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여리한 첫 인상과 작은 체구.

얌전하고, 조용하고 그나마 특징이라고 해봤자 늘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먹는 것 말곤 크게 없는 그런 아이.

까치발을 들고 우마무스메들이 레이스를 하는 걸 늘 챙겨보지만 막상 직접 달리는 걸 보진 못한, 그런 우마무스메.

"...레이스에는 관심 없니?"

"어머..."

불현듯, 그런 아이에게 관심이 동하여 말을 건넨 것이 시작이었다.

"늘 구경만 하고, 직접 뛰는 건 보지 못한 거 같아서."

"아... 전, 괜찮아요."

선홍빛 눈동자가 유독 반짝이는 우마무스메.

"혹시 어디 아프거나 한 건..."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조용하고, 섬세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레이스는... 즐겁고, 또 행복하지만, 전 못해요."

"어째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아이는 윗 입술을 가볍게 깨물으며 억지로 말을 끊는 것 처럼 보였다.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거 같으니까요."

가벼운 정적 끝에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아이였지만, 그 웃음 속 어딘가 아련한 감정이 흘렀다.

"..."

그 미소가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불편했던 나는.

"어랏? 어..? ㅌ, 트레이너씨...?"



"얘들아 잠시만!"

아이를 모의 레이스가 시작되기 일보직전의 패덕으로 끌고 나왔다.

"이 아이도 같이 뛰게 해주지 않을래?"




.

.

.

어쩌다보니 억지로 레이스를 하게 만든 꼴이어서 걱정이 앞섰다. 혹시 괜한 짓을 한 건 아닐지, 담당도 아닌 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앞설 때.

"...허."

그 모든 생각이 기우였단 걸 알 수 있었다.

여리여리하고 약해보이던 소녀는, 온데간데 없었다. 오직 승리만을 위해, 지금 앞에 있는 상대를 먹어치우고 말겠다는 저 얼굴

짐승,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한 걸 발굴해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오싹하게 흘렀다.

"하아... 하... 후으..."

아직도 레이스의 흥분이 식지 않은 건지, 경기장 한 가운데서 으르렁 거리고 있던 아이는.

"고생했어, 여기 물이라도 좀 마시고..."

"..."

다른 우마무스메들을 돌보다가 정신 차리고나니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난 이후였다.

.

.

.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아직도 그 아이의 레이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폭발력, 비록 모의 레이스였지만 확실히 보여준 잠재력, 무엇보다도.

"표정이 참..."

맹수처럼 드리운 그 얼굴은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자길 가로막는 모든 걸 다 씹어먹겠다는 표정.

쌓아둔 욕망을 터트리며 달리는 광란의 모습에 난 말 그대로 홀렸다.

이름도 학년도 모르는 우마무스메였기에 혹시 허깨비는 아니었을까, 도깨비 같은 거에 홀린 건 아닐까 싶었지만.

학원에 울려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헛 것을 본 게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땅과 공명하는 구두 굽 소리가 늦겨울의 산들바람을 타고 학원 안을 떠돌았다. 목소리도 구두소리도 제각기 갈 길을 찾아가던 중.

"...계신가요?"

단 하나의 발소리가 날 찾아왔다.

여리여리한 겉모습과 작은 체구, 얌전하고 또 조용하면서도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이.

"어..."

이번에는 내가 아닌 그 쪽에서 먼저 찾아왔다.



머리 위에 얹은 사포와 언뜻 맹해보이는 붉은 눈동자에 별 생각 없는 건가 싶었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학업과 레이스 그리고 미래,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그렇지만 확실히 드러내는 아이의 눈빛은 그 무엇보다 맑아보였다.

"...그래도, 한  번은 해보고싶어요."

"..."

"트레이너씨... 라면, 절 이끌어주실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나는 별 말 하지 않고,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몇 가지를 챙겨 다시 앉았다.

계약서와 음료수 그리고 과자.

"여기에 내 이름이랑... 네 이름 그리고 보호자 성명만 쓰면 담당 우마무스메로 계약 하는 거야."

일단 내 이름만 써져있는 계약서를 건네며 말을 이어나갔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과 얘기해보고 정해도 좋고, 조금 더 고민해보다가 다른 사람이랑 계약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한참 잘 듣는 듯 하던 아이는, 잠시 책상 위에 있던 과자에 눈길이 가는 듯 싶더니.

"..."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써놓고 도로 돌려주며 말했다.

"14세 이상의 우마무스메는 굳이 보호자의 동의가 없어도 되는 거, 알고 계시죠?"

특유의 이상야릇한 분위기와 함께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내일부터, 잘 부탁드려요. 트레이너 씨?"

라며 가볍게 방을 떠났다.

"...스틸 인 러브."

또박또박 쓴 가타카나, 이제야 이름을 안 것도 웃기지만 못해도 30분은 한 대화에서 서로 이름을 물어볼 생각도 않은 것이 묘하게 쿵짝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예쁜 이름이네."


