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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고 거칠게 다듬은 단발에 이마에는 곧게 뿔이 난 여인.
가을 추수를 앞둔 곡식처럼 황금빛으로 빛나는 장발의 여우 수인.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얀 얼굴에 차가운 외모를 지닌 숙녀.
큰 뿔테 안경을 쓰고 챙 넓은 모자를 얹은 앳된 소녀도 있었고,
잠시를 틈타 기도라도 올리는 양, 두 손을 모아서 작은 입을 중얼거리는 여자도 있었다.
그들 앞에서, 키가 크고 프릴 많은 메이드복으로도 강건한 몸체를 짐작할 만한 메이드가 손뼉을 두 번 쳤다.
“주인님께서 오셨으니 모두들 조용히 해주세요.”
메이드장의 지시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꼭 메이드장의 통솔력의 반영은 아니었다. 메이드장의 가슴께에 겨우 닿을락말락하는 소녀, ‘주인님’을 향한 공경과 충성이었다. 메이드장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주인을 향해 극진하게 예를 표현했다.
그 ‘노예’들의 주인, 소녀는 쭈뼛거리며 모두의 앞에 섰다.
새삼스럽게 주위를 돌아봤다.
남자였던 기억으로 보아도, 여자가 된 지금 보아도, 어느 그림이니 자연경관보다도 화려한 풍경이었다.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 광경.
하지만 그들 개개인의 정체를 고려한다면 부담감이 커졌고, 그 모두가 자신의 ‘노예’를 자처하는 상황에선 감탄은커녕 중압감이 커졌다.
그래도 이렇게 모두가 모인 적이 있었던가? 상단 운영할 때는 워낙 바빴던 터라 모두가 한 데 모일 기회가 많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두가 모였던 유일한 순간이 소녀의 뇌리에 바로 떠올랐다.
……자기가 해방을 선언하고 은퇴하고 난지 며칠 안되서, 이 저택 마당에 저렇게들 모여있었다.
“……으으.”
오늘도 무슨 일 생기진 않겠지? 괜시리 걱정되는 소녀였다.
“주인님, 괜찮으신가요?”
“아으, 어어, 아무것도 아냐.”
걱정은 고맙지만 이유를 말할 순 없었으니 얼버무렸다. 소녀는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다들 모여줘서 고마워……. 야, 야. 내가 말하라고 말하기 전에 말하지 마!”
사소한 인사에도 즉각 화답하려는 몇몇,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부복하려고까지 하는 동작에 소녀가 황급하게 외쳤다.
일단 무익한 소동으로 대화가 끌리는 건 막았지만, 용건만 빠르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 소녀였다.
“너희가 알아야할 게 있어서, 한꺼번에 말해주려고 이렇게 불렀어……. ‘그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대명사로 가리킨 내용은 ‘너희는 노예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너희의 주인이 아니다’였다. 소녀는 이 주장을 관철하는 것에 아직도 미련이 남았지만 ‘노예’들 중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었다.
"자, 첫째로는. 나는 평범한 인간이야."
사실 너무도 당연한 소리인 만큼, 멋쩍게 된 건 소녀였다. 긴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영부영 말을 이었다.
“뭐, 말하고 말 것도 없지만, 아무튼 나는…….”
“그럴 리가…….”
긁적거리던 손이 멎었다. 아니, 그 반응은 뭔데.
“……주인님께서는, 이 세상의 세 번째 구원자가 아니셨나요……?”
아까 기도를 열심히 올리던 여인이었다. 소녀가 기억하기로는, 노예 시장에서 구매했을 때 성직 공부를 하고 싶다길래 지원해줬던 기억이 있는 아이였다. 제정 분리가 엄격히 이뤄진 세계가 아니니, 종교에 대해서 좀 아는 사람 있으면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성녀 시성을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하지만 그런 이력은 방금 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지, 그 발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일절 도움되지 않았다.
다행히 성녀는 친절한 편이었다.
“너희 각자가 고초와 시련을 앞둬 길을 잃고 방황할 적에 나타난다는 구도자 중, 교리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세 번째 구도자가 아니셨나요……?”
성녀성녀야, 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니.
