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은 알게 모르게 흘러간다.
하지만, 어떠한 일을 계기로 시간의 흐름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표정 하나는 죽여주는구나.”
“그렇습니까?”
병장 정혜나.
하 중사는 그런 뚱한 모습으로 있는 정혜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시체인지, 사람인지 모를 때가 있어.”
“상병 때부터 빈자리를 크게 느낍니다.”
“뭐, 사람이 너무 크게 있으면 그럴 수 있지. 그래도 곧 너도 가잖아?”
“뭐, 그건 그렇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생활관에 돌아와 침대에 눕다 보면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아 심심해.’
동기나 후임, 그들과의 관계는 원활하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아니, 그거야 당연하지.”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것 같습니다.”
“그건 그런가? 그래도 다행이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휴가를 나온 어느 날, 이준석을 만났다.
*
계기는 사소한 것이었다.
그저,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카페에서 만나게 된 것.
“뭐, 마실 거야?”
“저는 아메리카노로 부탁드립니다.”
“차가운 거, 뜨거운 거?”
“뜨거운 거로.”
“그래.”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준석을 바라본다.
머리는 이미 충분히 길어진 상태.
이전에 짧았던 머리와 지금의 머리를 비교하면 꽤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신기합니다.”
“뭐, 그렇기는 하지. 안과 밖의 시간은 다르다고 하니까.”
“별로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그나저나 편하게 말해도 되는데.”
“아, 그건 나중에 할 겁니다. 아직은 이렇게 할 생각입니다.”
“그래?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뭐, 네 마음이니까.”
커피를 마시면서 나누는 것은 가벼운 잡담이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앞으로는 무엇을 할 생각인지에 대한 사소한 잡담.
사소하지만, 시간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아, 이제 너도 슬슬 전역인가?”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말뚝 박을 생각이 없냐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는 있지만.”
“뭐, 그만큼 네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지. 과하게 말이야.”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요즘에는 제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준석이 그렇게 말뚝 박을 생각이 없냐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 모습에 대해서.
물론, 정다혜 역시 말뚝을 박을 생각은 없기에 정중하게 거절을 하는 중이었다.
‘굳이 군대에서 썩을 생각은 없으니까.’
“아, 그런데, 혹시 연애는 해보고 있습니까?”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이건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까?”
“없어. 이 녀석 아픈 구석을 찌르네.”
배가 아프다는 듯이 배를 만지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고, 그런 모습을 본 준석은 웃음이 나오냐며 볼을 찔렀다.
*
연인, 그것에 대해 생각했던 때가 분명하게 있다.
지금도 그런 것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 시선은 이미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뭐, 그럼 너는 어때?”
“저 말입니까? 흐음, 군대에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만난다면 이런 사람이 좋겠네요.”
“...하하, 그거 재미있는 이야기네.”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있는 사람, 이준석은 그런 정혜나의 말에 웃었다.
*
“전역하는 날 되면 찾아라도 가줄게.”
“오오, 차를 끌고 오는 겁니까?”
“글쎄, 그건 어떨까?”
어깨를 으쓱이며 헤어지는 이준석의 모습을 보며 정혜나 역시 어깨를 으쓱였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네.’
남은 휴가를 보내고 부대로 복귀한 날, 정혜나가 보는 것은 다음 휴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어차피 남은 휴가가 모두 말출이 된 상황이었기에 최대한 훈련이 있는 날을 빼기 위해서 머리를 돌리는 상황.
“참 애쓴다.”
“이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마지막에 편안하게 끝내기 위해서는.”
“뭐, 그것도 그렇지.”
‘훈련이, 훈련이...음, 별로 없네.’
다행스럽게도 훈련은 별로 없는 상황,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날 눈만 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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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역하는 사람 중에서 여러 억까를 보기는 했는데 말이야, 내가 그 억까를 당하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어.”
말년 휴가를 나가고, 전역까지 얌전히 부대에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런 정혜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폭설과 함께 시작된 제설작업.
“흑흑, 내 말년이!”
“시끄럽고, 빨리 저기 눈이나 치워라.”
동기에 차디찬 말에 눈을 치우며, 하늘을 바라봤다.
눈을 치워도 하늘에서 내리는 눈에 의해서 효과는 별로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저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를 어떻게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그리고 다시 저 눈의 맛을 보고.”
