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찻집 겸 꽃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괴물로 변한 손님을 쓰러뜨릴 즈음, 웬 소녀와 병아리가 나타났다.


*


나와 여우는 소녀의 손에 이끌려 인적 드문 곳으로 향했다.


마을의 뒷골목은 처음 와보는지라 새로웠다.


눈이 쌓여있단 점은 여느 골목과 동일했지만 뒷골목만의 정경도 있었다.


이를테면 구석진 곳에 쌓여있는 술병이라던가.



"저도 마법소녀에요. 얘가 제 파트너 요정이고요."



소녀가 병아리를 가리켰다.


저 '도'라....


나는.


나는 마법소녀였던 걸까?


아스가르드의 신왕이 틀림없이 발키리로 임명했던 걸 기억한다.


나는 뭘까.


내 몸, 이 캐릭터는 뭘까.


다시, 나는 뭘까.



[그래서? 왜 숨으라고 한 게냐.]



감정이 남아있는지, 여우는 꽁한 어투로 물었다.



"사람들이 오고 있었잖아요."


[그거랑 무슨 상관이더냐.]


"이 마을에선 마법소녀를 사람들이 보면 골치 아프거든요."



여우는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골치가 아파요? 괴물을 막아준 거잖아요."


"그게... 하아, 사연이 복잡해요.

결론적으로 여기서 마법소녀는 눈에 안 띄는 게 좋아요."



내가 마법소녀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한테도 해당되는 사안이겠지 이거.



"괴물이라도 나타나면요?"


"사람 눈을 피해서 처리하든가 하셔야죠."



소녀는 시선을 아래로 하고 답했다.


'하든가'라는 건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걸까.


어쩐지, 소녀는 떳떳하지 못한 선택지를 심중에 품고 있는 듯 보였다.


병아리가 난입하여 말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거다 삐.

정체를 들키는 건 더욱 금물이고. 

이것도 좋지 않냐삐. 옛날 생각도 나고.


"헉! 정체도 걸리면 안 돼요?"


"예.

... 혹시 들킨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지만 알바처 사장님한텐 털어놓을 생각이었는데."



알바처 사장이라고 불러야 할지, 집주인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선 그렇게 대었다.


소녀의 답은 단호했다.



"안 됩니다."


"흐잉. 왜요?"


"이유는... 말씀드리기 곤란해요."



또 이거야?


대장간에 있을 적 기억이 새록새록.


돌이켜보니 대장간에서 무기 안 나눠주던 이유, 그거 결국 나한테 안 알려주지 않았나?


소녀가 한마디 보탰다.



"설령 그쪽이 마법소녀가 아니라 진짜 발키리래도... 그건 그것대로 들키면 안 되고요."

 


이쪽도 당연히 경위를 설명하지 않았다.


캐물어도 진전이 없는지라 "아 네에 그렇군요"하고 말았다.


암, 내게 가능한 건 입술 삐죽 내미는 정도겠지.


잘 압니다요. 칫칫칫.


그후의 대화는 알맹이 없는 작위적인 수준에 그쳤다.




*




그 초록옷 마법소녀... 이름은 릴리라고 했었나.


릴리와 헤어지고 며칠 동안 따분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꽃집에서 차를 팔고 접객을 하고.


틈틈이 아저씨에 대한 것도 묻고.


번번히 "그런 사람 못 봤는데"라는 답만 듣고.


지겹도록 쌓이는 건 정보도, 전투도 아니고 평가였다.


점원으로서의 나를 향한 평가.



"이 꽃집에 꼭 내 막내딸만한 아이가 커피를 판다고 하던데."



장년 즈음의 남성이 들어오며 뱉은 대사는, 노골적이었다.


젊은 여성이 아는 체하였다.



"아 오빠! 여기 맞아."



저 나이차로 오빠라니.


어처구니가 없네.



"대체 저희 가게 소문이 어떻게 난 거에요."


"어린 아이가 서투른 커피를 내려주는 가게."


"크림 얹어달라고 하면 중간에 조금씩 빼먹는 가게."



서투른 커피라니.


너무하다.



"처음 몇번 잘못 내린 거 가지고 오래 놀리시는 거 아니에요?"



핸드드립 커피란 놈은 인스턴트완 다르게, 필터로 한번 걸러야 한댔다.


나는 그것을 얼마 전에야 배웠다.


집주인, 아니 사장은 왜 이런 중요한 정보를 뒤늦게서야 알려주는 건지.


젊은 여성이 대꾸했다.