설마 교단에서도 그러는 건 아니지?
처음부터 거대한 스케일에 얼어버린 소녀였다. 그 와중에 성녀의 목소리는 울먹거림에 가까워서 뭐라 다그치지도 못했다.
그러자, 저마다의 의견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주, 주인님은 마탑의 거대한 후원자, 그, 그러니까 마탑의 실질적인 운영자시잖아요…….”
“아니에요. 저희 황가의 역사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니, 주인은 우리 동방 여우 일족을 부흥시킨 귀인이시다. 그러니 주인은 소녀만큼이나 신성성을 지닌 존재시다!”
말소리들이 뒤엉커 소란스러웠고 그 내용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어지러웠다. 아니, 이거 첫째라고. 첫째에 이러면 어떡해. 소녀는 이 혼란을 잠재울 방법을 도무지 찾지 못했다.
상황을 정리한 건 머리에 뿔이 솟은 여인이었다.
“조용.”
짧은 말이지만 종족자체에 실린 위압. 모두의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주인은 인간이 맞다.”
소녀는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다. 드디어 내 말을 들어주는 애가 있었구나!
“그것도, 백룡족의 유일한 말예인 본좌가 인정하고 떠받드는 유일한 인간이다.”
충동적으로 다가가려던 발걸음이 딱 멎었다.
“이상의 수식은 불필요하지 않은가.”
그리곤 주인을 씨익 웃어보였다. 아름다운, 그것도 멋짐에 가까운 미소였다.
하지만 ‘용이 인정한 인간’은, 소녀가 생각한 ‘평범한 인간’과는 아예 딴판인 칭호였다.
다시 좌중을 훑어봤다. 다양한 시선이 엇갈렸다. 그 칭호를 자기가 선점하지 못했다는 미미한 질투, 역시 주인님은 그런 분이었어 따위의 선망, 아냐 내가 믿는 주인님은…….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다음으로 넘어갔다.
"둘째로, 노예 제도는 나쁜 거야."
“네?”
“……응?”
“예?”
이번에는 일관된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예상한 건 아니었다.
뭘 잘못 말했나?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이드장을 돌아볼 때, 손 하나가 번쩍 올라왔다.
“왜요?”
소녀는 당황 속에서 더듬거렸다.
“왜, 냐니……. 당연하잖아…….”
“네, 당연히 좋은 거 아닌가요?”
생글생글한 눈동자에는 순수한 의문만이 담겨있었다.
“네, 아무리 주인님이셔도, 이건 다르게 알고 계신 게 아닐까요?”
“……제, 제가 주인님을 만나게 된 경로기도 했는데 말이에요…….”
소녀는 잠시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나? 아님 상식개변을 당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원래대로였다.
“아니, 나쁜 거라니까?”
“왜요?”
“그, 인간을 인간 취급 하지 않…….”
“아아!”
성녀가 뭔가 깨달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소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인간이 아니라 성인, 아니면 신을 모시듯…….”
“아냐!! 그게 아니라 너희가 인간 취급 못 받는 거라고!”
“네? 노예한테 왜 인간 취급을…….”
“그게 잘못된 거라니까?”
“……저, 저희는. 주인님이라면, 인간 취급 못해도 괜찮아요……”
“……어쩌면 그것도 좋을지도.”
마지막은 얼음여왕 – 북부의 황제의 혼잣말이었다. 얘네 국가 괜찮은 거겠지?
소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노예가 나쁘다는 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에서 사회 공부 열심히 하는 거였는데. 아니, 얘네한테는 아무 쓸모 없었을 거 같기도…….
“그, 그러니까. 노예는. 어. 강제로 하는 거잖아? 내가 강제로 너희의 능력을, 뺴앗아 쓰는 거잖아?”
“그래도 되잖아요.”
바로 옆에서, 메이드장의 발언이었다. ‘온 힘으로 주인을 지켜드리겠다’던 메이드장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소드마스터의 지위를 얻어낸 인물이었다.
“제 모든 건 주인님께 바치기로 한 거니까요.”
“……그, 지금 말고. 처음 만났을 때. 처음 보는 사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평생 같이 살아야한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백룡족 ‘노예’가 한 손을 까딱했다.
