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줄 때마다 무거운 식칼이 닭을 조각냈다.

이예지는 조각나는 식재료를 보면서 늘 하던 상상을 이어 나갔다.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종종 자기 손가락을 뭉텅뭉텅 썰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건 더럽게 아플 게 분명했다.

환부에서 아릿한 통증이 절단 이후 몇 분 동안이나 계속될 테다.

환부에 침전물처럼 가라앉은 느긋한 통증을 즐기는 그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하나 말고는 없었다.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은 손가락을 잘라도 별 대수롭지 않게 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은 자르면 다시는 붙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자해 욕구가 들 때마다 조금 더 온건한 방법을 쓰곤 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는 엄지손가락으로 경동맥을 눌렀다.

턱 끝까지 옷을 올려 입고 리본으로 목을 조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교수형 당하는 상상을 하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죽을 용기조차 없지만, 언젠가 그녀 스스로 삶의 끝을 결정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닭 많이 사 왔네?”


그렇게 말한 이예지가 닭 껍질에 칼집을 냈다.

이미 수없이 자기 몸으로 시험했던 일이라 얼마나 잘라야 상처가 잘 나는지는 알고 있었다.

적절한 힘을 약간씩 주면서 피부만 살짝 베어내는 게 묘리였다.


식칼이 날카로우면 날카로울수록 좋았다.

이예지는 칼날을 잠시 살피다가 다시 껍질에 칼집을 내기 시작했다.


칼날이 무조건 예리해야만 했다.

칼날이 거칠다면 피부를 베었을 때 제대로 회복하기 힘들었다.

이예지는 이미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어떻게 식칼을 갈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약간의 힘을 줄 때마다 식칼은 닭고기의 껍질을 잘 베고 들어갔다.

잠시 멍하게 그걸 바라본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쯧.”


짧게 혀를 찬 그녀가 평범하게 요리를 이어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상처를 내고 싶었지만, 지금은 연시우가 있었다.

연시우가 가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기에 이예지는 그저 요리에 집중했다.


그러나 막상 요리를 끝내니까 부정적인 생각은 스멀스멀 사라졌다.


“와, 맛있다!”


해맑게 웃는 연시우의 표정을 보니 그랬다.

만약 피부에 상처를 낸다면 연시우가 슬퍼할 게 분명했다.

이예지는 잠시 그가 우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턱을 괸 채 음식이나 먹었다.


조리 과정 중에서 불온한 생각이 들어간 것치고는 괜찮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찜닭은 맛있었다.


이예지는 마치 예전에 그러했듯 닭을 꼭꼭 씹어 먹었다.

예전에 행했던 자기 파괴적인 행동의 기억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원래라면 그 기억을 음미하며 적당한 걸 고르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시우야.”

“응? 어, 말해. 뭐, 먹고 싶은 것 있어?”

“아니, 그냥 머리 좀 쓰다듬어 줄 수 있어?”

“당연하지!”


연시우는 학창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이예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학창 시절의 이예지는 연시우가 그러는 걸 무척 싫어했었다.

자신은 어린애도 아니며 꼭 이상하게 보인다며 항변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어째서인지 그 어떤 때보다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예지는 한동안 그 손길을 느끼다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태동하는 걸 느꼈다.

좋다고도 싫다고도 말할 수 없는 감정은 한동안 계속 잔류해 있었다.


그 이후로도 며칠이 흘러갔다.

그 며칠 동안 이예지는 연시우에 의해 강제로 바른 생활 아가씨가 되었다.

그녀의 일과는 어지간해서는 연시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전 7시에 불안함을 토해내며 일어나면 연시우에게 안아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아침을 차리고 연시우를 배웅하면 집안일을 조금 하다가 마감을 시작했다.

억지로 점심을 입에 넣고 커피 대신 물을 마시며 재차 마감을 시작하면 연시우가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 저녁을 함께 차려서 먹고 집안일을 마저 했다가 같이 산책하러 나가곤 했다.


이예지는 내킬 때마다 계속 포옹이나 쓰다듬는 걸 요구했다.

과연 자신이 제대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마다 그런 접촉은 이정표가 되었다.

여전히 이상하게 보인다는 감정도 있었지만,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다른 걸 택하기도 어려웠다.


스트레스는 계속해서 쌓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제대로 된 부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예지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행복했으리란 사상의 신봉자였다.

못난 사람은 못난 그대로 그저 도태되어 비참하게 죽으면 그만이었다.

굳이 이 죄악을 대물림할 필요 없다며 늘 생각하곤 했다.

애초에 그녀 같은 사람을 좋아해 줄 사람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일어났어?”

“응...”


