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이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방해받은 게 아니야. 그냥 책에 빠져있었을 뿐이지 뭐."

 

그녀는 잠시 그를 살펴보았다.

호기심 어린,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은 눈빛이었다.

"같이 앉지 않을래?"

푹신한 소파에서 옆자리를 가리키며 그녀가 물었다.


말리크는 망설였다.

예상치 못한 초대였다.

도미니크에게 받았던 차가운 거절, 앨리스에게서 느꼈던 은근한 무시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자벨의 태도는 따뜻하고, 거의 환영하는 것 같았다.

말리크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에 이끌렸다.


그는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소파로 다가가, 젊은 여성과는 공손한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여린 미모와, 눈 속에 빛나는 지성이 느껴졌다.


"뭘 읽고 계신 거예요?"

책을 가리키며 말리크가 물었다.


이자벨은 무릎 위의 책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거의 경건함이 느껴지는 애정 어린 표정이었다.

"고대 신비술에 관한 책이야." 

그녀는 설명했다.

"아버지가 마법을 가르쳐주시거든. 아주 매력적인 주제라고 생각해."

 

다시 말리크를 바라보았다.

이자벨의 눈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말리크는 깨달음이 밀려오자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신비로운 마법에 대해 넘치는 열정, 낡은 책을 무릎에 공손히 받치는 모습...

그 모든 것이 말리크와 '그녀' 사이의 깊은 간극을 떠올리게 했다.

 

사생아, 집안의 따돌림, 영원한 이방인이었던 실비 데브뢰.

그녀는 먼지 쌓인 책장 사이에서 위안을 찾고, 아무도 베풀어주지 않는 지식과 이해를 갈망하는 소녀였다.

 

하지만 말리크는? 그는 전사였다.

잔인한 힘과 꺾이지 않는 의지로 세상을 헤쳐나간 남자였다.

마법의 신비, 학문에 대한 고요한 사색, 그런 건 그에게 낯선 영역이었다.

지금 자신이 갇혀있는 이 연약한 몸만큼이나 낯선...


말리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이 엄청나게 빨리 돌아갔다.

자신의 무지함, 실비의 취향에 관심 부족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건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자벨 옆에 앉아 있자, 처한 상황의 짐이 다시 강하게 그를 내리눌렀다.

그는 사기꾼이었다.

모르는 소녀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낯선 존재.

이 거짓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까? 이해하기조차 힘든 세계를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말리크는 무릎 위에 주먹을 꼭 쥐었다.

그 연약한 손가락들이 그의 평정심을 지키려 애쓰며 가늘게 떨렸다.

뭔가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자벨의 부드러운 질문에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목구멍에 말이 막혔다.

직면한 엄청난 과제 앞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했다.


말리크는 이자벨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마주했다.

긴장된 침묵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말리크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지 않고 어떻게든 이 대화를 헤쳐나갈 방법을 찾느라 머릿속이 급하게 돌아갔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표정이 차분하고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기를 바랐다.

 "나도 신비술에 항상 관심이 있었어요." 

그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내용 뿐이었죠."

 

이자벨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고, 그녀의 고운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말리크는 잠시 동안 그녀가 자신의 속임수를 간파한 게 아닌가, 온순한 여동생으로 위장한 사기꾼을 알아차린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 순간은 금세 사라졌다.

이자벨의 표정이 누그러졌고 그녀는 말리크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그녀의 눈을 밝게 빛나게 하는 것 같았다.


"아, 그건 농담이겠지, 실비." 

그녀가 부드럽고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언제나 공부를 잘했고, 배우기를 열망했잖아. 조금만 도와주면, 나만큼 신비술을 마스터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이자벨의 말이 말리크의 가슴을 조여왔다.

순진하게 도움을 주겠다는 그녀의 말은 마치 잔인한 조롱 같았다.

말리크는 이빨을 악물고 밀려드는 공포와 맞섰다.


이런 허울 좋은 짓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잠시 잠시 벗어날 위험이 커질 뿐이었다.

신비로운 것에 관심이 있는척 연기하고, 전사인 자신의 가슴속에 결코 없었던 지식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일… 이는 재앙을 부르는 일이었고, 그가 지금까지 간신히 유지해 온 허약한 거짓말을 허물어뜨리는 것이었다.


말리크는 호화로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움직임은 뻣뻣하고 갑작스러웠다.

