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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은 은유다.”
은근한 어투도 그렇고 퍽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학생들 얼굴엔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모두들 의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을 기호로서 이해하지.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é). 들어본 적 있나?”
한술 더 떴다. 성미급한 어느 누구는 팬을 소리나게 내려놓기도 했다. 하지만 교수는 그 학생을 꾸짖거나, 학급 전반적의 인문학 소양이 부족하다고 한탄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은 문학 수업이 아니라 <능력 활용의 개괄> 강의였으니까.
“뛰어난 능력자일수록 그 관계를 뒤트는 것에 정통하단 말이다.”
시니피앙, 시니피에. 교수는 칠판에 두 단어를 적고 뒤를 돌아봤다.
“여러분, 내 능력이 뭔지 알고 있나?”
“정신 조작이라…….”
희마리없이 흐려지는 말. 하지만 질문에 대답한 것만으로도 칭찬 할만 했다. 인간들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고 경외했다. 그리고 교수는 충분한 경외의 대상이었다. 아카데미 부총장이라는 직책도 그렇고, 정신 계열 능력의 독보적인 권위자기도 했으니.
“내 능력이야 말로 이 예시에 합당하지. 예를 들어볼까. 방금 대답한 게, 제이스, 맞나?”
“네, 네!”
“내가 지금부터 제이스의 정신을 조작할 걸세. 아아, 놀라지 말도록. 그냥 예시인 것 뿐이니까. 뭐, 수업 듣는 태도 봐서 필요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제이스는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가 웃음을 띄었다가, 다시 굳어지는 극적인 변화를 보여줬다. 그런 변화와 교수의 능청스러운 말투는 전체에게 학급에서 조금의 웃음을 줬다.
“음, 내가 제이스의 정신을, 아주 말 잘 안 듣는 날라리의 것으로 바꾼다고 하자. 흐음, 그래봤자 그럼 별차이가 없으려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교수도 허연 수염으로 뒤덮인 입가를 씰룩였다.
“자, 제이스를 구성하는 성질, 기억, 그리고 차후 그가 바뀐 정신으로 만들어 낼 역사와 의미까지. 즉, 시니피에가 변경됐네. 기의가 바뀐 거야. 하지만 정신 조작을 하기 이전과 이후에도, 제이스라는 인물의 시니피앙은, 기표는 바뀌지 않았지. 이해되나?”
학생들은 웃음기의 여진을 갖고 있었지만, 교수의 물음엔 답하지 못했다.
늙은 교수는 저 멀리 있는 뒷자리까지 훑어보았다. 조금 실망하려던 찰나, 가장 앞엣 줄에서 손을 든 학생을 보았다.
“어, 그래 레이사 군…… 미안하네, 레이사 양.”
레이사라 불린, 작은 키의 여학생은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혹시 정신계가 아니라 물질계로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삭막한 교정에서 질문만이라도 달가운 법이었다. 교수는 흔쾌히 그랬다.
“하긴 그 편이 더 와닿겠군. 물질계에서의 예시로는 여기 레이사 양이 적합하겠다.”
노교수의 발언은 특별한 악의를 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유일하게 발언한 학생을 위한 헌사인 셈이고, 예시로서 정말 적합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몇몇 학생은 벌써부터 저들끼리 쑥덕이기 시작했다.
“여러분들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레이사 양은 작년에 능력 개화를 겪었다. 그리고 그 때 신체의 여성화가 이뤄졌지. 참고로, 유급했더라도 대다수 여러분에게는 한 학년 선배니까 잘 대할 수 있도록.”
교수의 당부에도 레이사의 귀에는 키득거리는 소리가 포착됐다. 불평을 하거나 한숨을 쉬지 않은 건 그게 하등 도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였다.
“이 때, ‘레이사’라는 이름과 신분 등등의 기표는 마찬가지로 유지됐지. 하지만 기의는? 어떻지? 자, 내가 아까 레이사 군에서 레이사 양이라고 정정했지?”
레이사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불쾌한 순간이었다. 여자가 되고 나서 안 그런 적이 언제 있었겠냐마는.
“흔히 검사나 총사들이 검, 총탄을 매개로 하는 것도 기의의 변화에 해당한다. 평범한 쇠붙이에 검기를 불어넣는다는 사례는 익히 들어봤겠지. 총탄도 마찬가지. 공기에서 불꽃을 피워내는 능력자도. 모두 기호에 대한 변경에 해당한다.”
교수는 칠판에 수식 하나를 써내려 갔다. 레이사는 고개를 돌려서 뒷자리 학생들이 칠판을 바라볼지 자기를 바라볼지 확인하지 않았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 입학 요건은 능력자로서의 자질이었지, 선한 인품이 아니었다.
“기초적인 마나 응용식이다. 기의를 바꾸는 건 합당한 댓가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는 마나를 활용하지. 일정량의 마나를 들여서 시니피앙의 시니피에를 조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활용하는 능력의 원리다.”
아까부터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레이사는 더욱 속이 썼다. 신체의 성별이 바뀐 것만이라면 어떻게든 감수했을 지도 몰랐다. 레이사가 견디기 어려운 건 현저히 감소한 마나 감응력이었다.
여자가 되어버려 출석일수를 못 채웠다는 것이 학년 유급의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기본적인 마나 응용 시험조차 과락했던 건 아카데미 입장에서는 황당했고, 그 자신은 참담했다.
“……있긴 하다. 마나 이외를 사용하는 경우가.”
좌절을 곱씹던 레이사의 귀가 뜨였다. 누군가의 질문에 대한 답인지, 교수의 자문자답인지. 그건 중요치 않았다.
“사령술사는 댓가를 자기가 아닌 남에게 지우게 하지. 흑마법도 대체로 그렇다. 버서커 중에서는 신체를 훼손하면서 능력을 증폭시키기도 하지. 효율성에 대해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출력이 지수함수 곡선을 그리기도 하고, 반비례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교수는 칠판에 다른 수식을 적어가며 말했다. 레이사는 퍼뜩 그걸 되는대로 공책에 따라 적었다.
“하지만 마나를 활용하는 게 가장 안정적이긴 하지.”
교수는 단언했다. 하지만 레이사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 미약한 희망의 단초로 충분했다.
***
“어서 오십쇼, 단장님.”
“안하던 짓을 하시네, 부총장님.”
중년 남성은 곤혹스러워했다. 노인은 허허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졸업생들 취직 시켜주는데, 당연히 굽신거려야지 않겠나?”
“그렇게 잘나가는 곳이었으면 내가 먼저 어깨 펴고 다녔겠죠.”
“가뜩이나 좁은 바닥 아닌가. 능력자라고만 하면 죄다 총칼 들고 뛰쳐나갈 생각들 뿐이니.”
“제 길드 몸집 불리기에는 좋습니다만, 성장을 위해선 괜찮은 걸 먹어야겠죠.”
