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폴빠, Aka, Loar

삽화: 팀디얍, 투플

기획 책임편집: Loar






나는 세 번째 일기장을 찾은 후로 더 이상 일기장에 연연하지 않았다. 다른 책들도 낡아서 헤져있을 게 뻔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책이 그런 상태가 되었느냐다. 엘프의 도시를 빠져나올 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엘프가 힘을 빼앗아서라고 생각하기엔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였고, 내 힘이 약해졌다기엔 당장 나에게 느껴지는 게 없었다.


혹시 내가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게 아닐까? 잊어버리면 안 되는 중요한 무언가…… 응?

코코아?


세상에. 내가 코코아를 잊고 있었다니! 그 귀여운 손님을 따라서 엘프 마을까지 갔는데 어떻게 잊고 있을 수가 있지? 내가 너무 내 일에 정신이 팔렸나 봐. 아직 괜찮겠지? 설마 다치진 않았을 거야.


당황한 나는 온 정신을 집중시켜서 숲의 모든 존재들을 느꼈다. 숲의 모든 생명체가 하나하나 감각에 걸렸다.


코코아가 갈 수 없을 하늘부터 시작해서 땅속까지 모든 존재를 살폈다. 이렇게 찾고도 없다면 엘프의 마을에 아직 있다는 뜻일 거다. 산 위에서 정령과 요정이 다투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땅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게 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순간 관심이 생겼지만 코코아의 똘망똘망한 눈을 생각하며 집중했다.


짤막한 네 다리로 뒤뚱뒤뚱 뛰어다니는 발소리. 찾았다. 장소는 지하? 아주 넓은데 거대한 동굴이거나 지하공동 같았다. 주변으로 수많은 구조물이 느껴진다. 동시에 많은 생명체도…… 도대체 저기가 어디지? 


감각을 집중하다가 매우 익숙한 걸 발견했다. 아주 거대한 나무의 뿌리. 내 본체의 뿌리였다. 그렇다면 마녀의 마을이겠구나.


요정과 갈라져 땅속에서 자신들만의 종족을 이룬 마녀. 마녀들은 내 뿌리에 몰려 살며 이따금 달달한 양분을 뿌려주기도 하고 심심하지 않게 해줬다. 가끔씩 지상의 아이들(주로 요정)을 짓궂게 골려줘서 시끄럽긴 해도 자기들만의 선을 지키며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요정에게서 갈라져 나와서인지 마녀에게도 여왕이 존재했다. 마녀 여왕은 다소 권위가 낮은 요정 여왕과 다르게 모든 마녀를 휘어잡았다. 마녀 여왕의 한마디가 곧 마녀 전체의 법이 되었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녀 여왕이 실종된 상태라, 마녀 마을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구심점이 없으니 서로 날뛰었고 새로운 마녀 여왕이 되겠다고 매일 같이 싸워댔다.


내가 마녀 마을을 찾은 날에도 지하 공동이 무너질 정도로 격렬한 마법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코코아를 찾았다. 코코아는 주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산책하듯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있었어, 코코아?”


나는 코코아 앞에 실체화하며 나타났다. 코코아가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헥헥거리며 내민 혀가 두어 번 코를 핥더니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이곳은 위험하니까 나랑 같이 가자.”


끼잉-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니까 그러네.”


이 녀석이 내 말에 반응하긴 하는데 알아듣진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코코아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서 배를 깐 채 누워 있었다.


“뭐? 긁어달라고?”


나는 흔들리는 지하공동을 바라보다가 코코아 옆에 앉았다. 정말 무너질 거 같으면 그때 힘을 쓰면 된다. 코코아의 배를 손가락을 세워 살짝 긁어주었다. 부드러운 털 때문에 긁어주는 내 기분까지 좋아졌다. 


“어디를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온 거니? 분명히 엘프 마을에서 헤어졌는데 마녀 마을이라니…….”