.

.

.


"안녕하세요, 트레이너 씨."

"안녕, 스틸 인 러브."

"...편하게 러브라고 부르셔도 된답니다."

"어... 그래, 그럼 앞으로 러브라고 부를게?"

"후훗, 네."

아이... 아니 러브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조금 특이한 아이인 것 같지만, 그래도 나쁜 아이처럼 보이진 않았다.

"일단 오늘은 가볍게 체력측정 정도만 할 거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될거야. 그렇다고 대충 하진 말고."





"흐음..."

묘하다.

"하아... 하... 트레이너 씨...?"

"아, 미안. 잠시 안에서 좀 쉬고 있으렴."

"...네."

빠르다. 저 체격에서 나오는 속도라곤 믿기지 않는 폭발력이지만 뭔가 애매하다.

"비슷한 체급의 우마무스메 평균보단 조금 빠른데..."

실력도 잠재성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

날 매료시켰던, 러브의 그 모습이, 조용히 숨을 고르고 땀을 닦는 저 모습에선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다.

"뭐... 확실히 재능은 있으니까."

원석이란 건 언뜻보면 돌이랑 다를 바 없으니, 잘 갈고 닦아야 빛을 발하는 것 아니겠는가. 러브도 그런 부류라고 굳게 믿었다.

"..."

아니, 그 모습을 봤다면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었다.


.

.

.


우마무스메의 데뷔는 순탄치 않다. OP급 아니 데뷔전도 못하고 사라지는 우마무스메가 부지기수다.

내부적인 평가도 좋아야하고, 레이스 성적도 뒷받침 되야한다. 꾸준함이나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하아..."

그렇기에 일단 걱정이 앞섰다. 제아무리 인상적인 레이스를 보여줬다곤 해도 그게 재능일지 단 한 번의 반짝임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러브는, 오늘 이 자리에서 증명해야 한다.

"1차 내부 평가 잔디 2000m 시범 경주가 곧 시작될 예정이니 출주 우마무스메들께선..."

"...긴장 되시나요?"

"응? 아... 뭐 그렇지..."

직접 뛰는 건 내가 아니지만, 러브보다 긴장을 더 많이 한 것 같다.

"...그래도 러브를 믿으니까."

"후훗, 특훈의 결과를 보여주고 올게요."
 
고고하게 웃으며, 경기장으로 향하는 러브의 뒷모습을 믿음 반 두려움 반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건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3... 2... 1...!"

조금 늦은 출발, 살짝 당황해보이는 모습.

'아, 이거 좆됐구나.'

순간 상스러운 생각으로 뒤덮혔다. 어떻게 위로해줘야할까, 좋아하는 과자는 챙겼나, 같은 잡다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차던 그때.

"야 저거... 누구 애냐...?"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경주를 지켜봤다.

"하아... 하... 아하하... 아하하하하하!!"

뜨겁다, 미친듯이 심장이 뛴다. 숨이 가빠지고 판단이 흐려진다.

"더...! 더...! 아하하하.. 아하... 하하하하핫...!"

체구는 작고, 트레이닝 성과는 미미하다. 성격이 그렇게 독해보이지도 않는다.
"어딜 가는 거야? 응? 어딜 가는 거냐고..!"

하지만, 난 그 떄의 레이스를 기억한다. 상대를 죽일 듯이 쫓고 물어뜯고, 피가 흥건해질 정도로 난도질한다.

"아하하하하... 하하하...!"

자신 앞에 서는 이 하나 없도록, 어쩌면 자기 앞에 서는 겁 없는 상대를 희롱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하아... 하... 하..."

단순한 달리기가 아니다. 살육의 현장, 피 튀기는 잔혹한 전장.

러브에게 레이스란, 그런 존재다.

"...잔디 2000m 1착, 스틸 인 러브."

희열이 아직 식지 않은 듯, 경기장 한 가운데서 거친 숨을 내쉬는 러브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본다.

상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그 새빨간 눈동자, 숨을 고르면서도 섞여나오는 광적인 웃음.

짐승, 아니 괴물이구나.

내가 발굴한 건 괴물이었어.

승리의 희열에 잔뜩 물들어 있는 러브를 보며, 묘한 색기와 함께 말도 안 되는 괴물을 찾았다는 그 오싹함에 절로 웃음이 돌았다.

"하하하... 아하하하하....!"

나도, 그녀랑 똑같은 부류인가보다.


.

.

.


몇 번의 평가전을 더 거치고, 나와 러브는 착실히 데뷔 준비를 마쳤다. 중간중간 트레이너나 우마무스메나 제정신이 아니라는 악담 아닌 악담을 듣긴 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어떤...가요...?"

"오..."

흰색과 붉은색이 인상적인 색배합, 큰 리본과 각종 장식으로 치렁치렁 꾸며져있었지만, 뭔가 본질적으로 '위험한 여자' 라는 인식이 쉽게 가시진 않았다.

