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현대 #일상 #피폐 #드라마 #노맨스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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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 Chapter 2. 죽어버린 채 살아가기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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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된 지 사흘 동안 수없이 많은 일들에 치인 것과는 정반대로, 화요일부터는 좀 평소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남자였을 때랑 비슷한 느낌으로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다.

사실 어쩔 수 없는 게, 내 일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알바가 딱히 변한 점이 없어서 그렇다. 여자가 됐다고 못 하는 일이 생겨났다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내가 하는 일은 똑같았다. 카운터에서 주문 받고, 음료 만들고, 요리도 좀 하고, 뒷정리 하고. 이마저도 사장님이랑 어느 정도 분담해서 하는 탓에 별로 힘들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뭐가 있었다면 손의진이 두 번 더 찾아왔다는 걸까.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나 죽었나 살았나 보러 왔던 거라는데, 내가 슈뢰딩거의 고양이인 줄 알아?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또, 음. 옷 정리를 드디어 마무리했다는 거? 이건 별로 안 중요한데.

아, 마지막으로.

친척들한테 연락이 왔다. 정확히 말하면 고모랑 고모부, 사촌 누나한테서의 메시지. 사촌 형이 어떻게 잘 얘기를 해둔 모양이었다.


[이야기는 들었다. 힘들진 않니?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설 때 보마.] - 고모부


먼저 고모부의 문자. 간결하지만 담을 내용은 전부 담겨져 있는 알찬 내용이었다.

약간 딱딱한 말투지만 그게 또 고모부답다면 고모부다운 거지. 현실에서의 말투도 좀 딱딱하신 편이다. 나한테만 이러는 게 아니라 모두한테 그래.

그래도 좋으신 분이지만.


[우리 동생 고생 많이 하는구먼] - 서연누나

[힘내고] - 서연누나

[설 때 보자] - 서연누나


다음으로는 사촌 누나, 지서연 누나로부터의 문자. 어째 좀 착잡한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은 문장인데 기분 탓일까. 이해는 가지만서도.

서연 누나는 나보다 세 살 위의 누나다. 형이랑은 두 살 차이.

대학생이라는 소리다. 한 번 재수를 했기 때문에 이제 2학년으로 올라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

반면에 형은 대학을 안 갔지만, 이건 일단 그렇다 치고.


[많이 힘들지? 언제든 도와줄 수 있으니까 연락해~~] - 고모

[그리고 이번에도 데리러 갈 테니까 그때 다시 연락하자~~~] - 고모


마지막으로 고모의 문자. 고모부랑 똑같은 이야기를 하시네. 살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데리러 올 거라는 말.

……가야 할 곳에 대한 이야기다. 매년 고모와 함께 갔었고, 가야 하는 곳. 그곳으로 가기 위해 데리러 올 거라는 뜻이겠지.

살짝 괴로운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여자로 변해버렸어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고모도 마찬가지로 괴로우셨을까. 내게 이런 메시지를 남기시면서.

물론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의문이란 걸 알기에 나는 그 이상으로 생각을 이어나가진 않았다.

그저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을 뿐이었다.

진심을 담아서.





*****





그렇게 별 일 없었던 며칠의 시간이 흘러서, 일요일. 내가 병원에서 깨어난 날이 1월 23일이니 오늘은 1월 30일이다.

음.

사실 오늘도 별 일 없기를 바라고 있긴 했다. 살다 보니까 느끼는 게 있는데, 아무 일도 없는 날이 제일 좋은 날이다. 그러면 적어도 피곤하진 않거든. 극적으로 좋은 일 따위는 내게 있을 수가 없고.

하지만 오늘만큼은, 절대로 별 일 없는 날이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아니, 사실 벌써부터 피곤해.

왜냐고?

"……선배?"

"응? 왜?"

"왜 눈을 그렇게 음흉하게 떠요."

……그, 민증 사진을 찍기로 예약을 한 날이라서. 은설 선배가 옷 입혀주겠다고 내 집까지 찾아온 상황인데.

"흐응. 글쎄……. 인형 옷 입히기 놀이는 오랜만이라서 설렐 뿐인데."

"이젠 사람 취급도 안 해?!"

그걸 덜미로 지금 내가 은설 선배의 놀잇감이 되게 생겼다고. 이게 어떻게 안 피곤한 일일 수 있을까.

"자, 자 후배, 이리로 왓!"

선배는 한껏 음침한 눈을 한 채 내게 다가왔고.

"……망했다."

나는 순간 선배한테 내 옷차림을 맡겨버린 걸 후회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





"됐다! 한 번 거울 봐봐."

"……의외로 멀쩡하게 됐네요."

물론 장난은 장난이었는지, 최종적인 결과물은 정상적으로 나왔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청바지. 내 입장에서도 딱히 부담스럽지 않게 무난하면서, 또 겉으로 보기에 충분히 예쁘기도 한 조합이었다. 여러모로 균형이 잘 맞춰졌다 해야 하나.

"의외라니! 너 선배를 대체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이상한 변태요……."

"윽."

꽤나 직설적인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는 차마 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맞잖아. 여자 몸에 채 적응도 못한 날 갖다가 치마를 입히고, 비키니는 언제 또 사놓아서 내 멘탈을 터뜨려버리질 않나, 오늘은 날 아예 바비 인형 취급할 거라고 선전포고까지 놓았잖아 선배. 나 여자 되고 나서 쌓은 업보로만 따졌는데도 벌써 이렇잖아요.

내가 선배를 오해하고 있었던 건 맞지만, 솔직히 그럴 만 했다고 생각해 나는.

"그래도 고마워요. 저 사진 찍는다고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그치?! 고맙지!"

