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봤는데요.

이전 편들의 링크를 포함하면 읽기 편하시겠...죠?
https://arca.live/b/tsfiction/102746838 - 프롤로그

https://arca.live/b/tsfiction/102746937 - 평화로운 마을 (1)

https://arca.live/b/tsfiction/102884635 - 평화로운 마을 (2)

https://arca.live/b/tsfiction/103288959 - 평화로운 마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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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이를 꼽으라면 대부분은 촌장을 꼽을 것이다.
허나 마을에서 가장 훌륭한 집은 촌장의 것이 아니었고, 또한 마을에 사는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영주의 별관. 영주 본인 혹은 감찰관이 마을에 들렀을 때 머무르는 장소.
촌장의 주요한 업무 중엔 마을 주민들 간 갈등의 조정과 더불어 이 별관을 잘 관리하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하여 촌장과 그 내외 정도를 제외하면 마을 누구에게나 낯설기 그지없을 그 빈 집은 오늘따라 방문객들로 붐볐다.

봄비에 젖은 축축한 차림으로 거실에 자리한 이들.
노인, 청년, 여인 등 가지각색이라 할 인물들이 모여있었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불 켜진 벽난로로 덥혀진 훈훈한 공기도, 깔끔하게 정리된 넓직한 테이블과 적절히 배치된 쿠션 얹힌 의자도, 하다못해 함께 살아가며 친분을 다지던 이웃들의 존재도 그들을 안심시키진 못했다.

아들과 며느리를 전염병으로 잃고 하나 남은 피붙이를 애지중지하는 늙은 촌장과 그의 손자.
툭하면 술자리에 끼어 경비병 시절의 별 것 없는 무용담을 과장스레 늘어놓길 즐기는 자경단장.
마을 내 유일하게 글을 읽을 줄 알아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걸 보람으로 삼는 청년.
이른 나이에 남편을 잃었으나 무사히 아이 셋을 장성시켜 마을 여인들의 존경을 받는 과부.

말하자면, 이들은 마을의 유력자라 할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마을에 소속되지 않은, 유일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자가 하나.

"이 자리에 모여주신 것에 감사를 먼저 전해야겠군요."

검은 사제복을 걸친 남자.
모두에게 낯선 얼굴이었으나 그 정체만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교단의 가장 날카로운 칼날.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교단의 가장 어두운 과거를 직접 자행한 이들의 일원.

이단심문관 하린츠는 친절한 미소로 손짓했다.

"자, 다들 앉으시죠."

누구도 선뜻 자리에 앉지 않았다.
모두가 눈치를 보는 가운데 늙은 촌장이 나서 허리를 숙였다.

"어이구, 저희가 어찌 감히 이런 귀한 곳을 더럽히겠습니까요...."
"괜찮습니다. 만톤 남작에게선 전면적인 조력을 약조받았으니, 오늘 이 집의 주인은 당신들의 영주가 아닌 저입니다. 제가 허락하는 것이니, 부디."

철컥. 철컥.

방금 이 자리엔 끼어있지 않던 이가 거실에 들어선다.
현관을 지키며 이 곳에 온 모든 이들을 경계하던 기사가 제 일을 끝마치곤 제 주인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현관문이 열리자 모습을 드러낸 무장한 전투병기의 모습에 다들 얼마나 놀랐던가. 자경단장은 괜스레 진흙 위로 엉덩방아를 찧어 축축해진 자신의 엉덩이 부근을 툭툭 털어냈다.
하린츠의 곁에 선 기사가 하린츠의 옆에 선 채, 현관 앞에서 그랬듯 그들을 하나씩 쓱 훑어보았다.

"...다, 다들 앉읍시다."

촌장의 말이 진정한 허락이라도 되는 양 마을의 유력자들은 하나둘씩 의자에 착석하였다.
훈훈하게 덥혀진 공기마저 그들의 숨을 멎을 듯 조이는 답답함으로 다가왔으니, 유독 표정 관리를 못하는 촌장의 손자는 푸르죽죽한 안색으로 자신의 할아버지와 기사, 이단심문관을 번갈아 살폈다.
자경단장은 애써 의연한 체를 하며 어째서 우리를 이곳에 모이라 하였는지 물으려 하였으나, 아쉽게도 그는 자신의 입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현상을 마주하였다. 그는 답지 않게 겁이 많음을 다시금 자각하였다.