"여기도 이렇게 됐답니다?"

러브는 승부복이 마음에 든 건지 조심성 없게 치마를 들추며 구석구석 자랑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붉은 실처럼 보였으면 한다느니, 조금 정갈한 수녀 느낌을 줘봤다느니 하며 이럴 때는 영락없는 그 나잇대 여자아이나 다름 없었다.

"어머? 이 리본도 부탁했는데 여기에..."

꽤 밝은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던 러브를 유심히보던 나는.

"러브 잠시만..."

갑작스레 러브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손톱이 조금 상했네."

"아..."

"잠시만 기다려줘?"

뭔가 러브의 볼이 붉게 달아오른 것 같았지만, 그땐 별 생각이 없었다.

"손 줘볼래?"

"네..."

러브는 두 손을 가지런히 쭉 피며 보여줬다.  

가녀리고 조그마한 손과 그에 비해 거칠고 푸석푸석한 손톱, 한창 이런 거에 관심 있을 나이인데 너무 레이스에만 몰두한 걸까

"겨울은 건조하니까, 손톱이 갈라지거나 하면 추가 세균 감염이나 부상이 생길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돼."

"네에."

"이런 가벼운 몸상태도 나중엔 루틴을 해칠 수도 있으니까..."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며 네일 케어를 딱 마치면 그림이 예쁘겠지만.

"어..."

운명의 장난인지, 딱 왼손 약지, 그 한 곳을 케어해줄 양이 없었다.

"..."

그 특유의 야시시한 눈빛으로 나를 슬쩍 바라보던 러브의 눈빛은 이내 옆에 있던 새빨간 매니큐어 쪽으로 이동했다.

"하아.. 이것도 음... 광물성 염료에... 보습도 되긴 하네..."

꿩 대신 닭이라고, 그녀의 왼손 약지만 붉게 물들여지긴 했지만 러브는 어딘가 더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약지를 지그시 바라보는 듯 했다.



.

.

.


"으응.. 그래 그래.. 아가..."

"..."

"우훗... 아하하... 응.. 귀여워라."

이상한 상황같지만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어머, 이거 주는 거야?"

모처럼 나온 외출 중 들린 애견카페에서 러브는 환히 웃으며 강아지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후훗, 이거 봐요 트레이너 씨."

늘 옅은 미소와 눈웃음 정도만 짓던 러브는 그 나잇대 여자아이들 처럼 밝게 웃으며 말을 장난감을 들이밀었다.

"제가 마음에 들었나봐요."

잔뜩 헤진 강아지 장난감을 보여주며, 저 아이가 선물을 줬다느니 처음보는 사람인데도 배를 보여준다느니.

가끔 소름끼치긴 해도, 이런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여자아이였다.

"마음에 들어해서 다행이야."

"후훗, 사실 조금 놀랐어요."

러브는 한가득 묻은 개털을 털어내며 베시시 웃었다.

"어떤 부분에서?"

"먼저 외출하자고 하셔서 말이에요, 늘 보충이나 추가 트레이닝만 하셨는데 말이죠."

"...너무 구르기만 하면 재미 없잖아?"

"네에~."

살짝 찔렸다, 러브도 어색한 대답을 굳이 캐묻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느낌으로 넘어가주는 낌새였다.

"...대신, 확실히 놀아주셔야 된답니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특별한 게 있진 않았다.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예쁜 옷이 있으면 구경하고, 귀여운 인형이나 동물들에 시선이 팔리기도 하며 사소한 거에 즐겁다며 꺄르르 웃는 다른 우마무스메들도 할 법한 그런 소소한 일들.

"후훗, 트레이너 씨. 이건 되게 아저씨 같아요."

"아하하... 그런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선홍색의 눈동자, 러브의 작은 체구와 조용한 분위기가 맞닿아 오늘따라 더 소녀처럼 보이는 기분이었다.

옷이나 인형 혹은 작은 동물들 그녀가 관심을 가진 건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오늘 유독 눈독을 들인 건.

"..."

"하나 살래?"

새빨간 매니큐어.

별 다른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오묘한 미소를 짓는 러브를 보며, 사주면 기뻐하겠구나 싶어서 선뜻 사주었다.

저번에 해준 손톱 관리에 흥미라도 생긴 걸까, 확실히 여자아이긴 하구나.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

"여기요."

러브는 매니큐어를 나에게 주며 말했다.

"다음에도... 직접 칠해주셔야 해요?"

가슴에 양 손을 살포시 올리고 가벼운 미소를 짓는 러브, 왼손 약지에는 저번에 칠해준 그 붉은 매니큐어가 살짝 벗겨진 채로 반짝거렸다.

"...러브가 원한다면야."




"맛있는 걸 못 사줘서 미안하네."

"이것도 충분히 맛있는 걸요."

생각보다 즐겁게 돌아다닌 탓에 밥 먹을 시간도 놓쳐버렸다. 그나마 들어가 본 식당은 인산인해거나, 술 장사로 바꿔서 러브와 함께 들어가기엔 부담스러운 곳들 뿐이었다.