잠시 긁어주던 손이 멈추자 코코아가 다시 일어났다. 녀석은 뱅글뱅글 내 주위를 돌면서 뭔가 표현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답답했는지 다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렇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피식 웃으면서 뒤뚱거리는 귀여운 엉덩이를 따라 걸었다. 코코아는 어떤 집 앞에서 멈춰 서더니 문을 앞발로 벅벅 긁어댔다. 그러자 한 마녀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아~ 바쁜데 누구야!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바쁜지 안 바쁜지 어떻게 알지는 모르겠지만, 문을 연 마녀는 앞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다가 고개를 내려 코코아를 발견했다.


“뭐야, 넌? 누가 보냈어? 어라? 잠깐…… 설마 너, 그 녀석이야?”


마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헥헥대는 코코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작은 개…… 하얀 솜뭉치…… 맞아! 너 그 녀석이 찾아다니는…… 코코지?”


코코아는 코코라는 말에 신나게 반응했다. 나는 마녀를 향해 안아달라는 듯이 점프하면서 달려드는 코코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코코’가 ‘코코아’의 원래 이름인가? 내가 코코아라고 불렀을 때 좋아했던 이유도 소리가 비슷해서였고…… 그 인간이 찾던 것도 ‘코코’였지. 마녀는 코코를 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후훗! 어쩌면 널 이용해 시간을 벌 수도 있겠네. 날 따라와, 코코.”


마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코코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음흉하게 웃는 게 수상쩍어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마녀는 코코를 자기 집 한가운데로 따라오게 하더니 잽싸게 벽 쪽으로 붙었다.


“후후훗! 이걸로 그 자식이 널 찾는데 일주일은 넘게 걸릴 거야!”


갑자기 코코가 서 있던 바닥이 갈라지며 큰 구멍이 생겼다. 코코가 허우적대며 밑으로 떨어지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반사적으로 내 힘을 썼다. 다행히 코코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마법? 설마 마법을 쓸 줄 알아? 말도 못 하는 게 어떻게? 엘프들이 분명 마법이 없는 세상에서 데려왔다고 했는데……?”


마녀는 많은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마법이 없는 세상이란 아마도 지구를 말하는 걸 거다. 엘프까지 언급했으니 확실하다. 복잡하게 꼬인 매듭이 하나 풀어졌다. 


코코아와 인간은 에린과 같은 곳에서 왔다.


마녀가 누군지도 알겠다. 항상 마녀 여왕의 옆에 붙어있던 마녀들의 2인자, 프리클이라는 이름이었다. 프리클은 유심히 공중에 떠 있는 코코를 보더니 말했다.


“잠깐. 너 혼자가 아니야? 이건 네 마력이 아닌 거 같은데?”


응?


“이 마법…… 이 원시적인 느낌…… 이 압도적인 기운은……?”


원시적……이라고?


살짝 울컥하려는 순간에 프리클이 벽면에서 떨어지며 소리쳤다.


“세계수다! 세계수야!!”


프리클은 뭐가 그렇게 무서웠는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집을 뛰쳐나갔다. 저기,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좀 충격인데……. 내가 무섭다는 건 둘째치고 날 알아보았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프리클은 내 존재를 알고 있다. 엘프들뿐만 아니라 프리클마저 날 눈치챈 것이다. 난 공중에 뜬 코코를 내려놓으며 프리클의 집을 뒤졌다. 집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가 가득했는데 엘리아스 숲을 정복하기 위한 계획이 적혀 있었다.


코코도 나처럼 집을 뒤졌다. 그리고 구석에 쌓여 있는 통조림을 물고서 나에게 따달라는 듯이 다가왔다. 수인 마을에서 본 그 통조림이었다. 딱!


코코에게 사료 통조림을 까주면서 다른 문서도 살펴보았다. 그중에선 세계수인 나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엘프가 내 힘을 동력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도와준 게 바로 마녀였던 걸 알았다. 프리클만이 아니라 마녀들은 오래전부터 나를 연구하고 있었다.


