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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러운 질문일 수는 있겠지만 하나 묻겠다.


혹시 당신은 아카데미물의 클리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부끄럽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꽤 있었다.


주인공이 최하위 성적이라거나.

특별한 능력이 있다거나.

뭔가 튀는 행동을 한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카데미물에서 나는 꼭 나오는 클리셰를 한가지만 뽑으라면 나는 이걸 말하고 싶다.


'시비거는 양아치' 라고.


꼭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괜히 주인공에게 시비를 거는 양아치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게 조금 내가 생각한 방향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나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내 옆에서 실시간으로 머리에 우유가 부어지는 칼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중얼거렸다.


"어?"

"생긴 것도 찐따 같이 생긴 년이 아리에님이랑 붙어다니니까 좋냐?"


*


일이 이렇게 흘러간 것은 바야흐로 1교시 수학 때로 돌아가야 한다.


보통 아카데미물에서 수학을 하던가?


내가 생각해보건데 거의 대부분이 안했던 것 같다.


영웅 윤리, 라던가 대련, 이라던가 기초 훈련, 같은걸 하는걸 본적은 있어도 수학은 거의 없다.


있더라고 해도 거의 스킵에 가까웠지.


그런데 어쩌냐.


현실에선 소설적 스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에서 알파값은 3분의 4이고' 따위의 말을 하는 교수의 말을 한귀로 흘려들으며 칠판을 바라보았다.


사람 네명은 세워둬야 높이가 맞을 것 같은 거대한 칠판은 벌써 절반 정도가 꼬부랑 글씨와 무수히 많은 숫자로 채워지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게 전부 디지털이라는거?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수업 전용 고글을 썼다 벗었다 반복했다.


그러자 칼리가 나를 보며 풋 웃었다.


"뭐하는 짓이에요 아리에님."

"아니, 이게 신기해서."

"맨날 보는건데 그게 뭐가 신기해요."

"그래도 신기한건 신기한거지."


내가 대꾸했다.


우리 둘은 그 대화 이후에도 가끔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었는데 그 사이에도 칠판을 꾸준히 채워지고 있었다.


전설의 '나는 한줄 썼는데 고개를 들었더니 이미 칠판 전부가 채워지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는 교수님' 사태가 일어나야 만 것이다.


여기서 내가 보통의 대학생이라면 '조, 좆됐다···!'를 외치며 얼른 열심히 필기를 하겠지.


허나 나는 보통의 대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무려··· 수포자 대학생이었다.


학점? 몰라. 나 사이비 종교 교주할거야.


나름 진실된 관점에서 내가 사이비 교주가 될 운명을 받아들인 순간이기도 했다.


수학하기 VS 사이비 교주하기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가 더 나은 것 같았으니까.


그나저나···.


나는 잡생각에서 벗어나 힐끔 내 옆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앞을 바라보고는 있는데 딱히 필기는 하지 않는 칼리가 있었다.


혹시 얘도 나처럼 수포자인가?


갑자기 내적 친밀감이 급격히 상승한 내가 살짝 상체를 기울여 속닥거렸다.


"저, 칼리. 왜 필기 안해?"

"어라. 아리에님 걱정해주시는건가요? 저는 이미 다 풀어서 괜찮아요. 다 아는거거든요."

"안다고?"

"네. 저 교수님은 친절해서 좋은데 수학은 좀 못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 쓰면 저 수식의 반은 줄일 수 있을텐데."

"···진짜로?"

"네? 그럼 진짜죠."


칼리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 하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 순수하고도 악독한 눈빛에 나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칼리, 너는 문과일줄 알았는데.


혼자 친밀감을 느끼고 혼자 배신감을 느낀 나는 괜히 시선을 내려서 아래를 쥐 잡듯이 바라보았다.


무안할때면 내가 하는 일종의 버릇 같은 행동이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무슨 그림 같은 것에 수많은 수식이 적힌 페이지.


칼리의 공책에 그런 페이지가 있었다.