겨우 중심지에서 벗어나 한적한 패밀리 레스토랑을 하나 찾아 식사를 하긴 했으나, 찝찝한 마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정말 맛있다며, 이런 걸로 마음 쓰지 말라면서 되려 나를 걱정하는 러브의 모습이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미안하시면, 제 소원 하나 들어주실래요?"

"소원?"

"네."

"음... 들어보고?"

"...트레이너 씨 집에서 자고 싶어요."

"내 집... 에서...?"

"네."

이상야릇한 눈빛을 보내며, 단순 장난이 아니라는 신호를 느꼈지만 아무리 담당이라 해도 다 받아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안 될 거 같은데... 일단 외박계도 안 냈고, 아무리 러브라도 남자의 집에 여자를 함부로 들이는 건 조금..."

"..."

살짝 삐진 듯한 눈매를 하더니, 기대도 안 했다는 말투로 피식 웃으며 러브는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3관 우마무스메가 되면, 그땐 해주실 건가요?"

"그러면 뭐..."

"으응..."

당근을 집어 먹는 러브의 모습이 어딘가 오싹했지만, 앞으로 레이스를 잘하겠다는 의지 표명 정도로 여기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그래도 나름 고등부인데 너무 어린애 취급한 건 아니었나 조금은 뒤돌아보게 되는 러브의 행동이었다.



.

.

.


주변이 꽤나 웅성거린다. 평소에 보던 것보다 사람도 많고 우마무스메도 많고 진정한 프로의 세계구나, 싶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하아..."

"..."

곧 데뷔전일텐데, 러브는 놀랄만큼 침착했다. 오히려 트레이너인 내가 더 애간장이 타서 덜덜 떠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긴장만 할 순 없으니, 전황을 파악할 겸 주변을 살펴봤다. 밝고 활기찼지만 그만큼 긴장이 맴돌았다. 지금은 모두 웃고 떠들어도 결국 승자는 단 하나 뿐이니, 그럴 수 밖에.

"조금만... 조금만 더요..."

"보는 눈도 많은데..."

"으응... 알고 있으니까..."

트레이너와 우마무스메의 관계는 돈독하다. 특히 데뷔나 평가전 같은 게 있는 날이면 그 굳건함을 자랑하려는 사람이 많아진다.

"...낯 뜨겁네."

"...그러게요."

다른 사람들 보기에 꽤 부끄러운 애정행각도 서슴치 않고 하는, 그런 모습도 종종 보게된다. 물론 담당 우마무스메와 이어지는 경우도 많고 서로의 연결고리가 끈끈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응... 츄하..."

저런 건... 조금... 그렇지 않나...?

그래도 러브는 이런 행동을 해달라고는 안 하니, 꽤 의젓하고 어른스럽다고 할 수 있다.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우니 가벼운 애정표현이나 응원 정도는 요구할 법 한데...

"..."

...방금 말 취소.

"...안아줄까?"

"...네."

마지막 평가전까지 좋은 성적을 기록해도 긴장 되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뭔가 이상야릇한 주변 분위기도 그렇고 일단은 이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러브가 내 품속에서 다른 의미로 음흉하게 웃고 있었단 걸 안 건 한참이 지나지만 말이다.

"잘... 하고 올게요."

"응, 믿고 있으니까."





스틸 인 러브의 성적은 출중하다.  다행히도, 얼마 전 치른 코바이 스테이크스에서 화려한 1착과 함께 성공적인 데뷔전을 선보였다.

"후훗, 그 날 트레이너 씨께서 절 안아주셔서 잘 달릴 수 있었답니다?"

라며, 내 덕이라는 러브였지만 난 그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러브는 OP급에서 놀 우마무스메가 아니란 걸.

"그래도 중상은.. 으음... 아직 고민해봐야 하나..."

러브의 실력은 발군이지만, 아직 확신하긴 일렀다. 솔직히 조금 쫄리기도 했고.

"..."

신청을 고민하던 나 대신, 마우스를 집어들었던 러브는.

"...저도, 새로운 도전은 늘 떨리고 무서워요."

"..."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트레이너 씨께서 늘 곁에 계셨으니까 힘낼 수 있었어요."

"러브..."

"이번에도, 제 곁에 함께 해주실 거죠?"

라면서 기운을 복돋아주었고

"...그래, 해보자!"

그렇게, 첫 중상에 출사표를 내던지게 되었다.

"전, 트레이너 씨가 곁에만 있으면 늘 이겨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곁에 계실 거죠...?"

"러브 원한다면, 함께 해야지."

"후훗... 네.. 좋아요."




.

.

.





