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무기를 배분받은 발키리들


*



식사 자리에는 적대감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긴 세월 내전을 해온 것치곤 무척 화목했다.


잔류파며 이탈파며 한데 어울려 먹고 마셨다.



"나... 가재 이제 싫은데."



왕이 불평하였다.


괼 부대의 대장은 가재를 왕의 입에 밀어넣듯이 하였다.


질 세라 헤르표투르의 대장도 정성껏 사과를 깎아 왕에게 자꾸만 건넸다. 



"사과도 싫은데요."


"편식하지 마십시오."



소녀의 자그마한 입에 쏙 들어갈 아담한 크기로 가공하며, 두 발키리의 단검이 쉴새없이 움직였다.


번람한 흙탕물에 오염된 나이프의 대용이었다.


'저렇게 쓰라고 나눠준 칼은 아닌데' 라고, 홀뤽 부대의 부대장은 속으로 앓았다.



"음식 가리면 키 안 크는 법입니다."


"나 어른이에요. 키 안 커도 돼요."


"어른은 편식 안 합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꼬마 발키리가 우우- 하며 볼을 부풀렸다.


꼬마 발키리가 라드그리드의 발키리를 가리켰다.



"저기, 저 언니는 가재 안 먹잖아요."



라드그리드의 발키리는 접시에 담긴 '가재 양배추 샐러드'에서 가재를 골라내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왕이시여, 저는 지병이 있어 그렇습니다."


"네가 지병이 있어? 난 들어본 적 없는데."


"병이요? 어떤 병인데요?"


"싫어하는 음식을 먹으면 얼굴을 찌푸리게 되는 지병입니다."



헤르표투르의 대장이 "별 헛소리를 다 듣겠네"라며 핀잔을 주었다.


라드그리드의 대장은 애써 웃음을 참는 중인 괼의 대장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거 다 먹으면 다시 전쟁인가, 선봉대장?"


"그래, 새 무기도 받았으니 더욱 정성을 다한 내전에 임할 수 있겠지...."



묵묵히 앉아있던 홀뤽 부대의 부대장이 불안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괼의 대장은 급적스레 문장의 방향을 꺾었다.



"-라고, 말하고 싶다만... 아무래도 그럴 이유가 없어진 모양이야."


"휴우."



홀뤽 부대의 부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헤르표투르의 대장이 질문하였다.


괼의 수장은 난색을 짓는 꼬마 발키리의 입안에 가재를 쑤셔넣고 답했다.



"이탈파는 오딘이 발키리를 버렸다 판단해서 모인 거였거든.

지금은 아니란 걸 알았고."


"그렇군. 오딘 쫌생이가 손수 레긴레이프를 선발해 발키리에게 보냈다는 건...

무지개다리를 내려주지 않는 것에도 왕 나름의 이유가 있단 건가."



라드그리드가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렇지. 신왕이 발키리를 숙청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으니까."


"무지개다리요?"



끼어든 이는 꼬마 발키리였다.



"예. 헤임달이 관리하는. 뭔가 아시는 바 있으신지요."


"헤임달은-."



작은 소녀는 입에 든 가재를 꿀꺽 삼키고 말했다.



"얼마 전에 죽었다고 하시던데요."


"예?"


"헤임달이 사망했다고요?"


"무지개다리는 타버렸다고 했어요. 서임식 때 듣기로."



꼬마 발키리의 첨언에 세명의 대장이 시퍼렇게 질렸다.



"파수꾼이 죽고 다리가 파괴됐다고? 예언의 내용과 똑같잖아."


"그렇다면 라그나뢰크가 이미 지나갔단 거야?"


"말도 안 된다 헌병감. 라그나뢰크였으면 진작에 아홉 세상이 불탔어야지."


"전에 곳곳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났던 거, 까먹었어?"



라그나뢰크, 신계를 포함한 아홉 개 세계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대전쟁.


일찍이 오딘이 발키리 집단을 조직하고 거느린 이유이기도 했다.


라그나뢰크에 대비하기 위해 결성한 발키리가 정작 라그나뢰크 때 아무런 활약을 못했다면 넌센스였다.


홀뤽의 부대장이 대경실성한 세 대장에게 일렀다.



"저기... 라그나뢰크였다면 오딘 왕께서도 붕어하셨어야 맞지 않나요?

