! 내가 만든 거니까!”


“선임박사…… 아니, 시장님이 만든 차원 이동 장치는 전부다 5분도 못 버티고 폭발했잖아요!”


그 말을 시작으로 다른 요정들도 불만을 표했다.


“그래요! 지난번에 여기로 넘어올 때 만들었던 이동장치도 사실 자폭장치가 아니라 설계미스로 터진 거라는 소문이 있어요!”


“아, 아니야!”


“사실을 말해 주십시오!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습니까? 네!?”


“달라!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엘레나는 엘프들의 딴지를 부정하며 고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곁에 있던 아멜리아가 냉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게 웃고 있는 느낌이다.


“야! 보여주면 될 거 아니야! 자, 봐봐! 이렇게 좌표 설정하고! 어? 레버 당기면! 어? 이 좌표에 잡힌 지구 인간이 여기 엘리아스 숲에 딱! 하고 떨어지게 되어있어! 알겠냐? 지금 바로 동력만 연결하면 보여줄 수 있다고! 그 세계수 가지인지 뿌리인지만 시설에 닿으면 시운전 하는 거 보여줄 수 있단 말이야아아앗!”


거의 폭주하듯이 발광하는 시장과 따지고 드는 엘프들, 그리고 이제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시장을 감상하는 비서. 재미난 꼴이지만 재미를 느낄 틈이 없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시장이 조작하고 있는 장치를 바라보았다. 저 장치에 내 마력을 흘려보내면 작동한다고?


에린. 에린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이 수없이 많다고 했으니까 에린을 바로 볼 순 없겠지만, 언젠가는 에린을 데려올 수도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이미 내 마력은 장치로 향하고 있었다. 나도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막연하게 포기하고만 있던 에린에 대한 미련이 한꺼번에 깨어나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구조물에 이어진 복잡한 고무 선들을 타고 내 마력이 장치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빛이 폭발했다.




[한 뿌리에서 나온 자매들]


요정과 마녀는 자매 종족입니다. 사실 알맹이 자체는 동일하다고 보시면 되는데, 태어나는 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전에 푼 설정 에피소드에서 요정들은 꽃이나 열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녀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세계수의 지상 부분에서 태어나는 요정과 달리 마녀들은 지하 부분, 그러니까 뿌리 부분에서 태어나는 종족입니다. 쉽게 말하면 마녀들은 ‘감자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엘리아스에서 처음에는 ‘요정’과 ‘마녀’ 같이 서로를 나누는 단어도 없었고, 그들 스스로도 서로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두 분파의 성향이 자신만의 자리를 잡아가면서, 크고 작은 분쟁이 많아졌습니다.


요정과 마녀 각각 태어나는 지점이 달라서 그런지, 가지에서 태어난 요정들은 화려한 바깥 세상에 정신이 팔려 당장 ‘코 앞의 현실’만 볼 줄 알았고, 뿌리에서 태어난 마녀들은 어두운 지하에서 ‘미래의 큰 그림’만 중시하며 현실을 무시하곤 했습니다.


보통 작은 나무 한 그루보다 숲 전체를 보라는 격언이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작은 디테일에 신경 써야하는 상황에서 그런 걸 놓치게 되면 그거 대로 문제거든요. 간단하게 정리하면 요정들은 짧은 시야를 가진 현실주의자들이고, 마녀들은 속 좁은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요정과 마녀들 간의 마찰이 심화되자 엘리아스의 세상도 힘을 잃어 갔습니다. 각 종족은 본래 엘리아스의 숲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는데, 요정과 마녀들이 서로 다투느라 의무에 소홀해졌거든요.


요정들과 마녀가 숲 관리에 소홀해진다는 건 세계수 자신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문제였고, 자신이 창조한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걸 더는 원하지 않았던 세계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했습니다.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당시 이제 막 세계수 교단에 발을 들였던, 신참내기 사제 네르의 일지를 통해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1일.


세계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세계수가 그 커다란 줄기를 숙여 날 바라보는 신기한 꿈을 꿨다.

곧장 세계수 교단 사제들에게 가서 꿈을 말해주었더니 내가 사제가 될 운명이라고 한다.

그동안 마땅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잘됐다 싶어 곧장 교단에 가입했다.

나보고 매일 이 일기를 쓰라고 하는데 이렇게 쓰면 되는 건가?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3일.


오늘도 자고 일어났더니 간밤의 꿈이 생생하다.

내 키만큼 큰, 커다란 나무통이 날 계속 쫓아다녔다. 어느새 내가 거기에 물을 붓고 있었는데, 아무리 물을 부어도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 마법 통인가해서 신기해하다가 밑을 봤더니, 통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열이 받아서 나무통을 마구 패면서 꿈에서 깼다. 이 꿈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지?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8일.


나무통에 대한 꿈을 며칠째 계속 꾼다.

주변의 동료 사제들은 그 정도로 반복되는 꿈이라면, 개꿈이 아니라 세계수가 내려준 신성한 계시라고 한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 욕심을 다스리라는 현명한 가르침을 내려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10일.


