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마지막 발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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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벌판 위로 새하얀 눈꽃이 피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하염없이 흩날리는 새하얀 꽃잎.



그 순백의 꽃잎 아래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한때 온기를 머금었던 새빨간 선혈도.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반짝이던 전사들의 병장기도.

부러진 깃발과 창대, 무너진 진채와 낡은 선박까지도 모두.



이제는 본래의 제 색깔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린 채 새하얀 화원의 일부가 되었다.

과연 그 누가 이곳을 두고 한때 수천에 이르던 생명들이 치열한 투쟁 끝에 저버린 곳임을 알 수 있을까?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인생의 무상함,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대자연의 경이로움과 그 뒤에 이어질 생명의 순환까지.


만약 글 재주가 있는 이였다면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며 제법 세간의 호평을 살 만한 무언가를 내놓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 재주가 못한 이라 할지라도 새벽의 마법을 빌린다면 얼추 구색은 갖춘 물건을 내놓을 수 있었을 테고.




허나 안타깝게도, 그곳에 있던 유일한 사내는 살을 덧붙이기 보다는 발라내는 쪽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시상을 떠올릴 만큼 생각이 많은 이들은 모두 그의 도끼 앞에서 골통이 깨져버린 탓이니, 어쩌면 그런 그였기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늘 그래왔듯, 그의 입맛 만큼이나 무던한 감상으로 눈앞의 광경을 일축했다.




“거, 날씨 한 번 지랄맞군 그래.”



사내, 위대한 북방의 전사 올라프의 아들 시구르드는 반쯤 찌그러진 투구를 벗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증오스러운 눈송이들은 전투가 시작되었을 무렵과 조금도 다름없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우둑커니 자리를 지킨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그의 어깨 위로는 새하얀 꽃밭이 무성히 피어나 있었다.



그는 쌓인 눈을 털어내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 보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오오, 오딘이시여! 이토록 많은 전사들이 그대의 품으로 돌아갔거늘 아직도 라그나로크를 일으키기에는 부족한 것입니까!”



얼어붙은 동토와 북해의 강인한 전사들 사이에서 즐겨 회자되던 전설이 하나 있었다.


언젠가 천상의 모든 신들이 모여 ‘모든 것을 끝낼 전쟁'을 치루게 되면 지상에서도 끝나지 않을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리라는 전설.



그 전설 속 대전쟁을 위해 전사들을 기꺼이 웃으며 죽음을 받아 들였다.

그들이 죽어 위대한 주신 오딘의 대전사가 되어야지만 교활한 노신이 지옥의 거인들과 맞서 싸울 결심을 하게 될 테니까. 




지상에 도래한 악몽 같은 겨울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저의 육신과 영혼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겪은 끔찍한 추위와 굶주림, 쫓기듯 내몰리는 용병의 삶과 서로 죽고 죽여야만 하는 야만의 굴레로부터 후손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하지 못할까?



이곳에서 스러져간 모든 전사들이 그러했듯 살아남은 유일한 사내 역시 그 결의에 있어서는 매한가지였다.



“...후우, 빌어먹을. 좋습니다. 당신을 위해 더 많은 전사들을 올려 보내드리죠. 필요하다면 이 한 몸까지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내 아들, 크누트에게 만큼은 이 망할 운명이 이어지지 않게 해주십쇼!”



전해지지 않을 요구임을 알면서도 사내는 하늘을 향해 그렇게 외쳤다.

한때 그 모습을 보며 순진하다고 비웃던 과거가 무색하게 사내는 꿋꿋이 광대 노릇을 이어나갔다.



언제나 전장을 주시하고 있을 발키리들이 듣고 그녀들의 주신에게 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는 그의 오랜 친구가 그러했듯 죽어간 이들을 위하여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기꺼이 다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그놈 참 목청이 큰 것이니 어찌 살아남은 것인지 알만도 하구나.”



별안간 사내의 등 뒤로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말투는 사내 같되 목소리는 곱고 매혹적이다.

머나먼 남쪽, 세상의 중심이라 불리는 미클라가르드르의 최고급 무희나 보라빛 혈통을 타고난다는 제국의 황녀조차도 이에는 미치지 못할 터.


죽음의 공포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해 괴로워하는 어린 전사들조차도 단숨에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 전장으로 달려가게 만들 만큼, 그 목소리에는 묘한 매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사내는 자신의 오랜 애병을 더욱 거세게 움켜 쥐지 않을 수 없었다.



‘좆됐군.’


그가 지닌 상식에 따르면 이런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여자란 단 두 부류 뿐이었다.

전사들을 위한 창녀, 혹은 같은 전사인 방패 처녀.


허나, 전자의 경우에는 이런 갓 혈전이 끝난 곳보다는 좀 더 후방에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후자의 경우에는 대게가 악을 쓰다 갈라져 쇳소리만 나는 목을 가지고 있었다.


요컨대, 지금 그의 등 뒤에서 말을 걸어오는 이는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컸다.



‘...아마도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낼 줄 아는 괴물이거나, 사람 골리길 좋아하는 신들 중 하나겠지.’


어느 쪽이든 산 사람이 만나기에는 좋지 못한 상대에 속했다.


그리고 그의 직감은 아무래도 그중 후자 쪽으로 기우는 듯 했다.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을 움직이려 했건만, 마치 호박 속에 빠진 벌레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으니까.