마법의 근원을 탐구하다가 나에게까지 이른 것이다. 내가 만든 아이들이 이렇게 깊이 파고들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걸 대견하다고 해야 할지 괘씸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대견한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내용대로라면 몸을 숨기고 다닌 게 아무런 소용 없는 짓이었단 의미다. 사실상 정체를 들킨 셈이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하아……. 어떻게 할까? 코코아. 아니 코코야.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응?”


손에 든 서류들을 숨긴 뒤 사료를 먹는 코코의 등을 쓰다듬었다. 코코는 사료를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서 날 똘망똘망한 눈으로 올려보았다. 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등만 쓰다듬자 코코는 다시 먹는 데 집중했다. 프리클의 집에서 사료 통조림 몇 개를 챙겨서 나왔다. 코코는 이미 밖으로 뛰쳐나와 걷고 있었다.


지하공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섰다가 방방 뛰어다니는 코코를 보고 좀 더 뒤쪽에 물러나서 앉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행동을 결정할 시간이었다.


“그냥 잘까?”


앙!


짧은 한 번의 울음소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내가 뭐 얘한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대답을 들은 느낌이었다.


“내 존재가 잊혀질 때까지 다시 자는 건 좀 그렇지? 이미 세계수가 밝혀진 마당에 내가 잔다고 해서 아이들이 멈출 것도 아니고. 언젠가 진실에 도달할 거야.”


코코는 내 말을 듣는둥 마는둥 절벽 아래의 마녀 마을을 구경했다. 펑펑 소리가 터지며 화려한 불꽃이 막 튀는 게 마치 불꽃놀이 같았다. 안에서는 마법으로 열심히 싸우고 있는 모습이겠지만 멀리서 보니 장관이다. 에린이 그랬던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코코와 나는 한참 동안 마녀들의 불꽃놀이를 지켜보며 답 없는 문답을 이어갔다.


“내가 그냥 정체를 밝히는 게 옳은 일일까?”


코코가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왔다. 배고프니 통조림을 따달라는 뜻일까?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는지. 나는 마지막 남은 사료 통조림을 까서 코코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코코는 사료를 먹지 않았다. 대신 앉아있는 내 다리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그대로 배를 드러내고 벌렁 누워서 잠들었다.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


“나도 너처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될까?”


잠든 짐승에게선 평소처럼 짖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의미를 발견한 건, 원래 들었던 소리도 내가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해서 들었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어울리며 살고 싶었다. 에린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숨기는 것 없이…… 라고 하기엔 내가 좀 숨긴 게 있었지. 찔리네. 아무튼 그런 관계. 날 우러러보면서 찬양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잘못했을 땐 언제든 돌멩이를 날려서라도 나한테 뭐라고 해줄 수 있는 관계.

나는 친구를 원한다.


“하지만 그랬다가 예전처럼 되면…… 그러면 어쩌지?”


반드시 반복되리란 법은 없었다. 인간은 실패에서 성공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다고 했다. 나는 인간인 에린의 친구고, 그런 에린에게서 배웠다. 그렇다면 나도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든 코코를 천천히 세심하게 쓰다듬었다.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호흡에 맞춰 천천히…….


코코가 깨어날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잠을 푹 잔 코코가 몸을 털며 일어나자 나도 몸을 일으켰다. 마침 마녀의 마을에서 폭발음과 번쩍거리는 불빛도 잦아들었다. 분쟁이 끝난 모양이다. 이제 이곳도 나도 정리되었으니 그만 지상으로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코코가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코코가 향한 곳은 마녀들의 궁전이었다. 문이 부서지고 아무도 없어서 과연 궁전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심되었지만 말이다. 코코는 궁전 안으로 뛰쳐들어가더니 가장 안쪽 복도에 굳게 잠겨있는 문까지 이르렀다. 그 앞에서 사료창고나 프리클의 집을 발견했을 때처럼 문을 벅벅 긁었다. 안에 먹을 게 있는 모양이다.


“풉! 푸후훗! 넌 참 여전하구나, 코코.”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웃은 다음 나는 문을 열어주려고 했다. 그때 복도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코코?”


