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다 망해버린 귀족 가문에 입양되어, 피폐감금조교를 당하는 불쌍한 주인공.

나는 [하얀 겨우살이]의 아일라 빈터부르크를 동정했다.


그래서 댓글을 달았다.

5700자는 너무 많으니까, 5400자 정도만.

그런데 빙의당했다.


"아, 인생."


하루아침에 불쌍한 아일라가 되어버린 나는 곧바로 탈출을 결심했다.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하고, 내실이라고는 전혀 없는 귀족 저택에서

변덕쟁이 가주가 데려온 볼품없는 여자애를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누나…"


그러니까 달아날 수 있었다.

몰래 훔친 보석과 추천장을 가지고 저택을 나서면 되는 일이었다.


"어디가…?"


나의 손을 붙잡는 작은 손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카일 빈터부르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결국 나는 어디에도 가지 못했다.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카일이 나중에 어떻게 자랄지 눈에 훤해서.


……아니 장화신은 고양이 같은 눈으로 쳐다보는데 어떻게 버리겠냐고.


저택에 남는 것을 선택한 나는 그야말로 데굴데굴 굴러야만 했다.

가문을 옥죄는 빚을 어떻게든 갚아보려 장부를 쥐어짜고.

아직도 희망을 놓지 못한 가신들을 살살 꾀어내 카일에게 붙였다.


당연하지만 시련도 찾아왔다.

어린 여자애의 월권을 눈치챈 가주가 나를 물리적으로 죽이려 했으니까.


다행히 침묵을 지키던 방계의 개입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양아버지는 자작 위에서 내려와야만 했고, 나는 정식으로 가주 대리에 취임했다.

이권을 다수 빼앗기기는 했지만, 나중에 되찾기로 했다.


***


시간이 지날 수록 나와 카일의 뒤에 서는 사람이 많아졌다.

적자만 계속되던 장부가 흑자로 바뀌고, 낡은 저택을 수리되었다.

절망으로 물들었던 가신들의 얼굴이 희망으로 밝아지는 모습에 내심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기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카일의 성장이었다.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꼬맹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 나의 어깨를 넘어섰다.

…물론 나보다 커졌을 때는 분하기도 했지만.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 카일이 아카데미에 갈 나이가 되었다.

나를 두고 가기 싫다며 어리광을 부리는데,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얼른 작위를 가져가기를 바랐기에 나는 카일을 설득해 아카데미로 보냈다.


***


술기운에 달아오른 뺨을 차가운 바람이 기분 좋게 식혀준다.


빈터부르크의 후계자 카일 빈터부르크가 귀환 기념 파티.

나의 자랑스러운 동생은 아카데미를 무려 수석으로 졸업하고 내 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카일을 바라보면서 나는 술을 조금 마셨다.

…사실 기분이 좋아서 좀 많이 마셨다.

그래서 이렇게 몰래 숨어서 쉬는 것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발코니 문을 두드렸다.


"누님."

"아! 카일, 내 귀여운 동생."


카일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취하셨네요."

"응, 기분이 좋아서."


취기는 사람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 넣어준다.

나는 카일을 향해 팔을 벌렸다.


"음, 내 동생. 이 형아가 한 번 안아줄게."


카일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나는 그를 꼭 껴안았다.

순간 긴장한 것처럼 바짝 굳어버리긴 했지만, 뭐 형제니까.


"하아……"

"왜, 한숨이야?"

"아닙니다."


이 좋은 날에 뭔가 불만일까, 우리 귀염둥이는.

귀염둥이라고 하기에는 덩치가 많이 커졌고, 단단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카일은 내 동생이니까.


"벌써 다 컸네."

"누님보다 더 커진 지는 꽤 오래됐는데 말이죠."

"씁."


아카데미에서 나쁜 물이 들었나.

이 하늘 같은 형님의 말에 토를 달다니.

그래도 뭐 기분 좋으니까 이번만큼은 넘어가주지.


"얼른 가져가라."

"…네?"

"가주 자리 말이야. 남한테 너무 오래 맡겨두는 건 좋지 못해."

"남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님."

"형이라고 불러."


카일은 곧바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는 한동안 그의 온기를 느끼며 기쁨을 만끽했다.


"…하아."


***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 답게 카일의 업무 습득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덕분에 나의 부담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대로만 가면 금방 자리를 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준비했다.

자리에서 내려가기 전 양아버지의 추방 명령서에 서명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사라져 줄 것이다.


만약 내가 자리를 이양하고 나서도 남아 있는다면 그건 카일에게 부담이 될 것이다.

권력은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가문과 영지에 애착이 생기지 않은 건 아니다.

