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3. 버려진 땅



3. 광신도

 

식량을 구해볼 목적으로 향한 마을에서 입만 더 늘렸다. 레인은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습격자들을 풀어주고 주민을 데려오게 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원래 주민들이 땄던 열매를 나눠줬다. 당연히 주민들이 거부했지만, 언덕을 한 번 더 파괴해 주니까 바로 조용해졌다.


“난 황무지를 통일할 거야.”


난데없는 황무지 제패 선언에 한데 모인 주민들이 입을 다물었다.


“흩어진 주민들 다 모을 거고, 모자란 식량도 충당할 방법을 찾을 거고, 이 황무지를 벗어날 방법도 찾을 거다.”

“구, 구원자님?”

“셧업. 아직 말 안 끝났어. 저쪽 마을에서 단서에 대해서 들었으니 할 일은 명확해. 솔직히 여기 마을 놈들은 여전히 아니꼽긴 한데 다 살려주는 김에 덤으로 살려줄게. 바다와 같은 내 은혜에 감사하도록.”

“아, 예…….”


그런데 바다가 뭐냐는 소리가 들렸지만 레인은 무시했다.


“바로 아셀린을 데리고 여행을 떠날 거야. 다른 주민들 만나야지. 지금 이 마을에 3일 치밖에 식량이 없는데 어떻게든 3일 안에 해결해주마. 만약 3일이 지나도 내가 뭘 해주지 않으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 구원자니 뭐니 하는데 그 정도도 못 하면 때려치워야지.”


자신감 넘치는 말처럼 레인은 당당한 태도였다. 마치 그 일이 당연히 이뤄질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왠지 모르게 주민들은 그 말에 믿음을 가졌다.

실상은 그냥 하는 말이었다. 무턱대고 한다는데 믿는 거 같으니 다행이다.

폭풍 같은 선포를 마치고서 레인은 바로 길을 떠났다. 아셀린은 예전보다는 조금 편해진 얼굴로 같이 걸었다.

길은 꽤 험난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라는 사실만으로 몸과 마음이 지쳤다. 물론 아셀린에 한해서다. 레인은 전혀 지치지 않았고 심지어 배고픔마저 느끼지 않았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았다. 아무리 굶어도 힘이 넘치고 배고프지 않았다. 힘이 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신체가 아예 초인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레인은 아셀린의 짐까지 모두 자기가 짊어졌다. 그래봐야 식량이 조금 든 정도로 무겁지도 않았다. 아셀린의 상태에 맞춰서 걷고 쉬는 것을 반복하며 걸었다.

다른 주민들은 하루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만났다.


“똑똑.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상쾌한 미소와 함께 레인이 인사하면 보통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구원자다! 구원자께서 드디어 나타나셨어!”


대화를 통해 레인의 정체를 알고 바로 따르겠다고 하는 부류와,


“믿을 수 없어! 구원자고 뭐고 우리는 마음대로…… 악!”


몸의 대화를 겪은 다음에야 구원자가 진짜로 나타났음을 깨닫고 따르겠다고 하는 부류였다.

 

콰앙!

 

전력으로 던진 돌멩이가 언덕을 파괴하는 걸 보며 또 다른 마을 하나가 레인을 따르기로 했다.

레인은 바짝 엎드린 마을 주민들에게 앞으로의 계획과 향할 곳을 일러줬다. 몇 번 해보니 저 짓도 상당히 익숙해진 모양이다.


“……뭔가 아냐. 내가 생각한 구원자는 이런 게 아니었어.”


아셀린은 그 꼴을 보며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마을마다 확실히 상황이 달랐다. 힘겹게 사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열매를 먹으며 사는 이들이 있었고, 습격자들의 마을처럼 식량이 없어 아무거나 먹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동족을 먹는 마을조차 보았다.

처음엔 역겨워서 참을 수 없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먹을 게 없어서 서로 다리를 잘라 바꿔 먹었다는 말을 듣곤 그저 눈물만 나왔다.

많은 주민을 아셀린의 마을로 보냈다. 식량이 많건 적건 모두 공평하게 나누라고 했으니 알아서 할 거다.