내 목소리는 저렇게 얇지 않았다. 요정의 목소리처럼 경박하지 않았고 마녀처럼 의뭉스럽지도 않았다. 수인처럼 단순하지 않고 정령처럼 원초적이지 않으며 유령처럼 장난기가 감돌지도 않았다. 그저 친구에게 건네듯, 가볍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코코! 그동안 어디 있었어! 얼마나 찾았다구! 코코!!”


엘프 도시에서 마주쳤던 그 인간이었다. 인간은 코코를 발견하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와 껴안았다. 하지만 코코는 뭔가 답답한지 인간의 품에서 발버둥을 치며 빠져나왔다.


“왜 그래, 코코? 이제 나랑 집으로 가자! 여기 일은 다 끝났어.”


집으로 간다고? 어떻게?


놀라서 인간과 코코를 보고 있는데 다른 존재들이 뒤따라 나타났다. 요정, 수인, 엘프, 정령, 유령에 마녀들. 그리고 머리에 뿔이 달린 처음 보는 종족도 함께였다. 도대체 저 인간은 무슨 일을 하고 다닌 거야? 내가 놀라든 말든 코코는 그저 문을 벅벅 긁어대기만 했다. 인간은 그런 코코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지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문 뒤에 먹을 게 있어? 열어줄까?”


인간이 문을 열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마녀들이 깜짝 놀라며 말렸다.


“안돼! 그 문을 열면 안 돼!”


“왜?”


“여왕님이 절대로 열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이 방에 뭐가 있어서?”


“숲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그런 사악한 존재가 있다고 했어!”


난 그런 거 만든 적 없는데? 하긴 잠든 사이에 만들었으니까 뭘 만든 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코코를 찾을 때 궁전까지 뒤져봐도 마녀 하나 말고는 별달리 느껴진 게 없었단 말이야. 도대체 뭐가 있단 거야?


“아, 무슨 헛소리야! 그냥 열어봐.”


에르핀이 말리는 마녀들을 밀쳐내며 나섰다. 요정의 여왕은 마녀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문을 마법으로 열어제꼈다. 열린 문 안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 보였다. 그리고 코코는 내가 보아왔던 그 여느 때처럼 용맹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앙! 앙!


“코코! 같이 가!”


인간이 코코를 따라 뒤따라가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끄르르르륵-!


들어가려던 인간이 멈칫하면서 굳었고 주변 모두가 얼어붙었다. 나도 솔직히 조금은 긴장했다. 


“끄르륵…….”


길쭉한 손톱에 깡마른 손이 바닥을 긁으며 나타났다. 마녀들이 큰일 났다며 날뛰기 시작했다. 문을 연 에르핀도 겁을 먹었는지 딸꾹질을 해댔다. 으슥한 어둠을 가르며 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 사라따아……. 살았어어어!!!”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몇 달 동안 방에 갇혀 폐인이 된 마녀들의 여왕 벨리타였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사실 이 방은 벨리타의 비밀 간식 창고였고, 다른 마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거짓말을 한 거라고 한다. 코코는 나와 인간이 짐작했던 대로 먹거리가 있는 것을 찾았을 뿐이고. 나는 계속 모습을 감춘 채로 상황이 정리되는 걸 기다렸다가 인간을 따라갔다. 온갖 숲의 주민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그동안의 일을 떠들어댔다. 


긴 이야기였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인간은 엘프의 차원 이동 장치를 작동시켰을 때 요정의 숲에 나타났고, 같이 떨어진 코코를 찾으며 여행하는 동안 많은 사건을 해결했다.


그리고 이젠 잃어버렸던 코코를 찾고 숲의 문제도 해결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요정과 마녀는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도 인간을 돕는다고 나섰다. 그런데 정작 인간을 불러온 엘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또 숨기고 있는 걸까.


