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이상하지, 인간들은. 난 그저 너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 주었을 뿐이다."


"그게 무슨...!"


"너희가 이 땅에 왕국을 세울 때에, 너희의 왕과 그 아래의 신하들은 하나되어 그들의 피가 흘러야만 힘과 재능의 축복을 가지고 태어나길 염원했다."


"...뭐...?"


"그렇게 '푸른 피'가 흐르는 이들만이 힘을 가지고, 자연스레 힘은 곧 권력이 되었다. 첫 왕조가 스러지고 새로운 왕국을 세운 이들은 이제 그 힘이 수명에 영향을 주기를 염원했다. 가장 날카로운 검은 너무 오랜 세월을 거쳤기에 제대로 쓰기 힘들어 나온 생각이었지."


"..."


"그러다, 너희는 내가 실체를 가진 존재이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나는 때때로 특이한 빛깔의 짐승이기도 했고, 인간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끝에 난 여인의 몸이 되었다."


"한데 어째서..."


"내가 실체를 갖추고 이 땅을 거닐자, 내게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힘을 독차지하고 백성을 짓밟아 짜낸 부라는 즙으로 담가낸 권력이란 술에 취해 패악질을 저지르던 지배자들은 결론을 내렸지. 

더 이상 아랫것들에게 진실이 퍼져 여신의 이름 아래 새로운 왕국이 태어나, 자신들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전에, 아랫것들을 선동해 악신으로 몰아 버리자고."


"그럼, 처음에 번제로 희생되었다던 이들은..."


"내게 온 이들이 아니라, 내게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기에 움직이려던 이들이었다."


"하면, 저는 대체..."


"저치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고혈을 빨아내 말라죽은 이의 수를 명분을 위해 참살한 이들의 수에 더하고, 꾸며낸 가상의 악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행했다. 그것이 비로소 악신으로서의 나에게 연결되는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말이지." 


"..."


"그 뒤로는 네가 겪은 대로다. 악신의 주구가 들어와 부름에 답해 자신 근처의 이들부터 기습해 죽여 나가고, 악신의 숨은 주구의 역할을 부여받은 이들은 전부 내게 연결되어 진실로 그들의 왕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움직이게 되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다만 너희들이 바라던 대로 이루어졌노라."


"..."


"실로 우습게도, 날 악신으로 덮어씌운 것들이 사라지니 다시 여신의 태로 돌아오는 구나. 하나 내 죄를 외면할 이유는 없으니, 이만 끝내거라."







그날, 용사는 악신을 물리쳤다.

용사는 악신의 거처에서 생존자들을 찾아 돌아와,

승전연을 위해 모인 왕국의 온 귀족들을 죽였다.

승전의 축하라는 명목으로, 실상은 아랫것들이 꿈꾸었을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롱할 의미로 온 왕국에 생중계 중이던 수정구들에 의해 참사또한 그대로 전달되었다.


용사는 용사였기에, 그들 하나하나가 지은 죄를 다시금 하나씩 꼽으며 도축해 나갔다.

누구도 무고하지 않았다.

가장 세금이 가벼운 영지가 7할이었다.

귀족의 자제들은 수련이나 놀이를 위해 걸음마를 떼고 말을 뗄 즈음이면 수십의 인명을 양손에 진득하니 묻힌채 자라났다.

마법의 연구를 위해 아랫것들을 끌고 가 태우고, 꿰뚫고, 안팎을 뒤집고, 몸속에서 식물을 성장시키고, 얼리는 등 온갖 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다.

때때로 검술을 시험하기 위해 무기를 쥐여준 채 토막을 치기도 했다.

정적의 암살을 연습하기 위해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아랫것들 중 하나를 대충 골라잡아 목이나 배, 가슴을 칼로 쑤셨다.


아랫것들은 압제자에 분노했다.

기사가 수십을 토막내자 수백이 달려들어 갈갈이 찢어냈다.

마법사가 수백을 휩쓸고 다니자 마법사의 위로 건물을 무너뜨렸다.

아무리 아랫것들을 끔찍하게 죽여 내걸어도 그간 짓밟혀 온 울분과 밝혀진 규모에 타오르기 시작한 분노는 덮이지 않았다.


계절이 두번 바뀔 즈음에, 왕국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독점되어 있었던 힘이 널리 퍼지길 바랬다.

소원은, 확실하게 이루어졌다.


더 이상 마법사들은 태양보다 밝은 화구를 던지지 못하고, 지형을 홀로 뒤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더이상 수십이 아니라 수백만이다.

더 이상 검사들은 칼 한자루로 하늘을 가르는 참격을 휘두르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더이상 수십이 아니라 수십만이다.


힘은, 이제 더 이상 푸른 피만의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