제 아무리 지쳤다고는 하나 내리 십여분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왔던 그가 이제서야 도끼하나 휘두를 힘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다.

어디 신적 존재가 내린 마법에라도 걸리지 않은 한에서는 말이다.



목소리는 그런 사내의 마음에 에둘러 긍정하듯 한 번 쯧하고 혀를 차고는 타이르듯 말했다.



“몸집은 곰 같은 주제에 성격은 족제비만도 못하구나. 아서라, 어차피 뽑아들지도 못할 것 용 쓰지 말고 얌전히 얌전히 이야기나 듣거라.”


신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은 어릴 적부터 질릴 만큼 들어왔기 때문에 사내는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뒤를 잡히고 마법에 걸린 시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에 달라지지는 않았겠다만은.



그런 사내의 전향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 제법 말귀가 통하는 녀석이로구나. 하기야 그러니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 


아무튼 네 녀석의 짐작대로 이 몸은 어느 괴팍한 노인네의 명을 따르고 있는 처지가 맞다. 그간 너희들이 목이 터져라 부르짖은 덕분에 그 노인네의 꽉 막힌 귓구멍에도 인간들의 목소리가 닿은 모양이거든. 그래서 이렇게 직접 늙은 광기의 대답을 전해주러 왔노라.”



자신을 오딘의 사자라고 밝힌 목소리는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짐짓 무게를 잡은 뒤, 엄숙한 목소리로 노신의 전언을 입에 담았다.



“인간들의 부름에 지혜와 광기, 마법과 전쟁, 그리고 모든 신들의 왕인 나 오딘이 답한다. '불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인간들의 애타는 부름에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자 신들의 왕이 대답해 주었다.

결코 닿으리 없으리라 믿었던 인간들의 외침이 무거운 노신의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에도 사내는 뿌듯함 보다는 도리어 답답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유일하게 자유를 허락받은 입술을 움직여, 신에게 되묻는다는 금기를 범할 정도로.



"어째서입니까?"



그런 그의 애처로운 물음에 오딘의 사자는 감히 허락없이 입을 연 무례를 책잡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볼 일이 끝났다며 말없이 돌아가지도 않았다.


대신 그저 한없이 안쓰럽다는 투로 목소리는 이렇게 답했다.



“신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바라겠느냐?”



그 순간, 사내는 머리에 망치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어째서 그들은 신들이 대전쟁을 바란다고 믿었던 것일까? 

신들도 사람처럼 감정이 있고 욕망이 있다면 당연히 살고자 하는 욕심 또한 있을 터인데.


지상에 영원토록 겨울이 끝나지 않아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짐승의 참상이 펼쳐진들 그것이 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보다는 종말을 노래할 세 마리의 닭이 영원토록 울지 못할 방법을 고민하고, 지상의 기나긴 겨울이 끝나지 않도록 열심히 발버둥 칠 터였다.


이 혹독한 겨울 끝내고자 하는 그들 인간들처럼 말이다.




그런 사내의 생각을 긍정하듯, 오딘의 사자는 뱀 같은 혓바닥을 색색 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아이야. 인간이든 신이든 다 똑같은 법이다. 


탐욕스러운 노신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살고 싶어하고, 장난꾸러기 불의 신은 제 자식들을 살리길 원하지. 바나 헤임의 신들과 요툰의 거인들 역시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아.


요컨대, 누구도 자신들의 죽음을 감수하며까지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북구인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전설이 떠돌던 것인가?

그들은 왜 순진하게도 충분히 많은 전사들이 발할라에 도달한다면 마침내 모든 것을 끝낼 전쟁이 시작되고 마침내 지상에 봄이 찾아오리라 믿은 것인가?

이 땅에 스러져간 무수한 전사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죽어야만 했던 것인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각이 거듭되며 의문은 당혹으로, 당혹은 분노가 되어 점점 더 감정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뱀은 제 요사스러운 혓바닥을 놀렸다.



“그러니 네게 제안 하마. 나와 함께 인간을 위한 대전쟁을 시작하지 않겠느냐? 네 손으로 직접, 이 땅의 모든 겨울을 몰아낼 불을 던져보자는 게다.”



온몸을 짓누르던 마법이 사라지고 사내는 천천히 목소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마치 불꽃이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 쓴 듯한 선명한 주홍빛 장발을 늘어뜨린 소녀였다.



소녀는 저의 선홍색 눈동자를 사내의 짙은 잿빛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하며 분명하게 제 뜻을 전했다.



“위대한 전사, 올라프의 아들 시구르드야. 나와 함께 신들의 세계에 황혼을 고하자구나. 탐욕스럽고 비정한 신들로부터 인간들의 삶을 되찾아 오자는 게다. 언제부터 인간이 두 발로 서 있는 가축을 이르는 말이 되었단 말이더냐.


인간은 저항하기에 아름다운 법이다.”



사락사락, 소녀는 한 발자국씩 사내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부서지기보다는 녹아 없어지는 눈을 밟으며 소녀는 사내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는 슬쩍, 까치발을 서며 사내의 귓가에 속삭였다.



“최소한 네 아들, 총명한 크누트에게는 너와 다른 길을 물려 줘야 하지 않겠느냐?”



사내, 위대한 북구의 대전사 시구르드 올라프손은 그 어떠한 독보다도 치명적인 뱀의 속삭임을 거부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