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하의 고백을 시작으로 다른 마법소녀, 화인이나 유나도 조금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시우가 당장 고백을 받아준 게 아니어서 망정이지, 혹여나 받아줬으면 자신은 후 순위로 밀릴 것이 분명하단 생각이 먼저 앞서고야 말았다.

 

하지만 막상 생각을 머금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모두가 시우의 좋은 면을 봐 왔기에 망설임이 더 커지고 말았다.

 

자신보다는 다른 누군가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모두 마법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떠올리면 확실히 쉽게 건들기는 애매한 부분이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자신은 처음부터 여자였던 게 아니어서, 이 마음을 표현하는 게 옳은가에 대한 의문을 몇 번이고 표했다.

 

누군가를 대단하다고 여길 것도 없었다.

 

어울린다. 선남선녀다. 그렇게 생각할 법한 상황이었으니까.

 

“…빌어먹을.”

 

어여쁜 얼굴만 가지고 있다면 그냥 욕지거리하는 정도야 누가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법소녀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화인은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는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틀어막았다.

 

혹여나 들은 사람이 있을까 하여 진땀을 흘리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인식 저하 마법을 걸었음에도 공인의 모습으로 멋대로 구는 건 좀 지양해야 했다.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존재이고, 그걸 힘 삼아 사용한다면 한 사람의 동심이라도 더 지키는 게 당연한 법이다.

 

멍하니 걷고 있을 즈음, 길거리에서 새하얀 머리카락을 눈에 담았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나, 며칠 전 이야기가 되었던 나리를 떠올렸다.

 

“어, 저기…”

 

“엇, 아…?”

 

확실히. 자연적으로 나온 듯한 새하얀 머리카락은 나리 말고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같은 동네에 거주해서 그런진 몰라도, 큰길가로 나오니 금방금방 마주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백수처럼 길거리를 자주 배회하는 화인이었기에 그중 한 시간대가 얻어걸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리, 맞지?”

 

“아, 네에… 전에 봤던?”

 

“화인. 이렇게 만난 것도 우연인데 커피라도 한잔할래?”

 

“아, 아뇨. 괜찮아요.”

 

“그 정도는 내가 사줄 수 있어.”

 

돈 걱정에 고개를 저었다. 꼭 돈 문제가 아니더라도, 시우와 함께 있는 여자들에게 딱히 미움받을 필요는 없어 거리를 벌리던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화인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시원하게 끌어당겼다. 결국 나리는 고집에 가까운 화인의 제안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 들어가 맛있는 음료를 한 잔씩 갖고, 케이크까지 하나 놔준 뒤에야 이야기를 텄다.

 

“편하게 먹어도 돼. 그보다… 넌 시우랑 무슨 관계야?”

 

나리는 눈을 끔뻑였다.

 

자연스럽게 ‘친구요.’라는 답이 나올 뻔한 걸 꾹 억누르고, 겉으로 보이는 ‘나리’의 관계를 입에 담았다.

 

“친구의 친구…?”

 

확실하지 않다는 듯 끝 음을 톡 올리자, 화인에게는 조금 더 확실한 답이 되었다.

 

무슨 관계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애매한 관계. 가깝다고 할 수 없는 먼 타인이지만, 시우에게 있어 그 친구가 찾아야 하는 대상이 된 이상 그렇게 멀지만도 않은 존재가 되었다 볼 수 있다.

 

계속해서 시우 근처를 맴돌았다면 의심했을 법도 하지만, 시우의 집을 떠난 뒤로는 다시 연락도 잘 되고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기에 믿는 셈 치고 넘어가는 게 옳아 보였다.

 

그런 오묘한 관계라면 조금 털어놓아도 되지 않을까.

 

화인은 타는 속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그러면 내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무슨 이야긴데요?”

 

“그, 내가 조금 털털한 면이 있잖아. …막 여자답지 않고. 그런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

 

“여자답지 않았어요…?”

 

“이런 모습 말이야, 이런 모습!”

 

평소보다 조금 과장된 행동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귀여운 소녀의 얼굴이 가미되니 나리에게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불안함이 쌓인 화인은 답답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가슴을 두들겼지만, 나리에게선 원하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충분히 여자답다. 뭐 그런 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전부 이해받고 그런 소리까지 들으려면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니 껄끄러워할 수가 없었다.

 

대체 누굴 붙잡고 이런 소릴 하는 걸까…

 

갑자기 현자 타임이 와 버린 화인은 입을 꾹 다물고 시원한 커피로 목을 축였다.