"시골은 돌릴 소문이 많지 않잖아."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불공평한 기분이다.


나도 한번쯤은 남 놀려먹고 싶은데 계속 놀림당하기만 하니 그렇다.



"피이...."




출입문이 재차 몸을 기울였다.


적절한 순간이었다.


들어온 이는 구부정한 할아버지였다.


어라. 낯이 익은데.



"아! 전에 오셨던 '설탕 많이' 할아버지! 맞죠!"


"설탕 많이? 아가씬 뉘신데 남의 커피 취향을 아는가?"



노인의 화답은 야속했다.



"며칠 전에 오셔놓고 왜 그러세요. 맛없는 커피로 대접했다고 언짢으셨던 거에요?"


"아니, 난 여기 한달만에 오는 걸세.

그리고 아가씨는 누구인가? 여기 주인은 방년의 처자였는데."



짓궃은 장난이라기엔 과하게 티없는 낯이었다.


차라리 내가 꿈을 꾼 건가 싶을 만큼.



"그, 그런가요...?"



무안해하는 어린 아이를 가여이 여기신 걸까.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그 무시냐. 내가 나이를 먹어서 잊은 걸 수도 있겠네."



지워지지 않는 찜찜함을 달랠 수단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할아버지도, 그런갑다 하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주문은 전과 동일했다.


나는 동요를 가라앉히고자 태연하게 조언했다.



"할아버지 그러다 당뇨라도 오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허허, 이미 와서 꼴까닥한 걸세."



꼬, 꼴까닥?


뭘 했다고?


꼴까닥?



"어, 어어, 어, 어르신!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마세요. 무섭게!"



개그도 사람을 가리는 법이다.


저런 건 나 같은 응애들이 해야 안 무서운 농담이다.


흰머리가 성성하고 주름이 피부를 덮은 노인이 하면 개그가 아니라고. 스릴러지.


노인은 짐짓 모른 척 물었다.



"무슨 말인가. 자네도 꼴까닥해서 여기 온 거 아닌가."


"전 꼴까닥이 아니라 팔팔한데요."


"허기는, 꼴까닥했어도 팔팔할 수도 있지."



노인은 껄껄 웃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오빠 여동생 놀이하던 두 남녀가 면박을 주었다.



"할배요. 애 괴롭히지 마쇼.

여기 사장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가 저 애 덕분에 살 만해졌는데."


"할아버진 이렇게 작은 애를 괴롭히고 싶으세요?"



처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앉은 상태로. 서서 라떼 아트를 그려주고 있는 나를.


키차이 때문이구나.


아무래도 남자로서 비참한지라 슬쩍 까치발을 들었다.


처녀는 그제서야 손을 뗐다.


진작 그럴 것이지. 흥.


새침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누구한테 쓰다듬받고 편안해하는 어린애가 아니란 뜻이었다.


실외엔 손을 떨며 이쪽을 보는 소년이 있었다.


지갑 속을 세어보았다가 한숨을 쉬고,

꽃집 안을 보았다가 다시 한숨을 쉬고.


문을 엵고 소년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게 손을 잡힌 소년이 "헉"하며 숨을 마셨다.



"들어와. 춥잖아."


"나... 돈 없어."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라 따지려다 관뒀다.


초등학생 남짓의 신장이었지만, 소년의 키는 나보다 근소하게 위였다.


어련히 내가 연하라 속단한 거겠지.



"그냥 들어와. 내가 내줄게."



시퍼렇게 변해가는 피부를 보고도 외면하기는 쉽진 않았다.


왠지 이 마을에 막 도착했을 당시의 날 보는 듯도 했고.


소년은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어버버거렸다.


가게 후문으로 빠져나가 창고에 있던 가정용 수프를 꺼내와 물을 붓고 끓였다.


'집에서 먹는 걸 접객용으로 쓰진 말라'는 집주인님의 지시가 있었지만, 추위에 절여진 이 소년을 보았다면 그녀도 날 꾸짖지 않을 터다.


따끈따끈한 수프를 받고도 망설이는 소년에게 답답한 마음에 한두 숟갈 떠먹여줬다.



"아아."


"됐어, 내가 할게."


"'아아' 하라고."



소년이 고분고분하진 않았지만, 반항도 초반 몇번 뿐이었다.


소년은 장미빛 얼굴색이 되어선 순종했다.


불만은 꺼지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얼굴에 화색이 도는 점은 안심할 만하였다.


숟가락을 든 자와 받아먹는 자가 다르니 떠먹이는 짓도 용이치 않았다.


자꾸만 입가에 묻히게 되었다.


