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오직 시체뿐이었다.

녹음(綠陰)이 가득해야만 시기의 산봉우리는, 이미 피로 물들어 혈산(血山)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변모해버렸다.


“어째, 서….”


한 남성이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숨을 내뱉었다.


주변의 시체는 모두 그의 전우들이었다.

목이 잘리고, 가슴을 꿰뚫리고, 사지가 절단되면서도.

오직 협의(俠義)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목숨을 던졌고, 쓰러졌다.


이곳에 정파와 사파의 구분 따위는 없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오직 재앙을 향한 인간의 발버둥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구파일방. 5대세가. 흑천군 등.

정파와 사파의 모든 전력이 모였지만, 재앙에겐 닿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고수들이 뿜어내는 검기에도 천마(天魔)는 굳건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시산혈해(屍山血海).

정파. 사파. 마교의 수많은 인간이 시체의 산을 이뤘고, 피의 바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오직 남성의 앞에 서 있는 천마만이 멀쩡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끝인, 건가….”


실력이 있는 모든 무림인이 이곳에서 잠들었다.

희망은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고수를 쓰러뜨린 천마는, 천하를 피로 물들이기 위해 움직이리라.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이 울려 퍼지고, 남성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혈산에 남아있는 생명은 단 하나.

천마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몸은 죽은 건가.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이럴 거면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천천히.

눈이, 떠졌다.



“연아! 이곳에 들어가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면 안 된단다. 알겠지?”


어머니가 저를 끌고 가 밀어 넣은 곳은 장롱 안이었습니다.

갑자기 잠에서 깬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울고 계시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이게….”

“쉿. 지금부터는 아무런 말도 해선 안 된단다, 연아. 전부 너를 위한 일이니 알아주렴.”


아버지의 서글픈 표정에, 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 걸까요.


그렇게 저는 장롱 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조용히 몰려오는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아….”


어머니의 가슴에는 칼이 꽂혀있었다.

아버지의 목은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옆집의 산이도. 현이도. 령이도.


전부… 전부 눈동자에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살아남은 건 이 아이 하나가 끝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쯧…. 마교라고 했나? 대체 이 녀석들은 무엇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군.”

“천마의 재림이니, 뭐니….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마교. 천마.

용서할 수 없는, 천하의 원수가 생겼다.


그리고 그 불구대천의 원수가… 나였다.




갑자기 생각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