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략된 내용 요약본 ~ 대충 사뮤엘한테 거둬져서 3주동안 신세지며 나름 사람처럼 살게 됐다는 내용 ~ )


이제는 내 단칸방처럼 편안해진 305호실로 돌아와, 내가 손수 꾸며둔 나의 침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참고로 내가 손수 만든 침대는 큼직한 골판지 상자 안에 담요와 베개를 깔아둔 거였다. 호텔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해주는 침대는 뭐라고 해야 할까, 좀 불편했다.


사뮤엘이 쓰는 자리라서 막 올라가기 좀 그렇기도 했고.


살다보니 깨달은 건데, 꼬리에서 은근히 털이 많이 빠진다. 머리카락도 생각보다 꽤 빠지고. 그래서 침대 위에서 좀 뒹굴거렸더니 바로 털투성이 되더라.


사뮤엘은 괜찮다고 하지만 내가 안 괜찮았다. 일단은 악역이라지만, 날 도와준 은인을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밥도 사주고, 옷도 사주고. 어차피 자기 집 아니라지만 장기투숙중인 호텔방에 순순히 들여주고.


처음엔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려나 잔뜩 경계했지만, 그런 건 없었지. 뭔 이유에서였더라, 혼자 두기엔 정신상태가 영 불안하다고 그랬던가?


이 세상에 나만큼 정신 건강한 놈이 어디 있다고. 어이가 없었지만, 실험체다 보니 혼자 뒀다간 트라우마에 빠져 자해할지도 모른다면서 끈질기게 자기 시야 안에 넣어두려고 하더라.


별 시답잖은 이유였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하니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3주가 지났다. 이제는 나름 살도 붙고, 사뮤엘의 밑에서 여러 상식이나 지식등을 배우면서 소설로는 알 수 없었던 세상에 대해 알아갔다.


생각보다는 괜찮았던 것도 있었고, 생각보다 더 끔찍했던 것도 있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리버레이터를 도와 기업 도시의 권력구조를 무너뜨린다'였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 좆 같은 작가놈 때문이겠지. 결말을 그따위로 틀어버려?


오냐, 그럼 내 손으로 더 시원하게 조져주마. 사뮤엘은 민주주의 이념과 자유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지만- 글쎄. 나는 그런 거 잘 몰라서.


능력 때문인지, 고양이가 되어서인지. 복잡한 이야기만 들으면 잠이 솔솔 쏟아졌거든. 그래서, 아주 간단하고도 확고한 목적을 정했다.


작가놈한테 복수하기.


박스를 손톱으로 할퀴며, 얼굴도 모르는 작가의 얼굴을 할퀴는 상상 따위를 하며 사뮤엘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사뮤엘이 가지고 놀라고 남겨두고 간 pda를 보며 영상이나 정보 등을 보거나, 전자책을 보며 소설 속의 소설은 어떤가 살펴보기도 하고 그가 미리 따놓고 간 영양사료캔을 한 숟갈 퍼먹고는 표정을 잔뜩 찌푸리거나.


그러다가 늘 이 시간쯤에 방을 청소하러 온 룸케어 안드로이드에게 하악질하며 내 박스 건들지 말라고 횡포도 부리고. 그러며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해가 슬슬 고층빌딩 뒤로 숨으려 할 때쯤에 사뮤엘이 돌아왔다.


"여, 블랑카. 아직 활기 넘치는 걸 보니 지루하진 않았나 보네."


"오늘은 또 뭐하다가 이렇게 늦은 거예요? 이유나 말해봐요. 나 심심했으니까."


처음 구해지고 며칠동안은 그의 심기를 살피며 구두라도 핥을 듯이 존대했지만, 살다보니 그가 딱히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성격도 꽤 경박하고 가벼운 편이었지. 내게 이름이 필요할 거라며 잠깐 고민하다가, 30초도 넘지 않아 상의도 없이 이제부터 내 이름은 블랑카라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머리랑 피부가 하얀 색이라서.


그땐 어이가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이름은 아니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그 뒤로부터 그를 조금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내 은인은 맞으니, 계속 존대는 하되 말은 편히 하다 보니 지금의 말투가 탄생한 거다.


내 전생과 현생 다 합쳐도 나보다 연상인 사람이라 존대 하는 것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뭘 하긴. 또 지루한 사업 이야기나 하다가 왔지. 그건 그거고, 블랑카. 네가 입을 옷 좀 사왔는데. 좀 입어볼래?"


신발도 벗지 않고 침대 위로 몸을 날린 사뮤엘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튕기듯이 일어나며 플라스틱백 속을 뒤적거렸다.


"에? 옷은 지금도 충분하지 않아요?"


후드티에 청바지. 그리고 쌀쌀한 겨울철이니 적당히 따스한 파카. 혈청 주입자라고 해서 추위와 더위에 면역이 되는 건 아니라, 이 정도의 방한구는 필요했다.


"아, 맞아. 이야기를 안 해줬네. 유니폼 말이야, 유니폼. 아무래도 조직이니까, 적당히 소속감이 들만한 옷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유니폼.


…그런 거 없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귀를 쫑긋거리며, 내가 정말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의심했다.


하급 전투원같은 졸개들은 전부 외주나 하청 범죄 조직으로 충당하는 데다가 조직원들도 정체를 감춰야 해서, 간부들은 하나같이 개성만점이라 통일된 의복따위 거절한다는 이유로 유니폼을 안 입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니폼?


"냐하…?"


"어딨냐, 분명 여기 어딘가에… 아, 여깄네. 자, 난 나가 있을테니까. 한번 입어봐. 나름 알아주는 재단사한테 돈 잔뜩 찔러주고 뽑은 거니까, 안 입을 생각은 하지도 말고."