레긴레이프께서 하사받으신 게 궁니르인데...."


"참, 오딘이 죽었다면 궁니르를 부숴서 줄 분이 없겠구나.

이런 자그만 조각이 아니라 온전한 궁니르를 다뤄야 하는 거니."



헤르표투르의 발키리가 이의를 제기했다.



"밴댕이 소갈딱지 오딘 말고도 궁니르를 다룬 사람은 몇 있잖아.

천둥신 토르님이 왕위를 물려받으신 거면?"


"헌병감, 그분이었으면 묠니르를 뽀개서 주셨겠지 않겠느냐."


"외팔 신 티르님이나 발더님은?"


"티르님은 왼팔로 궁니르를 어떻게 복종시키시겠어.

발더님은 돌아가신지 꽤 됐고. 장례식 함께 갔으면서 까먹었어?"


"회니르님도 있잖아."



끈질긴 헤르표투르의 발키리에게, 괼의 발키리가 화를 내었다.



"벙어리가 서임식을 어떻게 진행해! 기사 선언이고 뭐고 다 구두로 진행하는 건데."



틀린 말도 아니었다.


헤르표투르의 대장이 "그... 런가"라며 얼떨떨해하였다.



"그럼 뭐야, 병이라도 난 거야?"


"그 튼튼한 양반이?"


"만날 잠 안 자고 뻐겨댔으니 몸이 축난 걸 수도 있지."


"아아."


"아님 요툰헤임의 거인들이 또 쳐들어와서 난동을 핀 걸 수도 있겠네."



뜻밖의 부고 소식은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었다.


다음은 이미 부고한 인물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게냐? 그 귀신 녀석은.]



여우가 물었다.


귀신 사내가 가재에게 붙잡혀 사라졌다.


목격자였던 홀뤽 부대의 부대장은 그 사실을 숨김없이 전달했다.



"되찾으러 가야지."


[어딘지도 모르면서 말이냐?]


"성불시켜주기로 약속했으니까."



레긴레이프는 결의를 마친 상태였다.


여우가 호기롭게 지시했다.



[좋다. 따라나와.]



소녀도, 발키리들도 어차피 배도 거의 채워진 상태였다.



"여기서 끌려갔을 거에요."



홀뤽 부대의 부대장이 귀신 사내와 헤어진 곳까지 안내하였다.


여우는 [으음 어디 볼까]하더니 땅 주위를 이리저리 톺아보았다.


코를 바짝 붙이고 냄새를 맡거나 젖은 땅에 발자국을 만들어 깊이를 확인하거나 하는 방식이었다.


여우의 태도가 진지한지라 모두가 할 말을 잊고 여우를 관찰했다.


지면에 납작 엎드려 귀를 기울이던 여우가 머리를 뗐다.



[모르겠군. 비가 와서 이 방법으론 못 찾는다.]


"그게 뭐야. 뭔가 보여줄 것처럼 굴더니."


[이 방법으론 안 되니 새로운 방법을 구해야지. 남는 지도 있으면 하나 줘봐.]



누군가가 지도를 건넸다.


여우는 먼저 뒷다리로 귀를 벅벅 긁었다.


여우는 흙을 꾸욱 누른 후 흙이 묻은 발바닥으로 지도를 찍었다. 


지도에 떨어진 흙은 물에 융해되는 설탕처럼 녹아 사라졌다.


대신, 지도에는 빛나는 점이 여럿 생성되었다.


가장 큰 점은 서게르만 땅에 위치해있었고, 그 주위로 자잘한 점이 모여있었다.


작은 점 중 몇개는 일정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서게르만과 북게르만을 지나 슬라브 서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여우는 선이 끊어지는 서슬라브를 가리켰다.



[여기로 끌고 갔네.]


"와! 이거 뭐야?"


[마법.]



여우가 캥캥하고 울자 하늘의 햇빛이 일순간 강해졌다.


볕을 받은 대지의 특정 부분이 희게 빛났다.



[이리로 따라가면 되겠고.]


"이것도 마법이야?"


[오냐.]



짧고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입때껏 입속에 남은 샐러드를 오물거리던 라드그리드 부대의 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헌병감은 저 여우를 일개 요정이라 칭했다.