노인은 두툼한 명부를 꺼냈다. 단장은 무심코 궐련을 물었다.
“아카데미 전 건물은 실내 금연이라네.”
“말세군요. 나 다녔을 때만 해도 안그랬는데.”
투덜거렸지만 다시 집어넣지는 않았다. 빼어 문 상태로 삐쭉였지만 부총장도 더 이상 지적하지는 않았다.
“올해 학생들 석차별 등급이라네.”
“다들 뛰어나겠죠. 바로 본론으로 갑시다.”
사제 관계에서 협력 관계로 발전한 부총장과 단장이었다. 자기가 가르친 학생 중 가장 우수한 학생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시원시원한 면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명부의 페이지를 한 움큼 쥐어 넘겼다.
“추천하는 학생들 명부네.”
“품질 보증이야 되어있을 텐데……. 이번은 많이 적군요.”
단장은 혀를 찼다. 부총장은 설명해줬다.
“이미 상위 길드에서 점 찍어 놓은 애들이 많거든. 이중에서도 그렇고.”
“네네,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다리 놔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겠죠.”
담배연기를 내뿜듯이, 짙은 한숨을 내쉬는 단장이었다. 부총장은 헛기침을 했다. 불편함을 표현하기 보다는, 평소에 않았던 부탁을 하기 위해 목을 가다듬는 행위였다.
“얜 뭐죠? 졸업 예정자도 아닌데요.”
“지금 특별히 부탁하려는 학생이네.”
단장의 입술에서 궐련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부총장은 손가락으로 안경을 올려썼다.
“1학년 도중에 능력 개화. 부작용으로 신체의 여성화.”
“허, 그게 있는 경우였군요. 뭐 어디 소설에만 나오는 건 줄 알았더만.”
“아카데미 보건부에서 검사한 걸로는 기존 대비 신체 능력 57% 열화. 마나 감응력 37%로 감소. 학업 중도포기 위험군 분류.”
“허어, 곤란한데…….”
단장은 방안 천장을 바라봤다. 부총장은 구태여 설득할 말을 찾지는 않았다. 천장의 무늬라도 세는 듯, 고개를 젖힌 채로 단장이 물었다.
“이유나 들어봅시다. 뭐, 손자에요?”
“나 독신일세.”
“숨겨진 자식일 수도 있잖아. 한창 잘나갈 때 기억 한 번 해봐요.”
“그 때 여자 후리고 다녔으면 이 자리 못 올라왔어, 인마.”
“당신도 재미없는 양반이었구만, 아카데미 시절 때부터 알아봤지.”
“그럼 너는 나 닮아서 결혼 않는 거냐?”
진심으로 임한다면 제자는 선생을 결코 이길 수 없는 법이었다. 단장은 심통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왜요.”
“위태롭다.”
“이 바닥에 사연 없는 놈이 어디 있수? 위태롭긴 당장 우리 길드가 위태로워요.”
정서적인 면모는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알고있었지만, 너무 예상했던 반응이라 부총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능성이 보인다. 성적은 좋잖아.”
“싹수는 개뿔. 나 학생 때보다도 성적 안좋구만. 그리고 성적 그거 허울 뿐인거 다알잖수? 마나량이 많은 놈이 다 씹어먹지.”
“……야, 너 내 수업 때 잤지? 능력은 마나로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고 안했냐?”
“하지만 마나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다. 당신이 말한 거잖아요.”
부총장은 뿌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단장은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야, 얘 교우 관계도 개판이네? 뭐 광전사라도 됩니까? 아니면 저주술사? 아유 나 그런 애들은 안 받고 싶은데.”
부총장은 명부를 덮으며 말했다.
“모른다.”
“여보쇼.”
“가능성은 있다고 하지 않았냐. 내가 보증한다.”
단장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총명한 머리로 생각해보게 딱 한 모금만 빨면 안되나?”
“대기 중에 남아있는 입자 수만큼 정확히 계산해서 너희 길드에 고지서 보내주마.”
“사업 파트너를 혼수상태로 몰아넣고 계약을 체결한다니, 이가 완전 양아치 아냐?”
단장은 궐련 끝부분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번에 위쪽에서 많이들 채간댔지. 그럼 우리 쪽에선 얘만…….”
“그럴지도 모른다.”
단장은 과장되게 죽을상을 지었다.
“애들 한테 나 어떻게 고개 들고 다녀요, 진짜.”
“귀엽고 깜찍한 신입 들어왔다고 해줘라.”
“교우 관계 파탄났더만 무슨……. 얼굴은 좀 괜찮습니까? 원래 남자였다메.”
부총장은 잠시 기억을 돌이켰다.
“뭐, 그렇게 나쁘지는…….”
“눈 높은 할배가 괜찮다면 얼굴은 보장된 거고. 월급도둑이야 한둘 있는 거 아니니까 가능은 한데…….”
단장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 부총장은 가만 바라보다 지나가듯 한 마디 툭 던졌다.
“미안하다.”
“아이, 또 분위기 잡는다, 이씨…….”
“참. 하여간 어디서 배워 먹었는지, 말본새하고는…….”
“당신이지, 누구겠어!”
단장은 벌떡 일어섰다. 부총장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에효. 월급도둑 새로 들어왔다고 하면 되지, 뭐. 안그래도 혼자 겉도는 여자애 있는데, 걔랑 붙여놓으면 어찌 되려나.”
“오호, 너희 길드 여자도 많고 그러냐? 고추밭이 아니라 꽃밭을 가꾸는구나, 야.”
터덜터덜 걸어나가는 단장은 씹어뱉듯 외쳤다.
“꽃밭은 개뿔! 난 걔 오크 혼혈 아닌가 여기에 의뢰 맡길 셈이요.”
“보내면 진단서는 무료로 떼주마. 진료비는 네가 내고.”
“말이라도 못하면. 나 가요. 나중에 연락이라도 줘요, 얼굴이라도 보게.”
부총장은 마중 나가진 않았다. 단장도 그걸 바라지는 않았다. 단장이 그의 생기마저 가져가버린 듯, 노교수는 허물어지듯 의자에 기댔다. 접어뒀던 부분을 다시 펼쳤다. 레이사의 생기 없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객관적인 지표는 빈말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자기 말은 조금 듣는가 싶어도, 다른 교수진이나 학생하고 실랑이하는 걸 직접 보기도 했다. 작은 체구라 당하는 일이 많았지만, 무슨 배짱인지 한두 번 싸우는 게 아니었다. 결국 모두가 레이사를 기피했다.
가능성의 근거란 단지 교육자의 직감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일평생 학문을 연구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것말고는 자기의 기대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확신이 있었다.
“급한 건 끝냈고…….”
레이사와 단장만 제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다음에 만날 사람들은 방금처럼 편할 수 없었다. 부총장은 수면욕과 피곤함을 이겨내고 명부를 다시 검토했다.
