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기묘한 수염쟁이 손님이 왔다갔다.
이름이 벨이라고 했다.


*


벨이란 손님이 가고 여러 날이 지났다.


초봄의 쌀쌀함은 4월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필시, 심심할 적마다 퍼붓는 봄비가 원인일 테다.



"드세요."



집주인이 스프를 덜어 주었다.


스프라고 해도 끈적이는 느낌이 크지 않고 찌개 비스무리한 물건이었다.


내용물은 버섯이며 토마토며, 고기랑 소시지 따위.


약간 신맛이 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육개장 내지 부대찌개를 연상시키는 음식이었다.


맛도 그렇고, 불그스름한 빛깔은 더욱 그렇고.


이름이... 쌀 뭐라고 했던가?


이 부근 전통 음식이랬는데, 다행히 내 입맛에도 맞았다.



"어때요?"


"맛있어요."



얹혀사는 식객으로서 자존심을 굽힌 거짓된 답변을 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맛났다.


아니, 소시지랑 고기가 들어간다니깐?


맛이 없을 수가 있나.


흘깃 여우를 보니 여우도 미친 듯이 스푼을 움직이고 있었다.


여우가 식기를 쓰는 모습.


처음에는 나나 집주인이나 경악했지만, 이것도 끼니 때마다 보다보니 익숙해졌다.



"역시 제가 만들 때보다 훨씬 낫네요...."



어쩐지 패배감이 들어 시무룩해졌다.


식객이라는, 비상히 눈치 보이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식사를 얻어만 먹고 있는 이유였다.


나도 몰랐지.


내 밥이 그렇게 요상할 줄은.


분명히 남자 시절에 배운 그대로 넣었는데 뭐가 문제였던 걸까.


돌연 엄마에게 따지고 싶어졌다.


엄마, 느끼한 맛이나 기름 잡내 잡을 땐 술이 제격이랬잖아.


내가 엄마 말 믿고 육개장에 술 넣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집주인이 시음하고는 맛이 없어서 울어버렸다고.



[승자는 과정을 위해 살고 패자는 결과를 위해 사는 법이다. 난 네 스프도 괜찮았어.]



여우의 위로는 거짓말은 아닐 터였다.


일전, 내 육개장을 앞에 두고도 그릇을 싹싹 비우며 한그릇을 더 달라고 요청했으니.


그러나 내 딴엔 여우의 혀가 이상하다곤 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그야 만든 내가 먹어도 별로였는 걸.


마을의 떠돌이 길고양이한테 줬더니 냅다 줄행랑을 쳐버렸는 걸.



"아르바님 요리라...."



집주인이 눈을 감고 곰곰히 과거를 떠올렸다.


덧붙여 아르바란 게 내 가명이다.


그야 지금 내 몸뚱이인 이 캐릭터가, 인게임에선 그런 이름이었다고.


달갑지 않은 추억이었는지, 집주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참, 가게는 요즘 어떤가요."



화제를 전환하는 실력은 서투른 집주인이었다.


입이 찢어져도 맛있다고는 평가 못할 음식이었나보지?


이해는 가지만.



[매일매일 수난이시다.]


"왜요?"


[가게에 괴물이 나타나질 않나, 그걸 때려잡-.]



깜짝 놀라서 여우 입에 곧장 먹을 걸 물려주었다.


그 이상은 말하면 안 되지. 이잉.



"'때려잡', 뭐에요?"


"때려잡는 마법소녀가 나타나 활약하곤 했다고요. 하하, 하, 하하하."


"그래서 가게가 자주 난장판이 됐던 거군요?"


"예! 맞아요! 그, 그거 때문이에요!"



실은 너무나도 큰 포신 때문에 휘두를 적마다 가게를 부수는 건 마법소녀인 나였지만....


어차피 나쁜 건 괴물이었으니 적당한 책임전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괜찮겠지. 뭐.


솔직히 평소에 내가 너희 때문에 고생 많이 했잖아.



"며칠 전에, 가게에 올리비아씨 오지 않았나요?"


"올리비아요? 그게 누구-."


"술꾼인데, 왕왕 남자 갈아치우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저보다 조금 연상. 가슴 크고요."