이자벨이 놀라움과 걱정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실비…?”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말리크는 침을 힘겹게 삼켰다.

변명거리, 그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이 점점 위험해지는 상황에서 빠져나갈 핑계가 필요했다.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그럭저럭 말을 짜내며 말리크는 서둘러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이자벨. 하지만 방으로 가봐야겠어요.”

 

그는 이자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려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뛰쳐나온 그는 맨발로 광택이 나는 복도 바닥을 달렸다.


가슴속에서 공포가 발톱을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쌓여가는 속임수의 무게가 마치 물리적인 힘처럼 그를 내리눌렀다.


말리크는 자신의 방에 도착해서야 속도를 늦췄다.

무거운 참나무 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닫혔다.

그제서야 그는 굳은 문에 등을 기대고 풀썩 주저앉았다.

가슴을 벌떡거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가자 절망이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자신이 이런 위장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모르는 소녀의 인생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상을 자연스럽게 흉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은 자신이 바보였다.



*****



말리크는 호화로운 욕실로 들어섰다.

맨발이 부드러운 욕실 매트에 푹푹 꺼졌다.

이 공간은 데브뢰 가문의 부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반짝이는 대리석, 금도금된 설비들은 그가 이전에 살았던 집의 지저분하고 비좁은 욕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넓은 세면대로 다가갔다.

낯선 제품들이 줄지어 늘어선 선반 위로 눈길을 쓸었다.

색이 들어있는 액체가 담긴 섬세한 유리병, 화려하게 장식된 크림과 파우더의 항아리,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색조의 매끈한 립스틱 튜브...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말리크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연분홍색 크림이 담긴 작은 병에 손을 뻗었다.

비단같은 내용물을 보려고 뚜껑을 열었다.

그는 주저하는 손가락을 혼합물에 담그고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를 문지르며 그 목적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이것은 피부를 부드럽게 해주는 일종의 로션일까? 아니면 볼의 장밋빛을 더해주는 화장품일까?


그는 그 항아리를 한쪽으로 치우고는, 이자벨의 속눈썹이 거실의 부드러운 빛 속에서 반짝이던 모습을 떠올리며, 날씬한 튜브의 검은 액체에 시선이 끌렸다.

그는 뚜껑을 풀고 작은 브러시가 나오는 것을 보며, 그런 것을 바르려면 어떤 능숙하고 숙련된 움직임이 필요할지 상상하려고 했다.


말리크는 샤워기로 시선을 돌렸다.

안에 있는 선반에 늘어선 여러 병을 보고는 눈살이 찌푸려졌다.

샴푸, 컨디셔너, 바디워시, 각질 제거제 – 각자 다른 효과, 여성의 매력을 알아내는 각기 다른 열쇠를 약속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의 옛날 삶에서 목욕은 실용적인 일이었다.

전투의 때와 땀을 없애기 위해 거친 비누로 빠르게 문질렀다.

하지만 여기, 부와 특권의 세계에서, 심지어 몸을 씻는 행위조차 예술의 경지로 올라갔다.


말리크는 아무 병이나 집어들고 진주빛 액체를 손바닥에 짜냈다.

섬세한 꽃향기가 콧구멍을 가득 채우며, 거품을 내고 낯선 곡선 위로 손을 쓸었다.

그의 것이 아닌 이 몸을 만지는 것, 이 부드러움을 느끼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말리크는 낯선 몸을 내려다보았다.

곡선과 윤곽은 완전히 이질적이었고, 그 위로 쏟아지는 따뜻한 물줄기마저 생소했다.

머뭇거리며 그는 가슴 위의 섬세한 쇄골과 무겁고 불편한 젖가슴을 만졌다.

 


이토록 자신의 육체와 단절된다는 건 초현실적인 경험이었다.

전생에서 말리크의 몸은 무기였다.

오랜 세월의 잔혹한 훈련과 끈질긴 전투를 통해 갈고 닦은 도구.

상처 하나, 굳은살 하나, 긴장된 근육 하나하나를 필연의 산물로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몸은? 수수께끼였다.

아직 풀지 못한 퍼즐.

피부는 매끄럽고 흠 하나 없었으며, 전쟁의 참혹함에 물들지 않았다.

근육은 부드러웠고, 한때 그가 손쉽게 다루었던 응축된 힘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냘픈 팔과 살짝 벌어진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말리크는 좌절감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이 몸은 감옥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

결코 바라지 않았던 삶에 그를 가두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