돈이 아깝잖냐, 안 입으면. 그렇게 말한 사뮤엘은 말릴 틈도 없이 멋대로 방을 나서버렸다.


"아─ 잠깐만요! 나 이거 입는 법 모른단─"


말이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서버리다니.


사뮤엘이 나선 문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짜증도 냈으나, 결국 내겐 선택지가 없다는 걸 시인하고 한숨을 폭 내쉰 뒤 옷을 하나 하나 벗었다.


겉보기엔 동등했지만, 어디까지나 갑은 사뮤엘이었다.


나는 그가 하자는대로 따라야만 했고. 여태껏 그가 무리한 지시나 이상한 건 하나도 안 시켜서 고분고분 따랐을 뿐이다.


별 수 있냐. 꼬왔으면 주인공 몸에 빙의했어야지. 체념하며 속옷만 남겨두고 옷가지들을 전부 벗어던진 뒤, 포장을 뜯어 안쪽에 고이 모셔진 옷들을 꺼내 하나하나 입어봤다.


이놈의 가슴 때문에 조금 끼는 옷은 입기 싫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눈에 처음으로 보인 건 와이셔츠였다.


본인 선정 학생때 가장 입기 싫었던 옷 no. 1.


물론 지금도 입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새하얀 셔츠를 노려본다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으나, 있는 힘껏 노려본 뒤 그 푸석푸석한 흉물을 입었다.


…오, 생각보다는 부드러운데. 무슨 재질로 만든 건진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와이셔츠의 질감이 아니었다.


물론 그냥 티셔츠에 비하면 여전히 뻑뻑하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입어줄 만했다.


가슴이 조금 끼는 것만 빼면. 가슴 살은 못 빼나. 솔직히 뛸 때마다 흔들려서 좀 아픈데.


셔츠도 입었으니 더 망설일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셔츠의 아래에는 치마가 있었다.


사뮤엘 개새끼.


고양이 수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저주를 퍼부은 뒤, 대체 이걸 어떻게 입어야 하는 건지 눈을 찌푸리며 들여다봤다.


이렇게… 입는 건가?


처음 브라를 찰 때처럼, 에고가 마구잡이로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남자로서의 내 자존심이나 그런 게.


아, 진짜. 작가새끼 만나면 아주 도륙을 내버려야겠다.


분노를 곱씹으며 어거지로 치마를 입고 나니, 어쩐지 짧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건 사뮤엘한테 화를 내야 하는 건가.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며 오갈 곳 없는 분노를 삭인 뒤, 축 늘어진 채로 나머지 옷들도 입었다.


스타킹, 무슨 벨트, 검은색의 털 달린 코트.


아하하…


그래, 어디까지나 명령인 거니까. 내 의지로 입은 게 아니니 노카운트인 걸로.


모자까지 마저 쓰려다가, 양쪽 다 덮으면 소리가 좀 안 들린다는 걸 깨달아 한쪽 귀에 비스듬이 걸치고는, 문 밖으로 나섰다.


"다 입었어요. 그것보다 보스. 대체 치마는 뭔 생각으로 넣은 건가요."


항의하듯이 그를 째려보며 치마는 무슨 생각으로 입힌 거냐며 추궁했다.


"엉? 그냥 디자이너가 이러면 예쁠 것 같다길래 그걸로 달라고 했는데."


그러나 사뮤엘의 대답은, 상상 이상으로 간단한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더 항의하려다가, 문득 '블랑카'가 치마를 싫어해야 할 이유를 생각해봤다.


사뮤엘은 내가 빙의…인지, 환생인지 뭔지. 아무튼 안쪽에 들어있는 게 남자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즉슨. 나 남잔데 하면서 거절할 수 없다는 거다. 기껏해야 난 치마 별로 안 좋아한다- 그 정도의 핑계만 댈 수 있을 뿐.


"…하아, 됐어요, 보스. 내가 뭘 기대하겠나요."


"벌써 네 마음속 평가가 바닥을 친다니, 이건 좀 슬픈걸. 뒤돌아볼래? 코트도 벗어보고. 이야, 진짜 예쁘게 잘 뽑히긴 했네. 오. 디자이너가 나한테 고함치면서까지 이 디자인으로 해야 한다고 억지부리더니, 이유가 있었구만."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 다시 코트를 걸치고 이제 벗어도 되냐고 물어보니, 사뮤엘은 아직 보여줘야 할 사람들이 남았다고 말했다.


"유니폼도 입었겠다, 시간도 꽤 지났겠다. 블랑카, 지금이야말로 적기라고 생각하지 않아?"


뭔소리래.


사뮤엘과 가까이 지내면서 헛소리를 자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의 헛소리는 들을 때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소린가요."


"뭔 소리긴. 네 상관들을 만나러 갈 때가 됐다는 거지. 따라와, 블랑카. 마침 녀석들도 시간 된다길래 오래간만에 간부진 회의도 할 겸 해서 네 소개도 하려고."


냐하. 간부 회의.


이제부터 본격적인 리버레이터 생활이 시작되는 거구나.


능력으로 나른해진 정신에 활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사뮤엘따라 차타고 번화가를 누비며,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기대했다.


그러나 어째 가면 갈수록, 후미진 뒷골목으로 가길래 무언가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원래 악의 조직은 좀 음지에서, 어? 알잖아.


그러다가 그의 차가 멈춰서서, 대체 어디인가 봤더니.


'삼녀네 분식점'

'단체주문 환영'


…분식집이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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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ㅋㅋㅋㅋㅋㅋ빵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빠아앙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s. 네로->시로->블랑카로 이름 수정함


생각해보니 네로는 검은고양이였어

그리고 시로보단 블랑카가 더 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