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백합근친




저주를 받았다.


나는 그렇게 결론내렸다.


집무실 책상 위, 투명한 유리 접시에는 소녀의 얼굴이 비쳤다. 


오밀조밀하게 어울린 얼굴에는 당황을 가득 담고. 


맞춤으로 제작한 정장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딸을 닮은 귀여운 소녀.


시선을 돌릴 때마다 소녀의 녹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다.


오른쪽으로.


이번에는 왼쪽으로.


시계방향으로.


납득했다. 접시에 비친 소녀는 나였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한 순간에 소녀가 되어버리는 현상은 저주 말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모름지기 귀족이라면 저주 한번 쯤은 경험할 날이 온다던가.


그 날이 오늘이 되었을 뿐이었다. 


똑똑!



"아버님 계십니까?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 듯 하여 찾아뵈었습니다."



집무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버린 아내를 닮은 딸, 프레데리카의 목소리.


어렸을 적부터 후계자로써 엄격하게 키워진 그녀는 이미 한 명의 귀족으로써 부족함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흔쾌히 들어오라 했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소녀의 가냘픈 목으로는 이전과 같은 굵은 남성의 목소리를 흉내낼 수 없을 게 뻔했다.



"괜찮으십니까? 행여 편치 않으시다면 시종을 부르겠습니다."



이 모습으로 딸을 만나 나라고 인지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어떻게 잘 구슬려야 할까. 


수십년의 인생 경험이 백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궁정의 능구렁이들을 상대할 때에도, 제국의 외교관과 협상할 때에도 느껴보지 못한 섬뜩한 감각.



"...아버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시간이 얼마 없다.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만 같은 목소리.


나는 습관처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집무실 안을 서성였다. 


작은 몸에 맞지도 않은 복장이 바닥에 한참을 쓸렸다. 


고작해야 눈 깜빡할 시간에 떠오르는 계책이 얼마나 될까.


귀족과 왕실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귀재는 어디로가고, 고작 설명 하나에 고민하는 둔재가 여기 있었다.  


소녀의 모습을 한 멍청이의 머릿속에는 하책 중에 하책밖에는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깃펜을 들어올렸다. 


.

.

.


아르틱멜트 공작가는 그 이름값만큼이나 거대한 저택을 가지고 있다.  


고위 귀족이나 왕족이 혹은 타국의 높은 사람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에.


손님 맞이를 위한 응접실도 또한 여러 개 있었으며 크기와 배치에 따라 용도가 달랐다. 


'신분이 불분명한 사람에게는 바깥쪽의 큰 방을.' 


넓지만 장식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기에 허전한 느낌은 들지 않는. 필요한 만큼의 대우를 한다는 공작가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었다. 


프레데리카 아르틱멜트 공작 영애의 앞에는 조금 작은 소녀 하나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다. 


마치 자매처럼 닮아있지만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행동했다. 



"그러니까, 아버님, 아니 아르틱멜트 공작님께 이 편지를 받았다는 말씀이신가요?"



끄덕끄덕.



프레데리카 아르틱멜트는 미간에 손을 올렸다. 


반대편 손에는 급하게 휘갈겨 쓴 듯한 글씨의 편지 한 장이 들려있었다.


아르틱멜트 공작가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하게 가공된 종이의 감촉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것이 무슨 의미일지, 귀족으로써 철저하게 교육받았던 프레데리카가 모를 리는 없었다. 



"하아...이런 때에 사생아라니. 그 완벽하시던 아버님이..."



사생아라는 말에 바로 앞에서 경청하던 소녀가 움찔했다.



"아, 미안해요. 당신을 비하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어요."



프레데리카는 소녀의 반응을 보고 다급히 사과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한들 바로 앞에서 사생아라고 말한 것은 큰 무례였다. 


'사이좋게 지내길 바란다.'


평소에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며 모든 행동에 감정을 배제하던 아버님이. 


자신에게는 냉정하게만 대하던 아버님이 작성한 그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프레데리카는 어딘지 모를 답답한 감각에 연신 차를 들이켰다. 



"혹시 아르틱멜트 공작님이 언제 돌아오신다는 말씀은 없으셨나요."



끄덕끄덕.


자신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이 소녀에게 말했을 리 없겠지.


종종 아버님은 왕가와 은밀하게 회담을 가지는 둥의 이유로 사라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는 보통 언제 쯤 돌아온다는 말 정도는 남겼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급한 일이었는지.


프레데리카는 다시 한 번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평소의 정자체가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어설프게 어른을 흉내낸 듯, 이리저리 비뚤어진 글자가 상황의 급박함을 알리는 듯 했다. 


아버님이 이럴 정도라면 자신이 끼어들만한 일은 아닐 터.


그녀는 금방 신경을 꺼버렸다. 



"당분간 저택에서 같이 지내게 될테니 잘 부탁드려요."



끄덕끄덕.


공은 공, 사는 사. 프레데리카는 자신과 아버지의 문제에 이 작은 아이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말없이 계속해서 과자만 먹고 있는 소녀.


릴리 아르틱멜트.


아버님의 피를 짙에 이어받았는지,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이 아닌가. 게다가 뒷배경을 후계 문제에 휘말릴 일도 없고. 


귀여워하면 귀여워했지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프레데리카는 메이드 하나를 불러 달달한 간식 몇 개를 더 가져오도록 시켰다. 



"지금 당장 비어있는 방이..."



왕도에 축제가 예정되어 있던 터라 공작가도 한창 바쁠 시기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 중 공작가와 지푸라기만큼의 인연이라도 있는 자들이 모조리 저택으로 와 있었으니까.


남아있는 방은 얼마 없었지만 그 중 소녀가 쓸만한 장소는 아직 몇 개 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맞는 선택일까?


'아버님이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으니까.'


프레데리카는 고민했다.


과연 '사이좋게'라는 말이 어디까지 해당될 지.


고심 끝에 내린 답은 한 가지였다.



"지금 손님방은 전부 차 있으니 당분간 제 방에서 같이 지낼텐데...같은 여자끼리니까 괜찮겠죠?"


"뭣...!"



프레데리카의 답을 들은 소녀의 입에서는, 비명소리 비스무레한 말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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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백합 #근친


대충 애정결핍 딸시아가 튼녀에게 의존하다가 아빠인걸 알아챈 후에도 감정을 참지 못하고 덮쳐버리는 소설을 쓰고 싶엇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