낮에 소란이 있었다. 지하 요정들이 올라와 지상 요정들에게 벌레로 만든 죽을 강제로 먹이다가 큰 싸움이 났다.

가까스로 말린 후에, 땅 아래의 요정들에게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다.

미래의 식량 부족 현상이 찾아오기 전에 충식을 공인해야 한다는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14일.


마을의 큰 길 한 복판에 집을 짓겠다며 난리를 친 요정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거기에 무슨 학교를 지으면 학생들을 모으기 쉬울 거라고 하면서 고집을 부렸는데, 아무리 봐도 다른 요정들이 통행로를 막는 민폐 짓이다.

지나가던 지하 요정들도 그걸 보고 정신나간 짓이라며 말리는 걸 도와줬는데, 거기에 집을 지으면 수맥… 같은 걸 막는다며 왕국의 미래가 어두워진다는… 조금 이유가 이상했다.

도와준 건 고맙긴 한데 지하 요정들은 역시 뭔가 이상하다.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15일.


오늘 원치 않는 꿈을 꿨다.

길을 걷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뜨고 보니 교단의 의무실이었다. 꿈에서 나무통이 두 개로 늘어나 있었다.

하나는 나무 가지에 달려있었고, 다른 하나는 반쯤 땅에 박혀 있었다. 두 나무통 어느 것도 가득 채울 수가 없어서 나는 땅에 주저앉아 울었다.

눈물 자국을 닦고서 바깥을 나섰더니, 지상 요정이건 지하 요정이건 엄청나게 많은 요정들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또 싸우는가 싶어 다가갔더니 모두가 신기하게 광장 한복판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땅에서 자라난 꽃 한 송이 안에 두 명의 요정이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순간에 나는 깨달았다. 내 꿈에 나타난 두 나무통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를.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18일.


교단에서는 이 두 요정이 신성한 계시의 증거라고 했다. 내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뿌리에서 자라난 꽃이 땅을 뚫고 지상에서 피워진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 신참이라도 그렇지… 이 둘을 돌보는 걸 왜 나 혼자 전담해야 하는 것이지? 계시고 뭐고 내일 때려치울 테다.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19일.


내가 그만두겠다고 말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잠이 든다.

그만둔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교단에 한 번 발을 들인 요정 중에 그만 둔 자가 없다는 역사가 어떻게 실현된 것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21일.


어느덧 내가 돌보던 ‘계시의 두 요정’들 중 하나가 제대로 말도 하고 혼자서 마법도 안정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다른 하나는 아직 내가 음식을 떠먹여줘야 할 정도로 성장이 느리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자매가 왜 이렇게 다른지…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22일.

다른 요정들처럼 계시의 두 요정들도 드디어 자신에게 이름을 기억해냈다.

똑똑한 녀석은 ‘벨리타’, 좀… 성장이 느린 녀석은 ‘에르핀’이라고 한다.

벨리타는 자꾸 에르핀에게 칡과 고수 풀을 섞어 끓인 괴식 수프를 먹이려고 한다.

에르핀이 아직 말을 제대로 떼지 못해서 그런지, 싫다고도 못하고 억지로 먹는 듯하다.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31일.


나는 한동안 벨리타와 에르핀을 데리고 지상과 지하 요정들의 마을을 보여주고 있다. 갓 태어난 요정들이 요정 사회에 익숙해지는 과정 중에 하나다.

여기저기서 요정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벨리타나 에르핀이 봐야하는 것이 조금 착잡했다.

지하 요정 마을에서 벨리타가 에르핀에게 벌레를 주워 먹이려고 했을 때 처음으로 에르핀이 비명을 지르며 처음으로 ‘싫어어어!’라는 말을 뗐다. 나는 그 순간에 벨리타가 지하 요정들과 어떤 연관이 있음을 깨달았다.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37일.


벨리타가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광장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광장에 내가 요정들을 모아주었더니, 벨리타는 요정들이 서로 이렇게 싸울 바엔 서로의 영역을 나누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하에서 태어난 요정은 지하에서, 지상에서 태어난 요정들은 지상에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다시 우리의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이다. 몇몇 요정들이 따지고 들었는데, 벨리타는 세계수의 시든 나뭇잎을 가리켰다.

아주 작은 일부분이었지만 세계수가 시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부끄러워져 할 말을 잃었다.



[네르의 사제 수양록] – 입교 후, 45일.


벨리타는 스스로를 ‘마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따라 지하로 들어갈 요정들에게도 자신들을 마녀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지하 요정들은 이 명칭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벨리타가 그동안 워낙 비범한 행보를 많이 보여주어서, 지상 요정들도 지하로 따라가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았다.

에르핀은 내 손을 꼭 잡고 지하로 내려가는 벨리타를 말없이 배웅해줬다.

에르핀은 자신이 아직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걸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벨리타가 손을 흔들면서 인사하자, 에르핀이 머뭇거리며 손을 흔들어 응답했다. 에르핀은 나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벨리타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지, 아니면 더 이상 괴식을 강제로 먹지 않아도 돼서 행복해하는 표정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제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한 번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