쓰러트리지 못했어, 쓰러트리지 못했어, 쓰러트리지 못했어, 쓰러트리지 못했어, 쓰러트리지 못했어, 쓰러트리지 못했어, 쓰러트리지 못했어, 쓰러트리지 못했어, 어째서?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건지?저렇게 약한 녀석에게 내가 당할 리가 없어, 분명히, 내가 쓰러트렸는데, 이 잔디에서 분명, 분명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 거짓말이잖아. 네가 어떻게 날 이긴 거야. 말도 안 돼. 그래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 그런 얕은 거짓말로 따위로 날 속이려 하지 말라고, 내 트로피, 내 승리, 러브...!, 그 모든 걸 다 나한테서 앗아가 놓고 대체 뭐가 즐겁다고 그렇게 웃어대고 있는 거야? 응? 응? 러브...!! 말 좀 해보라고 이 씹어먹어도 모자랄...

"러브...!"

"..."

"...잘했어, 정말... 잘 뛰어줬어."

"트레... 이너 씨..."

"나 진짜... 걱정 많이 했는데... 윽..."

"..."

"괜한... 내 욕심 때문에... 흑... 널 힘들게 한 건 아닐지..."

"..."

아, 트레이너 씨. 나의 트레이너 씨.

"...군말 없이 잘 따라와줘서 너무 고마워."

왜 이럴까요, 나는, 나 스틸 인 러브는 왜 당신이 곁에 있다면 모든 게 이리 고요해지는 걸까요.

"2착이어도 상관없어, 나한테는...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결과니까."

레이스도, 경쟁도 하물며 피가 끓었던 그 경쟁심도, 당신만 있다면 이렇게 잠잠해지는 걸까요. 나는, 이미 당신에게 너무 많은 걸 받고 있는데

왜 당신은 계속 부족하다고만 느끼는 걸까요, 트레이너 씨.

"...고마워, 러브."

아, 트레이너 씨, 나만의 오직 나를 위한, 러브만을 위한 트레이너 씨.

"....울지마요."

"으응... 흡..."

"제가... 행복하게 만들어드릴게요.. 트레이너씨."




 
첫 중상, 튤립상의 2착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물론 2착이란 결과도 호성적이었지만, 러브는 이 정도로 만족할 아이가 아니었다.

"다음은 G1이니까, 확실히 준비해야 될 거야... 어쩌면 참패할 수도 있지만..."

"네에."

"레이스 도중에 조금 폭주하게 되는 건, 최대한 케어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거 같아."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승부욕의 근원. 그녀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발산하고 레이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라 여기지만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실제 레이스에 맞춰서 페이스 조절하는 위주로 트레이닝을..."

"으응."

"저... 러브?"

"네? 왜 그러시죠?"

"거리가... 조금 가까운 거 같지 않아?"

굳이 이렇게까지 들을 필요는 없는데, 러브는 무릎 위에 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설명도 더 잘 들리는데 안 될까요?"

"뭐... 편한대로 있어 그러면."

은근슬쩍 꼬리로 몸통을 감싸면서 그 야릇한 눈웃음을 짓는 러브, 묘한 색기와 그 분위기에 매몰차게 거부하긴 힘들었다.

"아무튼, 조금 빡빡하게 굴러가겠지만 같이 헤쳐 나가보자."

"후훗, 네. 트레이너 씨."




.

.

.


G1, 그 이름값이 주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무릇, 우마무스메라면 그리고 트레이너라면 누구라도 꿈꾸는 G1에서의 호성적.

나의 애마를 누구보다 빛나는 우마무스메로 만들어주고 싶다. 그런 일념으로 준비했다.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가장 몰렸던 한달이었다. 나나 러브나 뭐라 할 것 없이, 트레이닝과 전략 분석이 끝나면 지쳐 잠들기 일쑤였고, 트레이너 실에서 쪽잠을 청한 적도 적지 않다.

"오늘은 확실히 쉬고, 컨디션 관리하자."

"네."

"...긴장 되잔 않아?"

"떨려요. 그렇지만, 트레이너 씨와 함께라면..."

우린 이겨낼 것이다. 난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오는 게 뭐든, 이겨낼 것 같아요."

러브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출주 우마무스메와 트레이너 님께선 대기실로..."

선수들에겐 루틴이 있다. 누군가는 편자를 손보는 걸 수도 있고, 의미 없는 주식 차트를 수십 번이고 새로 고침하는 걸 수도 있다. 러브는 딱히 그런 루틴이 있진 않았지만.

"...부탁드릴게요."

한 가지를 요구해왔다.

"경기 시작 전엔 절대 안 마를 거 같은데 괜찮겠어."

"네, 오히려 트레이너 씨께서 다시 칠해주실 수 있으니 더 좋답니다."

"으응..."

예전에 발라준 새빨간 매니큐어, 네일 케어나 아트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고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러브는 내가 발라주는 매니큐어를 참 좋아했다.

"예쁘게, 부탁드릴게요?"

특히 양 손을 다 바르는 것도 아닌, 딱 한 곳. 왼손 약지에 하는 것만 말이다.

"응..."

