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새오. 틋챈 뉴비애오.

좋아하는 틋소설에 대해서 마음껏 주책부릴 수 잇는 커뮤가 잇는지도 몰랏서요

그래서 주접떨고 싶어서 첫 글로 리뷰 남기려구 해오


스포가 잇워요




그냥 시작부터 스포 박을거애오



진자애요!!








틋 장르에서 가장 기본이 되지만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요소 중 하나는 성별이 변했다는 사실에 틋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냐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하냐에 따라서 틋녀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그 행동 하나 하나에 강력한 동기와 이유를 덧붙일 수 있고, 그걸 넘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모든 것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보통 무거운 주제의식을 동반하기가 쉽기 때문에, 가벼움을 추구하는 웹소설에서는 추구하기 힘든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이 장르의 웹소설에서는 그 요소를 부각하는 것을 초반에 한정짓거나, 과감하게 포기하고 일부 상황의 요소에서만 편할 때 사용하기 좋은 클리셰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런 기법도 매우 좋아합니다. 소설 각자가 나름의 매력을 어필하는 과정에서 살짝 올려주는 고명 같은 느낌인데, 그것만으로 재미를 상당히 더하고, 그게 저희가 이 장르를 좋아하는 이유니까요.


하지만 바꿔 말하면, 이런 고명 같은 요소라는 것은 틋녀가 아니어도 진행되는 재미있는 웹소설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굳이 거기에 살짝 특제 소스를 얹은 느낌이죠.


이 글 역시 쭉 읽다 보면 크게 다르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주인공인 틋녀, 이서연이 성별이 변경되어서 나타날만한 특별한 요소는 작품 특유의 분위기에 짓눌려 나오는 상황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특히, 초반에는 몰라도 후반에는 더더욱 말이죠.

어찌되었든 웹소설의 틋 클리셰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드는 요소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한 감정이나 생활의 변화 같은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에 안 맞거든요.


하지만 이 소설은 그것을 아주 작은 장치로 사용합니다.

이를테면, 초반에 주인공과 그녀의 친구가 짧은 여행을 가려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마법의 그 날을 겪고, 이로 인해 친구와 여행을 미루며 교감을 하게 되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런 작은 장치로 주인공과 친구는 서로에게 조금 더 다가가고 -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 새로운 등장인물을 언급하는 식으로 표현이 됩니다.


이런 식입니다. 

안 그래도 겉도는 주인공은, 틋녀로 바뀌는 걸로 학교에서 특정한 인물의 시선을 끈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결국 본인이 더욱 더 고립됩니다.

이야기를 자체를 이끄는 힘이 이 TS에서는 없지만, 주인공이 피폐해지고, 계속해서 주요 등장인물들에게만 끊임없이 교감하고 의존하려는 단초를 제공하고, 길을 닦아줍니다. 피폐의 길을 닦아준다는 점에서 정말 태그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럼 이 글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주인공 이서연이 틋녀로 변하면서 바뀐 외모가 그가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진, 죽은 누나와 똑같다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네, 이것도 나름대로 TS요소가 이끌어나가는 것도 맞긴 하지만, 이것은 주인공이 여자여도 큰 상관이 없다고 느껴서 그런 쪽의 시선은 배제했습니다. 다만, 제 짧은 식견이니 저보다 훨씬 멀리 보시는 분들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이게 틋의 요소이건 아니건, 저는 이 소설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주인공도, 주인공의 부모도, 주인공의 가장 절친한 친구도, 끊임없이 그를 통해 죽은 주인공의 누나를 되새길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주인공을 그럴 때마다 죄책감을, 주인공의 친구는.. 제 소견이 짧아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여러모로 씁쓸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겁니다.


이 감정이 끊임없이 등장인물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해서 주인공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깁니다.

그리고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녀의 누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녀의 누나가 끊임없이 쥐고 흔드는 이 피폐한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유유상종입니다.
상처 입은 동물들이 모여서 서로를 핥아주듯, 모두가 각자의 상처가 있고 그 상처를 서로가 보듬어주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 피폐함을 더해요. 솔직히 읽고 있으면 독자까지 정신이 피폐해집니다. 그걸 목적으로 하는 피폐물이라는 점에서 수작이네요.

