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휴가를 며칠 앞두고 TS된지 약 반년쯤 지났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처음에 불침번 교대하자고 깨우러 왔던 녀석이 비명을 질러 내무반의 모두를 깨웠던 상황은 어제처럼 생생하다.  내무반에 불이 켜지고 관물대의 거울을 봤을때, 거울 속 생전 처음보는 여자가 한치수 큰 런닝셔츠와 사제 드로즈를 입은채 사내들에게 둘러쌓여있는 상상하기 싫은 광경은 한동안 악몽으로 나올 만큼 절망적이었다.  제일 끔찍했던 점은 그 대혼란속에서도, 과한 자극을 받은 사내들의 하반신에는 싫더라도 반응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말년 휴가도 나가지 못한채 소대장의 배려하에 간부숙소에서 시간을 죽이다 남은 군생활을 끝냈다. 컴퓨터도 TV도 마음대로 쓸 수 있었지만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적어도 처음 TS병이 돌았을때처럼 부대 시설내 거수자로 몰아넣는 수준도 아니고, 내가 군생활 하던 내내 보던 보수적인 군대의 모습과는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새 치수에 맞는 여군 군복도 보급받았을때는 많이 놀랐다. 어차피 여군은 예비군같은거 안하니까 보급해줄 필요가 없었을텐데, 어차피 보급창에 많이 남는다고 가져가란다. 첫 며칠간은 아무 말도 못했지만 소대장과 행보관은 그래도 크게 갈구지 않고 넘어갔다.

제대후 집에 찾아가자 부모님은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행보관이 같이 동행해서 설명해주는 것을 듣고 나서야 이해해주셨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지만 납득했다고 하는게 더 옳겠지.

제대하고 한 1주일 정도는 방에 쳐박혀서 잘때 빼면 하루종일 울었다. 이게 현실이라는게 믿기지 않았으니까.. 하루종일 목이 쉴때까지 울고, 지쳐 잠들고,  부모님이 밥 차려준 밥상 앞에서도 먹다 울었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등을 토닥이며 이런 나쁜 일을 겪었으니 다른 좋은 일이 있을거라며 격려해주셨다.   


친했던 친구들은 소식을 전해듣자 대부분 처음에는 '차라리 입대전에 걸려서 바뀌었으면 군대라도 안갔을텐데ㅋㅋㅋ' 하고 내 불행을 웃음거리로 반응하다가, 서서히 연락이 줄어들다 거의 끊어졌다. 흥미를 잃은데다 자기들끼리 놀기도 바빴던거겠지.  입대 전 술자리에서는 평생 친구할거처럼 어거지로 술을 먹이더니, 나쁜새끼들.


... 딱 한명 빼고..  

민수는 소식을 듣자마자 집에 찾아와서 자기 일처럼 나를 도와줬다. 옛날 옛적 초등학교 4학년때 6학년 일진들한테도 겁내지않고 달려들었던 그였다.

민수와 부모님 덕에 제대하고 한 3주정도 지나고는 어떻게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군 소대장과 행보관이 귀찮음을 안고 도와준 덕택에 어떻게 서류작업도 끝나서 새 주민등록번호도 받았다. 선례가 생각보다 많이 있다보니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 10년쯤 전이었다면 온갖 서류작업과 법적 서류증빙을 거쳐 판사 앞에 서야했겠지.


이후 2학기에 복학계를 내고 복학했다. 제대도 했고, 너무 오랫동안 학교를 쉴수는 없었으니까. 과 조교는 뭔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단서를 같이 제출하니 이해하고 넘어갔다.


복학후 대학교에서도 난관은 계속되었다. 

남학생들은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거나, 같이 밥 한끼 하자고 계속 엉겨붙었었고, 스토킹하는 놈도 있었다. 그걸 보고 질투라도 한건지 입대하기 전에는 밥 한번 먹자고 하던, 음침한 과 여후배가 '군 입대 한다는건 뻥이고 사실 태국갔다온거 아니냐' 같은 소문을 내기도 했다. TS병이 이미 어느정도 알려졌기에 그녀의 헛소리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질 나쁜 소문은 언제나 꼬리의 꼬리를 물고 퍼져나간다는게 문제였었다.


그럴때 마다 민수는 자기가 직접 고초를 겪은거처럼 두 팔 걷어붙히고 문제를 해결했다.  상황이 종료되기 전까지 과 내에서 민수의 이미지는 조금씩 나빠져갔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날 도와줬다.  음침한 여학생은 자신이 던졌던 화살이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오는것을 보고 도망치듯 휴학계를 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보내다보니 정신없고 힘들지만 어떻게 한 학기를 마쳤다. 정신이 없었던 탓에 성적은 입대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망했고, F도 2개나 있지만, 자퇴하지 않고 학기를 마쳤다는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만약에 민수가 없었다면 나는 3학년 2학기를 버틸수 있었을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겨울방학동안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이내 음울한 가을과, 추운 겨울이 지나서 따스한 봄이 찾아왔다.