하린츠는 이들의 심정을 익히 이해했다.
안 그래도 이단심문관이란 신분에 의해 겁에 질린 이들이다. 거기에 더해 영주의 소유물마저 원하는 대로 다루는 모습을 보였으니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평소 소탈함으로써 주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그로서는 다소 불편한 일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뭇 신실한 성직자들도 감히 여신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하거늘, 못 배운 무지렁이들이 그 찬란한 광명을 올바르게 읽어내고 따를 것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그저 권위.
여신 앞에선 빛바랠 속세의 권위가 그나마 이들의 눈높이에 맞을 터였다.

"많이들 궁금하실 겁니다. 왜 이리 바쁜 분들을 불러 모셨는가."

하나같이 자신의 입에 주목하는 모습에 하린츠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신앙의 증명에 목마른 이단심문관에게는 더더욱. 그러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또한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악마가 있다는 신고를 받았습니다."

누군가는 새파랗게 질렸고, 누군가는 가슴께를 움켜 쥐었으며, 누군가는 길게 탄식하였다.
하린츠는 속세의 기준으로 셈을 하여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불신자가 없다는 사실에 만족하였다. 동시에 황당무계하다는 표정으로 부정하는 이들 또한 없다는 것을 익히 기억해두었다.

"아, 악마라 하심은...."
"말 그대로 악마입니다. 뿔이 달린 사악의 종자. 토벌되어야 마땅할 여신의 적. 다들 이 마을에 한해선 모르는 게 없으신 분들일 터, 짐작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마을의 유력자들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 의미심장한 눈빛의 교류야말로 하린츠에게 유의미한 반응으로 다가왔다.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나서서 부정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최소한 마냥 거짓된 신고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하린츠로서는 벌써부터 들뜨는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피비린내나는 과거사에 더해 몇 년간 허탕을 치며 존폐 위기까지 몰린 이단심문관들이다. 갈수록 교단 내에서 입지가 좁아지는 제 집단을 걱정하던 하린츠로서는 여신이 내려준 동앗줄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이번 일을 성공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좀 더 침착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으음... 악마라니...."

머뭇거리는 무지렁이들을 확인한 하린츠의 손끝이 소리없이 테이블 위를 쓸었다.
다시금 권위를 내세워 겁박해야 할까? 그것도 나쁘진 않은 방법이다. 허나 사람이란 자기가 중요한 법이니,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결국 유사시 자신에게 불똥이 튀는 상황일 뿐. 이를 노리는 게 가장 적합하리라.
묵직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기사의 허벅지를 몰래 툭툭 쳐 자제시킨 뒤, 하린츠는 자신의 냉막한 인상을 익히 감춰주던 친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걱정마시길. 교단은 쇄신을 게을리하지 않는 법이니, 과거의 참사를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혐의를 엄밀히 조사하여 관련자만 처벌할 생각이니 부디 기탄없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그것이...."
"망설이지 마시길. 진실된 고발은 그 자체로 신실함의 증명이 될 겁니다."

늙은 촌장은 마을 주민들의 눈치를 보며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다소 치기어린 티가 나는 촌장의 손자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벌렸다가 촌장의 눈치를 보곤 다시 다물었다.
과부와 청년은 짐작가는 바가 있는 듯 눈을 내리깔았으나 입매는 단단히 굳혔다.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자경단장은 이런 분위기가 못내 답답한 듯 다리를 떨며 가쁘게 호흡을 반복하였다.

하린츠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누구를 노려야 할까.

언뜻 촌장의 손자가 입이 가벼울 듯 싶으나, 어설프고 치기어린 말은 반발을 사기 마련이다.

늙은 촌장은 이 자리 누구보다 자신과 제 피붙이, 그리고 마을의 안위를 염려하는 부류다. 문제가 있더라도 심각하지 않다면 덮는 편이 좋다는 걸 알고 있겠지.

과부나 청년의 눈에 깃든 것은 불안과 걱정이나, 그 시선에 하린츠가 있질 않으니 그 걱정을 해결해줄 존재는 이단심문관이 아니란 뜻이다. 그러니 전폭적인 고발은 기대하기 어렵다.

다만 자경단장, 그는 무척이나 감정적인 인물로 보였다. 답답함이 가슴을 가득 채우다 못해 겉으로 흘러나오는 이는 가득 찬 물주머니와 같아 구멍 하나만 내주면 물이 졸졸 흘러나오듯 뭐라도 뱉어내기 마련이다.