[일개 요정]이 저런 마법을 쓴다고? 태양광을 다루고 땅을 조작하는 마법을?

저런 화려한 마법은 발키리조차 쓸 수 있는 자가 극소수일 텐데.'


그녀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우는 라드그리드의 발키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우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강조했다.



[마법이야. 일개 마법.]



귀찮은 짓을 벌였다간 가만두지 않으리란 무언의 협박이었다.


라드그리드의 대장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원체 짐이 조촐했던지라 소녀는 떠날 채비를 금방 갖추었다.


뭇 발키리들이 섭섭함을 드러냈다.



"벌써 가시려고요?"


"편안히 있다 가세요."


"어디로 가세요?"


"대장들이랑만 놀아주고 왜 저희랑은 안 놀아주세요."



"아직 밤놀이도 못했잖아요"라며 아쉬워하던 발키리 하나는 헤르표투르 부대의 대장이 조용히 혼냈다.


레긴레이프란 건 성처리 담당이래도 자유의지가 없는 쪽은 아닌 듯했다.


'하기는 왕이랬으니 그도 그런가'하고 소녀가 생각했다.


대장과 부대장은 미안해하였다.



"시중이라도 딸려보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공사가 다망해요."



그렇게 이른 이는 괼의 대장이었다.



"공사가 죄다 망한다고요?"


"아뇨, 공사다망하다고요."


"똑같은 뜻 아니에요?"


"똑같은 뜻이지만.... 에휴, 똑같은 뜻입니다."



이상한 분이네- 하고 소녀 발키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홀뤽의 부대장은 "이거, 위급할 때 써주세요"라며 팔찌를 내밀었다.


팔지에는 망치와 모루가 새겨져있었다.



"무슨 팔찌에요?"


"저희가 신세를 졌단 뜻의 팔찌입니다."


"팔찌 답답한데..."



헤르표투르의 대장은 간단한 과일 따위를 싸서 건네주었다.



"출출하면 드세요."



헌병감이란 지위치곤 소박한 감사 표현이었다.


라드그리드 대장의 선물은 독특한 물건이었다.



"부대 내 보물로 전해지는 겁니다.

옛날 알브헤임의 지배자인 요정왕이 썼다는 뿔피리입니다."



시험삼아 소녀가 불어보려들자 라드그리드의 대장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막았다.



"불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전승이 없으니까 신중히 쓰십시오."


"불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에요?"


"초대 라드그리드의 대장은 알았다고 하는데 그후에 기록이 없습니다.

늙은 현자나 지혜의 샘의 거인이라면 알 수도 있겠습니다만."



라드그리드의 대장은 여우의 눈치를 살피고는 소녀에게 귀엣말을 했다.



"그리고 저 여우, 맹신하지 마십시오. 평범한 요정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며 소녀가 되물어도, 라드그리드의 발키리는 "이 이상은 저도 잘 모릅니다"라며 일관했다.


여우는 매섭게 둘을 노려보았다.


홀뤽 부대의 부대장이 "제 임무는 이곳까지 왕과 동행하라는 게 전부였으므로"라며 남았다.



"가자! 귀신 아저씨 구하러."



꼬마 발키리가 발을 뗐다.


여우는 발키리의 어깨에 올라탔다.



"어이쿠쿠, 그럼 저도 가야겠네요."



멀찍이에서 관람하던 고등학생 정도의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소녀가 손짓하자, 허공에서 빗자루가 튀어나왔다.


공중에 두둥실 떠있는 빗자루.


마법소녀는 빗자루에 몸을 실었다.



"얼른 출발 안 하면 늦어버릴 테니까요."



소녀를 태운 빗자루는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북동쪽으로 날았다.


서슬라브 방면이었다.




*




나, 20대 청춘... 이었던 자.


어느 날 미연시 게임의 보추 캐릭에 여자로 변해 빙의하고 파란만장한 경험을 막 마친 참이다.


이 빙의에 대해 할 말이 참 많다.


그 중 1순위를 뽑으라면 이 영문 모를 ts겠지.


여전사 성처리 담당 캐릭에 빙의했으면 성처리라도 가능케 할 것이지, 갑자기 여자로 바뀌는 건 무슨 처사인가.


그렇다... 여장 남자 캐릭에 빙의했는데 여자가 된 거다.