"아! 그분."



술꾼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느낌이 와버렸다.


아 그 여자.


얼마 전에 왔던 그 여자.


술 먹고 주정부리던 그 여자.



"해그위드처럼 생긴 분이 거둬가셨는데요."



나는 그날 봤던, 여지껏 잊고 있던 한 아저씨를 입에 담았다.



"해그위드요?"


"모르세요? 영화에서 나오잖아요. 그... 수염 많고 배불뚝이고, 몸 큰 아저씨."


"그건 해그리드에요."


"그거나 그거나죠."


"해그위드는 올빼미에요."


"... 그거나 그거나죠."



집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무심결에 내뱉었는데 이 세계에도 있었구나, 해리ㅍ터.



"그 수염쟁이 아저씨, 이름이 벨이랬는데 사장님은 아세요? 그런 사람."


"그런 사람 세상에 한둘이던가요."



말은 그리하면서도 사장의 손은 일시적으로 멈췄다.


짐작가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이, 사장님은 자길 알 거라고 했어요.

사장님 보러왔다고 했고."


"모르는 사람이네요."


"너무 많은 짐을 지워서 미안했다고 전해달라 하셨는데."


"... 양털 같은 머리카락 곳곳에 늘상 서리가 끼어있던 아저씨 말씀하시는 거에요?"


"늘상 끼어있었어요? 그런 사람도 있구나... 하긴 여긴 귀신 마을이랬으니 그럴 수도 있나?"


[양털 같은 머리카락은 맞다.]


"그래요? 그렇군요."



집주인 소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고생 꽃집 사장답지 않은 우수에 찬 얼굴이었다.


집주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사정을 실토했다.


 

"저희 아버지에요."


"예?"



그래, 이 소녀에게도 부모는 있겠지.


나는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단지 넓은 집에, 좁은 가게에, 소녀 하나만 보인단 이유로.



"양아버지에요. 친부모님은 대화재 때 돌아가셨거든요.

절망해서 얼어죽으려던 절 거두고 키우신 분이에요."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왜 표정이 안 좋은 거야? 그럼.



"그리고 몇 해 전에 돌아가셨어요."



뭣.


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좀 무섭겠는데.


나 망자랑 만났다는 거잖아.


... 아니지, 여기 마을 사람들치고 귀신 아닌 사람 없댔으니 딱히 다를 것도 없나?



"돌아오지 못하는 종류의 죽음이셨고요."



집주인이 머리를 푹 숙였다.


집주인의 머리핀에는 병아리가 그려져있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거든요. 영영 소멸하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사람 아니야?


인간이 아니면 뭐... 귀신이었단 걸까.


귀신이 한번 더 죽을 수도 있나?


한번 죽고 또 죽고?


음, 어렵다.



"돌아가시는 걸 직접 본 건 아니었으니까 또 모르지만...."



집주인이 설명을 보충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나요? 올리비아씨랑."


"몰라요. 눈을 떼니 사라져계셨는데요."


"내일부터는 운동회 대비를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아버지를 찾으러 나가야 하나."



집주인의 낯에 수심이 가득했다.



"운동회라뇨?"


"모레부터 운동회잖아요. 가서 꽃 팔려고 했죠."


"근처에 초등학교라도 있는 거에요?"


"아, 손님들한테 한번도 못 들으셨어요?"



이 여자...!


알려주면 알려주고 말 거면 말 것이지, '몰루는건가' 따위의 태도를 취할 것은 또 뭔가.


물론 하늘 같은 집주인이자 알바처 사장님이신 분이니 티를 내지는 않았다.



"흥, 못 들었는데요.

저만 빼고 재미난 소식을 돌려들었나봐요?"



집주인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풀렸다.


그녀가 쿡쿡 웃었다.



"별 거 아니에요.

우리 마을, 망령들 밖에 없잖아요.

살아생전에 공부를 못해 한이 서린 사람이 많아서 마을 사람 대부분이 다니는 학교가 있어요."


"죽어서까지 공부한다고요?"


"재밌잖아요, 공부."



무슨 헛소리지?


꽃집 사장이랍시고 머릿속이 꽃밭이 되어버린 건가?