하지만 속에 생각을 감추고 있는 건 엘프만이 아니겠지. 나는 요정들처럼 인간을 도와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과 엘프처럼 막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에린 이후로 수천 년 만에 새로운 인간을 만났다. 귀여운 코코도 있고, 이 아이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겨우 절벽 위에서 정리했던 생각이 인간에 의해서 흐트러졌다. 하지만 그 문제와 이 문제는 엄밀히 말해 별개다.


나는 여러 종족과 어울리며 웃고 떠드는 인간을 보았다. 내 감정이 뚜렷해졌다. 나는 오래전부터 저 인간처럼 되고 싶었다. 내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함께하고 싶다. 결심을 했으니 이제는 용기를 낼 차례다.


앙!


“으앗! 죄송합니다! 코코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막 달라붙어요.”


인간은 코코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나는 실체화해서 인간의 앞에 자연스럽게 나타났는데, 내가 보이자마자 바로 코코가 날 알아보고 달려든 것이다.


“괜찮다. 이미 친해질 대로 친해진 녀석이니까.”


복슬복슬한 코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웃어주었다.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인간이 되물었다.


“아, 혹시 코코가 사라졌을 때 돌봐주신 분인가요?”


“약간은. 사료 통조림 따개로 잘 부려 먹더구나.”


“으아아…… 코코, 아무한테나 그러면 안된다고 했지? 우리 코코가 많이 귀찮게 굴었죠? 죄송합니다.”


“하는 짓이 귀여워 놀아주는 게 즐거웠다. 그 문제는 괜찮으니 더 사과하지 말거라. 오히려 사과는 내가 해야겠지.”


“네?”


코코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인간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에린과 서로 마주 보았을 때를 추억하며. 이번에도 그때와 같기를.


“이 세상에 코코와 널 불러온 건 나다.”


“네에? 뭐, 뭐라고요?”


“조금은 긴 이야기가 될 테니 편히 앉아라.”


나는 인간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정체까지 포함된 이야기였다. 물론 몇 가지 사실은 빼놓았다. 아직은 밝히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다. 이를테면 에린에 관한 이야기나 엘프의 차원이동장치에 대해서다. 나는 내 힘의 알 수 없는 작용으로 우연히 인간과 코코가 이 숲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중요한 정보를 뺐을 뿐,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인간은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간혹 짧은 감탄사만 할 뿐 어떤 질문도 없이 이야기에 집중했다.


“당장은 널 돌려보내 줄 수 없다.”


사실이었다. 방법은 알지만 당장은 무리였다. 나는 뒤에 다른 설명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뭔가 타이밍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뒀다.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기장 맨 마지막을 적을 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더라?


역시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그 말을 생략했다. 에린을 집에 돌려보내 준 이후의 기억은 끔찍했다. 친구를 위해서 한 일이었지만 나에겐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진실을 모르는 인간은 내 설명을 듣더니 쉽게 납득하는 듯 보였다.


“내가…… 언젠가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마.”


언젠가는.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인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꼬리를 늘였다. 나는 긴장해서 인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정말 요정들에게 한 번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나요?”


“하……! 하하! 없지. 없었어. 뭐 지금처럼 보통 요정인 척하고는 몇 번 있었지만.”


“그럼 지금 저랑 같이 가요! 다들 한창 신나게 놀고 있을 텐데 같이 가서 놀아요. 다들 좋아할 거예요!”


“그, 그럴까?”


인간은 내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았다. 비록 에린과 모습은 달랐지만 에린이 많이 겹쳐 보였다. 같은 인간이어서 그런지 자세히 보면 조금 닮기도 했고…….


“그런데, 음……. 뭐라고 부르죠? 신님? 세계수님? 아니면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되나요?”


“나, 나는…… 엘드르. 엘드르라고 부르면 된다. 넌?”


“저는 ○○라고 해요!”


○○. 내 숲에 찾아온 두 번째 손님.

그녀의 손에 이끌려서 나는 숲의 주민들에게 소개되었다. 나의 존재를 눈치챈 아이들도 있었고 처음 알게 된 아이들도 있었지만, 다들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엘프들의 시선이 조금 따갑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더 이상 모습을 숨기지 않고도 이들 속에 살아갈 수 있으니까. 친구와 놀고 있을 어느 호박밭의 유령처럼.