* * *
길드 부단장은 그럭저럭 멀쑥한 미남이었다. 자기 짐은 알아서 들라는 말에 배낭과 상자를 낑낑대며 들고 있는 레이사였지만, 알량한 친절보단 몸이 좀 더 고생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부단장은 폼이 건들거리기는 해도 안내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여기가 네 방. 길 찾긴 어렵진 않지?”
레이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방을 보진 않았지만, 복도만 해도 아카데미 기숙사랑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허름한 숙소였다. 그나마 유랑 용병단이니 만큼, 다른 곳에서는 더 나은 숙소를 쓸 수 있다는 걸 위안 삼았다.
주머니를 뒤적이는 부단장을 보던 레이사는 퍼뜩 생각난 점을 물었다.
“룸메이트도 있어?”
“맞다. 야, 테라!”
부단장이 문을 쾅쾅 두들겼다.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큰 동작이었고, 그게 걱정 될 정도로 낡은 문이었다.
“야! 신입 왔어! 얼굴이라도 비쳐라!”
숫제 물건 떠넘기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정도 취급은 익숙한 레이사였다. 인간 관계에서 결코 긍정적인 기억이 없었다. 남자였을 때도, 여자가 되고선 더욱.
하지만 마음도 소녀처럼 물들어 가는 건지, 아직 남아있던 소년의 감성인지, 아직 아이에 가까운 정신 탓인지. 비록 아카데미보단 훨씬 못한 숙소에도, 아주 다른 환경 자체에서 아주 조금 설레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쾅-
드디어 부서졌구나라고 착각할만한 문의 폭음.
“……신입?”
'먹을 거?' 와 비슷한 뉘앙스의 낮디 낮은 목소리.
방에서 흘러나오는 매캐하고 역한 냄새에 레이사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대체 어떤 작자인가 눈을 흘겼던 레이사는 당황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지가 터질 것 같은 두꺼운 허벅지. 낮은 목소리와 더불어 덩치 큰 남자라는 짐작은 자연스러운 추측이었다.
하지만 레이사의 눈높이에 이르러서는, 머리 대신 머리 하나 크기는 되보임직한 크기의 흉부 지방 한 쌍이 맞이했다. 확실한 여성성의 증거 앞에서 레이사는 황급히 고개를 젖혔다. 떡진 긴 머리칼, 체구 탓인지 초췌하고 여려보이는 얼굴은 여성의 것에 가까웠다.
“야잇 냄새가. 나가서 피던가, 환기라도 하던가!”
“혼자 사는 처녀에게 뭐 관심이 많아.”
처녀라고? 습관이 된 침묵과, 그 인물에게서 위압을 느낀 레이사였기에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그리고 부단장은, 만약 레이사가 그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에 대한 훌륭한 교본이 되어주었다.
“처녀는! 야, 말 나온 김에 묻자. 너, 들리는 소문이 이상해. 어디서 남자 하나 붙잡아와서 진즉 처녀 땠ㄷ……, 아악!”
“못하는 말이 없어 그냥.”
손가락으로 이마를 튕기는, 그냥 정상적인 딱밤이었다. 하지만 부단장은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머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아카데미를 나오고서 어떤 상황이든 각오했지만, 이처럼 비현실적인 촌극에 레이사는 그만 얼어붙었다. 덩치나 쓰러진 부단장으로 보건데 종족학 강의에서나 얼핏 들었던 하프오크가 아닐까 싶었다.
부단장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너도 알고 싶니’랍시고 자기 이마까지 튕겨주는 게 아닐까 두려워 그럴 수 없었다. 짐을 들고 있는 팔도 슬슬 아파오는지라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하프오크’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있을 거야?”
레이사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뗐다.
방안은 우아함이나 고상함 따위는 없었지만, 크기만큼은 아카데미 기숙사의 것보다 넓었다. 하지만 빈 병이 굴러다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쓰레기가 너절하게 어질러 있었고, 방 한가운데는 대검이 자리했다.
“침대는, 네가 2층 써. 아.”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갔다. 목재로 만든 2층 침대. 정리 안된 이부자리의 1층, 그리고 시선을 위로 올렸을 땐, 장구류로 같은 짐이 쌓인 올려져 있는 2층.
“치울게.”
레이사는 엉거주춤하게 옆으로 비켰다. 여성은 맨발이었다. 레이사는 뒤늦게라도 신발을 벗어야하나 싶었지만, 바닥 상태를 보곤 모른 척하기로 했다. 대신 눈치를 보면서 창문을 열었다.
“더워?”
“아니, 냄새가…….”
레이사는 뒤늦게 입을 닫았다. 남 눈치 볼 거 없이 할 말 다하거나, 말을 안 하는 등 절망적인 사교술을 가진 레이사였지만, 생사가 걸린 문제라면 얘기가 달랐다. 팔을 들어 올릴 때, 레이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다행히도 그 손은 자기의 웃옷을 집었다.
“별로 안나는 거 같은데…….”
“에?”
‘하프오크’가 고개를 들었다. 레이사는 자기 입을 찰싹 때리고 싶었다. 쓰러진 부단장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많이 나냐?”
아카데미 학생 시절이 유일한 사회 생활인 레이사에게는 가혹한 양자택일이었다. 아니라고 하는 건 안하느니만 못한 기만일까? 솔직함은 여기서도 미덕으로 작용할까?
답 없는 고민이 해결된 건, 상대가 새로운 문제를 제시한 덕이었다.
“테라.”
거칠고 투박한 손. 레이사는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이더니, 바지춤에 손을 쓱쓱 문지르고 다시 내밀었다.
“이건……?”
“악수.”
레이사는 지능이 급격히 저하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릎을 올려 들고 있던 박스를 엉거주춤하게 받쳤다. 자유로운 손으로 맞잡았다.
“레이사.”
“레이사?”
“응.”
“나는 테라야.”
레이사는 속으로 발음을 굴려봤다. 테라. 자기 소개 할 일이 별로 없는 레이사였지만, 그 다음 할 말로는 생년월일이나 출신, 특기 등등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테라는 새로운 접근을 보여줬다.
“씻으러 가자.”
“……뭐?”
“같이.”
레이사는 전혀 맥락없는 말에 손을 빼려고 했지만, 예상한 것보다도 강한 손아귀였다.
“냄새 난다면서.”
“아 그…… 근데. 지금?”
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던 레이사에겐 고맙게도, 부연을 붙여주는 테라였다.
“원래 남자끼리는 같이 씻으면서 친해진데.”
“그런데……?”
“같은 여자잖아. 처음 보는 사이고.”
논쟁의 여지가 다분한 근거였지만, 악력만으로 짐작할 수 있는 강건한 신체는 반박을 불허했다. 레이사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을 옷 챙겨. 이따가 짐 정리 도와줄게.”
그제서야 손을 풀어주는 테라였다. 집단생활이 처음인 레이사는 짐을 내려놓고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여기는 원래 그래?”
“뭐가.”