이단심문관은 목표를 특정했다.

"무언가 할 말씀이 있지 않으십니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이단심문관이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일까.
자경단장은 덜덜 떨던 다리도 거센 호흡도 멈추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어 주변의 안도하는 기색과 은근한 압박을 마주한 그는 새하얘진 머릿속을 어떻게든 헤집어 입밖으로 말을 꺼냈다.

"그게... 오해일 겁니다."
"오해라니요?"

하린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경단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어지러운 뇌리의 가운데서 애써 문장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저희 마을에 아인종 아이가 있습니다. 예. 그런데 수인인 듯 한데 그 기원을 모르는지라... 아, 고아입니다. 부모도 모르는 고아라 어떤 수인인지를 모릅니다. 그 애가 뿔이 달렸는데 그것 때문에 오해를 사곤 했지요."
"고작 뿔이 달린 걸로 오해를 했다, 이말입니까?"

뿔이란 아인종 중에서 수인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이다.
동물의 태를 섞어놓은 그들의 외견은 머리에 뿔이 달리거나, 동물의 귀가 달리거나, 온몸에 짐승 털이 돋아나는 둥 다양하기 그지없다.
비록 착각하는 머저리들이 없진 않다지만, 수인이 뿔을 지닐 수 있다는 건 엄연히 상식 축에 속하는 정보다. 고작 그걸로 악마를 보았다고 신고했을 가능성은 적다.

실제로, 하인츠가 신고자로부터 받아낸 정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저 혹여 자신이 모르는 정보가 나오진 않을까 입다물고 모르쇠로 일관하여 더 떠들도록 유도하는 것뿐.

"그 애가 힘이 좀 셉니다. 다 큰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도 못 이길 정도니 정말 세지요. 이전에 고블린 서너 마리가 마을에 왔을 때 그 애가 한 놈을 맨손으로 두들겨 잡더군요. 아, 맷돼지도 맨손으로 사냥했습니다. 또 태풍으로 쓰러진 목책 하나를 혼자 들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
"흐음... 듣자하니 아직 완전히 자란 놈은 아닌가 봅니다?"
"놈이 아니라 년...아니, 여자애입니다. 분명 힘이 세긴 한데 그걸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는 착한 아이입죠. 딱히 피해를 준 적도 없...."
"아니 아저씨! 걔가 얼마나 난폭한 년인데!"

입을 우물거리던 촌장의 손자가 대뜸 흥분하며 자경단장을 삿대질을 했다.
늙은 촌장의 안색이 단숨에 창백해졌으나 손자는 그쪽을 보지도 않고 분노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샤 그 망할 년이 나 두들겨 팬 건 까맣게 잊으셨나? 온몸이 새파랗게 멍들고 얼굴 퉁퉁 부을 때까지 쳐맞았는데, 그때 아저씨 뭐랬어. 뭐? 애들싸움? 그게 애들 싸움이야? 와, 그 간악한 년을 왜 다들 못본 체 하나 했는데 그냥 다들 홀린 거였구만?"

졸렬하고 천박하단 표현이 아깝지 않은 감정의 폭발.
그 폭발을 보다 못한 이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허! 니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당신은 또 뭐야. 댁이야말로 나서지 말고 집구석에 짱박혀 책이나 붙잡고 떠들어댈 것이지 왜 지랄이야?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이 건방진 녀석이... 얌마! 슈렌을 괴롭히려 했던 걸 쏙 빼놓고 뭘 잘했다고 주절거려!"
"내가 그 비실이를 괴롭히려 했다? 누가 그래? 전부 그 뿔 달린 악마년하고 걔랑 붙어먹은 비실이가 한 말 아니야? 걔네 입만 입이야? 그거 다 거짓말이라고 하는 내 입은 개 주둥이인가?"
"잭슨, 일단 진정하렴. 몇 년이나 된 이야기잖니.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아줌마도 좀 닥쳐요. 나 아직도 비올 때면 맞은 곳이 쑤시거든? 지금도 아프다니까? 옛날 이야기는 개뿔이, 아줌마도 개처럼 쳐맞으면 이해가 좀 쉬울까?"
"저 저 어른한테 말본새 좀 보게. 야! 너 이리 와! 새끼가 촌장님 손자라고 한도끝도 없이...!"

쿠웅-!