"화장은 좀 그랬지만…… 솔직히 화장 하기 전이랑 차이점을 모르겠어서 그건 됐고……."

어쨌든 고마운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단순히 옷을 골라준 것만으로도 내 입장에선 감사한 일이었지만, 선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날 더 꾸며주려 했다. 머리도 뭔가 좀 만져주려는 것 같았고, 들고 온 크로스백에 담겨 있던 여러 화장품 가지고 날 만져주기도 했지. 꼭 이게 아니더라도, 사진관 예약 같은 것도 선배가 다 알아서 해준 거였다. 자기가 괜찮은 곳 안다면서 온라인으로 대신 예약해줬지.

그만큼 내게 정성을 쏟았다는 소리고, 나는 그 점에 진짜로 감사해하고 있었다. 다른 거야 어찌 됐든 날 위한다는 것만큼은 진실이라는 걸 알아서.

"으음. 넌 애초에 내가 화장했는지 안 했는지도 구분 잘 못하잖아. 알아봐주길 기대하고 화장 시켜준 건 아냐."

"……그야 전 화장해본 적 같은 거 없으니까 그렇죠." 

물론 요즘엔 화장하는 남자도 많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게 나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어지간히 진한 화장이 아니면 저게 화장인지 아닌지도 분간을 못 하지.

그렇다고 여자가 됐다고 해서 화장할 생각이 드는 건 아니지만 말야. 이건 거부감이고 뭐고 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이유를 찾을 수 없어서 그렇다. 귀찮은 것도 귀찮은 건데, 굳이 나 자신을 가꿔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별로 없어서 그래.

여자가 되고 예뻐진 지금에 와서는 더 그렇지. 이미 충분히 예쁜데 나 스스로 화장을 할 이유가 더 있어? 지금 내 모습도 화장하기 전이랑 딱히 차이가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이거 너무 재수 없는 생각인가?

"그래도 너 같은 경우는 지금 완전 애기 피부라서 진짜로 내가 한 게 별로 없어서 문제지만……. 대충 티 안 나는 화장이라고 하지 뭐. 화장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좋은 거 아니에요?"

"좋은 거지. 질투심이 나버릴 정도로."

"아니, 남자였던 사람한테 질투를 하면 어떡해요?"

"뭐어. 부러운 건 부러운 거라구."

거울로 바라보는 선배의 표정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분한 듯했다. 정말로 분하다기보다는, 부럽기에 짓는 분한 표정, 그런 느낌으로다가. 나도 거울을 바라보며 앉아 있고 선배도 내 바로 뒤에서 똑같이 거울을 바라보고 있어서 선배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근데, 이거 정말로 부러워해도 되는 거 맞아? 아무리 그래도 TS 증후군은 내가 원해서 걸린 게 아닌데?

아니 물론 외모 정도는 나도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긴 한데, 그래도…….

……아. 선배도 외모만 놓고 말하고 있는 거구나.

나라고 다를 게 없네. 쩝.

"아무튼, 그냥 고맙다고요."

"응? 한 번 고맙다고 했으면 충분한데."

"그래도요. 이런 건 여러 번 말해도 모자르거든요."

뭔가 아까의 감사 인사는 어물쩍 넘어가게 된 감이 있어서, 난 확실히 하고자 감사하다는 말을 한 번 더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만 같기도 했고.

"…어휴. 왜 우리 후배는 옛날이랑 달라진 게 없을까. 몸은 완전히 변해버렸으면서."

"하하. 그러게요."

"……."

선배의 눈빛에, 약간의 슬픔이 깃드는 것이 보였다. 아까와 똑같이 웃고는 있었지만, 감춰지지 않는 것은 있는 법이니까.

…어라. 선배의 기분을 건드리고 싶진 않았는데. 너무 가식적으로 웃었나?

"……선배――"

"자! 후배! 이제 슬슬 일어날까? 지금 시간이…… 음. 아마 지금 출발해서 느긋하게 걸으면 넉넉하게 도착할 듯?"

그리고 그 눈빛은, 선배의 활기찬 말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언제 그런 눈빛을 지은 적이 있었냐는 듯이. 신기루라도 본 듯.

선배는 아까 전과 같은 텐션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

아무리 잠깐 동안이라지만, 방금 그건.

"자, 자! 일어나! 후배의 리즈 시절을 사진기에 새겨두러 가야지!"

"뭐가 리즈 시절인데요."

"너 나중엔 귀찮다고 막 입느라 편한 것만 골라서 입을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 딱 내가 직접 코디를 해준 이게 너의 리즈 시절이 될 거다 이 말이지!"

"그러면 그냥 제가 좀 더 의식해서 입으면 되는 거 아닌…… 아."

"어. 내가, 방금 그 말, 똑똑히 들어놨어. 안 지키기만 해 봐 너."

"어, 어…… 죄송합니다?"

"원피스도 입고 어? 치마도 입고! 나중에는 직접 요즘 유행하는 패션 같은 거 좀 알아보기도 하고! 마지막으로는 내가 사준 비키니도 입고 바다 한 번 가고 어! 그래야 해! 꼭!"

"비키니 은근슬쩍 끼워넣지 마!"

아까의 눈빛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 탓에, 썩 유쾌하진 않은 생각이 상황에 맞지 않게 조금 피어오르고 말았다. 슬픈 눈빛이라.

사실 내가 처음으로 여자가 된 날, 선배를 만났을 때에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은설 선배는 지금.

슬픔을, 웃음으로써 덮으려고 하고 있다.

……그래도 그 슬픔이 어떤 것 때문인지는, 조금 이따가 물어보기로 할까.

지금은 다시 분위기가 밝아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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