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 공원은 인적 없이 한산했다. 


그래서 여린 목소리가 똑똑히 울려퍼졌다. 


어둠을 몰아낸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바르르 떨리는 입술이 다시 열렸다.


"사랑해." 


그리고 입을 닫았다. 다시 침묵이 도래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 멀어저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해드셋을 쓰고 어디론가 걸음을 제촉하는 남자. 높은 힐을 신고 위태롭게 거리를 옮기는 여자. 

택시가 속도를 줄였다 다시 높이며 나는 엔진 배기음. 이 시각이 되어서야 활발히 움직이는 배달 오토바이.


적잖은 소음이 발생했다 스러졌다. 그럼에도, 벤치에 앉아있는 남자와, 그 앞에 서있는 여자.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있었다. 


기나긴 적막을 깨고, 먼저 입을 열던 건 남자였다. 


".......그."


".......흡, 끄흐흐. 꺄하하하!"


느닷없는 카랑카랑한 웃음소리가 남자의 말을 막았다.


"뭐, 뭐야. 하하하. 왜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던 거야?"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 급격히 말을 한 탓인지, 호흡이 불안정했다. 


"너 설마. 정말 고민이라도 한 거야? 응? 시우~ 너 진짜 그런 거야? 꺄하하하!"


여자는 이젠 배를 잡고 몸을 꺾었다. 웃겨 죽겠다는 고전적이고 과장된 표현이었지만, 가로등불 아래 해맑은 얼굴이며 청량한 폭소는 그럴싸해보였다. 


"하하하하! 아, 너무 웃긴다, 하하하! 오늘 만우절이잖아! 그걸 몰랐냐? 하하하하!"


그러면서도,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았다. 


"하하, 야, 내가 여자가 되보고 나서 느낀 건데. 그거 가장 최악의 답이야. 응? 차라리 싫으면 싫다, 그렇게 뜸들이지 말고. 알겠어?"


한바탕 웃고 난 탓인지, 여자의 눈가에는 물기가 맺혀있었다. 한 손으로 그 눈물을 훔치는 동작이, 왠지 서투르고 어색했다.


"자, 가자. 가자. 넌 내일 또 강의 들어야 하잖아? 응? 자. 오늘 잘 놀아서 즐거웠고. 응, 응."


얼버무리는 듯한 작별 통고에, 남자는 마지못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래."


"어, 아. 나 먼저 들어가도 되지? 나 집 가기 전에 편의점 좀 들렸다 갈까 싶어서. 응?"


가녀리고 호리호리한 여자와 달리, 남자는 제법 덩치가 있었다. 

여자의 의문에 대해서, 남자는 가타부타 표현을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런 건 잘 몰랐어."


목소리도 그에 맞게 낮고, 어투는 무뚝뚝했다. 


"그럼 좋아한다는 말도, 느리게 하면 안됐던 거지?"


그 의문조차 평서문과 분간이 안갈정도로. 여자는 가볍게 웃으며 남자의 말투를 지적하고자 했지만, 뒤늦게 그 내용을 깨닫고 멈춰섰다.


".......뭐?"


"좋아해. 나도."


이전이라면 동등한 눈높이였겠지만, 지금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보려면 올려다봐야했다. 


그래서 여자는 가로등 조명을 등진, 그늘진 그의 표정을 곧바로 알아볼 수 없었다. 


"사랑해."


"너, 너......"


"너를."


아까보다도 늦어진 시각에 적막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지금 여자는 그 고요를 견딜 수 없었다. 


"너, 너......"


여자의 표정이 극적으로 바뀌어갔다. 놀람, 경악, 슬픔, 고통.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착한 건 분노와 비슷했다. 


"너, 그거 진짜 좆같은 짓인거 알아?"


일반적으로 표정은 감정을 드러낸다고 하나, 그 역도 성립하는 법인 듯 했다. 

여자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는 새된 소리로 외쳤다.


"내, 내가 암만 장난이 심했다고 해도! 어? 그게, 그렇게 마음에 안들었어?"


남자는 다른 대꾸가 없었다.


"그, 그래! 내가 남자였어서. 근데 갑자기 좆 떨어지고 여자로 변해서. 내 주변에 남은 사람이라곤 너뿐이라서. 어! 너도 내가 좆같을 수 있었겠지!" 


남자는 여자의 장황한 자기혐오에 대해서 제지하지 않았다.


"그런 새끼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역겨울 수 있지! 씨발, 나라도 그러겠어. 근데, 그렇다고 그렇게 놀릴 건 없지 않냐? 어? 아무 것도 없는 나한테, 그럴 것까진 없지 않냐고!"


남자는 자기를 향한 비논리적이고 원색적인 비난에도 듣기만 있었다.


"말 좀 해봐, 이 개새끼야!"


발언권을 허락하고서야, 느리고 투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 아냐."


한 걸음.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다. 


"농담도 아냐."


한 걸음, 여자가 뒤로 물러섰다.


"......오, 오늘 만우절이었으니까"


다시 한 걸음. 남자가 여자에게 가까워졌다.


"난, 그런 거 잘 몰라."


주춤주춤 멀어지던 여자가 멈춰섰다. 


가로등 조명이 내려쬐는 밝은 동심원, 빛과 어둠의 희미한 경계선. 그 가장자리에 여자가 섰다.


"네가, 나를 싫어한다면 미안해."


지금이라도 뒤로 돌아 도망칠 수 있었다. 저 우둔하고 멍청한 낯짝을 뒤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다시는 못 돌아올까봐.


"그렇지만. 내 담은 그래."


앞으로 달려가고만 싶었다. 저 우람한 덩치에, 그동안 참고 부정하며 고민하며 억눌렀던 마음을 한껏 표현하고 싶었다. 

역시 두려웠다. 다시는 그러지 못할까봐.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나 그래도 돼?


"나도 너 좋아해. 그리고, 사랑해."


타탁, 탁.


흙을 박차고 나아가는 걸음 소리가 한적한 공원에 울렸다. 


그 방향은 빛의 가장 자리.


기념일도 모르고 무뚝뚝한 남자가 서있는 그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