내가 그 페이지에 시선이 이끌리게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림이 엄청나게 정교하고 잘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 팔?'


무심코 그 페이지를 자세히 보기 위해 넘기려고 했더니 칼리가 엄청나게 당황하곤 황급하게 공책을 덮었다.


"아, 안되요 아리에님!"

"어? 어, 미안. 보면 안되는건줄 몰랐어."

"보면 안되는건 아니지만···."

"그럼?"

"···."


내 물음에 칼리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떨다가 침묵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강했다.


나도 굳이 대답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대답을 강요할 정도로 공책의 정체가 궁금한 것은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공기가 우리 사이를 흐르는 가운데 풋, 하고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던 상황인데다 지금의 관계가 어색했던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딱 봐도 나 양아치요- 하는 관상의 여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분을 삭히고 있었다.


교수는 그런 학생을 보면서 말했다.


"학생.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해주겠어요. 하지만 수업중엔 정숙, 아시겠죠?"

"···네 교수님."

"그럼 이 문제는 누가 풀어볼까요. 아, 그래. 칼리? 나와서 이 문제를 풀어보겠니?"

"네 교수님."


교수는 갑작스럽게 칼리를 불렀지만 칼리는 익숙한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여기서 베타 값은 이런 형태가 되면 안되고 0.325···' 따위의 외계어를 남발하며 칠판을 지우고 수식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교수는 자신이 애써 써놓은 수식이 무자비하게 지워지는데도 흐뭇한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이거 아무래도 그거지? 보통 교수가 딴짓하는 학생에게 뭔가 물어보고 주인공이 멋지게 해결하는 클리셰.'


물론 칼리가 그런 역할을 맡게 된 것이 불만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나한테 저걸 물어봤으면 나도 어버버하다가 저 양아치 여학생이랑 똑같은 꼴이 되었을테니까.


다만, 혹시 이 세계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 것들 있지 않은가.


조연 빙의라던가 엑스트라 빙의라던가.


내가 신음했다.


"흐음···."


뭐, 아무튼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디지털 팬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했다.


물론 만약 내가 불려갔더라도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고.


자, 여기서 문제 하나.


능력치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일까?


이번에 완벽하게 예를 들어주겠다.


우선 [지혜] 능력치가 내게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내가 교수에게 불려나간다면 나는 [지혜] 다이스를 굴릴거고 만약 성공하기만 하면 실제로 전혀 모르는 수학 문제를 풀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성공!]


[갑자기 당신에게 알 수 없는 수식들이 떠오릅니다. 어째서인지 당신은 눈 앞에 놓인 문제를 풀 수 있을 것만 같은 직감이 듭니다.]


같은 말과 함께 말이다.


저번에 말했던 '스킬 같은 역할' 이라는게 바로 이런 것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앞에 잠긴 문이 있다면.


[재주] 능력치를 이용해 락픽으로 따보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힘] 능력치를 이용해 부수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내가 실제로 문을 딸줄 모른다고 해도 재주 능력치로 굴린 다이스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난 실제로 문을 딸 수 있다는 점이며, 이게 바로 능력치의 사기적인 부분이었다.


그러니 아마 교수님이 내게 문제 풀이를 시켰더라도 매력이 10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건 어떨까요 교수님?'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서 현혹시켰지 않았을까?


내가 그런 상상을 하다가 디지털 팬을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감탄했다.


"역시 신기하단 말이야···."


디지털 팬은 실존하지 않음에도 내 입술에선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당연하지만 고글을 벗으면 그 감촉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뭐, 뇌파를 속여서 그렇다는 설명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현대인의 관점에선 '그게 뭐야? 무서워···.' 그 자체였다.


아무튼.


능력치란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이래서 내가 매력을 개똥같다고 한 것이기도 하다.


힘이나 민첩, 체력 같은 능력치는 굉장히 범용성 넓고 다양한 상황에 쓰인다.


도주, 저항, 공격, 방어, 기타등등.