이게 유독 기억에 남았나보다, 뭐 그런 생각으로 칠해주긴 했지만 조금 묘하긴 했다. 굳이 왼손 약지라니 이게 어떤 손인지 의미를 알곤 있는 걸까.

"됐다, 최대한 말리긴 했는데... 아마 금방 벗겨질 거야."

"후훗, 괜찮답니다."

러브는 그렇게 한동안 이상야릇한 미소만 지으며 레이스 직전까지 약지의 매니큐어를 바라봤다.




"모든 우마무스메가 게이트 인 했습니다... 그리고."

레이스란, 레이스란 무엇일까.

"시작했습니다!"

 우마무스메로서 달리기란 단순 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 가치관 어쩌면 운명. 그런 것들을 매순간 담아내는 찬란한 파노라마.

나, 스틸 인 러브는 그렇게 생각한다.

"먼저 선행 싸움입니다만, 몽파르나스. 역시 몽파르나스가 선두에 섰습니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빛날 그 순간 강자를 먹어치우고 굴복시키는 정복감, 찬란하게 빛나는 선혈의 황홀경이다.

강자들을 마주하는 건 언제나 심장이 뜨거워지고, 흥분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든다.

"뒤는 야마크츠 릴리가 빠르게 3번째, 뒤에는 스틸 인 러브가 선두에서 5번째!"

피가 끓는다는 표현, 어쩌면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내 앞에 서는 모든 걸 무너트리고 철저히 부숴놓는다. 그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지만

"남은 거리 200m를 끊고! 스틸 인 러브 선두다!"

이젠, 분명히 다르다.

"뒤에서 어드마이어 그루브가 파고들어 오지만! 선두는 스틸 인 러브!"

피 끓는 대결도, 강자를 무릎 꿇리는 것도 레이스에 미쳐 광폭하는 것도 행복하지만.

"스틸 인 러브 골인! 스틸 인 러브의 중상 첫 승리는 G1의 오카상!"

이제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건.

"러브!!!"

"...트레이너 씨."

"잘했어...! 진짜...! 진짜...!"

"...행복... 하신가요?"

"당연하지...! 세상 누구보다!"

"...후훗."

아아, 당신. 나만의 당신. 나의 행복, 나의 사랑.





 .

.

.


"10년만에 돌아온 2관 우마무스메, 여왕의 대관식."

"...부끄럽네요."

"이렇게 특집기사도 나오고, 우리 성공했네."

"다 트레이너 씨 덕인걸요."

오카상과 오크스, G1 2개를 거머쥔 러브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여세를 몰아 다른 중상이나 해외 쪽으로 관심을 돌려도 괜찮았지만, 굳이 그러진 않았다.

"러브가 잘 달려준 덕분이지, 난 담당 잘 선택한 거 말곤 한 게 없는 걸."

최근 2달간 체력과 정신력을 모조리 매몰시키기도 했고, 러브에게 부담감을 주긴 싫었다. 다음 출주도 최대한 뒤에 열리는 경주로 잡고 지금은 조금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후훗, 그럼 다 제 덕분인 거네요?"

트레이닝이 아니더라도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러브와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제 꽤 능청스럽게 장난을 던지거나 무릎 위에 앉는 빈도가 흔해진 걸 보면 더더욱 그렇다.

"뭐어.. 편하게 생각하자고."

이젠 자기 자리라는 듯 자연스레 팔에 꼬리를 감고 무릎에 앉는 러브, 나도 별 생각 없이 러브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흐흥~ 네에."

그렇게 무릎 위에 러브를 앉혀놓고, 업무를 보고 과자를 나눠먹으며 적당히 시간을 보내던 와중.

"...트레이너 씨?"

꽤 싸늘한 말투와 눈빛으로 돌변한 러브가 날 노려봤다.

"응? 왜 그래."

"이거..."

책상에 대충 쑤셔뒀던, 팀 트레이너 제의 서류. 그걸 들고 있었다.

"아..."

"설명... 해주실래요?"

순간 러브의 눈 초점이 흐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묘한 살기가 등골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새차게 흔들어놓았다.

"그냥, 받아만 둔거야. 트레이너로서 좋은 성적을 거두니까 조금 높은 급으로 팀을 운영할 생각은 없냐... 권유 정도만 받았어."

"..."

"애초에 수락할 생각도 없었어, 지금은 러브 하나만 봐도 모자라니까."

"...네, 알겠어요."

살짝 화는 누그러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살기는 느껴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독점력인가.

한동안 조용하던 러브는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더니.

"...잠깐 손 좀 빌려주실래요?"

라며 내 왼손에 살포시 손을 포갰다.

"응? 어, 뭐.. 그래."

뭘 하려고 그러나 싶을 찰나.

"윽..."

러브는, 지체없이 내 왼손 약지를 입 안으로 넣어 깨물었다. 약지의 가장 안쪽 마디, 보통 반지를 낄 때 쓰는 그 부분.

손가락이 살짝 아릴 정도로 강하게 깨문 러브는 조심스레 내 손가락을 놓아주더니.

