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전사들에게는 하나의 전통이 있었다.
바로 늙은 전사는 젊은 전사와 싸워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이는 패륜을 조장하는 것과는 달랐다.
전사들은 죽는 순간에서도 전사로서 남아있어야 한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왜 그래야 하냐는 질문따위는 없었다.
그 전통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몸 속에 흐르는 피 한 방울마저 투쟁을 부르짖는 전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야엘은 검을 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은 처음 만들어졌을 적의 깨끗한 도신과는 달리 몬스터의 피나 인간의 지방 등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죽음을 머금고 색이 바뀐 것이다.

별의 모양이 새겨진 폼멜로 둥근 방패를 두들겼다.
흑색 나무를 쪼개고, 갈면서 만들어낸 그 방패는 철방패보다 단단한 소리를 냈다.
짐승의 문양이 새겨져서일까, 아니면 어두운 빗물에 삼켜진 날씨 탓일까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야엘의 앞에 선 늙은 전사가 양손에 도끼를 한자루씩 쥐었다.
얼굴에 주름은 있을 지언정 육체는 아직도 젊은 전사의 것에 꿀리지 않았다.
바위처럼 굵은 다리를 내딛으며 천천히 야엘에게 전진했다.
낡은 샌들이 젖은 흙을 쓸면서 나아갔다.
발가락을 적시는 진흙따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야엘은 독수리를 닮은 날카로운 눈매로 마찬가지로 독수리를 닮은 늙은 전사를 바라봤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됐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달려들었다.

선공을 취한 것은 늙은 전사였다.
늙어가는 자신을 부정하듯 크고 강직하게 휘둘렀지만 젊고 재능있는 전사에게는 넓게 횡으로 베는 도낏자루가 훤히 보였다.
반걸음을 내딛은 야엘은 몸을 조금 뒤로 빼는 것만으로 공격을 피했다.
단순히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걸 공격으로도 연결했다.
뒤로 빠지는 반동을 이용해 방패로 늙은 전사의 몸을 들이 받았다.
단단한 방패는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무기였다.


“……!”


근육을 뚫고 뼈를 울리는 충격에 늙은 전사가 침음을 삼키며 눈쌀을 찌푸렸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전사는 이를 빠득거리며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상단에서 하단으로, 좌에서 우로, 하단에서 중단으로.

언뜻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두 도끼질에는 젊은 전사가 함부로 파고들지 못하도록 효율적으로 벽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담겨있었다.
방패로 상체를 가리고 차분히 도끼의 움직임을 보며 검을 휘두를 틈을 노렸다.
왼손의 도끼가 오른손의 도끼를 피해 움직이는 그 작은 틈 사이로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것자체가 미끼였다는 듯 부드러운 손목 스냅으로 도끼를 움직여 검을 쳐냈다.
늙은 전사가 땅을 굳게 밟고 도끼를 휘둘렀다.
전통, 다른 이름으로 계승식은 늙은 전사가 젊은 전사에게 죽임을 당해 전사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의식이었지만 젊은 전사가 늙은 전사에게 죽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제 자식을 죽이는 일임에도 전사의 도끼질에는 망설임따위 없었다.
결국 계승식에 이겨 자식이 죽더라도 결국엔 전사들의 고향에서 만날 테니까.
그곳에서 벌꿀주와 고기 먹고, 여자들을 안으며 다시 끝나지 않는 싸움에 임할 테니까.
언젠가 찾아올 라그나로크를 대비해 몇 번이고 죽어가며 서로의 실력을 키워나갈 테니까.

늦건 빠르건의 문제였다.
하지만 젊은 전사는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 않았다.
방패를 든 손을 억지로 휘둘러 도끼를 쳐냈다.
자칫하다간 팔에 도끼가 박힐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짓이었지만 팔 하나따위를 판돈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다행히도, 팔은 무사했고 늙은 전사의 몸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하지마 수십 년 동안 싸워 온 전사답게 몸을 수그리며 자세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야엘은, 늙은 전사의 아들은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날카로운 검 끝으로 제 아비의 목을 노렸다.
양 손의 도끼로 검의 경로를 막아보지만 유연한 손목의 움직임으로 검을 뱀처럼 움직여 도끼 사이를 누비고 지나갔다.
짐승의 목이 꺾였을 때 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그 어떠한 감상도 남길 틈도 없이 늙은 전사의 몸에서 혼이 빠져나갔다.


“후우…! 후우…!”


긴장이 풀린 야엘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늙은 전사의 몸이 진흙탕 속에 무너져 내렸다.
몇 번 숨을 고르고 흐르는 땀과 몸에 묻은 피를 비에 깨끗이 씻었다.