오전 7시를 알리는 알람을 끈 이예지가 절망을 토해내며 양팔을 벌렸다.

연시우는 어색하게 그녀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간질이는 걸 느꼈다.

이러다가 입맞춤을 허락하고 그대로 여자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잠깐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가 늘 그랬던 것처럼 포옹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아랫배가 쿡쿡 쑤시는 데다가 실금이라도 한 것처럼 찝찝했다.

허리랑 복부, 골반을 누군가 툭툭 치는 것처럼 아프기도 했다.

이예지는 잠시 멍하게 그 이유를 분석하려고 했지만, 머리가 핑 돌아서 그럴 수 없었다.


순식간에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예지야!!!”


그녀는 뭐라도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의식이 완전히 꺼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낯선 흰 천장부터 보였다.

이예지는 그녀가 이동식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조금 전 상황을 정리했다.


임신했는데 하혈한 것도 모자라 쓰러지다니.

그게 뜻하는 건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해진다는 게 새삼 어떤 뜻인지 몸으로 깨달은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다행히 근처에 연시우와 의사가 얘기하는 게 보였다.


“보호자분도 아시겠지만, 단순히 기립성 저혈압인 것 같고요.”

“네네.”

“임신했다고 하신 건 이제... 산부인과에 검사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마침 환자분도 깨어나셨고 이 병원에는 산부인과도 있으니 내원하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이예지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아 반사적으로 연시우를 껴안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검사를 받기 전까지는 속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괘,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한 연시우가 그녀보다 더 허둥거렸다.

조금 전까지 연시우와 대화하던 의사는 다급하게 다른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두 사람은 이내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접수부터 시작했다.


이예지는 그 과정 내내 창백한 얼굴로 떨었다.

애를 지운다는 건 그녀가 원하던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제대로 된 어머니가 될 수도 없었을 테고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조금 다른 절망이 그녀의 가슴 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건 성폭력 위기에 처했을 때 들었던 절망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웠다.

덕분에 이예지는 반사적으로 옆에 있는 연시우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검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래 걸렸다고 한들 그녀는 다 기억할 수 없었다.

반쯤 공황 상태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뿐이었다.


진료실에는 온화한 인상의 여의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연시우와 이예지에게 눈웃음을 보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당연히 그 내용은 그녀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넋이 나간 채 적당히 대답만 하던 그녀가 겨우 정신을 차린 건 진료실 밖으로 나온 이후였다.


연시우는 병원 구석에서 그녀를 꼭 껴안았다.

숨이 턱 막히다 못해 질식할 정도로 껴안는 통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어깨를 두들겼다.


“다행이야.”

“...뭐가 다행인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라고 하셨어. 애초에 임신한 적도 없다고 하시더라.”

“...뭐?”

“컨디션 난조로 생리 불순이 생겼고 그것 때문에 입맛이 변했던 거래.”

“...잠깐.”


이해할 수 없는 말의 연속이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계속, 말해봐.”

“아마 상황도 상황인 데다가 검사기 오류 때문에 오해했을 수도 있다고 하셨어.”

“...아.”

“오히려 가임기는 지금이고 신혼부부면 고려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하여간 그래.”

“그렇, 구나.”


잠깐 그렇게 숨을 삼킨 이예지가 울기 시작했다.

유산인가 싶었을 때 느꼈던 감정이나 그 외의 다른 것 때문에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시우는 허겁지겁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지만, 이예지는 그저 병원 구석에 처박힌 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쪼그려 앉은 채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문득 연시우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예지가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나서 연시우를 붙들었다.


“...나, 가임기랬는데.”


그 말만 남긴 채 이예지는 붉게 변한 얼굴을 숨기기 위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정말 제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생각도 잠시.

연시우는 어버버 당황하면서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며칠이 지난 후, 아침.

이예지는 오전 7시를 알리는 알람을 꺼버린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간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허리가 아팠지만, 그래도 잠을 청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어느덧 일어난 연시우가 음험한 눈빛을 보낸다는 걸 알아차렸다.

막 갈아입은 옷 속으로 손을 넣으려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예지는 짐짓 안 된다는 듯 말을 던졌다.


“이미 두 줄이잖아.”

“그, 그래도...”

“...몰라, 다 너 때문이야.”


그렇게 말한 그녀가 연시우를 껴안은 채 몸을 돌렸다.

졸지에 침대에 누운 자세가 된 연시우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예지는 그 표정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감정이나 걱정은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늘 말했던 것처럼 전부 연시우 때문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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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절단면이 예리하면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요.

반면 절단면이 거칠면 아무래도 상처가 좀 느리게 아물더라고요.

고통은 아마 둘 다 비슷했던 것 같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