“주인. 그럼 결혼도 나쁜가?”
소녀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이건 또 뭔소리야.
“우리 용족처럼 인간도 결혼을 하지 않나. 결혼도 모르는 사람과 평생을 살아야하는 건데. 신랑과 신부는 서로의 노예가 아닌가? 결혼도 나쁜가? ”
“그게 어떻게 같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잖…….”
“아뇨. 귀족가의 정략 결혼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야만인들의 지방에서는 아직 늑혼도 성행하고 있습니다.”
북부제국 황제의 첨언이었다.
“그리고 꼭 사랑한다고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요.”
성녀의 말이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성녀잖아? 그런 시선을 읽은 듯, 성녀가 수줍은 듯 덧붙였다.
“결혼하고 나서 진정한 사랑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 그럼 우리도 주인을 사랑하면 되는 건가?”
“아하. 그래서 주인님께서…….”
“아냐! 아냐! 다들 조용!”
참다 못한 소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이런 바보멍청이들! 이런 미개인들! 말장난이나 하고 말이야! 다시 노예로 삼아달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그 멸칭이 욕설에 닿지 않은 건 소녀가 되고나서 여려진 마음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노예’로 보지 않았다는 반증도 되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노예’들은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풀 죽은 목소리로 대충 끝내고자 했다.
진짜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알아듣겠지.
“셋째. 마지막. 다들 가만 있어봐. 금방 끝날 거야. 휴우. 아까도 결혼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하지만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려니 더 캥긴다. 쑥스럽기 보다는, ‘이게 맞나’ 싶은 생각.
“아니, 내가 잘못 들은 거면 진짜 미안한데, 그래도 진짜 혹시나 싶어서 이러는 건데…….”
머뭇거림이 더 호기심을 부르는 법이었다. 메이드장을 포함해 모두의 시선이 소녀에게 모였다.
소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너희 성노예로 산 거 아니야…….”
잠시간 적막.
괜히 말했다. 대체 누가 이런 헛소리를 한 거야. 관계 괜히 어색해지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해맑게 되묻는 거지??”
정작 얼굴을 붉힌 건 소녀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고오!”
남자였을 때도, 변변찮은 연애도 못해봤지만,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은 안했던 소녀였다.
지금은, 아무리 이 ‘노예’들이 예쁘고 노예를 자처한다고 해도, 결코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었다.
슬프게도 그럴 수도 없는 몸이니까.
“애초에 여자랑 여자가, 뭐. 임신이라도 하겠어? 어? 말이 되는 소리를……!”
소녀가 말끝을 흐렸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다들 시선이 흐려졌다. 눈 앞에 안개가 낀 것처럼.
또 뭐 잘못 말했나? 또 다시 자기 의심이 들 때 쯤.
“……흐, 흐히. 주, 주인님…….”
말을 걸은 건 마탑의 주인이라 불리는 ‘노예’였다.
“……그, 그런 거라면, 원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한데…….”
원해? 가능? 뭐를? 얼마든지? 뭐가?
소녀는 자기가 했던 말을 되돌이켜 봤다. 여자랑 여자가…… 임ㅅ……
“……헤헤, 흐헤헤…….”
웃음이 유독 섬찟하다. 다른 노예들도 뭔가 홀린 것처럼. 시선은 흐리멍텅한데,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있다.
소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오, 오, 오늘 전달할 건 끝! 다들 가! 아, 알아서 쉬어! 나, 나 먼저 갈게!”
뛰듯이 거실을 뛰처나왔다. 거실을 나오니 극도의 공포도 조금 누그러졌다.
그런데도 다들 미동도 않았다. 해산을 명령했는데도, 슬슬 자기 정비니 휴식하러 가야할 애들인데.
얘네 괜찮은 건가? 다시 들어가야하나 싶을 때, 메이드장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주인님이랑, 나랑, 닮은, 아이…….”
“……어휴. 으으으휴! 어우!”
소녀는 두 팔에 솟는 소름을 서둘러 쓸어내리며, 도망치듯 자기 방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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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피드백은 환영입니다.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