하린츠의 곁에 선 기사가 발을 구르자 삽시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귀 따가운 고성이 잦아들고 시뻘건 혈색으로 물든 이들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 하린츠는 지금껏 입다물고 있던 촌장을 향해 물었다.

"촌장, 자세히 말해주시겠습니까?"
"...커험."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던 주름진 눈이 이내 분기를 못 이겨 씩씩대는 손자를 향했다.
세차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내 지친 기색으로 아래를 향하고, 다소 진이 빠진 쉰 목소리가 조용해진 거실 안을 울렸다.

"제 손자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그 아인종 꼬마가 제 손자를 두들겨 팬 적이 있었지요."
"촌장님!!"

하린츠는 직접 손을 들어 다른 이들의 입을 막았다.
어색하게 고개를 숙인 뒤 늙은 촌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이들끼리의 다툼이야 흔한 일입니다. 허나 그 아인종은 어린 모습과 달리 마물조차 넘어선 근력을 지녔지요. 그런 힘으로 제 손자를 때려눕혔으니, 아직 자라지 못한 이 아이가 피멍이 들어 일주일을 앓던 기억이 선합니다. 애들 싸움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니 쉬이 넘어갈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들 그 아이를 감싸더군요. 분별을 못하는 이들이 아닌데 이상한 일이지요."
"...!!"
"돌이켜보면 그 아인종은 한겨울에 홀로 숲속을 헤매다 발견되었는데, 아무리 육체가 강인한 수인이라 한들 털가죽이 달린 것도 아닌데 거적떼기 하나 걸치고 추운 겨울을 날 수는 없는 법 아닙니까? 헌데 그 아이는 동상도 없이 지나치게 멀쩡했습니다. 하물며 피부에 상처가 나더라도 금방 나았으며, 제 아들과 며느리를 데려간 전염병이 돌 때도 병에 걸리지 않고 활발하였으며, 무엇보다 똑같은 것을 먹고 시간을 보내더라도 잘 자라질 않았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요... 악마처럼."
"이보쇼, 촌장!"

말을 끊어가며 자경단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용기가 샘솟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친구를 떠올렸다.
자경단장의 친구는 좋은 남자였고, 그의 부인도 좋은 여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아이인 소년 또한, 툭하면 자신을 따라다니며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조르는 귀엽고 기특한 아이였다. 만약 그가 결혼을 하여 아이가 있었다면 그 소년 같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도 종종 했을 정도로.

한때 자경단장은 아인종 소녀를 꺼렸다.
뿌리도 모를 수인 아인종인데다 힘이 세서 사람 하나는 맨손으로 패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 마을의 위험을 가장 일선에서 막아서는 그의 입장에서 그 소녀는 두렵디 두려운 위협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친구 부부는 기꺼이 아인종 고아를 받아들였고, 끝내 진짜 피로 이어진 것처럼 단란한 가정을 이뤄냈다. 여신이 보우하신 게 아니라면 어찌 이런 아름다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물며 근래 자신이 아들처럼 여기는 소년과 그 아인종 소녀가 사귀기 시작했다는 소식까지 들은 참이다. 종종 둘이 붙어다니던 모습을 떠올리자면 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오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 아인종 소녀 또한 자신에겐 친구의 딸이나 며느리나 다름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리 생각하니 더는 촌장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아이작은 선하고 좋은 사람이고, 그 아내와 아들도 마찬가지요. 그들은 근면히 터전을 일구고 마을에 헌신한 이들인데, 그들이 받아들인 사샤가 사악한 종자라면 그들이 기꺼이 가족으로 삼았겠나?"
"악마가 괜히 악마겠나? 선한 이들도 속이니까 악마겠지."

촌장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늙은 촌장의 뻔뻔함도, 옆에서 히죽대는 손자의 웃음도, 용기백배한 그에게는 참을 수 없이 역겨운 것이었다.

"촌장!! 지금 제 새끼만 돌보겠다고 나설 때요? 저 건방진 못된 녀석 하나 때문에 무고한 아이를 음해하다니!"
"무고? 그래, 내 손자가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애가 자칫하단 병신이 될 뻔 할 정도로 두들겨 팬 게 선하고 좋은 일이라도 되나? 고작 아인종 주제에 말이야."
"지금 저 놈이 씨부린 걸 듣고도 모르는 척인가! 저 놈은 맞아도 싼 놈이야! 발랑 까져서 애들 삥 뜯고 계집질까지 하던 어린 불한당 놈이 맞는 게 싫었으면 진작 지팡이로 후려패서 바르게 키웠어야지! 사샤가 저지르기 전에 내가 직접 칼집으로 후려팼어야 했거늘!"
"무, 뭐! 불한당이라니! 자네 지금 말 다했나? 칼 좀 쓴다고 제멋대로 떠드는 자네야말로...."