낯선 이에게 한없는 따스함을 베풀어준 친절한 집주인님께는 언제나 감사와 동경의 감정을 품어온 나였지만,

아무래도 이런 대범한 기호엔 환상이 깨지게 마련이었다.


신이시여, 어찌 꽃다운 여고생에게 공부라는 가혹한 취미를 선사했나이까.


... 참, 나도 신이었지.


여우의 눈치를 살피니 여우조차도 질색하는 얼굴이었다.



[너 그런 거 좋아하니...?]



어색해진 분위기를 감당하기 싫었던 걸까.


집주인이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으흠, 여하간 운동회면 이래저래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요.

무언가 팔려면 이때죠.

계주 1등이라도 한 분에게는 화환도 팔 수 있겠고."


"은근한 구석에서 뼛속까지 장사꾼이시로군요."


"최근 가게 매상 위험하거든요.

저 없는 때면 만날 부숴지고 해서 고치는 비용도 많이 깨지고."



그렇게까지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부수는 원인의 절반 이상은 나였으니까.


아, 아닌가? 절반은 넘는 거 같은데.


6할...? 아니, 7할?


8할은 너무 간 거 같다.


내가 그렇게나 부술 리는 없지. 아무렴.


그럼에도 6할이면 상당히 충격적인 비율이다.


벽이나 바닥 수리 마법 같은 거... 없나?


있으면 있을 듯도 한데.


나중에 여우한테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우... 운동회 날 장사, 힘내보죠!"




*



"우... 운동회 날 장사, 힘내보죠!"



팔자에도 없는 식객을 수용하는 게 슬픈 일만은 아니었다.


어쩐지 저 작은 아이는 나와 많이 닮아있었다.


이 집 주인이 되기 전의 나.


모든 게 무섭고 싫던 때의 나.



"돈 없어요."



돌이켜보면 생명의 은인에게 취한 첫인사치곤 무척이나 무례한 말이었다.


'벨', 내 양아버지는 거인 특유의 크고 넓은 등에 날 고정시켰다.


나는 그에게 다시금 말했다.



"돈 없다고요."



몇번을 반복해도, 사내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동상에 걸려 얼어붙은 사지.


어린 나이의 여자 아이.


다 죽어가는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사내.


돈이 없단 건 날 들고 호주머니를 탈탈 털기만 해도 알 일이었다.


사내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저 나를 들고 이송할 뿐이었다.


으슥한, 더욱 으슥한 숲속으로.



"돈이 목적이 아닌가."



그렇다면 뭐가 목적일까.


당시의 나는 고민했다.


팔다리가 얼어붙어서 절단이 시급한 어린 아이를 무급 노동 착취라도 시킬 셈인가?


넌센스였다. 합리적이지 않았다.


달리 어떤 목적으로 날 숲속으로 끌고 가는 걸까?


곰곰히 생각하였다.


저 사내가 내게서 얻을 수 있는 게 뭘까.


내가 저 사내와 비교해서 가장 큰 차이점이 뭐지.


체구가 작다는 점?

고아라는 점?

여자아이라는 점?


... 여자라는 점?


서둘러 거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거인은 남자였다.


친부의 말을 떠올렸다.


세간엔 어린 아이에 욕정하는 이상성욕자도 있다고 하였다.



"야, 야이 변태야! 지리, 저, 저리 가!!"



나는 식겁하여 마구 발버둥쳤다.


사내의 억센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과연 거인의 힘은 차원이 달랐다.



"당장 날 내려주라고 미친 놈아!"



나는 화도 냈고



"너... 너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지?

너 후, 후, 후회할 거야!"



을러도 보고



"제발 멋진 거인님, 한번만요. 저, 저, 저는 아직 너무 어리... 어리잖아요."



얼러도 보았다.


그러나 싸그리 무용지물이었다.



"어리니까 그러는 거지."



거인이 단 한번 들려준 대답은 겁에 질린 어린애의 저항하려는 일말의 의지조차 꺾어버렸다.


산장에 이르러 거인은 날 식탁에 올려놓았다.


산장이래도 거인의 산장이어서인지 일반인의 별장보다는 훨씬 컸다.