“이 마을도 역시네.”

“응. 무기도 많고 식량도 풍부해. 그들과 거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습격자의 마을은 엄청 빈곤했지만 무기가 있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습격자는 무기와 식량을 동족과 교환해주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괴물이 되었거나 괴물이 되기 직전의 동족을 넘겨주면 대신 식량이나 무기를 주었단다.


아셀린도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리 굶더라도 동족을 팔 순 없다면서 거래하지 않았다.

그 거래를 알았을 때 레인은 역겨웠지만, 그럴 수밖에 없던 주민의 처지는 이해했다. 단지 납득하진 못했다.

그래서 레인은 ‘상인’을 목표로 했다. 황무지의 주민들을 모으는 것과 동시에 상인을 잡아야 한다. 듣기로는 황무지의 상당수가 상인과 관계를 맺었고 1/3 정도는 아예 상인을 따른다고 했다.

황무지를 제패하기 위해서 상인을 잡는 게 필수였다.

 

두두두두두-!

 

그렇게 한참을 걸은 어느 날. 땅이 울리는 소음이 점차 레인에게 가까워져 왔다. 

소리의 정체는 괴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괴물을 타고 있는 주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괴물을 길들여서 탈 것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레인은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가만히 서 있었다. 단지 아셀린만 레인의 등 뒤로 피했다. 이 황무지의 무엇도 레인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다.


“워워. 멈춰.”


지척까지 다가온 땅의 주민들이 명령하자 괴물이 멈춰 섰다. 수가 열 명 가까이 되었다. 뒤에는 괴물에 묶은 짐수레도 보였다.

레인은 그들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가 상인이야?”

“상인? 아, 그렇게 말해도 되겠군. 맞아. 왜? 너도 등 뒤에 있는 애 팔고 식량이나 무기 사려고?”

“하! 설마 멀쩡해도 사는 거냐?”

“멀쩡하게는 안 보이는데…… 보통 그 정도 수준이면 사진 않지. 그렇다고 또 굳이 팔겠다는 걸 안 살 이유도 없지만.”

“진짜 쓰레기네.”


레인은 혈압이 빡 올랐다. 만약 이게 만화라면 이마에 핏줄 몇 가닥 정도는 그려졌을 것이다.

그녀는 바로 들고 있던 돌멩이를 힘차게 집어 던졌다. 상인들 사이를 노린 돌멩이는 정확히 날아가 멀리 있는 언덕에 부딪혔다.

 

콰앙-!

 

이제는 익숙해진 소음이 귀를 때렸다. 와르르 무너지는 언덕에서 흙먼지가 잔뜩 피어올랐다.

상인들은 그 광경에 깜짝 놀랐지만 의외로 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잔뜩 긴장하며 무기를 꺼내 레인에게 겨눴다.


“조심해! 마법을 제대로 쓴다!”

“마법? 난 그딴 건 모르고 그냥 힘으로 한 건데?”


레인이 말해도 상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녀를 포위했다. 무기를 팔아서 그런지 상당히 날카롭고 좋아 보이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갑자기 적대적으로 변했지만 최근에 경험이 꽤 쌓인 레인은 여유롭게 대화를 시도했다.


“싸우기 전에 잠깐만. 너희들 한번 생각해봐. 난 마법 같은 거 안 썼거든? 그런데 힘으로 저렇게 했어. 너희가 생각하기에,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고 저런 힘을 쓰면서 이렇게 예쁘장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누가 있을까?”


“……?”


상인들 사이에 당황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저들도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천을 싸매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파악됐다.


“보통 내가 이러면 다른 주민들은 날 더러 구원자라고 부르더라고. 그래. 너희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구원자 같아?”

“구, 구원자라고?”

“그럴 리가 없어!”


상인들은 부정하며 무기를 치켜올렸다.

레인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번 힘을 보여주면 대부분이 숙이고 들어왔지만, 그래도 덤비는 주민도 있었다. 그들의 경우는 직접 때려눕혀 주면 수긍했다. 수긍 안 하면 할 때까지 때려서 수긍시켰다.