더 트릭컬 2장 끝.








비가 내렸다.


외롭게 홀로 죽어가던 땅이 있었다. 그 땅은 항상 메말라 있었으며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잔뜩 드리워 햇볕조차 목말라했다. 가뭄에 갈라져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에 비가 내렸다. 어쩌다 이렇게 비가 올 때면 땅에 잠시나마 생기가 돌았다. 


마법처럼 꽃과 나무가 순식간에 자라나 열매를 맺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겨우 피어난 생명은 어떻게든 다음을 남기려 애썼다. 황무지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처럼 비가 내릴 때만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죽어버린 땅에서 먹을 것이라고는 비 내릴 때 맺힌 열매밖에 없었다.


생을 이어가기 위해 식물은 열매를 맺었고, 생을 이어가기 위해 주민들은 열매를 수확했다. 주민들은 하나라도 더 많은 열매를 따기 위해 빗속을 뛰어다녔다. 다음 비가 언제 내릴지 모르고 또 얼마나 굶을지 알 수 없었다. 주민들은 그 생김새만큼이나 아귀처럼 열매를 탐했다. 그러다 한 주민이 손을 멈췄다. 덩달아 다른 주민도 발을 멈췄다.


그렇게 점점 멈춰서는 이들이 많아지더니 결국 모두 멈춰버렸다. 비가 내리는 동안 하나라도 더 열매를 따야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내린 비로 꽃이 활짝 피었다. 그 꽃밭에 누군가가 잠든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황무지의 주민들은 처음 보는 존재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했다. 아주 오래전 잃어버렸던 그들의 옛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식량을 수확할 생각도 잊은 채 누군가를 둘러싸고 지켜보았다. 아득할 정도로 긴 시간을 이 죽은 땅에서 보내며 잊고 있었던 추억이 고개를 내밀었다. 


한 명이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전염되기 쉬웠다. 꽃밭에 눈물과 흐느낌이 흐드러지도록 피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잠든 누군가를 깨웠다.


“아이씨…… 자는데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질질 짜는 거야?”


눈을 뜬 누군가는 몸을 일으키며 짜증 난 목소리를 냈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주민들은 멀리 떨어지며 몸을 숨겼다.


“어?”


그녀는 주변을 보고 당황했는지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사방에 피어난 꽃과 내리는 비, 경계하는 수많은 시선이 그녀를 반겼다. 몸을 숨긴 주민 중 몇몇은 낯선 이가 자신들과 똑같은 말을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주민 하나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넌 누구야……?”





더 트릭컬 3장 시작.








[엘프 설정 개괄]


엘프는 아마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판타지 종족 중 하나입니다. 엘프와 함께 떠올리는 드워프도 연상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인지도 면에서 엘프는 급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판타지 장르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종족인만큼 엘프는 고귀하고 명예로운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 일부러 변형시킨 모습으로도 많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워해머40K’ 프랜차이즈의 ‘엘다’를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판타지 장르 엘프 종족은 최근에 이르러서는 이런 식으로 얍삽하고 간사한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저도 이 모습에 많이 동의하는 편입니다. 국내에서는 흔히 이런 형태의 엘프를 ‘깐프’라고 하죠.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엘프들을 묘사할 때 국룰처럼 유지하는 조건이 ‘인간보다 장수하고, 아름답고, 똑똑하며 개체 수가 적다’ 라는 것인데, 이런 요소를 가지고 그냥 세상의 수호자를 자처할 만큼 자기희생 정신이 투철하고 성격적으로도 완벽하면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다 가질 거 가지고 남보다 우위에 있는데 그걸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악용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건… 사뭇 부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물론 이는 작가의 개인적인 주관이므로 가벼이 흘려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튼, 트릭컬에서도 이런 변형된 엘프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했습니다. 제가 처음 스토리 작업을 맡았을 당시부터 이미 트릭컬의 엘프들은 하이 테크놀로지 종족으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깐프적인’ 이미지를 적용시키는 게 굉장히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앞서 언급드린 하이-테크 덕에 외계인이라는 설정도 자연스럽게 덧붙이게 되었는데, 엘리아스의 다른 종족들에 비해서 너무 독보적인 수준이다 보니 거리감이 느껴지도록 하자는 의도에서 추가한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외계인 침략자’의 이미지도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트릭컬의 엘프들은 고향에서 떠나 길을 잃고 엘리아스에 불시착한 종족이라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 엄연히 근본적으로는 남의 행성의 땅과 자원을 점령하러 다니는 전투 종족들입니다. 엘프들 하나 하나가 상비군이고 예비군이거든요.



