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이 비웃음으로 일그러졌다.

"동료요? 농담하지 마세요, 아버지. 우리는 엘리트에요. 사회의 최상류층이죠. 왜 우리가 그런 쓰레기들에 신경을 써야 하죠?"


"진정해라." 

데브뢰 씨는 손을 들어 타이르듯 웃었다.

"성급하게 굴지 마라. 가장 거대한 나무라도 땅에 박힌 강한 뿌리가 있어야 버틸 수 있는 법이야."


말리크는 그 비유에 온몸이 굳었다.

그와 같은 각성자들이 데브뢰 집안의 번영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암시였다.

말리크는 입을 열었다.

신랄한 반박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데브뢰 씨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말이 막혀버렸다.


"그렇지 않니, 실비?"

그가 은밀한 도전의 뜻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말리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갑자기 타들어 왔다.

데브뢰 씨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그가 가문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물기 위해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데브뢰 씨가 내건 도전의 무게가 숨막히는 긴장감이 되어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말리크는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손을 주먹 쥐고 있었다.

손톱이 연한 손살을 파고들었다.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순간이었다.

이 저주받은 형상으로 눈을 뜬 후부터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드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의 정체가 노출되고, 그가 애써 쌓아올렸던 허울이 산산조각 날 것이다.


이자벨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평소의 거만한 경멸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어때, 실비? 아버지 말씀에 반대하지 않겠지?"


말리크는 이를 악물었다.

목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온몸을 내부에서부터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이 모든 부당함,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보다 하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함부로 무시하는 잔인함.

이 모든 것이 그가 평생 견뎌야 했던 편견의 왜곡된 메아리였다.


그런데, 이 몸으로, 이 저주받은 존재로서, 그는 반격할 힘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가벼운 떨림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되어, 마치 불타는 용암처럼 혈관을 타고 흘렀다.

그는 이 감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감각은 그 자신의 심장 박동만큼이나 친숙했다.


각성이다.


말리크는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하면서도 황홀하기까지 한 깨달음이 그를 휩쓸었다.

이 형상에서도 그의 본질은 부정될 수 없었다.

한때 그의 타고난 권리이자, 그를 대중과 구별시켰던 힘, 그 선물이 다시금 꿈틀대기 시작했다.


피부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힘, 폭발하고 싶어 안달하는 힘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이 그를 집어삼키지 않으려면 통제해야만 하는, 중독적이고 매혹적인 감각이었다.


점화된 에너지가 마치 용암처럼 말리크의 혈관을 흘렀고, 신경의 끝자락을 지져댔다.

무시무시한 고통의 압박에 말리크는 이를 악물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멀리서 데브뢰 가족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에 그들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에 불과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의 시선은 자그마한 몸을 뒤흔드는 이상한 떨림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점화의 절정에 이르자, 말리크의 시야가 흐려졌다.

우아한 거실의 윤곽이 녹아내리며  만화경 속의 색처럼 뒤섞였다.

마치 속의 뼈마저 불타오르는 힘을 받아들이려는 듯, 몸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굳게 다문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깊은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참기가 힘들었다.

데브뢰 가문, 이 명예로운 이름을 더럽히는 존재로 치부하는, 그들의 앞에서 연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맺혔고, 조약돌만 한 크기로 줄어든 듯한 폐로 숨을 들이쉬느라 가슴이 들썩였다.

이 극심한 고통은 정신을 부수기 직전의 고문 같았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느껴졌다.

태고의 원초적인 무언가, 너무나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것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 힘은 우주의 나이만큼 오래되었고, 원래 그가 가지고 있었던 강대한 힘이었다.


그리고 지금,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 힘은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말리크는 각성한 힘을 통제하려 애쓰며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굳은 살을 파고드는 손톱이 초승달 모양의 자국을 새겼다.

입술이 찢긴 듯 금속 맛의 피가 났다.


주변세계가 흐려지고 뒤틀렸다.

현실의 경계와 비물질적 세계가 하나로 퍼지며 더 이상 구별할 수 없었다.