거인이란 생물은 별장도, 연필도, 식료품도 모두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의 물건을 쓴다더니 꼭 그랬다.


거인의 식탁은 너무나 높아 여느 산 못지 않은 높이였다.


또 넓이는 얼마나 넓은지 여느 운동장 부럽지 않은 넓이였다.


여기서 탈출하려 들었다간 땅바닥에 떨어져 사망할 것이 뻔해보였다. 



"이제 어, 어떻게 하실 거에요...?"



나는 맞설 용기를 잃고 떨며 물었다.


거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삐약이! 삐약이 자네 어디 갔나!"



거인의 책꽃이 근처에 병아리 하나가 있었다.


병아리도 나만한 크기였는데, 거인의 서가는 그또한 무식하게 거대하여 한칸한칸의 간격이 100m는 되어보였다.



-불렀냐 삐?


"얘랑 계약을 맺어주게나."



거인이 날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크게 놀랐다.


주로 병아리가 말을 한다는 점이었다.



-너무 어리다 삐.


"나이는 상관없지 않나."


-정신상태도 누더기다 삐.


"그러니까 하란 걸세. 자네가 잘 다독여줘야지."


-확실히 자질은 있어보이지만... 다른 아이는 없었냐 삐?


"다들 불타 죽었어.

우리만 그런 줄 알았더니 발트 녀석들도 똑같더구만그래.

아마 지금은 세계 어딜 가도 비슷할 걸세.

당장 지하세계나, 천상의 알브헤임조차 화재가 있었잖나."


-정말 이 애 밖에 없었던 거냐 삐?


"내 눈에는. 다른 아이를 찾을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몰라. 그냥 얘로 해."



하아하며 병아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몸, 동상 때문에 많이 춥니 삐?


"으, 어... 응."



상황이 돌아가는 걸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린 나는 영 겸연쩍은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나와 계약하자 삐. 마법소녀가 되는 거다 삐.



마법소녀라.


예전에는 베드모이라 불리며 뭇 슬라브 사람들의 두려움을 사던 존재라 들었다.


알브헤임의 요정과 계약하면 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마법소녀가 되면 그 썩어버린 다리랑 팔, 안 잘라도 된다 삐.



추위와 동상과 굶주림에 반쯤 얼이 나간 나는 병아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법소녀가 된 다음부턴 한동안 산장에서 지내며 몸을 살찌웠다.


동상이야 나았지만, 주려서 드문드문 뼈가 보이는 육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산장에 머무르며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기력을 보충했다.


날이 가고, 달이 갔다.


충분히 몸이 회복된 시점 즈음에는 잠들었던 불안함이 부활하였다.


어느 날은 긁어부스럼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도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거인... 님."



이때의 나는 거인과 끼니 때마다 수다도 떨고 하면서 비교적 친근해졌다.


마음 한구석에서 경외시하는 부분은 없지 않았지만.



"저는 그, 아... 안 덮칠... 거에요?"


"꼬마야 그게 대체 무슨 말이니."


"덮치려고 살 찌우는 거 아니었어요? 헨젤과 그레텔처럼...."



푸하하하-.


양아버지는 박장대소를 했다.



"내가? 얘를? 덮쳐?

이 크기 차이로?

으하, 으하하하하하!"



웃다가 지쳐 배가 아파져서도 한참을 숨죽여 낄낄거렸다.


사람 민망하게시리.


아니면 뭔데요- 하고 다소 불만스럽게 항의하자, 아버지는 날이 밝으면 알려주겠다 하셨다.


다음 날이 되어서 거인은 돌연, 변신을 하라고 재촉했다.


옷이 약간 부끄러워지는 것 빼곤 거부할 이유도 딱히 없었기에, 나는 시키는대로 하였다.


거인은 나를 호수 근처로 데리고 갔다.


그곳엔 서툴게 닦인 길이 있었다.



"여기 마을이 생기면 어떨 것 같니."



근처에 나무가 빼곡하여 장작 걱정은 없을 듯했다.


호수 물은 맑아서 마실 수 있는 수준이었다.



"나쁘지 않겠는데요."


