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tsfiction/101976934 - 프롤로그
해가 막 얼굴을 내민 아침, 밀짚에 천을 씌워 만든 침대에서, 한 소녀가 곯아떨어져 있었다.
“커, 커어어··· 크에, 에엑··· 커억···!!!”
긴 금발 머리는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개털처럼 헝클어져 있고,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잔뜩 찌푸린 얼굴.
목이 졸려 죽어가는 듯한 코골이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소녀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갈색 머리의 중년 여성이 냅다 호통쳤다.
“디아나! 얌전히 좀 자지 못하겠니!”
불호령이 떨어진 순간, 언제 코를 골았냐는 듯이 소녀가 조용해지는 바람에 하도 어이가 없던 소녀의 어머니는 하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곧 아침 먹어야 하니 그만 일어나렴.”
“···네.”
피식 웃은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아주자, 죽은 듯이 조용히 있던 소녀, 디아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가리며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요즘은 그 개 같은 꿈 안 꿔서 좋았는데.”
머리 위로 거대한 박스가 떨어지는 꿈. 아직도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고통에 디아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소녀의 입가에는 쓴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엄연히 말하자면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는 전생의 기억이었으니까.
“하아···.”
서늘함이 느껴지는 가슴팍을 무심코 쓸어내리던 손이 중간에 턱 걸려 버리자, 디아나의 표정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이 쓸모없는 지방 덩어리···.”
요즘 계속 부풀고 있는 제 가슴팍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던 디아나는 짜증스레 뒷머리를 긁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문짝도 없이 뻥 뚫린 창문으로 걸어갔다.
“어, 하늘 고래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푸른 고래 무리를 발견한 디아나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오늘은 수가 많네.”
수컷으로 보이는 거대한 고래가 둘, 그보다 다소 작은 암컷이 아홉, 어미를 따르는 새끼 고래가 십여 마리. 고래 무리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장관을 넋 놓고 바라보던 디아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에 봤을 때는 정말 놀랐는데...”
어린 시절, 하늘에 고래가 날아다니는 걸 보고 신이 나서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더랬다. 그걸 본 아버지가 시큰둥하게 고래는 원래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했을 때는 또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
“너희들은 자유로워서 좋겠다.”
문득, 하늘을 가로질러 자유롭게 날아가는 고래들을 향한 부러움이 솟구친 디아나는 긴 한숨을 토하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그날 오후가 되어도 디아나의 우울한 기분은 풀리지 않았고, 울타리 안의 닭들에게 모이를 대충 던져주며 소녀는 연신 투덜댔다.
“뭐가 좋다고 그리 새파래, 엉?”
마침내 애꿎은 하늘에까지 시비를 걸어대던 디아나는 웬 수탉 한 마리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뭘 봐?”
디아나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지만, 수탉은 물러서기는커녕 덤빌 테면 덤비라는 건지 깃털을 부풀리는 것이었다.
“이제는 닭까지 성질을 돋우네.”
이게 다 자신의 이 실눈 때문이라고 디아나는 생각했다. 눈빛이 보이지가 않으니 저 닭 새끼조차 겁도 없이 까불지 않는가.
“이이이...”
감긴 눈을 똑바로 떠보려고 억지로 눈꺼풀을 밀어 올리던 디아나는 문득 이러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져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에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빌어먹을 수탉을 향해 모이통을 힘껏 던진 디아나는, 닭의 비명 소리에 낄낄거리며 울타리에서 등을 돌렸다.
분명 이대로 집에 가면 꼼짝없이 엄마에게 붙잡혀 바느질이나 하게 될 터. 소녀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집의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확 그냥 운석이나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대충 발 닿는 대로 마을을 쏘다니던 디아나는 마침내 자신의 기분을 전환 시켜 줄 만한 흥밋거리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야! 너희들 거기서 뭐 해?!”
디아나가 소리 높여 부르자, 머리를 맞대고 시시덕거리던 소년들의 시선이 소녀에게 향했다.
“또 무슨 작당을 하고 있어, 앙?”
작은 시골 마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함께 뛰놀며 자랐다. 그러다가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성별을 따라 무리가 갈렸지만, 디아나는 여전히 소년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자연히 짓궂은 소년들은 도저히 여자애 같은 구석이 없는 저 특이한 소녀를 놀려댄 적도 있었지만, 디아나는 언제나 그런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동네 형처럼 괄괄한 성미에, 그 성미를 뒷받침할 무력도 든든하니, 자연스럽게 디아나는 동네 악동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왜 그러냐, 너희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자신을 둘러싸고 대장 대장 하면서 떠받들 녀석들의 반응이 오늘따라 영 시원찮은 것이었다.