미리 해변가 한 켠에 준비해둔 나룻배에 전사의 시체를 옮기고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이틀 밤이 지나고 나서야 비가 개기 시작했다.
해변가에는 야엘이 잡아먹는 짐승들의 뼈로 가득했다.

미리 준비해둔 항아리에서 기름 묻은 천을 꺼내 시체 위에 덮었다.
항아리 안쪽에 스며든 기름을 모조리 털어 시체 위에 부었다.
배는 파도에 흔들리면서 점점 야엘에게서 멀어져갔다.
미리 준비해둔 화살에 불을 붙이고 배를 향해 쏘아냈다.

아직 비바람의 잔향이 하늘에 남아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북부의 정령들이 이 땅을 위대하게 만든 전사를 떠나보내기 싫어서 그런지 야엘의 화살은 배에 맞질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화살을 쏘아낸 후에야 배에 불이 붙었다.


“마지막까지 참 번거로운 일을 하게 하는군.”


그냥 남들처럼 땅에 묻히건 바람에 매장당하건 할 것이지.
왜 자신을 배에 올리고 불로 태우란 것인지.
평생 배도 몇 번 안 타본 양반이 배에 뭐 그리 환상이 많은지.

뒤를 돌아보자 여인이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같은 진한 오렌지 색 머리카락에 바느질의 흔적이 보이지 않은 길고 흰 천으로 된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야엘이 지닌 것과 비슷한 둥근 방패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단창을 쥐고 있었다.


“또 만났구려.”


야엘이 젊은이답지 않은 말투로 말을 건넸다.
여인이 피식 웃으면서 화답했다.


“이젠 제법 그 시덥잖은 말투가 익숙한가 보구나.”

“뭐. 그렇게 됐소. 본인은 언동이 어떻든 싸움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짐을 짊어보니 그게 아니더군.”

“무얼. 그게 바로 왕이라는 것이다.”

“왕이 아니라 대족장이오만….”

“그게 그거지 않느냐. 남쪽의 제국에선 그대를 두고 이미 야수왕이라고 부르고 있어.”

“남쪽 사정에도 꽤 밝으시군.”


여인은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야엘은 점점 바닷속으로 사라져가는 제 아비의 시신에 오래도록 시선을 뒀다.
검은 연기가 점점 허공에 녹아들어 갈 즈음, 야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왔다는 건, 아버지는 그토록 바라던 전사들의 고향에 가셨겠지?”

“물론. 그처럼 뛰어난 전사는 그곳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지.”

“다행이군.”


……



“…그래. 이제 그쪽이 다시 일로 돌아가기 전에 같이 술이나 한 잔 어떻소?”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난 남자였다.”

“그거 우연이군. 나도 남자이오만.”


여인이 너털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달싹러렸다.
이 문답도 몇 번인지 기억조차 안 났다.
살아있는 육신이 발키리를 보는 것조차 심상치 않은 일인데, 이 놈은 발키리를 꼬시려고까지 한다.

죄 깊은 몸으로서 속죄를 위해 발키리가 되었다.
‘끝'을 여러 번 경험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이어지는 세계를 지켜봤다.
이젠 나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대체 언제 발키리가 된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수많은 전사들을 끝없는 싸움이 기다리는 곳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이런 녀석은 처음이었다.


“몇 번이고 말해왔지만, 난 여자가 좋다.”

“우연이군. 나도 여자를 좋아하지. 서로의 공통점을 알게되서 기쁘구려.”

“...하. 여튼 술의 권유는 거절하겠다. 그리고 그런 말투를 쓸거면 우선 수염이라도 기르고 해보는 게 어떤가? 턱이 매끈한 놈이 해봤자 애송이가 겉멋에 든걸로 보여.”

“흠. 수염? 혹시 수염을 기른 남자가… 이런.”


야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인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사라졌다.
눈동자가 깜빡이는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야엘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천둥신의 눈물이 장난기 많은 형제의 도움으로 물러가니 여인의 머리카락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태양이 훤히 들어났다.

야엘은 발걸음을 돌려 제 집으로 돌아갔다.
내년, 내후년. 아니면 그 이후.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북부와 제국은 반드시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리라.

그리고 아마 자신이 승리하리라.
제국은 강하지만, 그 내부는 곪을대로 곪았다.
이미 제국 북부가 겨울의 전사들에게 반쯤 잡아먹힌 게 그 증거였다.
아버지도 그걸 알기에 더는 죽음을 미루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길 선택했다.

빛이 꺼져가는 태양따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대들에게 태양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지.”


그녀라면 모를까.
자신이 황제가 된다면.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을 그녀가 알게 된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야엘은 그녀가 모시는 신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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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공모전하느라
ts채널 공모전 잊어버리고 있었네;;


다행히 귀족 틋녀는 담 달로 미뤄졌으니
하편은 21일 전까지 무조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