일신의 생존력을 크게 증폭시켜준다.


또 정령 친화력, 마력 재능 같은 능력치는 굉장히 좁지만 희귀한 일을 손쉽게 겪을 수 있게 해준다.


정령 계약, 마법 쓰기 같은 것들.


그에 반해 매력은 이도저도 아니다.


사용폭이 좁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넓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특수하냐고 하면 특수하지만 특별하냐고 하면 특별까진 아니다.


티어로 치자면 2.5티어 급 성능.


내가 이를 아드득빠드득 갈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만약 나한테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5시간은 고민해서 적어넣을거야.'


물론 그런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말이다.


휴우, 하고 분을 삼킨 내가 앞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어느샌가 문제를 다 풀어낸 칼리가 꾸벅, 하고 수학 교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학 교수는 그런 칼리를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어머, 어쩜 이렇게 품행도 올바를까. 누군가가 보고 꼭 본받았으면 좋겠구나."

"아니에요 교수님. 저도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닌걸요."

"어쩜! 네가 잘하는 편이 아니면 누가 잘하는 편이겠니? 안되겠다. 너는 상점을 줘야겠어."

"그렇게까진 안해주셔도 되는데···."

"오홍홍. 어차피 줄 사람도 없었단다. 이 반 에이스인 네가 받아가야지."


그 말을 끝으로 칼리는 거듭 부담스럽다며 거절했지만 교수는 결국 칼리의 이름에 상점을 주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그 모습을 직관하던 양아치 여자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야 대놓고 자기에겐 쪽을 주고 남에겐 상점을 줬으니까 화가 날 것이다.


심지어 자신은 비꼬면서 다른 이는 칭찬하지 않았는가.


허나 차마 교수에게 대들지는 못하겠는지 눈만 부라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맨 뒷줄에서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직관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거, 사건이 터지겠다고.


*


하여··· 이어진 사건이 바로 머리에 우유 주르륵 사건이었다.


내가 눈을 깜박이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지금 20대인 여성이 고등학교에서나 있을 법한 우유 급식에 나오는 우유를 들고 심지어 그걸 같은 동급생 머리에 쏟은건가?


일부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정녕 이것이 올바른 정신 성장 상태를 가진 성인이 보일 법한 행동이 맞는가?


진지하게 본인이 유치뽕짝하다는 자각은 하나도 없는걸까?


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양아치는 말을 계속했다.


심지어 내 이름을 자기 입에 담기도 했다.


"너 같은 하찮은 년이 아리에님이 친하게 지내주니까 뭐라도 된 것 같아? 왜 으스대는거야."

"···누가 으스됐다고 하는거야."

"너 말이야 너. 이 쌍년아. 너 일부로 그러지? 자꾸 나한테 쪽주려고."

"그건 그냥 내가 공부를 잘하는거야. 오히려 너나 잘하지?"

"뭐!? 오냐오냐해주니까 이 쌍년이!"


처음 이 세계에 오고나서부터 쭉 생각했지만 역시 내 이름이 '아리에 님' 으로 불리고 모든 사람이 내게 존댓말을 하는 것은 이상하다.


처음 설명창을 읽었을 때 내가 꽤나 재능있는 학생이라고 했었는데 그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점점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상념을 끊고 현실로 돌아왔다.


싸움이 나기 직전이었다.


이러다간 교실에서 머리채 잡고 '니가 놔, 네가 먼저 놔!' 하는 그런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내가 황급하게 다이스를 굴렸다.


굴리려는 행동은 '설득'


성공은 7이상.


데구르르르르르.


달칵.


17.


처음에 좀 이렇게 나와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제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네요."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상상치도 못한 교양있는 말투였다.


정확히는 그렇게 '느껴졌다'


이 목소리에는 저항하지 못하겠다고. 무언가 힘이 담겨있다고.


몰랐던 매력의 진면모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내 말 한마디에 각자 할 것을 하고 있던 학생들이 홀린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건 다이스를 굴린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여파였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