“안 믿기면 직접 몸으로 경험해 보든가.”


레인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땅을 박찼다. 하지만 상인들의 눈에는 그녀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레인은 가장 가까이 있는 상인의 앞에 나타났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상인의 팔을 쭉 잡아당겨 무기를 놓치게 만들며 팔을 빼버렸다. 

그리고 바로 반대편 팔을 잡아서 괴물 아래로 끌어내려 땅에 내동댕이쳤다.


“아아악!”


팔이 빠진 고통과 땅에 부닥친 고통이 같이 밀려왔다. 

레인은 그동안 어떻게 상대를 무력화시키는지 연구했다. 충분한 힘이 있으니 저렇게 팔을 빼놓기만 하면 대부분 좋게 해결되었다.

순식간에 한 명을 처리했지만, 그 사이에 시선이 모였다.

 

휙!

 

훈련을 잘 받았는지 상인들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창을 던졌다.

아무리 날카롭다고 해도 무기는 그녀에게 통하지 않는다. 팔로 막을 필요도 없이 몸으로 창을 받고 다음 상대를……

 

푸슉!

 

“꺄악! 아파……!?”


전혀 아플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는데 팔이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팠다.

동시에 날아든 창이 레인의 옆구리와 다리, 팔에 적중했다. 옆구리와 다리에 맞은 창은 평소처럼 튕겨 나갔는데 팔에 날아든 창만 그렇지 않았다. 

그 창도 튕겨 나가긴 했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긴 상처를 남겼다. 살짝 벌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상처가 생긴 걸 보자마자 상인 하나가 소리쳤다.


“마법을 바른 무기는 통한다! 빨라서 맞추기 힘드니까 일반 무기와 섞어서 마법을 바른 무기로 공격해!”

“이 새끼들이…… 진짜 죽을래?”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상처를 입었다. 그녀는 아픔에 겁먹기보다는 화를 내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잔뜩 성을 내며 그녀는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를 입으로 쭉 빨아먹고 소리쳤다.


“너희들은 내가 곱게 안 보낸다. 한번 죽을…… 때까지……. 어어……?”


레인의 말이 나오다가 점점 끊겼다. 눈꺼풀이 무거워서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겨왔다. 똑바로 서 있으려고 하는데 자꾸 다리에 힘이 풀려서 쓰러질 것 같았다.

반쯤 감기는 그녀의 눈에 당황한 상인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거 독 바른 창인데…….”

“……엩?”


친절하게 독 발린 창에 난 상처를 입으로 빨아서, 독을 구강섭취 해준 레인이었다.

레인은 그대로 털썩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눈을 뜬 레인을 반긴 것은 이상할 정도로 우중충한 실내였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검은 갑옷의 투구가 있었다. 장식품인가?


“일어나셨군요.”


아니었다. 투구 안에서 의외로 미성이 들리자 레인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여긴 또 뭐야?”

“저의 방주 안입니다.”

“방주……?”


레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셀린을 따라 들어갔던 동굴 같은 분위기의 방이었다. 도저히 커다란 배 같지는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 해보니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무겁다. 팔과 다리에 엄청난 수의 사슬이 감겨 있었다. 아무리 레인이라 할지라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거 좀 풀어주지 않을래? 얌전히 있을게.”

“당신이 보시기에 이곳의 주민들은 유치하고 단순하겠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거나 속셈을 감추고 있는 정도는 알 수 있지요.”

“안된다는 말 한번 어렵게 하네.”


레인은 혀를 차며 검은 투구를 노려보았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아셀린 외에 제대로 대화가 되는 두 번째 상대였다.

검은 투구가 가까이 다가왔다. 투구 틈으로 눈이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의외로 깨끗한 느낌이 드는 눈과 마주했다.


“확실히 하기 위해 묻겠습니다만, 당신이 구원자입니까?”

“나도 몰라. 그냥 다들 그렇게 부르긴 해.”

“그렇겠지요. 우리도 당신을 그렇게 부르는 게 편하니까요.”