알 수 없는 짐더미를 뒤지는 것 같은 테라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사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같이 씻고 그런 거……. 신고식 같은 거야?”
그 말에 테라는 잠시 뺨을 긁적였다.
“그런 거 같진 않던데.”
“그럼 왜……?”
테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룸메이트잖아.”
레이사는 지금 여기서 자기가 남자였다는 사실을 밝힐 타이밍인 건지, 아니면 룸메이트의 친교 방식을 따르는 게 맞을지 고민했다.
그래도 일단, 고민은 유지하면서 배낭 속에서 갈아입을 옷을 찾기 시작했다.
* * *
해가 졌지만 야영지는 곳곳에 피워 둔 모닥불 덕분에 환했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 용돈으로 사온 고기를 꼬챙이에 끼워 구웠다. 모닥불 하나에 몇몇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길드 운영금 활용에 인색한 단장이었지만, 대원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편이었고, 의뢰를 마친 이후의 자축을 말릴 이유도 없었다. 길드 차원의 지출은 도매가로 달아온 술통을 돌리는, 가격 대비 효과가 확실한 요소뿐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별다른 딱히 친한 이들이 없거나, 돈이 없는 이들에겐 지금의 상황에서도 소외될 수 밖에 없었다.
모닥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 앉은 레이사는 그들이 노는 양을 보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급식비를 내지 못해 담임교수가 도와주기 전까지 오랜 기간 굶은 적 있었다. 허기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코를 간질이는 노릇한 고기 냄새는 전례 없는 고문이었다.
아카데미에서의 차별과 모욕은, 저들과 내가 서로 다른 부류라는 생각으로 견뎠다. 자기는 열등생이고, 유급생이고, 남자였다가 여자으로 바뀐 놈이었으니. 하지만 길드는 집단 생활을 표방했고, 그런 덕인지 지금의 외로움은 그 전과 결이 달랐다.
“휴.”
뭘 먹지 못해 그런지 한숨조차 미약했다. 가뜩이나 바람도 차가워진 계절이었다. 레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한참 찾았네.”
낮고 어두운, 하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 레이사는 고개를 조금 높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어딜 보는 거야.”
“……옷 좀 밝은 거 입고 다녀. 유령인 줄 알았네.”
보편적인 유령의 이미지와 일치하는 요소라곤 긴 머리칼 뿐이었다. 키뿐 아니라 몸집도 크고, 검고 두꺼운 옷을 입은 채 접시 두 개를 들고 나타나는 유령은 레이사도 본 적 없었다.
접시엔 어떻게 담은 건지 저민 고기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레이사는 비꼬아 물었다.
“그거 혼자 다 먹으려고?”
“너 먹으라고.”
레이사는 무심하게 건네는 접시를 두 손으로 받았다.
“……포크는?”
테라는 레이사 곁에 앉아서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레이사는 일부러 목청을 높였다.
“우리 교양인처럼 살자. 응? 손으로 집어 먹지 말고.”
“교양이 배불려준다니.”
“진짜…….”
불평이긴 했지만 어둠 속에서 레이사의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올라가 있었다. 손가락에서 고기의 잔열이 느껴졌다.
테라에게 맞춰진 건지, 조각 하나하나가 꽤 컸다. 레이사는 천천히 씹었다. 소금의 짠 맛. 이런저런 향신료의 맛. 탄 부분의 쓴 맛. 덜 익은 핏물의 맛. 지방층의 느끼한 맛. 벗기지 않은 껍데기의 질긴 맛.
그리고 잘 익은 고기의 육즙.
“천천히 먹어. 체하면 약 없다.”
“누, 누가 할 소리를!”
테라의 말에 괜히 역정 냈지만, 레이사는 벌써 반이나 먹어치웠다는 게 아쉬웠다. 텁텁한 기름기 탓에 갈증을 느꼈다.
“마실 거 없어?”
뻔뻔한 물음이었지만, 밤눈 밝은 테라는 어둠 한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온다.”
레이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세히 보니, 그림자가 하나가 휘청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야, 우리, 신사 숙녀 여러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 계셨다니.”
명랑하고 경박한 목소리. 부단장이었다. 테라가 달갑지 않은 듯 말했다.
“여자만 둘인데, 누가 신사야.”
괜시리 찔끔한 레이사였다. 이제 길드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이력이란 섞일 수 없는 이질성이었다. 성별이 바뀐 걸 알게 되면 반가워하는 반응은 커녕 꺼림직스럽단 반응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부단장은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아아. 미안, 미안. 정정. 미녀와, 야수께서. 이런, 마치, 테라처럼, 음습한 곳에…….”
“누가 야수인데.”
“누구긴 누구야. 우리 레이사 아가씨 덕에, 짐승에서 서서히 인간이 되어가고 계시는, 어어어. 오지마. 오지마?”
테라는 그저 일어났을 뿐이었지만, 부단장은 깽깽이 걸음으로 저만치 멀어졌다. 레이사는 그만 소리없이 웃었다.
“내가 저번에 이마 깨졌다고 말했나? 아직도 패인 자국있다고. 잘생긴 얼굴에 이거 어떡할 거야?”
“그럼 내가 시집가면 되겠네.”
“야이 씨, 진짜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어어? 미안, 오지 마, 미안하다고, 씨! 가까이 오지 마, 임마!”
같은 레파토리에 이젠 레이사는 어깨를 떨면서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테라는 흘끗 바라봤지만, 레이사에게도 뭐라하진 않았다.
“아, 배 땡겨. 부단장님은 왜 왔어?”
“왜긴 왜야. 단원들 챙기려고 왔지.”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레이사는 자조적으로 대꾸했다.
“말이 좋아 단원이지.”
아까의 웃음 덕에 어조는 누그러져있었지만, 경계심과 자각이 물씬 드러나는 대꾸였다.
어엿한 전열조의 일원인 테라와 달리, 레이사는 어디에도 끼지 못했다. 작은 체구는 전열조로도, 돌파조로도 부적합했고, 검사라는 클래스 탓에 후방 지원도 마땅찮았다. 애초에 제대로 능력을 쓰지 못하니 그저 머릿수 채우는 게 다였다. 아카데미 중퇴생이라는 신분은 학연으로 쓸 수도 없었고, 편가르기의 가장 기본적인 격인 성별조차 모호한 레이사였다. 좋게 말해서 유망주, 직관적으론 외톨이, 단장의 표현으로는 ‘월급도둑’이 레이사였다.
하지만 부단장은, 특유의 능글맞은 모습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리, 레이사 아가씨. 잘생긴 오빠가 마술 하나 보여줄까?”
그런 호칭을 질색하는 레이사였지만, 배부른 덕인지 조금 너그러울 수 있었다.
“해 봐.”
“너, 불꽃놀이 본적 있냐? 불꽃.”
레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의 축제에서 밤하늘을 수놓던 폭약들이 기억났다.
“나도 본 적 없어.”