 

“갑자기 소리 질러서 미안.”

 

나리는 영문을 모를 상황에 부닥치는 바람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도 일단은 먹고 마시는 걸 공짜로 받았으니 아무렴 좋다는 생각으로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이게 웬 떡이냐.

 

화인은 속도 모르고 케이크를 우물거리고 있는 나리를 보자니 속이 더 타는 느낌이었다.

 

‘귀엽단 말이야.’

 

케이크 한 조각에도 볼 한쪽이 부풀 정도의 작은 얼굴. 새하얀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뽀얀 아기 피부. 눈도 크고 행동도 뭔가 어리바리해서 지켜주고 싶은 그런 귀여운 모습이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법소녀가 된 뒤로 시우의 근처에서 머무르느라 잠시 잊었던 감정이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뭔가 범죄자가 된 느낌이라 읏, 하고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어요?”

 

한숨을 푹 내쉰 화인은 다리를 꼬았다. 턱까지 괸 그녀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연거푸 내쉴 정도로 상황이 막막하단 걸 증명했다.

 

“…그게, 몇 번 안 본 너한텐 정말 미안한데, 보다시피 이 꼴이라 말할 데가 얼마 없더라고…”

 

손으로 휘적이며 얼굴을 가리키자, 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하나 유나도 있던데, 그쪽에도 말 못 할 고민이라면 뭘까?

 

솔직히 너무 무거워지는 주제는 피하고 싶었지만…

 

“시우, 좋아해도 되는 건지 의문이야.”

 

아쉽게도 나리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시우에게라도 자신을 알릴 만한 방법을 찾으려던 나리였다. 자신에 대해 뭐라도 알아내서, 그 단서를 토대로 자신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리는 게 그녀의 바람이었다.

 

한데, 그게 계속해서 불발되는 상황에 시우를 둘러싼 연애설이 돌고 있으니, 나리로서는 속이 따끔거릴 수밖에 없다.

 

친구가 이렇게 화끈하면서도, 부끄러움 때문에 툴툴대는 게 좀 강한 여자애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허탈한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가서 고개를 저을 수도 없고, 뭐 사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럴 이유나 자격, 명분. 뭐든 간에 없던 나리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 군요…?”

 

“이런 소리 해서 미안한데, 나 정말로 괜찮은지…”

 

화인이 땀을 삐질 흘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마 아는 사람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면, 부끄러운 마음에 상을 엎었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나리라서, 그리고 밖이라서 최대한 진중하게 물었다.

 

부끄러움을 얼마나 참고 있느냐면, 그녀의 입으로 불길이 머금어질 정도였다. 마치 드래곤이 불을 뿜을 것만 같은 기세로 입꼬리 쪽에 열기가 맴돌았다.

 

나리는 그 모습을 보고서, 화인이 얼마나 진심인지 깨달았다.

 

“아무래도 괜찮지 않을까요? 솔직하게만 한다면…”

 

그런데 뭐, 좋아하는 게 어때서? 웬만한 사람들이 쌍수 들고 환영할 텐데. 물론 조금 어린 나이의 용모가 걸리긴 하겠지만, 그건 마법소녀라서 어쩔 수 없다고 치고 넘어간다면…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다.

 

나리나 화인이나, 스물 넘는 성인이라도 겉으로 보기엔 중고등학생 소녀들이 모여 사랑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솔직, 솔직…”

 

솔직 이란 게 어려웠던 화인은 그 말만을 반복했다.

 

끙끙 앓던 그녀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리는 그런 화인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문제 될 게 있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첫 만남 때부터 쭉 생각하면 되죠.”

 

“첫 만남 때부터?”

 

“어떻게 만났고, 어떤 행동을 했는데, 어떤 행동이 돌아왔는지 그런…”

 

화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곤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그래, 그런 것들을 떠올려 보면, 시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화인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마주했다.

 

 

 

**

 

 

 

―화인아!

 

남자의 목소리?

 

아니, 여자의 목소리다.

 

―후회하고 있진 않아?

 

이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뭔가 떠오르는 듯 떠오르지 않았다. 멍하니 눈을 뜨고 나니, 눈앞엔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나리의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요?”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

 

아까 들은 목소리와 비슷한 나리의 목소리. 화인은 그걸 가벼이 넘기기가 뭣해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요…?”

 

나리는 알 수 없는 물음에 땀을 삐질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