3학년 2학기 종강때까지만 해도 4학년 1학기는 2학기때처럼 칙칙하고 힘든 학기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봄학기는 그 걱정이 눈녹듯이 사라질 것 같은, 지난 학기가 그렇게 끔찍했다는게 상상이 되지 않을만큼 반짝반짝했다. 

지난 학기의 뜬소문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방학동안 카페에서 친해진 같은 과 여학생들과도 언니 동생 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새 친구들을 더 사귀자 얼굴이 더 밝아졌는지, 남후배들이 더 집적거리긴 했지만 그때마다 민수가 대처해준 덕에, 과에서는 거의 반쯤 민수와 CC 취급을 받고 있었다. 아는 동생들도 만날때마다  연우 언니는 언제 민수선배랑 사귈거냐는 등 질문공세였지만 애써 아무 사이 아니라며 둘러댔다.


그래도 내심 속으로는 계속 날 위해 동서남북 분주히 움직이며 날 도와준 민수를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켠이 두근두근하고 계속 신경쓰이는게 거슬렸다. 하지만 민수는 그냥 나랑 오래 알고지냈던 부랄친구니까 민수한테 반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정체모를 감정이 뭔지 확실하게 알고싶었기에, 어차피 여자친구도 없는데 다음주 일요일에 벚꽃축제나 한번 같이 가보자고 했다. 당장 학기 중순부터 취업준비하느라 바쁠테니까 이번이 마지막일거라고 이유를 달면서.  민수는 잠깐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승낙했다.


그 소식을 들은 후배는 이번에야말로 고백할거냐면서, 민수 선배한테는 비밀로 할테니까 도와주겠다며 날 도와줬다.  약속날 1주일 전 주말 토요일에 백화점을 돌면서 벚꽃축제날 입을 옷을 샀고, 일요일에는 이 도시락을 내밀며 고백해서 남친을 사귀었다며 귀여운 도시락 레시피를 알려줬다. 민수는 그냥 친구일 뿐이라며 둘러댔지만 후배는 "세상에 누가 그냥 친구한테 그렇게 지옥불로 기어들어가면서 도와줘요? 연우 언니 혹시 둔감 철벽이에요? 분명히 민수 선배는 언니한테 마음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거라니까요?" 라며 대학은 후배여도 연애는 선배니까 믿어보라며 계속 떠들어댔다. 후배한테 고맙다고, 다음에 먹고싶은거 알려주면 기프티콘 보내줄거라고 하고 집에 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별로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아 멍때리다가 교수님한테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축제를 보러가기로 한 일요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을 준비했다. 다들 나한테 잘해주니까, 후배가 알려준 도시락은 완벽히 만들어야겠지 싶었다.  왼손 새끼손가락을 살짝 데여서 반창고를 살짝 붙였지만 도시락을 완성했다.  계란말이, 스팸 무스비같은 식사거리를 밑단에 채우고, 윗단에는 곰돌이모양으로 모양을 낸 주먹밥과 문어모양 비엔나소세지, 토끼모양으로 깎은 사과같은 것으로 채워넣었다.  도시락을 싸면서 같이 먹을 상상을 하니 행복해서 몸을 떨었다.


도시락을 다 싸고 챙겨서, 평소때보다 복장에 많이 힘을 쏟은 채, 약속장소로, 약속시간보다 약간 일찍 나갔다. 도시락이 어디 부딪혀서 쏟아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도시락가방을 백팩 안에 집어넣어서 나갔다.  

그러자 약속시간보다 약간 늦은 시간에 민수가 나타났다. 우리는 표를 끊고 공원으로  들어갔다.

벚꽃이 만개한 공원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인파로 미어터질듯 사람이 있었고, 연분홍색 벚꽃잎이 눈처럼 내렸다.  그날 민수와 걸으면서 보던 벚꽃은 어릴때 부모님과 봤던 벚꽃과 비교해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예뻤다.  그러다 슬쩍 민수 얼굴을 바라보면 빛이 나는것 같고, 손을 잡자 막 심장이 터질것같이 뛰는게 이상했다.

아.. 나는 민수를 좋아했던거구나..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반해버린거구나..

한 걸음 한 걸음 걸을때마다 천국을 향한 계단을 오르는 것 같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면서 있는데, 갑자기 민수가 날 부르더니 할말이 있다고 했다.

"저기 연우야.."

설마? 설마??? 하고 민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기다리는데,

"연우야,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태연한척 누군지 되물었다.  얼어붙으면 이상하게 생각할테니까.

"잘됐다~ 누군데? 평생 여자한테 잘해주지만 여친은 한번도 없던 민수가 드디어 누굴 좋아하는 날도 오네..?"

"옆동네 여대 조굔데 우리집 윗집살아, 다음주 주말에 고백하러 가려고. 아! 연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너는 내 제일 친한 친구니까 "

다시 확인사살을 당하자 5분전까지만 해도 터져버릴것처럼 뛰던 심장이 멎어서 발치에 굴러떨어진다.