“테라 너는 끼어들지 마,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이걸 확.”
“에헤이. 방해하지 마. 기술 쓸 땐 방해 안하는 거 몰라? 하여간 이래서 촌놈은. 어어? 미안. 미안하다고 했다?”
빠른 사과로 이마를 지켜낸 부단장은 다시 레이사에게 집중했다.
“근데 그 불꽃놀이라는 거, 이상하지 않아? 불꽃이라며. 그건 불티잖아.”
“그렇지……?”
“잘 봐.”
부단장은 양손의 집게와 엄지를 한데 모았다. 모아진 손가락을 바깥쪽으로 벌리자, 그 공간에 발그레한 주홍빛 막대가 나타났다.
“집어 봐. 안 뜨거워.”
레이사는 천천히 그 막대를 집었다. 말마따나 조금 따듯한 뿐이었다. 부단장은 막대 한쪽 끝에 느리게 숨을 불어넣었다.
천천히, 여러 개의 화순을 가진 분홍 꽃봉오리가 나타났다.
“와…….”
“네가 불어 봐. 살살.”
레이사는 그 말을 따라, 제 꽃봉오리를 호 불었다. 차가운 숨결을 따라 꽃망울이 벗겨졌다.
잎 하나하나가 불로 이뤄진, 불꽃(炎花)이 피어났다.
“어때?”
일렁이는 꽃잎에 레이사의 표정이 드러났다.
“……따듯해.”
레이사의 얼굴에는 불꽃처럼, 미약하지만 충분히 환한 웃음이 피었다.
“저기는 더 크고, 더 따듯하거든.”
부단장의 말에 레이사가 고개를 들었다.
“같이 가볼래? 아가씨들?”
레이사는 접시를 내려두고서, 불꽃이 꺼질까 봐 천천히 일어났다. 걸음도 느릿했다. 하지만, 분명 부단장을 따라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테라는 두 접시를 챙겨서 레이사의 뒤를 따랐다.
길었던 그 밤은 영원할 것 같았다.
* * *
레이사는 힘겹게 눈을 떴다. 빳빳한 흰 옷. 자기를 내려보고 있는 단장.
“일어났군. 경례는 됐네.”
경례를 붙일 생각도 들지 않았던 터라 차라리 잘됐다. 레이사는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몸 곳곳이 아팠고 머리가 먹먹했다.
“그동안 월급 먹은 값을 몰아서 했더군.”
늘 월급 운운하는 소리는 달갑잖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사뭇 달랐다.
“단장으로서 감사를 표하고 싶네. 부단장도 있었지만, 마침 능력을 개화한 자네 덕에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네.”
치하하는 것 치고는 단장은 무표정했다. 그제야 레이사는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늘 그렇듯이, 후방 지원대와 함께였다. 늘 그랬듯이, 요도(腰刀) 하나만 차고 있는 레이사를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와 달리, 부단장이 지원부대로 배치되었다. 평상시 같지 않게, 부단장은 레이사 곁에서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었다.
보통과 달라서 그랬던지, 전위를 무시하고 후방 부대가 급습을 받았다.
그리고 레이사는 능력을 개화했다.
“부단장이 무슨 말을 했다고 하던데. 알려주겠나?”
단장의 말에 레이사는 고개를 들었다. 그나마 근접전이 가능했던 인원은 자기와 부단장 뿐이었으니, 다른 이들은 안보인다는 건 무사하거나, 치료가 불가한 피해를 입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부단장은 보이지 않았다. 병실에는 자기뿐이었다.
“무슨 말을 했다고…….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습니까?”
단장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조금의 실망과, 놀람. 늦은 수긍.
“하긴, 워낙 경황이 다들 없었으니. 자네도 능력을 제대로 활용한 건 처음이고.”
“……부단장님은 괜찮습니까?”
단장은 거짓말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죽었다.”
레이사는 두 눈을 깜빡였다. 단장은 한 말을 거듭하는 것도 싫어하는 편이었다.
“자네라도 살아서 다행이군.”
쾌유를 바라겠네. 의례적인 말을 남긴 단장은 소리 없이 병실 문을 닫았다.
레이사는 병실에 혼자 남겨졌다. 몸을 반쯤 일으킨 상태에서 천천히 생각을 곱씹어봤다.
부단장이 죽었다고 했다.
부단장은 가장 처음 만난 길드 인원이었다. 낡은 숙소로 안내해주면서, 시시한 잡담으로 귀를 따갑게 하면서, 몸소 테라의 괴력을 대리 체험해주던, 이따금씩 자기를 포함한 다른 여자에겐 희롱을 일삼던, 방정맞고 천박한 인간이었다.
부단장은 괜찮은 능력자였다.
후방 부대에는 치유 계열 능력자, 원거리 병기 능력자가 많았다. 뛰어난 능력자라면 거리에 무관하게 위력을 발휘했지만, 여기는 자타가 공인하는 ‘어중간한 길드’였다. 후방 부대의 급습에 대응할 사람은, 쉬어가기 위해 후방으로 돌려진 부단장과, 클래스가 검사인 레이사뿐이었다.
부단장은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가볍고 시끄러운 인간이었다. 재능을 낭비하는 능력자였다.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덩치만 크고 무뚝뚝한 누구에게는 사서 매를 맞을지언정 장난을 그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숨만 쉴 뿐, 길드에 하나도 기여하지 못하는 월급도둑에게 다가가서는 불꽃으로 된 꽃을 주기도 했다.
그런 부단징이 죽었다고 했다.
아름다운 꽃은 며칠 가지 못한다.
모든 걸 태울 수 있는 불은 꽃보다도 빠르게 사그라 들었다.
부단장은 불꽃과 같은 사내였다.
레이사에게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따듯함을 전해주던 인간이었다.
그런 부단장이 죽었다고 했다.
“……윽.”
레이사는 배와 허리가 뻐근했다. 칼을 쥐었던 팔은 근육이 저릿했다. 하지만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흐윽, 으윽.”
하얀 환자복을 적시는 방울을 보고서야 레이사는 자기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울고 있지?
부단장이 죽었다고 했다.
“흑, 흐윽, 윽, 으으우…….”
레이사는 얇은 담요를 꽉 쥐었다. 그젯밤 자기는 능력을 개화했다. 내지르는 검은 두꺼운 갑피를 갈랐고, 찌르는 검기로 몸통을 꿰뚫었다. 그토록 염원하고 바라마지 않던, 능력을 개화해냈다.
하지만 자기에게 온기를 알려준 부단장이 죽었다고 했다.
“아으윽……, 아, 아아…….”
한 손으로 가슴께를 짚었다. 지독하게 아팠다. 레이사는 힘겹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게 가버릴 거면, 아무것도 알려주지 말지. 잘해주지 말지.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익숙한 방식대로, 그냥 멸시하고, 무시하고, 외면하지.