"..."

약지에 진한 잇자국이 새겨진 걸 확인하고는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꼭..."

이라며, 아직은 알 수 없는 얘기와 함께 말이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푹푹 찌는 여름을 러브와 함께 보냈다.
러브가 좋아하는 애견카페나 동물원에 가기도 하고, 방학에 맞춰 홋카이도나 바닷가로 떠나기도 하며 나름 알차게 보냈다.

그러면서, 러브와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아하핫, 트레이너 씨! 발이라도 담궈보세요!"

저물어가는 늦여름, 지평선에 걸려 흐르는 은은한 홍색의 노을이 바다에 반사되며 마치 하늘 위에 떠있는 듯한 몽환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다가 빠진다?"

러브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닷속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신발을 다른 한 손으로는 치마를 잡으며 발만 담궜지만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웃고 있었다.

"너무 그러지만 마셔요.~"

함께 놀자는 러브의 앙탈에 어쩔 수 없이 바지를 걷고 바다로 향했다. 햇빛에 반사된 바다는 별처럼 반짝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와 보석처럼 새하얗게 부숴지기를 반복했다.

"...트레이너 씨."

꺄르르 웃던 러브는 잠시 뒷짐을 지더니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고마워요. 늘 즐겁게... 그리고 행복하게 해주셔서."

"아냐, 트레이너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트레이너 씨가 아니었다면, 전... 아마 평범한 우마무스메로 남았을 거에요."

"러브..."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드려요?"

러브는 마지막 말을 하며 뒤로 빙글 돌면서 가볍게 웃었다. 황혼이 내린 노을, 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다홍빛 바다 그리고 하나 둘 하늘에 장식된 별. 모든 것이 아름다웠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러브의 웃음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후훗,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슬슬 돌아...앗..."

"러브!"

바닥에 깔린 해조류라도 잘못 밟은 건지, 러브는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했다. 나는 그런 러브를 받으려고 냅다 몸을 던졌고

"..."

"..."

결과적으론 둘 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을 면치 못했다.

"...푸흡."

"...아하하, 아하하하핫."

"하핫... 하하하하."

그런 모습에, 둘 다 마음이 동했는지 웃음보를 터트렸다.





.

.

.

바닷물에 푹 젖은 몸을 온천 속에 풀었다. 후덥지근하던 여름도 어느새 끝을 바라보며 한풀 꺾여가고 있었다.

러브와 만난 지 어느새 2년째, 우여곡절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여기까지 왔구나 묘한 감동이 몰려오는 순간이었다.

"...트레이너 씨?"

"러브구나."

벽 너머 온천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저기도 사람이 없는 듯 했다.

"피로는 좀 풀리시나요?"

"응, 오랜만에 온천이라 그런가 시원하네."

"다행이네요."

직접 보진 않았지만, 러브는 가볍게 웃는 것 같았다.

"트레이너 씨 덕에 이런 곳도 와보고 후훗, 정말 오래 살다보면 별 일 다 겪네요."

"꼭 60대 할머니처럼 말하네."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를 하다보니 살짝 정신이 몽롱해졌다.

"...러브는 안 나가려고?"

"네?"

"꽤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는 거 같아서."

"아, 전 진즉 탕에선 나왔어요. 다만... 얘기하는 게 즐거워서."

"으응.. 그렇구나."

잠시만... 그럼 이 너머에선 러브가 알몸으로...

아냐,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러브는 아직 미성년자고... 뭣보다 내 제자라고

"감기 걸리겠다. 얼른 들어가, 나도 곧 들어갈게."

"네에."

...나도 미쳤지, 그런 생각을 하고.




.

.

.



여유로웠던 여름이 지나고, 꽤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다. 기나긴 공백기를 깨고 우린 로즈 스테이크스로 시작해 엘리자베스 여왕배로 끝맺음 하는, 4관의 여정을 순탄하게 시작했다.

...그랬어야 했는데.

"괜찮으신가요?"

"쿨럭.. 크흠.. 미안해, 쉽게 낫지 않네."

환절기에 제대로 된 건강관리를 못한 건 변수였다. 일단 러브에게 옮으면 안 되니 최대한 조심하곤 있지만 러브의 걱정을 받고 있다는 것 부터가 이미 글러먹었다.

"내 걱정은 너무 하지 말고, 우선은 트레이닝에.. 콜록.. 집중하자."

"...네."

영 상태가 안 좋다면 트레이닝 일정을 조절할 수도 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우선 러브와 레이스가 최우선이었으니까. 몸을 좀 혹사시키더라도 최대한 일정에 맞춘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결국 터질 게 터지고 말았다. 38도, 의사선생님께 병원은 부활하러 오는 곳이 아니라며 한소리 들을 정도였다.

"...미안해, 그래도 트레이닝 한 대로.. 크흥.. 하면 되니까..."

"네... 푹 쉬고 계세요."

