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바람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듯한 폭풍이 지붕을 두들겼다.

온도계로도 다 표시 못할 정도의 추위는 제국의 최신 기술이 적용된 보온 주택으로도 막지 못했다.


의족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차게 식은 이불이 오히려 몸을 괴롭히는 듯했다. 

박진수는 신음을 흘리며 몇십 분간의 짧은 휴식을 끝냈다.


“제기랄.”


욕설과 함께 몸을 일으킨 그가 고통에 신음했다.

새삼 척추를 바꿔 끼울 수 없다는 것에 한탄한 박진수가 천천히 거울 앞으로 가서 섰다.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맞은 영국 신사의 모습이 보였다.

박진수는 갈색 눈동자를 몇 번 깜박이다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몇 개 없는 탓에 손은 빗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대강 털모자를 푹 눌러 쓴 박진수는 천천히 거울을 보며 되뇠다.


“난, 박진수다.”


그 말을 세 번 정도 한국어로 반복한 그가 몸을 돌렸다.

그가 되뇐 건 어차피 아무도 믿지 못할 테니 무덤까지 들고 가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뉴 팰리스에는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았다.

빌어먹을 폭풍이 닥친 상황에서 할 일이 뭐 그리도 많나 싶었지만, 박진수는 알고 있었다.

그나마 그동안 대비를 해둔 덕분에 이 폭풍 속에서도 일할 수 있다는걸.


그러나 그가 문을 열고 나가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들겼다.

철문을 부서질 것처럼 두들기던 그 누군가는 문을 홱 열고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눈 때문에 얼굴이 반쯤 희게 변한 남성이 언성을 높였다.


“마르크 시장! 발전기가 터질 위기요!”

“허.”


박진수는 그러고 말았다.

다시 보니까 밖에서 들리던 바람 소리가 주민의 비명이었나 싶었다.


그는 툴툴거리며 코트를 입었다.


“시장! 못 들었소!? 발전기가 터질 위기라니까!”

“귀 안 먹었소. 이만 나가지.”

“그래, 어떻게든 좀 하게나! 시장, 자네는 발전기를 지을 때 감독했던...”

“그 이야기를 내 앞에서 꺼내지 말라고 몇 번째 말했지?”

“하지만...!”


박진수는 남성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의족을 타고 흐른 냉기가 잘린 부위를 얼리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다.


그는 최대한 숨 쉬려고 노력하며 눈앞의 발전기를 응시했다.

어지간한 빌딩만큼이나 거대하고 석탄만 넣는다면 북극에서도 살 수 있게 해주는.

가히 엘프들의 세계수라고 해도 다를 것 없는 문명의 이기이자 마지막 유산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거의 다 끝이었다.

영하 150도라는 말도 안 되는 냉기에 버티기 위해 발전기는 진작부터 과부화된 지 오래였다.

발전기의 수명을 깎아 주민의 목숨을 살리고 있던 만큼 터진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을 때부터 문제가 많았어.’


그렇게 생각한 박진수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노동자 새끼들 때문에 억지로 타협한 게 정말 많았다.

머리에 똥만 들어찬 기술자 새끼들은 항상 거들먹거리며 그의 발목을 잡아댔다.


안전을 논하면서도 그 속내는 늘 같았다.

돈을 받고 일하긴 하지만, 그래도 좀 편하게 일하고 싶다.


“우라질 놈들.”


그렇게 울분을 토한 박진수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발전기가 버티지 못하는 건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안의 중앙 자동증기기관이 버티지 못한다는 걸 의미했다.

현대의 컴퓨터와 유사한 이 물건이 너무 혹사당한 나머지 폭발하려는 게 그 원인이었다.

그리고 중앙 자동증기기관이 폭발하는 순간, 연쇄 폭발이 일어나 발전기가 무너져 내릴 게 분명했다.


그러면 무얼 가져와야 하는지도 명확했다.

그 빌어먹을 자동증기기관 하나를 가져와서 교체해주면 말끔하게 끝났다.


자동증기기관이 버티지 못했을 뿐이지, 발전기가 버티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당연히 자동증기기관만 있으면 해결될 문제였지만, 박진수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왜냐면 남은 자동증기기관은 전부 쇄빙선에 실어다 놓은 지 오래였으니까.


‘아직 다른 방법이 있지.’


그렇게 생각한 박진수가 발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눈밭 위로 의족이 자국을 남겼다.

그는 폭풍을 헤치며 나아가 걱정스럽다는 듯 발전기 근처에 모인 사람들을 응시했다.


남자. 여자. 남자. 여자. 그가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원하는 사람이 한 명 나타났다.


“찾았다.”


그렇게 말한 박진수가 손가락을 뻗어 한 소녀를 가리켰다.

털모자를 푹 눌러쓴 흑발 흑안의 동양인 소녀. 아마 이름이 이예지라고 했던가.

극동의 나라에서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것도 기구한 일이었다.


부모가 다 얼어 죽었는데도 혼자서 희생하는 삶을 산다며 성녀 소리를 듣는 것 같기도 했다.