세상을 믿어보라고, 인간도 한 번 믿어보라고, 나 스스로를 믿어보라고, 그래서 믿었는데. 믿어보라고 말하는 당신을 믿었는데.
속에 쌓인 그런 말들은, 언어가 되지 못한 비통한 울음으로 새나왔다.
“아아, 흐아아아…….”
병실은 레이사 혼자였다. 레이사의 울음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험해 본 적 없는 온기를 전해주던 부단장은 없었다. 레이사의 말과 울음을 들어야 할 부단장은 이제 없다.
단장은, 부단장이 자기에게 무슨 말을 했다고 했다.
한 손으로는 아릿한 가슴께를,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짚은 레이사는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리려고 했다. 손에 힘을 주면서, 깨진 손톱과 검 손잡이 때문에 잡힌 물집이 아팠다.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부단장에게 물어보면, 또 말해줘야 하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할 게 뻔했다.
그런 부단장은 이제 없다.
레이사가 깊게 울었다. 가라앉지 못한 울음은 혼자뿐인 방안을 채웠다.
* * *
그 순간, 능력 개화가 빨랐다면.
발휘한 능력이 좀 더 뛰어났다면.
개화한 직후, 좀 더 능숙하게 활용했다면.
레이사는 입단한 이후부터 오랫동안 무능의 대명사였고, 자기들의 무능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다른 이들은 부단장의 죽음을 자연스레 레이사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런 행위를 무턱대고 비열하다고 할 순 없었다. 합리화는 인간에게 필수 영양소였고, 레이사 스스로도 그렇게 여겼으니까.
부단장의 부재는 모두들 느리지만,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레이사도 그랬다.
하지만 부단장과 함께 있던 시간 덕에 알게 된 점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직접 알려준 건 아니었지만, 부단장과 함께 있던 순간 레이사는 능력을 개화할 수 있었다. 마나 감응력이 없다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무엇을 대가로 능력을 발휘하는지, 연습과 출전을 통해서 얼추 깨달았다.
레이사는 기억을 대가로 능력을 전개할 수 있었다.
처음엔 두려웠다. 스스로를 구성하는 걸 조금씩 잃어간다는 점에 의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레이사는 자기에게 남겨둘 만한 기억이 많이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부단장은 자신의 최후로서, 높낮이와 온도차에서의 충격이 어떤 건지를 여실히 알려줬다.
레이사는 아카데미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수첩에 거칠게 적었다.
그들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일치하지 않을 때, 얼마나 큰 복수가 될 수 있을까?
남자였다가 여자로 변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떠올랐다.
여자로서 보았다가, 원래 남자였다는 걸 알고 변하는 시선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내게 유일한 온기를 안겨준 그가 그랬듯이.
하찮게 보는 이들에겐 우월함을,
무능하다 보는 이들에겐 자기의 유능함을,
친하지 않은 이들에겐 친해진 다음에,
역겹게 여기던 이들에겐 사근하게 대하고 나서,
어려운 이들에겐 도움을 주고 나서,
죽자.
“레이사? 안에 있었냐?”
낮은 목소리였다. 레이사는 수첩을 빠르게 덮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흥분으로 빨라진 심동을 가라앉혔다.
자기의 능력은 기억을 댓가로 했다. 어떤 기억이 사라지고 남을지는 몰랐다. 지금의 기억이 얼마나 유지될지 몰랐다. 그러니 실천은 빨라야했다.
“몸은 좀 괜찮냐?”
레이사는 짐짓, 밝은 모습으로 테라를 돌아봤다.
“응, 테라 언니.”
테라의 표정이 벌레라도 먹은 것처럼 변했다.
“머리 다쳤냐?”
“응?”
레이사는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테라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징그럽게 왜 그래.”
“왜. 우리 같은 여자잖아? 언니.”
테라는 질린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원래 남정네였던 녀석이 뭔. 사람 갑자기 바뀌면 죽는데. 괜찮으면 됐고. 나 먼저 씻는다.”
옷가지를 들고 공용샤워장으로 나가는 테라를 레이사는 웃음으로 배웅했다.
차갑고 비릿한 웃음이었다.
* * *
이전까지는 테라의 호들갑으로 단정지었지만, 하루 일과를 모조리 기억 못한다는 건 단장이 보기에도 이상했다. 결국 테라의 종족 판별을 겸해서, 레이사의 진단을 아카데미에 의뢰했다.
의뢰는 오래 걸렸다. 시간이 더 걸린 건 레이사였다. 단장은 테라의 종족 검진서를 보고 결과의 신뢰도에 의문을 품었다. 레이사의 진단서를 보고선 그날 밤 곧장 부총장실로 갔다.
“진단서 무료랬지!”
사이의 근원을 떠나서 인사말로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단장의 기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진료비 때매 길드 파산 직전이니까 당신 명의로 다 달아놓아도 되지?”
대꾸가 없었다. 비어있는 집무 책상에 단장은 코를 팽 하고 풀었다.
“시끄럽다 못해 더럽기까지 하구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부총장실은 충분히 넓었다. 손님 맞이 응접용 소파와 낮은 책상. 부총장은 거기에 앉아서 잔을 채우고 있었다.
맥이 풀린 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친네, 청승맞게 안하던 독작을.”
“왜 왔냐.”
“당신은 왜 이러고 있는데?”
노교수는 묵묵히 잔을 들이켰다. 상대를 위한 잔은 없었다. 단장은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신이 이러고 있으면 찾아온 내 꼴이 뭐가 돼.”
“재진단 요청하려고 왔으면 가라. 내가 참가해서 봤으니까. 테라인가, 걔 인간 맞고, 레이사는…….”
“아니, 그런 경우가 있어?”
“너, 내 수업 때 잤지.”
노교수의 발음은 부정확해도 내용은 선명했다. 단장도 알고는 있었다. 마나 이외의 요소로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
하지만 제자가 스승의 방문을 걷어차며 들어오고, 스승이 안하던 술을 마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게 이론의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춘아.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아냐?”
“당신처럼 정신 계열 능력자면 모를까, 내가 어찌 알겠수.”
단장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나는, 지금 존나게 후회하고 있다.”
단장은 부총장을 바라봤다. 늙은 교수는 파격적인 발언을 따르려는 건지, 술을 붓다가 그만 잔을 넘쳤다.
“노인네, 돈 많이 벌었으면 비싼 술 사먹지. 이런 상황에서도 째째하기는.”
단장이 주름진 손아귀에서 병주둥이를 빼앗으며 말했다. 스승은 끄응 소리만 낼뿐, 병을 되찾으려하지 않았다.
“뭐가 그리 후회됩디까. 번듯한 곳이 아니라, 진단비에 벌벌 떠는 허접한 길드에 입단시킨 거?”
“난 레이사가 사람답게 살길 바랐다.”
단장은 자주 웃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리 인상 쓰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소태 씹은 정도로 오만상을 찌푸렸다.