나는 그 점이 도통 신경 쓰였다.



"너 이대로 가만히 있어."



나는 그렇게 이르곤 주머니를 더듬었다.


이 언저리에 있었을 텐데- 하고.


티슈를 꺼냈다.

이유도 모른 채 집주인의 압박에 못 이겨 챙겼던 티슈.


티슈로 소년의 입가를 깨끗이 하는데는 큰 수고가 들진 않았다.



"어리구만."



이는 앉아있던 손님 중 하나가 뱉은 평가렸다.


뒤늦게 카페의 손님들을 돌아보니, 하나같이 흐뭇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대놓고 싱글벙글인 이도 있었고.



"그런데 너, 돈도 없으면서 왜 여길 기웃거린 거야?"



뜻모를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환기를 꾀하고자 소년에게 질문했다.



"꽃 보려고 온 거야?"


"보려는 건 꽃이 아니고 사람이었는데...."



소년이 머뭇거렸다.


아이고 답답해.



"사람 찾으려고 온 거야?"


"찾는 거 아니고, 보려고 온 거야."


"무슨 차이야?"


"큰 차이...."


"으휴, 누군데? 여자야, 남자야?"


"여자."



여기 오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예상 가능한 여자... 라면

뻔하지 뭐.



"알겠다. 집주... 아니, 사장님이구나?

안 됐네. 사장님은 오늘 아침에 물 받아오겠다고 호수로 나갔어."



집주인은 어제 저녁밥을 하다가 손이 베였다.


깊지 않은 상처였지만 다친 손으로 혼자서 물 떠오겠단 주장이 안쓰러워서 따라가겠다고 제안했다.


집주인은 단칼에 거절하고 기어코 혈혈단신으로 물통을 들고 떠났다.


분명히 저녁밥 때에 맞춰서 온다고 했었지.



"이따 저녁 먹을 즈음에 다시 와."


"사장님 아니고 그게... 저기 다른 사람... 인데."



소년이 날 지그시 보았다.


뭔데. 누군데. 말을 해야 알지.


울화통 터지네.


카페가 괜스레 숙연했다.


무슨 재미난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묘한 침묵을 깬 건 누군가의 참견이었다.



[여기 점원 남자다.]



여우였다.


손님들은 알아채지 못하고 어렴풋이 '누군가가 말했나보다'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왜 쓰잘데없는 간섭을 하는 거야'라는 눈빛으로 쏘아보니, 여우의 답신도 예술이었다.


졸린 눈, 일자로 굳게 다문 입, 으쓱 치켜올린 어깨, 한쪽만 살짝 올라간 눈썹.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나'라는 몸짓이었다.


아니 뭐, 그야 뭐, 그... 전생을 생각하면 그, 마냥 거짓이라고만 치부할 수도 없긴 한데 그....



"진짜인감?"


"아니 그, 어휴, 저, 어휴, 하아... 네."



고요하던 가게가 단박에 시끌벅적해졌다.


나이차가 많은 듯한 2인조 남매도, 꼬부랑 할아버지도, 방금 데려온 꼬마 남자애도, 차분히 찻잔을 기울이거나 꽃을 구경하던 다른 손님들도.


모두 시끌벅적해졌다.



"남자라고?"


"치마는 왜 입은 거야."


"여장이야?"


"정말 여자 아니라고?"


"저 외모로... 남자?"


"말세로구만."



그중에 유독 동요하는 이가 있었다.


추위에 고통받던 소년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얘기 없었잖아.

진짜야?"



선선히 고개를 까딱였다.


이제 와서 몸뚱이는 여자라는 둥, 여장은 아니라는 둥 소개하기 힘들어보였다.


애초에 딱 잘라 정의하기도 어렵잖아.


현재의 나는 뭐야.


남자의 정신을 가진-.

여장을 하는 남자애였던 여자아이의 육체를 가진-.

아스가르드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근데 발키리인-.

그래서 지금껏 아스가르드인의 육체라고 여겼는데 이제 와서 마법소녀라고 하는-.


나도 모르겠다고.


나열해놓고 보니까 더 모르겠다고.


하나도 모르겠네, 망할.


남한테 뭐라고 설명하겠어.


무리무리.



"그그, 그런... 남자, 남자가...."



소년이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얼굴이 자글자글하게 구겨졌다.


벌떡 일어나서, 소년이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남자면 치마 입지 말란 말이야!! 으아아앙!"



의미심장한 절규였다.


하의가 치마 뿐이란 사정은, 알리지 않는 편이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