"그렇지? 여기다 마을을 세워보려고 한단다.

대화재에 피해 받은 이들을 끌어모으는 거지.

가족이 죽었다거나, 본인이 부상을 입었다거나, 살던 부락이 타버렸다거나.

그런 길 잃은 사람들 전부 끌어다모으는 거야."


"저 같은 사람들이요?"


"... 그래."


"모아서 어쩌시려고요?"


"다함께 모여서 사는 거란다.

다들 똑같은 아픔이잖아.

서로 보듬어주고, 서로 토닥여주고."



부모를 잃은 후 북쪽에 친척이 있단 말만 막연히 믿으며 나아가다가 쓰러진 나였다.


그런 애들 거둬들일 마을을 만들잔 건가.



"오래 걸릴 텐데요.

100년, 200년씩 걸릴 지도 몰라요."


"나한테 100년이면 짧은 세월이란다."



당시의 나는 무진장 긴 시간이 걸릴 줄 알았다.


현실은 훨씬 짧았다.


비교도 못할 만큼.



"혼자서 하시려고요?"


-누가 혼자냐 삐! 내가 지금껏 도와줬는데.


"... 둘이서. 둘이서 하시려고요?"


"아니란다. 더 많은 손이 필요하지.

더 많은... 신앙도 필요하고."



거인은 그러곤 날 바라봤다.


아아, 내게 사람들을 도우라 하는구나.


나 같은 자들을 거두라 하는구나.


북유럽의 매정한 추위에는 이골이 나있었고

대화재 이후 모든 것이 불타버린 세계에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날부터였다.


내가 거인을 아버지라 부르기로 한 건.


그때만 해도 마법소녀는 사람들을 화재의 참혹함에서 구해내는, 삶의 희망이었다.


아버지가 사람들을 맞이하고, 내가 사람들을 구출하고, 병아리가 나를 안내했다.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다.


아버지가 죽으며 상황이 급변했지만.



*



집주인과 운동회 이야기를 하고 이틀이 지났다!


집주인은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보였지만, 내가 상관할 계제는 아니겠거니 했다.


무엇보다 일이 너무 많았다고.


당일엔 바빠서 못할 거라며 집주인이 이거저거 시켜서 특히나 더!


꽃다발이라던지 화환이라던지....


맹세코, 나는 꽃다발이라면 그냥 적당히 꽃 모아서 꽃으면 장땡인 줄 알았다.


꽃의 분위기네 메인에 하는 따위의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 복잡미묘한 것인 줄은 몰랐지.


어쨌거나 일체의 귀찮고 성가신 것은 안녕! 이제는 운동회였다.



"꽃 있어요 꽃! 운동회에 꼭 필요한 꽃 사세요!"



집주인이 퍽 당당하게 외쳤다.


운동회에 꽃이 '꼭'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장님이 그렇다니까 일개 점원인 나는 잠자코 슬로건을 따를 뿐이었다.



"맞아요 운동회에 꽃이 없으면 서운하잖아요! 꽃 사세요!"



장사는 섭섭하지 않은 결과였다.


나와는 달리 마을 주민들은 사장님의 슬로건에 공감했나보다.


이 학교, 일종의 평생교육 비스무리한 거랬지.


운동회라고 해도 어린아이부터 노년까지 참가 계층이 다양했다.


아, 저쪽 빵물고 달리기한다.


맛있겠다.


빤히 보고 있었더니 집주인이 갔다오랜다.



"꽃 파는 거 거들어야 하지 않아요?"


"곧 있으면 매진일 듯 한데, 그냥 갔다오세요."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제멋대로 참가해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 따윈 않았다.


크림빵이 날 부르고 있었으니까.


크림빵, 땅콩크림빵.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이란 말이냐.


슬쩍 나오려는 침을 닦았다.


자리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심판이 한번 고개를 갸웃한다.



"하나둘셋넷... 다섯?

한명이 왜 더 많지?"



누군가가 그에게 "많으면 어떻냐, 빵 하나 더 매달아두겠다"라고 말했다.


이상하다며 연신 중얼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심판은 별다른 제재는 안했다.


탕- 하고 신호탄을 쏘자 쏜살같이 달렸다.