“책상물림은 이래서 안 돼. 밖에 나가보면, 잘난 능력만 가질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악마에게 영혼 팔 녀석들이 수두룩 빽빽이요. 그래, 좋게 생각하자고. 떳떳하게 살 수 있을 거 아뇨.”
마지막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스승은 풀린 눈으로 단장을 바라봤다.
“야 이 새끼야.”
단장은 노교수의 폭언을 안주 삼아 병채 집어 술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 능력 때문에, 정신 조작한다고 별의 별 연놈들 만나봤다. 기억, 기억손실, 조작. 그런 건 너보다 내가 잘 알아.”
노교수는 술잔을 집어올렸다. 휘청이는 손에 술이 반 이상 탁상 위로 흘렀다.
“제 이름 뭔지도 모르고, 친한 사람 누군지도 모르고, 어제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르고. 누가 자기 등에 칼침 놨는지도 모르고. 그래, 구멍 뚫린 대가리로 사는 거. 그게 사람 사는 거냐?”
“그러면 어쩌라고.”
“탈퇴시켜.”
“허.”
단장은 코웃음을 쳤다.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하지만 노교수의 눈을 보고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답게, 굶어 죽으란 소리지, 그거? 길드에서 나가면 애는 뭐 먹고 살라고? 변변찮은 이력으론 어디 교관이나 강사로도 못 굴러.”
“아카데미에서 받아주면 된다.”
“이야, 아카데미 좋아졌다. 언제부터 자선 사업도 했데?”
그런 비아냥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술병을 들이키던 단장은 대뜸 소리쳤다.
“잘 풀려봤자 특급 실험 대상이겠지! 안 그래!”
노교수는 침묵했다. 단장은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빈 잔에 술을 부어넣었다.
“춘아.”
단장은 제 이름을 부르는 혀 꼬부라진 그 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요.”
“내가 이 나이 먹고 왜 선생짓하는 줄 아냐?”
“논문 하나 써내는 게 더 벌어먹는다고들 하더만. 심심해서 아뇨?”
노교수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일부러 절반 남짓 채운 술잔이건만, 흔들리는 팔에 크게 찰랑거렸다.
“영감 또 술 흘릴라.”
“흐흐흐흐……, 야, 난 사람을 기르고 싶었다.”
단장은 말하지 않았다.
“사람을 사람 답게 기르는 거. 그거 해보고 싶었다.”
“당신 능력이 그거잖수.”
“능력 안 쓰고.”
단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능력이 능력이니만큼 길드 꽁무니 쫓아다니면서 온갖 인간 군상을 만나봤다. 교도소도 꽤 들락날락 해봤고. 상류층 파티만큼이나 빈민가도 많이 가봤다.”
노교수의 눈은 방 한구석을 향했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건 방 안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은 종(種)이다. 한 개체이면서, 군집이지. 다른 종족도 마찬가지다. 그들 각각이 자기답게, 사람답게 사는 거. 그게 꼭 능력 써야지 가능한 일이겠냐? 그렇게 믿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노친네, 강의는 수업 시간에나 하쇼. 적당히 자시고.”
단장은 잔을 뺏으려고 했지만, 노교수는 그 손에 힘을 줬다.
“이게, 내 마지막 강의다.”
단장의 손이 멈췄다.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뜻하는 바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할 일이요? 이렇게 찾아온 내가 할 말은 아닌데. 그렇게 교직 오래 있었으면서 제자 죽는 꼴 처음 봐요?”
“내 손으로 사지 밀어 넣은 적은 없었다.”
단장은 술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은근한 취기에 한숨처럼 욕지기를 뱉었다.
“……시발, 내 앞에서 그러기요? 내가 죽고서나 그러면 몰라.”
노교수는 낄낄 웃었다.
“너는 적어도 그 바닥에서 죽을 거란 생각이 안들더라. 그런 놈은 처음이었어.”
“지랄, 졸업 면담 때 얼마나 길길이 날뛰던지. 당신이 드디어 정신 나간 줄 알았어.”
노교수는 이젠 끄윽끄윽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단장도 희미하게 웃었다. 제자는 스승 앞에서 궐련을 빼물었다.
“후우……. 당신 빽 없으면 우리 길드는 어떻게 되려나.”
“뒤탈 없게 조치할 테니까 걱정마라. 대신.”
부총장은 떨리는 손으로 단장의 손을 붙잡았다. 당황한 단장은, 노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걔만 좀 신경 써다오.”
단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흘렸다. 술병은 가볍게 찰랑였다. 단장은 아직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술 한 병 더 가져올께요. 먼저 뻗으면 재미 없어.”
노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은 천천히 일어섰다. 들어섰을 때와 달리, 힘없는 걸음으로 부총장실을 빠져나왔다. 밤길은 어두웠다.
* * *
뛰어난 능력은 선망을 받는다. 사근한 태도는 그와 가까워지고 싶게 한다. 어여쁜 외모는 호의를 부른다. 그 모두를 갖춘 레이사는 어느덧 길드 내 모든 사람들과 친해졌다.
돌파조의 주력 대원으로서 활약할 뿐만 아니라, 비상 상황이라면 비번인 날조차 앞장 서 달려갔다. 무뚝뚝하던 태도는 오간데 없이, 원래도 귀염상인 얼굴을 꾸미고 다가오니 남자 뿐만 아니니라 여자들도 레이사 앞에선 자연스레 얼굴이 펴졌다.
그런 만큼 단장의 발표는 길드 전원에게 반발을 불렀다. 진단 결과 공개도 본인동의가 없었단 점에서 문제가 됐지만, 돌파조에서 순찰대로 보직 이동한다는 결정이 가장 컸다.
돌파조는 독단적인 결정이라고 볼멘소리와 함께 항의했다. 순찰대는, 레이사는 환영하지만 그 무력은 자기들에겐 과분하다며 사양했다. 레이사 본인은, 향간에는 멱살잡이를 했다고 할 정도로 반발했다. 물론 과장이 좀 섞였겠지만, 레이사의 행동을 두둔한다는 입장도 없지 않았다.
결국 단장은 결정을 물렸다. 되도록 일선 임무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권고로 물러섰다. 하지만 다른 길드원들은 의아해했다. 기억을 댓가로 한다니. 그런 건 본적도 없는데. 게다가, 지금 레이사는 멀쩡하잖아?
레이사는 그런 모두를 비웃었다.
본인을 낮추는 게 겸손이고 스스로를 줄이는 것이 사교였다. 레이사는 기억이 흐릿해진 만큼, 역설적으로 모두에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가식적인 미소에 남들은 좋다고 따라 웃었다. 알량한 아첨과 빈 껍질뿐인 콧소리를 귀담아 들었다. 자기 파괴를 위한 능력 발휘에 감사와 칭찬을 들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남길 만한 기억은 없었다. 모욕으로 점철된 지난 날, 거기에서 비롯된 증오와 분노뿐. 새로운 기억도 죄다 뻔했고, 곱씹을수록 역겨웠다.