파도처럼 몰려드는 원초적 에너지의 바다를 떠돌았다.


그리고 시작되었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소용돌이가 잦아들었다.

말리크는 숨을 헐떡거렸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흐릿한 시야가 서서히 선명하게 돌아왔다.


데브뢰 씨는 얇게 감춰진 경멸과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을 뒤덮은 침묵을 깨뜨리는 듯한, 데브뢰 씨의 날카로운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리크는 나이 지긋한 그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계와 불신이 섞인 표정이 주름투성이의 얼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데브뢰 씨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말리크는 남자의 당혹감을 즐겼다.

데브뢰 집안에 배어 있던 우월감을 뒤흔든 것에 비뚤어진 만족감이 온몸으로 퍼졌다.

공포의 냄새가 진동했고, 그 냄새는 말리크의 안에 잠재한 힘의 불길을 더욱 강하게 타오르게 했다.


도미니크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섬세한 얼굴이 혼란으로 일그러져, 그녀의 아버지와 한때는 하찮은 골칫거리에 불과했던 이복 동생 사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데브뢰 씨는 손을 들어올린 채, 말리크를 계속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알 수 없는 속셈을 가진, 우리에 갇힌 포식자에게 다가가는 것 같은 긴장감이 그의 몸짓에서 느껴졌다.


"느끼지 못하겠니, 도미니크?" 

데브뢰 씨는 경외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힘은... 내가 경험해 본 어떤 것과도 달라."


말리크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남자의 불편함을 음미했다.

새롭게 얻은 권력과 우월감이 그를 취하게 했다.

각성된 에너지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이 주변의 공기마저도 변형시키는 듯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실비?"

데브뢰 씨는 다시 허세를 부리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의 눈은 마음속에 자리잡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말리크는 단호하게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지금 자신이 차지한 호리호리한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나운 빛이 눈에 반짝였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유순하고 음침한 실비가 아니었다.

다시 태어난 전사, 말리크 톰슨이었다.

그리고 이런 인간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다.



*****



새벽의 첫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고, 방안은 따뜻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말리크는 이불 속에서 꿈틀하며 눈을 떴다.

꿈의 잔재가 희미하게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잠시 동안, 낯선 환경에 어리둥절한 그의 마음은, 자신이 익숙했던 소박한 집과는 대조를 이루는 호화로운 가구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기억들이 폭발하듯 밀려들었고, 그 기억의 급류는 그로 하여금 들뜬 마음과 불안정한 마음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각성.


그는 혈관을 타고 흐르는 희미한 힘의 고동, 그 속에서 일어난 심오한 변화를 일깨워주는 증거를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만약 그가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를 집어삼킬 듯한, 중독성 있고, 짜릿한 느낌이었다.


이불에서 빠져나온 말리크는 부드러운 카펫 위를 걸었다.

맨발이 푹신한 카펫 틈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한때 그토록 낯설게 느껴졌던 자신의 고운 얼굴을 뜯어보았다.


이제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표면 아래에 숨어 있는 전사의 아주 희미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담긴 강렬함, 눈빛에서 번득이는 힘은 그 안에 잠재된 힘의 원천을 암시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그의 집중을 흐트렸다.

문틈으로 앨리스가 머리를 들이미는 게 보였다.

앨리스의 동글동글한 얼굴엔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실비야?"

그녀는 소곤거리듯 물었다.

"괜찮아…?"


말리크는 한동안 어린 소녀를 바라봤다.

물론, 앨리스도 변화를 감지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데브뢰 집안은 체면을 중시할지언정, 각성자 세계의 복잡한 사정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괜찮아."

그는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그냥... 적응 중이야."


앨리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몸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가 겪은 격렬한 변화의 어떤 외적인 징후라도 찾으려는 듯이.

잠시 후, 그녀는 무언가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말리크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다가올 날을 향해 마음을 다지며 느슨하게 주먹을 쥐었다.

많은 질문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새로운 힘의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