그보다 카일이 더 중요할 뿐.


나는 천천히 잠적을 계획하며 미소를 삼켰다.

여유로운 은퇴 라이프를 기대했다.


그러니까.

카일이 새로 만든 신분증을 들고 갑자기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


"그, 그게 말이지, 카일. 이, 이건…"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습니까, 누님? 이런 가짜 신분증까지 만들었을 만큼?"


뚜벅뚜벅 가까워지는 카일의 표정이 무척 어둡다.

분명히 잘 숨겨줬는데, 어째서 저게 카일의 손에 있는 걸까?


그래도 우선 카일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일단 내 말을 좀 들어봐."

"이미 늦었어요. 저는 절대로 누님을 놓아주지 않을 거니까."


망했다.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


사람 한 명은 가볍게 죽일 것 같은 흉흉한 기세다.

뒷걸음질 치던 나는 허리에 단단한 책상이 닿았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나를 카일은 더욱더 밀어붙였다.


-턱


책상을 짚어 나의 양옆을 막아버린 카일.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뚝을 훑어 보았다.

무척 딱딱해 보이는 근육이 폭발할 것처럼 꿈틀거린다.


-꿀꺽


아일라의 몸은 여자 중에서도 아담한 편에 속한다.

그렇기에 훤칠한 카일이 나에게는 더 크게 느껴졌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나를 내려다보는 카일의 푸른 눈동자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후우, 카일."

"뭡니까."

"내 말 들어줄 거지?"

"…변명해 보시죠."

"하하, 내 착한 동생."


순간 카일의 눈썹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내가 뭐 잘못했나?


"착한 동생이라. 누님은 아직도 제가 작은 꼬마로만 보이십니까?"

"무슨 소리야! 네가 작다면 다른 사람들은 전부 난쟁이게?"

"그럼 누님은 저를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한 아이로 보고 계시다는 거군요."


카일의 말에 나는 뒷목이 뻐근해졌다.

무능한 아이라니.

아무리 본인이어도 나의 카일을 깎아내리는 말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말 조심해, 카일."

"아일라."

"어?"


나는 곧바로 형님 모드로 전환해 카일을 혼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듣고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일라."


또 한번 카일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부르는 나의 이름이 낯설었다.

아니, 이름이 낯선 게 아니라 카일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낮고, 탁하고, 또 거칠었다.

잔뜩 잠긴 목소리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도망치고 싶어도 이미 늦었어요. 나는 아일라를 놓아줄 생각이 없으니까."

"하, 하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도저히 카일을 올려다 볼 수가 없었다.


"누님."

"왜, 왜에?"


목소리가 떨린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카일의 뜨거운 손이 나의 뺨을 상냥하게 쓰다듬는다.

그의 손가락이 지나간 곳이 화끈거려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상처 나잖아."


두꺼운 엄지가 나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나무라는 듯한 말에 나는 작게 숨을 토해냈다.


눈이 마주쳤다.


-쿵


어느새 바짝 붙어있던 우리는 서로의 고동을 동시에 느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외면했던 진실을 속삭이는 듯했다.


"느꼈어요?"

"뭐, 뭐를."


뭔가를 확신한 카일이 입꼬리는 비틀어 올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잔혹하고 유혹 적인 미소.


그는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넥타이를 살살 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여자의 속을 긁어내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움츠렸다.


"아직도 떠나고 싶어요?"

"…응."


사실 떠나기 싫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못 떠나게 만들어야겠어."

"뭐, 뭘 하려고?"


애착이 생긴 가문과 영지.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이 있는데 내가 어디를 가겠냐고.


"아일라의 몸을 무겁게 만들어 볼까 하는데."

"무, 뭐?"


그저 겁이 났을 뿐이다.

카일과 나의 관계가 선을 넘어버릴까 봐.

그저 멋진 형이 되고 싶다는 어렸을 적의 결심이 깨어질까 봐.


"알아들었으면서 모른 척하기는. 어차피 우리는 진짜 남매도 아니잖아."

"흐으…"


내가.

카일을 남자로 본다는 게 들킬까 봐.


책상을 짚고 있던 카일의 손이 나의 허리를 감쌌다.

그는 아주 강압적이고 남자 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입, 벌려. 키스할 거야."


언제 이렇게 자란 걸까.

나의 동생은.

착하고 귀여운 동생은 어느새 누나를 잡아먹으려는 못된 짐승이 되어버렸다.


"…네에♡"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남자답고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면 어쩔 수 없지.


동생의 성욕은 누나가 책임지고 풀어줘야 하니까.


그날 나는 

한낱 입양아가 아닌

진짜 빈터부르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