“너 뭐 하는 녀석이야? 분위기 한번 더럽게 잡네.”

“제가 당신이 찾던 상인들의 대장입니다. 이 황무지에 상인들을 보내 괴물들을 모으고 식량을 나눠주는 존재지요. 그리고 이 방주의 주인이기도 하고요.”

“…….”


너무 순순한 대답에 오히려 레인이 할 말을 잊었다. 

확실히 생각해보니 그럴듯했다. 그녀는 구원자라고 밝힌 상태에서 상인들에게 잡혀 왔고, 상대는 저렇게 좋아 보이는 갑옷을 입었으며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지녔다. 

대장이 아니라고 하는 편이 더 이상하다.


“날 왜 여기로 끌고 왔지?”

“그건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이군요. 당신이야말로 어째서 이곳에 온 겁니까?”

“너 뚜들겨 패서 주민들한테 식량 나눠주려고.”


한껏 도발적으로 응수했지만 검은 갑옷에겐 아무 소용이 없어 보였다.


“질문을 잘못 이해하셨군요. 제 질문은 어째서 이 황무지에 왔는지 묻는 겁니다.”

“……뭐?”

“‘갑자기’, ‘우연히’, 저도 처음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지요. 처음엔 허기를 채우는 게 중요했으니까요. 이건 우리의 문제지만, 당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람이 알아먹게 이야기해.”

“구원자시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레인. 본명은 아닌데 구원자니까 다 레인이라고 불러.”

“왜 그런지 의문을 가져보신 적 없습니까?”

“이 세상이 다 나한테 의문투성이인데, 그런 거까지 의문을 가져야 해?”


검은 갑옷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가까이했던 머리를 뒤로 빼며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건틀릿을 착용한 손을 들어서 손가락 하나를 뻗었다.


“그럼 지금부터 의문을 가져보세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레인이어서 구원자가 된 게 아니라, 구원자여서 레인이 되었습니다.”

“그게 뭐?”

“당신의 본래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인이 되었으니까요. 당신은 레인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


듣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다. 주민들은 무조건 그녀를 레인이라고 불렀다. 본래의 이름을 아무리 주장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레인이어야만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조금 전의 질문입니다. 왜 당신이 이 황무지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황무지에 떨어진 원인이 다른 누군가의 짓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세계를 넘어서 나를 여기로 데려올 정도면 신이나 가능…… 어!?”

“짐작하셨나 보군요. 황무지의 주민들에게 들으셨겠지만 원래 이곳에는 신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우릴 버린 신이지만요.”

“숲의 신 말이야?”


투구 사이로 보이는 눈이 가늘어졌다. 기뻐서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아니고서야 당신이 이곳에 나타났을 리가 없지요. 위대하신 분, 엘드르가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엘……드르?”

“그분의 이름입니다.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만드셨으며, 세상을 지탱하는 거대한 나무. 세계수 엘드르의 안배이지요.”


레인은 큰 충격에 빠졌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눈은 부릅떴지만 동공은 역으로 작아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가늘게 입술이 떨렸다.

그런 레인을 보고서 검은 갑옷이 다시 일어났다. 그는 레인에게 다가와 그녀를 구속하고 있던 사슬을 풀어주었다.


“……풀어주는 거야?”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를 통제할 자신은 있고? 내가 마음먹고 도망치면 이번엔 진짜로 잡지 못할걸?”

“당신께서는 도망치시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분과는 다르니까요. 스스로 저를 찾아 이곳까지 오신 분께서 도망치시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미리 레인에 대해서 조사라도 한 모양이다. 그녀가 어떻게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레인은 사슬에서 풀려난 손을 매만졌다. 검은 갑옷의 말대로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뭔가 분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야.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 시선을 느꼈는지 검은 갑옷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갑옷은 자신의 투구를 손으로 잡더니 벗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웃고 있었다.

단지 너무 멀쩡한 얼굴이었다.

하나도 일그러지지 않은, 인간이나 다름없는 외모로 웃으며 답했다.


“제 이름은 ‘메이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