단장이 진단 결과를 알리고 보직을 변경할 때만큼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 번복된 지금. 자기의 ‘목표’를 이루기에 방해될 건 아무것도 없어보였다.
“레이사?”
단 한 사람만 빼고. 레이사는 깨질 뻔한 가식의 가면을 가까스로 유지했다. 낮은 목소리를 무시할까도 싶었지만, 모두에게 친해져야 더 큰 복수가 가능했으니까.
“왜요, 언니?”
테라는 망설이며 말했다.
“잠깐, 밖에서.”
레이사는 정리하고 있던 서류를 일부러 탁탁 쳐보였다.
“나 바쁜데.”
사무실 내 모든 시선이 테라에게 모였다. 테라는 당황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잠깐만…….”
“……휴. 조장님, 저 잠깐 갔다 올게요!”
조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래. 테라! 우리 레이사 빨리 돌려줘야한다!”
테라는 우물쭈물하다가 경쾌하게 나가는 레이사를 쫓아갔다. 다른 돌파조원은 레이사가 없는 자리를 조금 아쉽게, 그런 원인을 제공한 테라를 조금 원망스레 바라봤다.
사무실 건물 바깥 조금 외진 곳에서, 레이사는 천천히 뒤따라오는 테라를 기다렸다.
“왜요?”
“할 말도 있고, 줄 것도 있고 그래서.”
“언니.”
테라가 움찔했다. 레이사는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건 이따가 일과 끝나고 하세요. 전열조는 어떤지 모르지만, 돌파조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요? 갑자기 상황 터지면, 언니가 책임질래요?”
레이사는 테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테라가 말을 더듬거렸다.
“방은, 너 늦게 오잖아. 그리고.”
테라는 마음을 굳힌 듯이, 레이사의 시선을 마주봤다.
“너, 많이 바뀌었어.”
레이사는 가볍고 해맑게 웃었다.
“그럼요. 능력이 기억을 댓가로 하다보니까, 아무래도 전과 다르겠죠? 그래도 남들은 다 좋아한다구요. 언니도 지금 제가 좋지 않아요?”
테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남들이야 어떻든……. 너, 너무 바뀌었어.”
레이사의 가면에 균열이 일어났다. 덩치만 커가지고, 유일하게 웃을 때 혼자 웃지 않는 여자. 자기가 뭐라도 된 것 마냥, 매사 참견하려고 드는 사람.
“왜요. 마음에 안들어?”
“……조금.”
“언니는, 너는 왜 그래?”
경어를 집어치운 레이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늘 웃상인 사람처럼, 웃지 않는 표정이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너만 그러는 거 알아?”
“레이사, 그게 아니라.”
“나, 잘 웃잖아. 활약도 많이 하고, 다들 나 좋아하잖아. 그게 보기 싫다는 거 아냐?”
레이사의 눈은 맑았다. 테라는 감정이 선명히 드러나는 눈을 더 이상 보기 힘겨웠다. 레이사의 입지가 변했을지라도. 테라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자기 기분을 조리있게 표현할 수 있는 말재주는 없었다.
“그, 아냐. 미안해. 어.”
레이사는 한풀 풀어진 표정으로 발게 물었다.
“가도 되지, 언니?”
“……단장님께 요청했어.”
레이사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테라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너, 행정 쪽으로 직책 옮겨달라고. 임무 나갈 때마다 너.”
“야-!!”
비명 같은 고함에 테라는 몸을 떨 정도로 놀랐다. 레이사가 테라에게 바짝 다가왔다.
“다들 좋다는데 왜 너만 지랄이야?”
생글거리던 입으로 독설을 내뱉었다.
“왜. 늘 비웃고 꼽주던 애가 잘나가니까 배가 아픈가봐?”
“내가 언제…….”
“뭐? 하하하하…….”
찬바람 속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였다. 테라는 살갗이 에이는 기분이었다.
“하하하, 기억 못한다니까 그냥 우습지?”
레이사가 더욱 더 몸을 가까이 했다. 가슴께에 닿을 듯한 머리는 테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월급도둑이라고 하던 단장도 그렇고, 둘이 쌍으로 왜 이러는데?”
그렇게 다가올수록, 테라는 한 걸음 물러섰다.
“니가 뭔데.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지금 와서 이러는데?!”
“너는!”
레이사의 목소리가 칼날이라면, 테라는 공성추였다. 묵직한 울림에 레이사도 멈칫했다.
테라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는.”
레이사는 테라의 얼굴을 바라봤다. 혐오스럽던 예전에 비해선 그래도 볼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할 건, 눈가에 아른거리는 물기였다.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되잖아.”
레이사를 멈춰 세운 기백은 오간데 없이, 금세 흩날릴 만큼 힘없는 말이었다.
테라는 한 손에 쥐고 있던, 곱게 포장된 작은 바구니를 건넸다.
“오늘 주려고…….”
레이사는 말을 다 듣지 않고 채가듯 집었다.
내밀었던 테라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갈게.”
테라는 군말 없이 뒤돌아섰다. 하프오크가 의심될 정도로 큰 덩치에 맞지 않게 힘없는 걸음이었다. 레이사는 뒤틀린 심사로, 거칠게 포장을 뜯었다. 늘 그렇듯이, 쓸데없는 잡동사니라고 생각했다.
그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컵케이크와 작은 초 열 몇 개가 무슨 의미인지 레이사는 알 수 없었다.
먹을 거야 좀 나았지만 결국 레이사에겐 이해 못할 말과 태도였다.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더욱, 같이 있을수록 꺼림칙하고 찝찜한,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싱숭생숭해진 레이사는 레이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이 한창 번잡했다.
“무슨 일이에요?”
순간 짜증을 내려던 조장은, 레이사의 얼굴에 반가워하며 답했다.
“레이사 왔구나!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빨리 준비해라!”
레이사는 조장의 말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뭘요?”
“제국 소집령이다!”
소집령. 레이사는 피가 빠르게 도는 걸 느꼈다.
“소집령이라면?”
조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소리질렀다.
“대규모 게이트! 말할 시간 없다. 빨리!”
레이사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방금의 일을 싸그리 잊어버린 채,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다.
전례 없는 활약을 펼칠 장소에 대한 준비였으며,
더 없이 완벽한 죽음을, 그토록 고대해온 복수를 위한 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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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후에 대한 거 : "모든 기억"을 바쳤던 검사의 껍데기 앞에서 txt.
자꾸 괜찮다느니 연재하라느니 써오라느니 하니까 뇌절하잖아..
생각바구니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이벤트 단위로 나열해봤는데... 물론 손볼 구석 또 있겠지만
이렇게 놓고 보니까 인물 관계나 이야기 자체가 이해가 되는지, 애당초 이게 남들 보기에 재밌을까 싶다.
문장 수준도 모르겠고...
하여간 긴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