“야, 퉁퉁이. 왜 그래?”
고개를 갸웃거린 디아나가 유독 덩치가 큰 소년에게 말을 걸자, 퉁퉁이라 불린 소년이 마땅찮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너 이제 우리랑 놀지 마.”
소년의 퉁명스러운 말에, 이번에는 디아나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래봤자 소년들의 눈에는 평소의 서글서글한 표정에서 그다지 변한 게 없었지만 말이다.
“야, 무슨 개소리냐?”
잠깐 침묵하던 디아나가 나지막하게 묻자 소년들은 일제히 움찔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야, 무슨 소리냐고 묻잖아?”
소년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만 하자, 혀를 찬 디아나는 손가락 마디를 꺾기 시작했다.
“맞고 말할래, 그냥 말할래.”
“으···.”
결국, 친구들에게 등을 떠밀린 퉁퉁이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빠... 아버지가 여자애랑은 노는 거 아니랬어!”
‘여자애’ 그 단어를 들은 주변의 소년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건 자신들의 대장이 무엇보다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으니까.
“너도 딴 여자애들처럼 시집갈 준비나 해!”
퉁퉁이가 짐짓 근엄하게 외친 순간, 디아나의 눈꺼풀이 열리며 오랜만에 소녀의 회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히이이익!!!”
곧 시작될 피의 응징을 상상하며 기겁한 소년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오늘의 디아나는 주먹을 휘두를 의욕조차 없었다.
“일어나 임마. 내가 이 나이에 애들 때려서 뭘 하겠냐.”
“어... 어?”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양팔로 머리를 가리고 있던 퉁퉁이가 슬쩍 바라보자, 디아나는 뚱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안, 때려?”
“안 때릴 테니까 일어나, 새꺄.”
대장의 변덕이 바뀌기 전, 얼른 일어선 소년은 얼굴 가득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시시덕댔다.
“헤헤... 대장, 이거 내가 한 말이 아니고···.”
“알아. 아저씨가 그랬지? 요즘 나만 보면 그 소리더라.”
“맞아, 맞아!”
디아나는 다 이해한다는 뜻으로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큰 소년의 팔꿈치를 툭툭 쳐 주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데?”
신기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들을 향해 디아나가 싱긋 웃어 주자, 이내 한 소년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외쳤다.
“내가 숲에서 벌집을 찾았어!”
“벌집?!”
벌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디아나는 냉큼 반색했다. 기분 전환에는 뭐니뭐니 해도 달콤한 것이 제일이었으니까.
“우후후후···.”
좀처럼 맛보기 힘든 꿀의 맛을 떠올리며 디아나가 미소 짓자, 주변의 소년들이 움찔했다. 웃음을 흘리는 디아나의 모습이 마치 수상한 음모를 꾸미는 악당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아, 안내해. 당장 따러 가자.”
입맛을 다신 디아나가 의욕적으로 말하자 소년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벌집을 따려면 호되게 쏘일 각오와 함께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우리만···?”
퉁퉁이가 조심스럽게 묻자 디아나는 콧김을 뿜어내며 허리에 손을 얻었다.
“이 멍청이들아, 이러다가 동네 어른들이 먼저 벌집을 발견하면 어쩔 건데? 예를 들어, 톰 아저씨가 그 벌집을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
그 말에 소년들의 표정이 일제히 찌푸려졌다. 술 담그기가 취미인 그 아저씨가 벌집을 발견했다가는, 달콤한 꿀은 그대로 쓰고 맛없는 술이 되어 버릴 테니까.
“자, 제군들! 간단한 일이야, 벌집 근처에 간다. 돌멩이를 맞춰 떨군다. 잽싸게 자루에 넣고 도망친다. 그리고 우리가 전부 먹어 치운다!”
“오오오오!!!”
“이 형님만 믿고 따라라! 달콤한 보상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감에 찬 태도로 주먹 쥔 오른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 디아나가 힘껏 외치자 열렬한 박수와 고함이 뒤를 이었다.
“대장 만세!”
“어디까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 두목!”
“형님! 최고예요!”
“누나, 멋쟁이!!!”
“마지막 새끼, 누구야?!”
두 번은 참지 않은 디아나가 냉큼 아이들 틈으로 뛰어들고, 짧은 추격전 끝에 끝내 붙잡힌 범인이 관자놀이에 주먹 돌리기를 당하는 장면을 바라보며 모두가 배를 잡고 웃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