그런데요.
그런데 말이죠.

그럼에도 상처 입은 아직 미성숙한 학생들은 그럼에도 서로를 계속 보듬어줘요.
계속해서 상처가 생기는데도 말이죠. 그게 아프다는 걸 아는데도 말이죠.
결과적으로 계속해서 피폐함을 낳으면서도 멈추지 못해요. 

이게 정말 미치게 합니다. 정말 피폐함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독자까지 받아요.
그리고 그 희망 때문에 소설을 놓을 수 없어요.
언젠간 치유되지 않을까라는 희망 때문에.
악랄한 신화처럼 판도라의 상자 맨밑에 희망을 감춰놓고 보여줄까 말까를 하고 있어요.

각 소설에는 각자의 가치가 있고, 우위를 정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입니다.
날림으로 쓴 후피집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명작인 반지의 제왕보다 가치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기에 다른 소설을 언급하는 건 참으로 서로에게 실례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언급하고 싶어서 미리 보험을 깔고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중, 고등학생 때 많이 읽었던 팀 보울러의 소설이 생각났어요.
네, <리버보이>, <스타시커> 등을 쓴 손꼽히는 성장 소설 작가 그 '팀 보울러'요.
아무리 제 개인적인 감상이라지만 돌을 던지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읽었건 간에 감히 세계를 휩쓴 명장의 소설에 웹소설을 빗대다니요.
저 역시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인만큼, 그쪽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의 대전제인, 상처를 입은, 덜 자란 어른아이가 마찬가지로 상처를 입은, 덜 자란 어른아이와의 만남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나간다는 그 분위기만큼은 흡사하고, 그 감정선을 작가 분만의 개성으로 잘 녹여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선을 소재를 통해 직접 보여줍니다.

대표적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팀 보울러' 분의 소설 <스쿼시>에서는 책의 제목인 '스쿼시'가 그 대상이었죠. 끊임없이 잘해야한다는 압박을 받는 주인공의 감정을 외부에서 비유하는 게 스쿼시라는 스포츠입니다.
반면, 이 소설에서는 완전 색맹과 사진이라는 걸 들 수 있겠네요. 주인공의 감정을 직접 움직이는 요소이자, 감정을 외부에서 비유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소설은 그렇게 상처를 입은 사람이 한 사람과 한 사람의 만남이 아닌, 여러 사람이 나와서 주인공을 중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상처를 치유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잘 안 되지만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이 감정선 하나만으로 이 글을 읽는 이유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 감정선에 작가 분이 몰입하시는 건지, 아닌건지 잘 모르겠지만 요즘 글에는 하나의 감정에 꽂혀 묘사하는 문체가 자주 나옵니다. 감정을 유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하나의 감정을 한 마디로 묘사하고, 그걸 다른 말로 다시 묘사하고, 그걸 또 다시 묘사하고.
충분히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 느낀 한 번의 감정을 계속해서 표현하여 글을 늘리려는 것처럼 애쓰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걸 싫어하시는 분이라면 잘 맞지 않을 수 있겠네요.

네 뭐, 각설하고. 웹소설의 가벼운 분위기는 매우 즐겁습니다.
혹은 무거운 피폐물이라고 해도 그것조차 가볍게 즐길 수 있다는 게 그 매력입니다.

하지만 그 매력들을 탐구하다가 오히려 어렸을 때 좋아했던 이런 성장 소설의 감성을 보니 오히려 신선하고 반갑더라구요.
피폐 장르를 좋아하고, 팀 보울러 같은 청소년 성장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이라면 추천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글쓰는 재주가 없어 이것저것 두서 없는 글이 되었지만, 주책이나 부리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쓰게 되었네요.




글 쓰는 재주가 업서서 리뷰/추천하는 글이 오히려 자까분애개 독이 되엇는지 몰루갯내오

요약 때리면 그래도 피폐물 조아하고, 성장소설 조아하면 진짜 취향 맞는 글이애오


+ 가끔식 주말에 저어가 조아하는 노벨피아 소설 리뷰 들고 올개오.
글 못슨다고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