"ㄱ..그래..? 잠깐만.. 나 아까 오는길에 버스에서 물을 너무 많이 마셨더니 화장실이 조금 급하네.. 금방 다녀올께 기다려"

화장실이 급한 척 하고 화장실로 뛰어들어왔다. 이 이야기를 더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변기칸에 앉아서 생각했다.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게 나중에 좋은 일이 있을거라서' 라니, 작년 가을에 들었던 부모님의 격렷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중에 좋은일은 무슨,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민수 덕분에 그 지옥을 버텼고, 후배 말대로 그렇게 잘해주는 민수가 날 좋아하는줄 알았는데, 혼자만 착각해서 행복한 상상속에서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던거지. 그는 그냥 내가 제일 친한 친구라서 잘해주는 거였다. 아마 다른 애들한테도 비슷하게 잘 해줬겠지.  나쁜새끼..

진짜 오랜만에 감정이 북받혀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으면 또 괜히 걱정하기도 할거고, 이상하게도 생각할테니까 꾹꾹 슬픔을 눌러담고, 일어났다.

그러고 나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도시락을 보여주면 민수가 장님이 아니고서야 내가 걔한테 연심이 있다는걸 알텐데, 그러면 자기 여자친구랑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으니 사이가 서로 나빠지는게 아닐까,  그래서 다른 애들처럼 민수까지 날 버리고 떠나버리면 어쩌나, 그러면 이 세상을 나 혼자서 살수 있을까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허겁지겁 도시락을 휴지통에 버렸다. 그에게는 가방을 잘못 들고와서 도시락을 집에 두고왔다고 변명하기로 했다.


화장을 고쳐그려 울었다는 흔적을 지우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공원 벚꽃길의 풍경은 들어갔을때 연분홍빛으로 반짝이던 모습과는 다르게, 회색으로 칙칙했다. 그리고 민수에게 다가갔다. 제발 그가 내가 울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기를.


"조금 오래걸렸네? 슬슬 점심땐데 도시락은 챙겨온다더니, 챙겨왔어?"

"미안해 민수야, 실수로 가방을 잘못들고와서 집에 놓고왔어.. 저기 노점상에서 김밥이나 사서 먹자."

"아냐 괜찮아 실수할수도 있지.. 내가 도시락 싸도 될거 너한테 떠넘긴거잖아? 그럼 돗자리는 내가 먼저 깔고있을게."


김밥을 도시락 대신 사서, 돗자리를 깔고 앉은다음, 김밥이 들은 스티로폼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김밥을 먹었는데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지점토를 입에 넣고 씹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한개를 삼키고, 민수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조교는 언제부터 좋아했어?"

"방학중에 교수님 추천으로 박람회 갔을때 만났었는데 그때 첫눈에 반했어."

"그래? 고백 잘돼서 사귀면 좋겠다."

거짓말이다. 속으로 내심 차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차이면 혹시나 다음 기회는 나한테 오거나 하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그와중에 잠깐동안 그 조교가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때는 충격이었다.


"연우야 어디 아픈거 아냐? 김밥 마저 먹고 일어나서 일찍 집에 갈까?"

"아냐 괜찮아. 아픈거 아냐~ 생각보다 오래걸어서 그래.. 이왕 벚꽃축제 온건데 꽃구경도 좀 더 하고 솜사탕같은것도 먹고 들어가야지"

"어디 아프면 말해, 내일도 강의 있으니까 아프면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하니까."

걱정해주는 민수의 얼굴을 보자 멎었던 심장이 다시 조금 뛰는것 같았다. 

그래.. 이대로 계속 친구로 지내면서 계속 곁에 있는것도 나쁘진 않겠지.. 괜찮을거야... 민수가 행복하면 된거겠지.. 

나는 민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그래도 만약에 잘되면.. 어쩌면.. 나도..  하고 부질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자꾸 멤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김밥을 계속 입에 넣었다. 여전히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마음의 허기짐을 김밥으로 달랠 생각이었다.

무채색의 인파가 돌아다니는 회색빛인 공원에 돗자리 깔고 앉아서, 먹는 김밥의 맛은 지점토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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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소설이라고 볼 수 있나..? 망상하다가 급 절망회로 풀악셀 밟은거 갖고 늘어진거라 소설태그 다는게 맞나 싶긴 한데..  그래도 일단 소설인거 같기도 하니까. 소설태그 달았음.


지난번 망상 대비 글자수가 훨씬 늘었는데, 내용은 똑같이 별거 없는거같아서 좀 찜찜하긴 해..

오히려 내용은 지난번 망상이 나으려나 싶기도 하고.

TS챈에 올리는데 TS물 맞나? 아닌가? 햇갈림.


근데 사람들이 왜 수익이 안나는데 글을 연재하고 하는지 조금 이해가 될거같기도 한데,
관심 받으니까 괜히 뭔가 된거같고 기쁜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