조금 가자 빨랫줄에 걸어놓은 빵이 보였다.


그런데 헉!


마음에 드는 빵이 두개나 있었다!


초코소라빵, 땅콩크림빵.


둘 중 어느 빵을 고를 것인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보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달보드레한 소라빵?


아니면 은은하게 달고 고소한 크림빵?



"어... 어 어떡하지?"



망설이다가, 나는 빵 두개를 냅다 집었다.



"손 쓰면 반칙이에요!"


"빵은 하나씩만!"



주위에 있던 이들이 항의하길래 그럼 반칙패로 탈락하겠다며 자진탈락하였다.


벤치에 앉아서 먹는 빵은 꿀맛이었다.


어차피 달리기 따윈 안중에도 없었으니 오히려 좋았다.



"애잖아요. 봐줍시다.... 하아."



운동회를 개최한 측 인사들은 그런 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빵을 무료로 두개씩이나 먹게 된 내 입장에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히히. 맛있다!


집주인은 머리를 싸맸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왜요?"


"제가 밥 안 주는 줄 알잖아요."



주변 어르신들 눈치를 쓱 보았다. 



"쟤가 그 꽃집에 새로 왔다는 점원일세."


"벨님 돌아가시고 사장 혼자서 운영하느라 힘들어보였는데 다행이로구만."


"잘 먹으니 보기좋구만. 애들은 팍팍 먹어야지."


"귀엽구만. 내 손녀딸이 딱 저 정도 나이였는데."


"저 애, 남자앨세."


"뭣."


"이 친구 농담두. 저 꼴에 남자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네."



음... 다들 예쁘게 봐주는 거 같은데....


나는 집주인의 잔소리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빵에 집중하였다.


먹어치우는 게 아쉬워 소라빵의 마지막 한조각을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릴 즈음이었다.



'쿠웅'



땅이 흔들렸다.



"끼힉, 쿠에에에에!"



엄청 큰 도마뱀이 튀어나왔다.


아니나다를까, 도마뱀의 표피에도 군데군데 보라빛이 박혀있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학교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몇몇은 학교 안이 더 안전하리라 판단한 건지 군중과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옷 안에 숨어있던 여우가 머리를 드밀고 작게 속삭였다.



[꼬맹아, 떴다. 악령이다.]



집주인에게 "화장실 좀 갔다올게요" 라 일렀다.


기이하게도, 집주인도 화장실을 가겠다며 사라졌다.



"변신."



교사 뒷편 인적 드문 곳을 찾아 변신했다.


무기를 꺼내고 운동장으로 나오니 사람이 일부 빠져있었다.


대부분은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그대로였지만.


포를 도마뱀에게 겨누고 다리를 땅에 안착시켰다.



"발-."


"뭐하는 거에요, 이리 와요!"



무반동포는 쏘기 직전에 저지당했다.


막아선 사람은 소녀였다.


나와 같은 마법소녀. 일전에 만났던 삐약이네 마법소녀.


마법소녀 릴리가 소리죽여 내게 말했다.


저 사람은 언제 왔던 걸까.



"거기 아니에요...! 따라오세요!"


"저기가 아니라뇨? 저기 괴물이 있잖아요."


"사람들 많잖아요. 원흉부터 해치우러 갈 거에요.

저 괴물 여기다 푼 녀석."



그럿 짓도 가능한 건가?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발키리들조차 악령을 길들인다는 발상은 없었던데.



"저 괴물은 어쩌고요? 놔두면 주민 공격할 텐데."


-그건 우리가 막을 테니 가봐라 삐약.



병아리 요정이었다.


물으니 여우랑 함께 두 요정이 막아내겠다고 했다.



-처치는 못해도 막는 건 가능하다 삐.



여우는 못내 불안한 낯이었지만 일이 착착 진행되는 걸 보고 그에 따랐다.



[하긴 잡초는 뿌리부터 뽑는 게 옳을 테지. 갔다와라.]


"이리 와요, 어서!"



급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적응할 새도 없이 나는 마법소녀의 손에 이끌려갔다.


목적지는 '원흉'이 숨어들어갔다는 교사 내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