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 : https://arca.live/b/tsfiction/102792232?category=%EB%8C%80%ED%9A%8C2&p=1

1화 : https://arca.live/b/tsfiction/102800289?category=%EB%8C%80%ED%9A%8C2&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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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공작저의 안뜰에 위치한, 백합이 가득한 넓은 정원의 한 가운데서.


누이와 함께 즐겁게 뛰놀고, 그런 나와 누이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


언제나 바라마지않던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의 표본.


하지만 그것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행복했던 꿈의 광경은 순식간에 조각조각 깨어졌고.


그 날카로운 조각은 비수가 되어 내 심장에-


****


"아아아악!!!"


수십 수백 개의 비수가 내 심장을 난도질 하기 직전에 번쩍 뜨인 두 눈.


그와 동시에 누워있던 신체를 벌떡 일으킨 나는 혹여 자신이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슴께를 수없이 더듬었다.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작은 생채기는커녕 일말의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지만 그 안도감이 절망감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로, 여성의 몸이 된 것인가."


상처가 없는 대신 제 존재감을 과시하듯 부풀어 오른 앞섶.


그 가슴께를 더듬는 동안 손에 확연히 느껴졌던 부드러움은 자신이 겪었던 일이 한낱 꿈이 아닌 차가운 현실이라는 것을 재차 각인시켜주었다.


뿐만 아니라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작아진 골격, 높아진 목소리 등등.


제아무리 평생을 병상에 누워 보내느라 사내답지 않게 여린 몸을 가졌다한들 남성인 한 절대 보일 수 없는 신체의 특징들.


그 모든 것이 내가 더 이상 남성이 아니게 되었다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났음에 놀라고, 절망하고, 회의감을 느끼기도 잠시.


나는 스스로의 모순을 깨닫고 자조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죽음을 각오하고 떠났던 여정길이었건만.


이제 와서 여성의 모습으로 변했으니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같은 분수넘치는 고민을 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변해버린 몸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었니?"


"...!"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네가 눈 뜨기 전부터 이 곳에 있었는 걸. 네가 눈치채지 못 했던거지."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 있는 건 한 명의 여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하나뿐 인 누이이자, 지금 이 꼴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


레이나였다.


그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 순간.


반가운 마음에 몸이 먼저 움직이려 했지만 찰나에 떠오른 생각은 그 모든 것을 멈춰세워버렸다.


눈 앞의 여인이 누이임을 아는 것은 오직 자신 뿐.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자신은 그녀의 동생인 이안 폰 아덴펠트가 아닌 왠 초면의 여인에 불과할 테니까.


이걸 떠올리지 못하고 누이라고 부르기라도 했다면 정신나간 미친 년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누이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을, 아니 애초에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듯 인사와 통성명부터 해야 할 상황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내 마음 속엔 한층 더 질척하고 어두운 감정들이 들어찼다.


자신이 처한 처지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그렇다고 이걸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기에 앞으로 평생 누이를 누이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암울한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누이의 말은, 그런 감정들을 날려버리고 귀를 의심케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우리 동생, 고생 많았지?"


"...그걸, 어떻게?"


"나도 처음엔 믿기 힘들었지만, 네 심장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내 동생 이안의 것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와중에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것처럼 꼭 쥐고 놓치 않았던 그 펜던트가 있었으니까."


이렇게나 증거가 확실한데, 누이된 몸으로 어찌 동생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고.


그리 말하며 누이의 얼굴에 떠오른 따스한 미소를 본 순간.


내 눈에선 자신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흑...흐윽...누님...누니이임..."


"하여간 울보 동생 같으니. 몸만 컸지 여전히 어리구나."


그럼에도 자신의 동생이니, 기분이 풀릴 때까지 얼마든지 울어도 좋다며.


누이는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쏟아지는 내 눈물을 받아주었다.


****


한참동안 울먹이던 소녀가 제 풀에 지쳐 잠에 든 후, 다시 고요해진 객실 안.


자신의 하나뿐 인 남동생, 이제는 여동생이 되어버린 이안을 살포시 끌어안은 레이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가 사라진 냉혹한 가주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울음을 그친 이안이 잠에 들기 전, 자신에게 말해 준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었다.


"악마, 인가."


악마.


고대부터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이계의 종족.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어떠한 형태로든 대가를 받아간다는 초월적 존재.


그렇기에 수많은 인간들이 악마를 찾아 계약을 맺었고, 그 대부분이 파멸적 결말을 맞이했다.


그것을 악마의 잘못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 원인은 대부분 인간의 탐욕에 있었기에.


분명 작고 사소한 소원으로 시작하여, 점차 욕망의 굴레에 빠져 지불할 대가를 모두 잃은 끝에 자신의 영혼까지 건 자들의 말로가 파멸일 뿐.


악마는 어디까지나 계약대로 행했다는 점에서 과실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낚싯대 끝에 드리운 바늘에 달린 미끼로 물고기를 유혹하듯.


인간의 욕망을 교묘히 자극해 파멸로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악마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재앙이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레이나는 터져나오는 분노를 참아내느라 이를 악물어야 했다.


감히.


감히 자신의 동생에게 계약이라는 이름의 빌어먹을 저주를 걸었을 어느 악마를 당장 쳐죽이고 싶었으니까.


아니, 단순히 죽이는 것으로 끝낼 수 없었다.


갈기갈기 찢고, 찢고, 또 찢어서 세상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 한줌 핏물로 만들어 버려야 하는데.


하지만 악마에 대한 복수심은 잠시 뒤로 미룬 레이나였다.


비록 저주에 가까운 계약이지만, 그 덕분에 이안이 살아남은 것 역시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안의 병약함은 선천적인 마나 부족으로 인한 결핍증이 원인.


그 답도 없는 문제를, 과연 고대부터 존재해온 이계의 존재라는 이름값은 하는 것인지 아예 대량의 마나를 이안의 몸 속에 직접 때려박는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해결해버린 악마였다.


대마법사의 칭호를 가진 자신조차 상상만 했을 뿐 도저히 불가능했던 방법.


그 망상에 가까운 치료를 해내주었으니 레이나와 이안에게 있어 평생의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장난질을, 장난이라고 해도 될 지 모를 악독한 짓을 해두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 마나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1년이라는 시간 뿐.


만약 악마가 지정한 봉인 해제의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이안의 몸 속에 심어둔 마나는 폭주를 일으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안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터져버릴 것이다.


말 그대로의 의미대로 말이다.


심지어 그 봉인 해제의 조건은-


"진정한 사랑, 이라."


남성이었던 이안을 여자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1년 안에 진정한 사랑을 만나 교접을 하는 것.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며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이안의 몸 속을 자세히 관조한 레이나는 그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진정한 사랑과의 교접이 해결책인지 까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이 거대한 마나가 폭주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기 때문에.


사랑은커녕 친구 하나 만들어 본 적 없는 이 가여운 동생을 어찌 하면 좋을 지.


어느덧 자신의 어깨에 기대 곤히 잠에 든 소녀를 품에 안은 채.


레이나는 깊은 사색에 잠겨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