쿠웅-!

다시금 기사가 발을 굴렀다.
서로를 향해 비난하는 데 집중하던 촌장과 자경단장은 일말의 이성을 되찾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사자를 제외한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허나 대부분은 촌장과 그 손자에게 불쾌감을 향하고 있었기에 자경단장은 당당하게 할 말 다했다는 듯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설령 기사가 무례하다며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당당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상쾌함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어 흘러나오는 이단심문관의 말에 자경단장은 은근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 아인종 소녀가 제법 인망이 좋은가 보군요."

자경단장은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사샤의 인망은 기실 좋은 편이 아니었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 그냥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슈렌과 그 일가를 제외하면 도통 사람들과 어울리지를 않으니까.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데에는 그간 수없이 마을에서 악행을 저지른 불한당 꿈나무와, 그 예비 불한당을 제 새끼라고 감싸는 늙은이의 추한 내리사랑 탓이다.

그래도 괜찮다.
어쨌든 결과는 좋을 테니까.
늙은 촌장과 그 손자는 잔뜩 주늑든 채 다른 이들의 시선을 감내할 뿐이었다.

"헌데...."

이단심문관 하린츠는 예의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깍지껴 턱을 괴었다.
그 별것 아닌 동작에 명명백백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읽어낼 순 없으나, 적어도 논쟁을 매듭짓고자 하는 뉘앙스의 행동은 아니라는 걸 이 곳에 있는 누구나 직감했다.
자경단장의 입꼬리에 매달린 당당한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그 아인종 소녀, 꼬리가 없다지요?"

누구는 아차 하는 표정을, 누구는 아리송한 기색을 내보였다.
자경단장은 후자에 속했다. 꼬리가 없는 게 대체 뭐 어떻단 말인가?

"성서에서 이르길 여신께서 인간을 빚어내셨을 적, 악마들은 이를 배껴 제 형태로 삼되 머리에 왕관과 같은 뿔을 둘렀다 하였습니다. 악마가 박쥐의 날개를 빼앗고 부지깽이에 마법을 부려 꼬리로 매단 것은 나중의 일이지요."

악마의 형태란 본래 '뿔 달린 인간'에 불과할지니.
한때 교단이 피 보기를 주저치 않을 무렵 행해졌던 수많은 '사냥'의 희생자 중 뿔 달린 수인이 많았던 이유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때의 관습이 남아있기에 사람들은 아인종 중에서도 뿔 달린 족속들을 더욱 불길하게 여기며, 뿔 달린 수인들 또한 인간 특히 교단을 무척이나 꺼린다.
한껏 열을 올려 노성을 토해냈던 부작용일까, 자경단장은 눈앞이 흐릿하니 깜깜해지는 듯 했다.

"더구나 고작 아인종 하나를 이리 두둔하는 일은 실로 드문 일입니다. 무언가 마법이나 주술을 부린 것은 아닐까 염려되는군요."
"그 말씀은...."

짝.
갑작스런 손뼉 소리가 모두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하하, 다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죠. 인내 또한 여신께서 내리신 미덕일진데, 상세한 조사 없이 섣불리 일을 행할 정도로 폭급해서야 어찌 제가 여신의 종을 자청할 수 있겠습니까."

밝아지던 촌장과 그 손자의 안색에 다시금 그늘이 졌다.
반대로 자경단장과 다른 마을 주민들의 어두웠던 안색에는 희망의 빛이 되돌아왔다.

"제가 직접 그 소녀를 심문해야겠습니다."

이단심문관의 선언에, 다시금 그들의 낯빛에 내리앉은 명암이 반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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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내글구려병은 물론이고 싹 지우고 다시 쓰고 싶어지네요!

좀 더 제대로 된 복선을! 좀 더 제대로 된 캐릭터 묘사를 하고 싶은데...!

쓰자마자 올리기 급급한 제 잘못이 큽니다....


혹시 글에 이상하다거나 거슬리는 점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긴 글을 써보는 게 어... 몇 년 만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