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는 빛을 바랬고, 협은 저 밑으로 떨어졌다.”

목소리가 전장에 낮게 울렸다.
검은 장발의 사내가 시체로 이루어진 산 위에 올라있었다.

“…그렇기에, 그대들은 무너졌다.”

해가 지는 풍경 아래에.
붉은 안광의 사내가 약간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천마. 단 한 사내에 의해서 정파는 멸망했다.
진부하고도, 정의로운 이야기 대신에 악이 승리하는 역사가 새겨졌다.
시체의 산 위에서 고민하던 천마는 그대로 죽은 이의 등판을 바닥 삼아 앉았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서 상념이 시작되었다.
그는 지난 시간, 끝도 없는 악업을 쌓아오면서도 끝을 알수없이 강해졌다.
단신의 힘만으로 천하를 호령할 정도가 되었고, 고금제일인은 진작에 넘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루하다.”

만일 천마가 다른 취미가 있었더라면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검을 쓰는것 이외에 할줄 아는것이 하나도 없었다.
생사결만이 기쁨을 주었고, 맞수와 겨루는 것은 말 그대로 전율이었다.

“나는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

생사경을 이룩한 그에게 수명이란 의미가 없었다.
그의 맞수가 나올때까지 기다린다는 선택지도, 지루해 죽을것 같았다.

“…괜히 죽여버렸어.”

그는 가장 위에 있는 노인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무림맹의 맹주였지만 몇합만에 절명해버린 인물.
현경 중기라고 하길래 진심으로 대해줬더니만 제 값을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찌해야하는가….”

천마는 훌쩍 뛰더니 가볍게 바닥에 안착했다.
그때, 그의 눈에 검 하나가 보였다.

“무림맹주의 검.”

그 명칭 하나가 모든것을 나타내었다.
천마는 꽂힌 검 하나를 바라봤다.

“환생도라….”

무림맹의 12가보 중 하나로써, 금고에 굳게 보관되고 맹주만이 지녔던 검.
전설로는 죽기 직전에 심장을 찌른다면 윤회하여 새 삶을 얻을수 있다고 했다.

“허, 하지만 결국 못 찌르고 죽었군.”

천마는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서, 검날을 자신의 가슴팍에 갖다댔다.

“맹주, 그 전설은 내가 시험할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천마가 웃었다.

“저승에서 안식하기를.”

-푹.

*

*

*

“….”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소녀가 천장을 바라봤다.

‘개꿈인가.’

개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137년의 기억이 생생했다.
지금도 압도적인 기억의 질량에 휩쓸려, 오히려 천마라고 불리는게 편했다.

소녀는 잠시 뒤척거리다 다시 잠에 들었다.

*

*

*

지난 천마대전 이후 150년.
그때, 모든 문파들은 정파와 사파나 무론대소하고 고수들이 전부 죽어버렸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비급서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소실되거나 사라졌고, 나머지 일부마저 시장에 풀려서 뺏기고 뺏는 싸움이 벌어지다 소실되어버렸다.

그렇기에 구파일방이란 호칭은 옛날의 영광이 되었다.
그들의 후손과, 후원하겠다는 자들이 모여서 억지로 일으켜세웠지만.
그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대종사마저 죽어버려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낼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세대가 지나고나서야 무공을 창안할만한 인물이 나왔고, 구파일방보다는 세가 약하지만 지역 내에서는 강세인 문파들이 나왔다.
그리고 또 한 세대가 지나자, 세를 잡은 문파들은 서로를 구파의 계승이라 부르며 전쟁을 벌이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살아남은것은 육파가 되었다.

그렇게 굳혀진 무림의 세력은 계속 이어져내려 서서히 기틀을 잡아갔고 옛날의 구파일방과 다를바가 없었다.
아니, 그렇게 여겨졌다.

‘70세에 절정을 이룩하다니! 이 무슨 기적인가!’
‘오오…, 33세에 일류에 이르다니, 최연소시오!’

“꼴값들 떠네.”

천마, 아니. 현재 이름 유강은 낮은 무학 수준에 이마를 짚었다.
예전에 그 드높았던 무림은 어디갔는가, 고작 어린애들 놀음같은게 무림이란 말인가?

70세에다가 무림맹주라면, 최소한 화경은 되어야 할진데.
고작 초절정을 가지고 천하제일인을 논하다니. 통탄할 지경이었다.

“유강아!”

그리고 그때 그한테로 달려오는 소녀가 있었다.

“뭐냐?”

“스승님이 부르셔! 선배님이 43세로 일류에 등극하셨는데 축하하자고….”

“안 간다고 전해라.”

“그래!”

천마는 벽보를 보며 고민에 잠겼다.
혹시 이것은 기회가 아닌가 싶어서.

‘정파들이 놓친 인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알기로 신교는 아직도 세가 살아있었다.
천마의 죽음 이후로 극도로 폐쇄적이게 되었지만,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키워서, 내 맞수로 성장시키게 한다면?’

꼭 죽일 필요는 없었다.
그들의 재능으로 자신을 따라잡게 하면 된다.

생사결도 즐거웠지만, 그보다는 싸움이 일차원적으로 즐거웠다.

“일단 이 빌어먹을 문파부터 뒤엎어 놔야겠군.”

유강은 문파의 문을 발로 찼다.
그러자 소녀가 황급히 달려왔다.

“유강아! 발로 문 차지 말라고 했잖아!”

“상관 없다. 장문인께서는?”

“저기…, 침소에 계셔.”

“흠.”

유강은 검을 들었다.

“유, 유강아…. 혹시?”

“별거 아니다.”

그가 침소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장문인이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것이 보였다.

“장문인님?”

“오오, 유강 아니냐!”

눈에 띄게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그야, 문파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으니까.

“제가 이번에 무공을 대성해서 좀 보여드리려고 합니다만, 괜찮습니까?”

“그래 그래, 마음껏 하거라.”

유강은 숨을 내쉰 다음 검을 들었다.

“저기, 초식을 보여줄거면 침소가 아니라….”

“초식이 아닙니다.”

유강이 검기를 둘렀다.
그 순간, 방 안에 적막이 흘렀다.

“장문인님?”

“유, 유강아…. 유강이가….”

그렇게 말 없이 바라보던 장문인이 그대로 뒤로 엎어졌다.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물자, 유강이 굳었다.

“…뭐?”

보통 이 나잇대라면 절정에 이른다.
아무리 43세가 최연소라고 해도, 19살의 검기가 거품을 물게 만들 일인가?

“….”

무공이 퇴화됐다.
그 말이 무엇인지 천마는 뼈저리게 느끼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