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녀가 머물고 있는 신녀궁은 이 황궁에서도 깊숙히 자리잡은 내궁이다.


신녀궁은 제법 운치가 있는 곳이며, 규모 또한 꽤나 큰 곳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는 늘상 늦가을과 초겨울의 정취가 맴도는 곳.


경계를 보는 망루는 제법 거리가 있어서 궁의 정취를 방해하지 않고, 대나무로 곁을 둘러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아홉 겹의 돌벽은 여인의 보금자리를 철통같이 지키고, 아홉 개의 문은 여인의 내정(內庭)이 방해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황제는 그런 신녀궁을 돌아나와 황실로 향했다.

황제가 한 걸음 옮기면, 그 세 걸음 뒤에 무사들이 따른다.

무사들의 뒤로 세 걸음, 내궁부의 인물들이 따른다.


황제의 행차마다 근 스물에 가까운 인물들이 움직이는 곳.

그것이 황제를 비롯한 황실이 가진 위엄이다.


“태각사(太閣士).”


“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황제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태각.

태각 중에서도 좌장이라 할 수 있을 태각사ㅡ 이연(李演)은 그런 황제의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말은 맥락이 없음에도 능히 알아들어야 하며,

황제의 행동은 기척이 없더라도 알아 모셔야 한다.

그것을 위한 태각이며, 또한 태각사.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녀님께서는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듯 하옵니다.”


“그러한가. 허면, 질문을 좀 바꿔보도록 할까.”


황제가 걸음을 멈췄다.

근 스물에 가까운 인물들의 걸음도 함께 멈췄다.


“신이 있다 생각하나. 저 여인이, 정말로 신이 보낸 신녀라 생각하나.”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옛말에 이르기를 불신(不信)이면 불견(不見)이라 하였습니다.”


“그러한가.”


믿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믿기에 보인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여인의 머리 위에 솟은 뿔이 보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것이 신에 대한 증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에둘러 말하는 태각사 이연의 말에 황제는 피식 웃으며 다시 돌아섰다.


“가지. 나는 아무래도 신자여견(信者如見)이라 할 수 없을 듯 하군.”




*




“갔죠?”


“신녀님, 그래도 폐하이십니다. 말씀에 신중을 기하셔야…”


“…가셨죠?”


“예.”


문지방 너머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로 내정문을 바라보던 신녀가 고개만 돌려 시비를 향해 물었다.

황제가 떠나갔다는 소리에 으휴, 작게 숨을 토해낸 신녀는 다탁 옆에 털썩 소리내 주저앉으며 목끈을 주우욱 끌어당겨 풀어냈다.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푸른색의 용잠이었다.

양쪽에 솟아있는 길쭉한 뿔이 이 푸른색 용잠 덕분에 더욱 돋보이는 터라 하루종일 그걸 끼고 있었었다.

그 덕분에 지금 턱 부근이 아려서 참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신녀님, 위엄을 갖추셔야지요. 이리 사내처럼 앉으시면 어찌하겠습니까.”


“아니… 우리만 있는데 좀 편하게 있으면 안돼요?”


신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물었다.

그러면서도 쩍 벌리고 있던 두 다리는 스르르 오무려져서는 그래도 제법 다소곳한 티가 난다.


뭐 이리 하지 말라, 하면 안된다는 게 많은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신녀고 뭐고 나발이고 간에 그녀로서는 본래 그로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탓이다.

심지어 현대인 기준으로ㅡ 이 곳의 행동양식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말투부터 비롯해서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사내 티가 나서는 아니된다느니, 말을 그리 직설적으로 하면 아니된다느니.

이거 하지마라, 저거 하지마라ㅡ 이러는 통에 도통 진저리가 날 판이었다.


“그리고 말씀을 낮추어 주십시오. 신녀님께서 계시던 천상에서는… 그리하시었다 하더라도, 이곳은 하계가 아니옵니까. 폐하께서 보시면 저희가 경을 칠 것이옵니다.”


“내가 이게 편하다는데 왜…”


“저희가 목이 날아갈 것입니다.”


신녀는 요 열흘 가량 같이 지내면서 부쩍 친해진 시비, 야연을 올려다보았다.

상전의 앞에 멀뚱히 서있으면 큰일이 난다며 옆에, 옆에서 살짝 뒤에서 시립해있는 야연.


“…에휴, 알았어. 이러면 됐지?”


여기는 현대가 아니다.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목이 날아간다고 하였으니 아마 진짜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사람 목숨을 그리 파리처럼 날리려고. 아무리 황제라지만.’


책에서 보았던 황제라는 인물들, 폭군과 성군으로 나뉘어있는 이들.

그 두 가지의 갈래 중에서 지금의 황제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폭군이라 할지라도 이런 걸로 목을 베어버리지는 않을 거다ㅡ 라고, 그녀는 속편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았으니, 이제 나가 봐. 혼자 좀 쉴게.”


“예. 용무가 있으시오면 언제든 불러주시지요.”


“응.”


허리를 꾸벅 숙여보이고서 뒷걸음질로 물러가는 야연.

그런 그녀가 장지문 밖으로 나가고 완전히 모습이 사라진 후, 문까지 완전히 닫히고 나서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대로 향했다.