[정체된 사회]






엘리아스에 표류된 엘프들의 시간은 멈춰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자신들이 고향 행성에서 떠났을 당시의 기술과 인력들이 그대로 지금까지 유지되어 있고, 다행히 퇴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발전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엘프들이 엘리아스에 세운 도시 ‘모나티엄’에서, 스스로 리더를 자처한 엘레나는 어떻게든 나름 성과를 내보려고 하지만 매번 실패를 거듭하는데, 엘레나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얼빠진 성격 영향도 있기는 하지만 어떠한 신비로운 존재가 일부러 방해하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엘리아스의 신격인 세계수가 앞으로 나아가길 내심 두려워하는 것은 엘프들이 엘리아스에 불시착한 이후 그들을 관찰하던 세계수가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엘프들은 이런 내막을 알 수는 없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가용이나 반물질 호버-보드가 왜 만들어지지 않는지 답답해하면서 방구석 오락을 즐기며 시간을 죽이고 있습니다.



[반쯤 자유 전체주의]


엘리아스의 엘프들은 리더인 엘레나 아래에서 하나로 규합된 사회로 보이지만 엘레나의 리더십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엘레나의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만은 아닌데, 엘프들은 모성에서 벗어나 긴 시간을 표류하면서 ‘생각의 자유로움’이 어떤 것인지 생각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런 과정은 리더인 엘레나도 똑같이 경험했기 때문에 모성에서 겪었던 철권 통치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거든요.






항상 기계의 부속품처럼 살아오다가 직접 자신들이 방침과 정책을 결정해야하는 상황을 마주하다 보니 모성의 방식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데, 엘프들은 비록 기술적인 발전은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정신적으로는 많은 성장을 이뤄낸 상태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영유했던 엘리아스의 토착민들에 비하면 한참 멀기는 했지만, 토착민들을 동일 선상에서 보며 협정을 맺고 대화를 해 나가는 건 모성의 엘프들의 태도와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 물론 협정은 허울뿐이고 뒤에서 몰래 자기가 할 거 다 하는 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시도한 게 어디겠습니까만...


[엘프 설정에 대한 마무리]


비단 트릭컬의 엘프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닌데, 가끔 판타지 설정이나 이야기들을 짜면서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마법과 기술(테크놀로지)이 공존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가 바로 그것인데, 애초에 마법이라는 게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니 참 무의미 하면서도 재미있는 생각입니다. 마법이 실재한다면 현실의 과학 법칙들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과학적으로 마법을 설명하는 게 가능한 것인지, 실 생활에서 어떤 형태로 마법이 사용될 지, 한계는 무엇인지…


트릭컬에서는 일단 기술이 발달한 엘프들이 반쯤 고립된 사회로 설정되었으니 당장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지만, 어찌됐든 마법과 기술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보니 언젠가는 둘이 엮여야 하는 시점이 오긴 할 겁니다. 그 시점이 언제일까요? 그 시점이 오게 될까요? 지금은 풀리지 않은 저만의 숙제로 남겨두겠습니다.







※ 카페에 게재되는 소설 공개 및 설정은 금주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종료됩니다.

지금까지 소설 더 트릭컬과 폴빠님의 설정 풀이를 감상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리며, 추후 공개될 게임과 도서에서 전개되는 트릭컬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