애초에 그쪽 표현으로는 야소쟁이였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테지만.


박진수는 이예지를 알고 있었다.

몇 번 그녀가 건네는 밥을 먹은 적 있었다.

성당에서 봉사할 때마다 늘 이예지가 있었으니 내적 친밀감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그건 대의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박진수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창백해진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예지의 양 어깨를 손가락이 몇 개 없는 손으로 억세게 잡았다.


“자네가, 죽어야 하오.”

“...네?”

“지금 발전기는 과부하 때문에 내부에 증기가 과하게 쌓여 있소. 무슨 소리인지 알겠지?”

“시, 시장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원래라면 발전기를 정지시키고 외부에서 증기를 빼내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소.”

“아.”

“어른은 들어갈 수 없는 틈으로 들어가서 레버를 당겨 증기를 빼내야 하지.”


그 말을 이해한 이예지의 눈동자에 절망이 어렸다.

하지만 박진수는 개의치 않고 계속 그녀를 다그쳤다.


이미 도시를 운영할 때부터 그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필요한 희생은 있어야 했고 그게 누가 되었든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죽어야 하는 사람은 이예지였다.

이예지가 아니면 다른 어린애가 나와서 죽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예지는 그 자리에 굳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한숨만 푹 내쉰 박진수는 조목조목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감정에 호소했다.

지금 네가 여기서 눈 딱 감고 죽어야만 모두가 살 수 있다고.

도시를 운영할 때 그런 식으로 누군가 죽었던 만큼, 너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고.


마지막에는 고함만 남았다.


“자네가, 죽어야만 한다고!!!!”


그렇게 외친 박진수가 이예지의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 그의 턱을 주먹으로 때렸다.

박진수는 눈밭에 쓰러진 채 그 얼굴을 살폈다.

아까 문을 두들겼던 남성이었다.


“시장, 뭐라고? 지금 우리 성녀님께 뭐라고 말한 거요?”

“...그녀가 죽어야만 한다고 말했소.”

“네가 그러고도 영국 신사야!? 이 빌어먹을 자식!”


남성이 박진수의 멱살을 잡았다.

박진수는 멱살을 잡힌 와중에도 언성을 높였다.


“그러면 다 죽을 테냐, 이 멍청한 것들...!”

“살기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해!”

“지랄하지 말고 저년더러 얼른 들어가라고 해! 차라리 내가 들어갈 수 있었으면 들어갔을 테니까!”

“마르크... 이 악마 같은 놈...!”

“누가 보면 나 혼자 살려고 온갖 짓거리를 한 줄 알겠군, 안 그래?”


박진수는 그렇게 말하며 남성의 손을 떼어내고 그를 밀쳤다.

귀기 어린 듯한 그 힘에 남성이 저 멀리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지만, 어느 사이에 생긴 시민 무리가 이예지를 감싸고 있었다.


박진수는 혀를 찼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것에 자신을 빼놓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빌어먹을 참상 속에서 기어이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것도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그 이후를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든지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몸을 혹사한 대가가 고작 이것인가 싶었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지만, 성난 군중이 그를 공격하는 게 더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진수는 된통 두들겨 맞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이 멍청한... 놈들...”


그렇게 툭 내뱉은 박진수가 한국어로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영국 신사처럼 행동하는 것도.

너희 같은 벌레 새끼들의 요구를 맞추어 주는 것도 질렸다고.

너희 혼자만 고생하는 게 아니라 나도 똑같이 고생하고 있는데 무엇이 그리 불만이냐며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진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예지를 감싸고 도는 사람들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군중 사이에 숨은 이예지가 성호를 그리며 눈물을 머금고 기도하는 게 보였다.

신이 그 기도를 들어줄 리 없을 텐데 기도하는 걸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박진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저들이 어쩌든 간에 누구 한 명은 꼭 죽어야만 했다.

그는 발전기를 새로 짓기 전까지 죽어서는 안 되는 몸이었지만, 이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엿 같은 새끼들.”


그렇게 침을 탁 뱉은 박진수가 몸을 움직였다.

꼼수를 쓸 수 없으니 정공법으로 가야 했다.

발전기 외벽에 있는 사다리를 타고 레버를 내려 증기를 배출하는 것.

그 과정에서 박진수는 박진수 찜이 되겠지만, 사람들을 살릴 순 있었다.


그래서 박진수는 망설임 없이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하지만 그 발악은 얼마 가지 못해 끝났다.


발전기는 폭발했다.

그 화염 속에 휘말린 박진수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죽어 버렸다.


...죽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박진수는 눈을 떴다.

묘하게 가는 목소리와 어색한 무게감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당황한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응시했다.

그제야 박진수는 그가 박진수가 아니라 이예지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박진수, 아니. 이예지는 그곳에 있었다.

그 마지막 가을, 본국에서 북극으로 발전기를 지으러 가는 배 안.

그것도 사지 멀쩡한 것도 모자라 힘도 넘치는 최고의 몸으로.

마치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이걸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