“내가 화장대에 앉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안했는데.”


고아원에서는 물론이고 자취방에서도 가장 인연이 없었던 게 화장대다.

게다가 어지간한 도서관 책상만큼이나 크고 드넓은 화장대라니, 이건 거의 침대 크기가 아닌가.

그 위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각종 안료라던가 염료, 붓이며 연필처럼 생긴 도구들.


심지어 이것들로 끝이 아니다.

화장대 아래칸에는 그녀가 어디 외출할 때면 언제든 들고 나갈 수 있도록 운반도구까지 꽉꽉 들어차있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그녀를 남자로 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남자라 주장한대도 그걸 믿어줄 사람조차 없다는 이야기다.


“…에휴.”


한숨을 토해내며 그녀는 반사경판을 뒤집었다.

그녀의 상식 속에 있는 거울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품질이 조악하지만 그래도 거울 행세는 할 수 있을 법 하다.


“이 뿔은 대체 뭐지?”


이 뿔 때문에 똑바로 눕지 않으면 잘 수가 없다.

옆으로 눕기라도 하면 이 뿔이 짓눌리는 느낌 때문에 불편해서 잠을 못잔다.

그 느낌을 무시하고 잤더니 베게에 구멍이 뚫린 걸 봤을 때의 황당함이란.


심지어 두 뿔 사이에는 파즛파즛 묘한 소리를 내면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이 시대의 말로는 뇌전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그 뇌전이 두 뿔 사이에서 오거니 가거니 하면서 날카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이거 사람이 만지면 감전되나…”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본 채 손을 뻗어 뿔을 만져보았다.

분명 촉감이 있다ㅡ 그리고 그녀의 손 사이로도 파직파직 뇌전이 튄다.


“나한테는 멀쩡한 거 같기는 한데…”


그렇긴 한데 기분이 좀 이상하다.

그녀는 양손으로 양쪽 뿔을 각각 살짝 힘주어 움켜잡고는 위아래로 슥슥 매만져보았다.


“어, 흐, 흐앗…?”


순간적으로 입밖에 기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라 뿔에서 손을 얼른 놓아버리고 말았다.


방금 제 입에서 튀어나온 그 소리.

자기가 낸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고 색정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뭐야.”


게다가 이 하복부쪽의 찌릿한 느낌이란.

정체 모를 그 간질거리는 느낌은 이거 영 안좋은 느낌이 들었다.


‘뿔은 못만지게 해야겠고.’


신녀의 뿔을 덥썩 움켜잡을 미친놈은 아마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또 다행이기는 했다.


“그 다음은 이 비늘인데…”


손등부터 시작한 비늘은 어깨까지 뒤덮혀있었다.

뱀비늘처럼 좀 흉한 느낌의 비늘은 아니긴 한데, 인간의 몸에 이런 비늘이 돋아나 있으니 영 보기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어깨까지만 그런 게 또 아니라, 목 뒷덜미까지 비늘이 덮혀있었다.


다행히 다른 곳에는 비늘이나 그런 게 없다.

꼬리라도 달려있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그렇진 않다는 게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본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그 생각을 이번에 처음 하는 게 아니다.

장장 열흘 동안 계속 그것만을 생각해왔다.


차라리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이나 웹소설의 세계로 뚝 떨어진 거면, 어쨌든 단서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또한 게임과 애니메이션이나 웹소설들을 좋아하긴 했었으니 그 중 하나였다면 아무 문제 없었다.


오히려 더 즐겼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을 대신해서 온갖 기연도 다 줏어먹고, 히로인들을 다 만나서 먼저 꼬드겨서 신나는 하렘 라이프를ㅡ


‘근데 여자네!’


그마저도 못하게 됐다.

남자를 여자로 바꿔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 영문도 모를 곳에다 뚝 떨어뜨려놨으니.

게다가 뿔이며 비늘까지 달아놓은 채로 말이다.


‘진짜 악취미란 말이지. 그렇다고 상태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거 대체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거지?’


차라리 퀘스트 같은 게 주어지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없고.


신녀는 화장대 앞에 앉은 채로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이세계 환생, 이런 걸 꿈꾸지 않은 오타쿠는 몇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는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같이, 아무 것도 못하는 상태로 뚝 떨어진 것을 좋아하는 이가 과연 있기나 할까ㅡ

아득하기만 해서, 그녀는 한숨을 푹푹 쉬기만 할 뿐이었다.




*




“그래, 홀로 보겠다. 물러들 가라.”


황제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과 동시에 좌탁 위에는 두루마리 족자가 한 본 놓여져 있었다.

곤룡포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채 좌탁에 앉은 황제가 족자를 집어들고서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그랬단 말이지. 역시나 신녀 같은 게 아니었다는 소리군.’


신녀궁에 황제의 눈이 없을 리 없다.


“재미있게 되었군. 재미있게 되었어.”


황제는 족자를 다시 둘둘 감아 화로에 툭 던져넣었다.

화르륵ㅡ 화마가 그 아가리로 족자를 삼키자, 이내 족자는 사그라진 재가 되어 남는다.


그 모습을 황제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한껏 비틀린 미소가, 눈빛에는 한껏 일그러진 조소가 머무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