“...하아.”
하루를 별의별 일을 보내며 시간을 보낼 때, 매 아침 달력을 바라본다.
“드디어 내일이면 전역이다!”
“오오, 드디어 그 고생길에서 해방이네. 축하한다, 축하해.”
“그런데, 정 병장님은 전역빵 못 때립니까?”
“글쎄?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어어? 폭력반대, 폭력반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전역에 대한 기대를 커지는 나날.
기쁨을 다시 슬픔으로 만드는 방법은 참으로 간단했다.
“...뭐라고?”
“내일 눈이 온다는데?”
“그럼, 내 전역은?”
“그거야 정상적으로 전역은 가능하지. 대신 눈맞고 전역하겠지만.”
‘억까도 이런 억까는 없을 텐데. 왜 내가 전역하는 날에 날씨가 지랄이지?’
*
눈 오는 날, 위병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 병장님, 안 가십니까?”
“사람 오기로 했어.”
위병조장과 함께 눈 오는 밖의 풍경을 보며, 천천히 잡담이나 나누고 있는 상황.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그나저나 고생 많았습니다.”
“그래, 너도 앞으로 고생하고.”
나름의 덕담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멍하니 CCTV를 바라봤다.
‘언제 오지? 분명 여기로 온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준석과 대화를 나눴을 때, 데리러 오겠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정문에서 기다리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이준석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눈이 많이 와서 차가 막히나?”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나는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냥 기다리십시오, 그게 답인 것 같습니다.”
[정문에 차 한 대 있음.]
입초의 말에 CCTV를 바라봤다.
확실히 정문 쪽으로 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저거 간부 차량은 아니지?”
“예, 간부 차량는 아닙니다. 아마도 민간인 차량 같은데, 저 차 아닙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CCTV의 화질로는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아서 결국, 위병조장실을 나와 밖에서 바라봤다.
“네 전역 날에는 무슨 눈이 이렇게 온다냐?”
“저도 그게 불만입니다.”
차에서는 이준석이 내렸다.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정작 나오는 말은 날씨에 대한 불평들.
“아무튼, 축하한다. 자, 빨리 타.”
*
눈 오는 날, 부대를 다시 보는 소감은 참으로 정겹지도 않은 장소라는 소감이었다.
‘설마, 이렇게 또 오게 될 줄이야...그래도 뭐, 이제 다시 볼 일은 없겠지.’
“그나저나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그냥, 평범하게 복학 준비를 하고 있지.”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 조심히 운전을 하면서 옆에서 들어오는 질문에 답해준다.
“그나저나 이제 전역도 하셨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말할 생각이야?”
“흠흠, 그거에 대해서는 저도 충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직접 꺼내는 것이 조금 그래서?”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길래?’
전역을 하고도 나오는 군대식 말투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긴장을 하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정혜나는 기침을 두 번 하고는 이준석을 바라봤다.
물론, 운전을 하는 이준석은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으음, 다시 이렇게 만나서 기뻐요, 오, 오빠.”
“...!”
순간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만들어질 뻔했다.
다행히도 신호가 빨간불이었기 때문에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바, 방금 뭐라고요?”
“아니, 저보다 연상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부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니까?”
“그거야, 그렇기는 한데.”
아무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든 말든, 상대는 웃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말할 생각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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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군대 안에서도 이것에 대한 생각을 여러 번 했기에 말을 한 다음.
돌아오는 것은 약간의 부끄러움이었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
“있을 리가...이번이 처음인데.”
TS병으로 성별이 바뀌어도 모든 것은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지는 못했다.
남자였던 시절 그대로의 행동으로 했었고, 변화를 준 것은 이번이 처음.
그런 혜나의 모습에 준석을 자신의 볼을 긁고 있었다.
‘효과는 좋네. 그래도 계속하려니...아직은 어색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돌아온 것은 이준석의 질문.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야 했다.
‘어떤 걸 묻는 거지?’
그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준석이 어떤 것을 묻는 것인지에 대해서.
“으음, 역시 시작은 친구로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 아니,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
순간적으로 차 안이 조용해졌다.
정혜나는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런 정혜나를 보며 이준석은 작게 웃으며 계속해서 운전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