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 시커먼 무저갱 속에 잠들었다.
빛도 어둠도, 더위도 추위도, 느낄 수 없던 무저갱 속에서 영겁을 잠들게 될 운명이었다.
살귀로 변모해 수만을 베어낸 나의 죄악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에,
윤회전생의 희망따위는 일말도 없이 그저 그 무저갱 속에 봉인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어찌된 일일까.
나는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참상이 휩쓸고 있는 전장에서,
그런 참상 와중에도 한떨기 꽃과도 같은 귀티를 풍기는 공주님같은 몸이 되어,
꽁꽁 싸매진 한 자루의 우치가타나를 중요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 처럼 꼬옥 껴안은 채로 말이다.
"찾았다! 이 년이 마지막 남은 비겁한 도주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를 지켜야 한다-! 주군께서 남기신 마지막 명이다-!"
챙- 챙-
날카로운 금속이 맞부딪치는 파쇄음이 울릴 때마다 선홍색 붉은 꽃잎들이 하늘과 땅에 흩뿌려졌다.
비릿한 쇳내음을 가득 머금은 선분홍 꽃이 지천에 피어올랐다.
나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하나 둘 꽃피워내며 쓰러지는 모습을 매몰되어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것을 느꼈다.
"아가씨!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검은 머리를 한 여성이었다.
차림으로 보아, 시중을 드는 소녀일까.
시선을 옮겨 이번엔 그 소녀를 멍하니 매몰되어 바라보았다.
"아니, 아가씨...!"
답답한듯 봉창을 두들기는 소녀.
소녀의 그 자그마한 어깨 너머로는 어느덧 공격자들의 윤곽만이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가면 이 소녀도 죽겠구나.
나를 어떻게든 지켜내기 위해서 목숨을 받쳤던 저 충성적인 무사들처럼 말이다.
게다가, 좋은 꼴도 보지 못하겠지.
천천히 참혹하게 그들의 노리개가 되어 능욕당한 끝에, 엉망진창 누구인지 알 수조차 없는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보고있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과연 이것은 현실일까.
현실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이리 절묘하게도 이런 순간, 단단하게 봉해진 검을 감싸쥔 소녀가 된 채로 눈을 뜨게 된 것일까.
너무나도 수상하다.
하여, 천지신령들께서 나를 심판하기 위한 환상세계인 것일지도 모른다.
살귀로 변모하여 수만을 죽였음에도, 또 다시 검을 뽑아들 것인가를 지켜보는 환상세계.
그렇다면, 나는 절대로 이 봉해진 검을 뽑아들면 아니된다.
이것은 천지신령들께서 내린 시련이자, 시험일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마쳤을 즈음엔, 공격자들의 손이 검은 머리 소녀의 어깨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봉해진 검을 뽑지 않기로 하였다.
하늘의 뜻대로, 신령님들의 바램대로.
그 모든 것은 하찮은 기우였을 뿐이었다.
번쩍- 단 한 번, 번뜩임이 일었다.
착- 맑고 청아한 납도음과 함께 천하에 백만송 붉은 석산이 피어올랐다.
나는 봉해졌었던 검을 뽑아들어, 단 일순에 공격자들을 전부 베어내었다.
".... 아가씨...?"
방금 전까지 눈을 질끈 감았던 소녀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불렀다.
그럴만도 한 것이다.
시선의 높낮이로도 확연하게 조막만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꼬마아이가 무장한 괴한 십수명을 단 일순간, 단 일격에 모조리 베어버렸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까.
조용히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이걸로 된 것이다. 후회는 일절 없다. 천지신령이시여, 이 같은 시련을 일백 번 계속한다 하여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고를 것이요."
그 순간, 세상이 잠시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