생김새, 인간관계, 이름 모두 내가 알던 그 여장 남자 캐릭이 맞는데! 왜! 가랑이만! 코끼리가 사라져있냐고!


성에 목마른 발키리들과 함께 있을 때마다 이 점을 들키지 않게 하는 게 도무지 난관이었다.


들키면 어떻게 되냐고?


글쎄, 걔네 입장에선 왕을 사칭한 셈이니까... 아마 끔찍한 꼴이 나겠지.


그런 아슬아슬한 경험 위에 복잡한 투쟁이 있었다.


투쟁도 참 길고 사연많은 이야기였는데 지금 와서 떠올리고 싶진 않다.


사실 별로 떠오르지도 않는다.


머리가 안 돌아가거든. 추워서.



"으으, 추, 추, 추워...."



비가 막 그친 늦겨울, 햇님도 한기에 져서 아침마다 이불에서 꾸물거리는 이 날씨.


이 추위에 북유럽 횡단을 자진하는 전생 한국인이 어디 있을까.


현생 아스가르드인, 현생 발키리의 왕이라는 멋들어진 칭호는 북유럽의 서러운 냉기 앞에 맥을 못 추었다.



"이럴 줄 알, 아, 알았으면 손난로라도 받아오는... 건데."



이가 딱딱 부딪힌다.


발키리들의 땅을 떠나기 직전, 우릴 배웅해주던 이들이 여러 선물을 주었다.


사용법을 모른다는 보물이나, 오는 길에 식량으로 조금씩 쓴 과일도 있었다.


어린 소녀의 눈물까지 뽑아내는 맹추위를 견딜 무언가는 없었다.


억울함에 찔끔 눈물이 나왔다.



"왜 아무도 얘길 안 해준 거야, 이렇게 춥다는 걸...!"


[춥다 춥다하면 더 추운 법이다.]



앞장서 걷던 여우가 조언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물었다.



"아으우, 여우 너는 안 추워?"


[안 춥냐니, 하하, 그야 물론... 추워.]



'추워'란 부분만 급격히 떨어지는 텐션.


여우의 진심이 묻어나왔다.



"너도 추우면서... 으.... 폼 잡기는."



나아지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주위를 돌려, 추위에서 관심을 끊으려고 해도 숫눈으로 범벅된 시야는 '무리무리인데스'라며 극구 사양하였다.


숫눈을 제외하고 눈에 들어오는 건 지겹도록 많은 침엽수 정도였다.



"아, 마, 맞다... 여우 너 마버, 쓸 수 이, 이, 이찌? 따뜨하게... 하는 거... 없어?"



냉기에 굴복한 혀가 발음을 포기하였다.


나는 받아들이고, 되는 대로 주절거렸다.



[이미 쓰고 있어.]


"거, 거지잇말! 이러케 추운데?"


[햇빛에 닿아야 효과를 보이는 마법인데-.]



여우가 주둥이로 하늘을 가리켰다.


높이높이 솟은 침엽수는 서로 빽빽히 모여서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그 침엽수의 숲 한가운데로, 하늘은 나무에 가려져 드문드문 조금씩만 보이는 수준이었다.



[이래서야 볕이 들어올 수가 없잖아.]


"우으으.... 뭐야 그게. 쓸모없잖아."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살이 찢어지는 듯한 추위였다.



"아아아으우으, 시러! 이제 시러어어!"


[어쨌거나 빨리 마을을 찾아야지. 슬슬 하나쯤 나올 때도 됐는데.]


"마을?"


[목적지까지 바로 갔다간 이 날씨에 얼어죽어.

들러서 쓸만한 옷도 구하고 따뜻한 것도 먹고 하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숲 한가운데 뻥 뚫린 호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을이었다.



"대, 대, 됐다... 드디어 마을이야."



이성의 끈이 머리카락만큼 가늘어졌을 때 즈음이었다.


목재 집이 여러개 모인 마을로, 걸음을 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가장 먼저 보인 집을 향했다.



[망자의 마을, 야른비드르촌에 어서오세요.]



표지판의 마을 안내 문구가 불안한 게 한가지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그런 걸 따지고 앉아있을 만한 지능이 남아있지 않았다.




*


미드가르드 편 끝
마법소녀 편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