"그래도 같이... 크흡... 갔어야 했는데... 진짜 미안해..."

"아녜요, 괜찮으니까. 빨리 끊고 쉬세요."

"'응..."

터질 거면 내일 터지지, 왜 하필 레이스 당일날 펄펄 끓은 몸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러브가 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이 된다. 정신적으로 든든하게 지지해줘야할 사람이 앓아 누운 탓에 이번 레이스를 그르치진 않을까 싶은 그런 불경한 생각이 머리를 잠시 스쳤다.

"...아닐 거야."

몽롱한 정신과 축 처진 몸뚱아리를 겨우 이끌어 약을 먹곤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일어나면 러브의 승리 소식이 올라와 있을 거다.






"으응..."

어딘가 맛있는 냄새에 잠에서 깼다. 옆에서 배달 음식이라도 시킨 건가.

"어머, 일어나셨네요."

"아... 러브..."

아, 러브가 집에 와 있었구나. 응... 그렇구나...

"...러브?!"

"자, 이거라도 조금 드세요."

"여긴 어떻게...! 아니 애초에 레이스는...!"

"..."

러브는 말 없이 시계를 가리켰다. 오후 6시 40분, 레이스는 한참 전에 끝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아... 레이스는 끝났구나, 아니 잠시만 그럼 결과는..."

급하게 휴대전화를 켰다. 의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결과는 중요...

"...5착?"

"..."

러브를 쳐다봤다, 뭔가 읽기 어려운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직접 지은 죽과 계란찜을 푼 숟가락을 그저 들어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드세요."

"헙..."

더 질문 하지 말라는 듯, 일단 억지로 밥부터 먹인 그녀는 그제서야 보따리를 풀어주었다.

"일단 5착은 죄송해요. 나름... 잘 해보려고 했는데 계속 트레이너 씨가 마음에 밟혀서..."

"..."

"그러다보니 페이스 조절도 잘 안 되고, 뭣보다.. 트레이너 씨를 계속 보고 싶어져서."

"...응."

"끝나자마자, 이렇게 왔어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봤다. 흙투성이인 그녀의 양말과 체육복이 바닥에 있었고, 그 옆엔 요리 재료를 직접 사온듯 마트 비닐봉투가 놓여져 있었다.

"...미안해."

"아녜요, 이렇게 멀쩡하신 모습 보니까. 한결 편안해지는 거 같네요."

러브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이런 아픈 몸으로 자길 챙겨줘서 고마웠다고, 그래도 앞으론 몸관리 잘하라며 역으로 케어를 받기도 했다.

이럴 때보면 나보다 어른스러울 때도 있는 것 같다.


이후에도 러브는 설거지나 집 안 청소 그리고 빨래 같이 잡다한 가정일까지 도맡아 해주었다. 환자는 쉬고 있으라며 도와주려 할 때마다 다그치면서 말이다.

"푹 쉬세요. 트레이너 씨."

"응.. 고마웠어 러브, 너도 얼른 들어가."

"네."

러브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곤, 집을 나섰다. 그래도 러브가 와준 덕에 꽤 깨끗해진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러브한테 우리 집 주소를 알려줬었나.








.

.

.

5착이라는 결과표에 부진, 침몰 심지어는 몰락같은 표현까지 써가며 러브의 부진을 예상하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러브는 멋지게 1착을 해내며 새 역사를 써내려갔다.

비록 다음에 있던 엘리자베스 배까지 석권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3관이라는 업적이 어디 가진 않았다.

 "" 건배ㅡ! ""

성공적인 데뷔와 한 해를 그렇게 마무리 지으면서 많은 것이 바꼈다.
3관 우마무스메나 트레이너 경력에 화려한 한줄이 쓰인 것도 그렇지만 가장 큰 건, 러브가 성인이 됐다는 것.

"옛날에 3관 따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했는데, 그게 정말로 될 줄이야."

"그러게요, 저도 조금 놀랐어요."

거품을 입술에 묻히고 베시시 웃는 러브, 아직 술은 약한 건지 한두 캔 정도로 금방 기분이 업된 게 눈에 보였다.

"올 한 해 정말 고생 많았어, 뭔가 난 한 것도 없는데 얼떨결에 3관 트레이너가 되서 묘하네."

"한 게 없다뇨, 다 트레이너 씨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요."

늘 그렇듯, 서로에 대한 칭찬과 가벼운 대화들 이를 테면 전에 봤던 부모님께선 잘 지내시는지, 친구들이랑 관계는 어떤지 뭐 그런 것들이 오갔다.

"아, 맞다. 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뭔가요?"

"나랑 계약 했을 때... 뭔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바로 승낙했잖아? 혹시 그 이유가 뭔가 해서..."

"으응..."

"개인적인 이유면 굳이 말 안 해줘도 괜찮.."

"과자."

"응?"

"그때 내주셨던 과자가 제가 제일 좋아하던 과자였거든요."

"어... 그랬구나."

"네, 이런 사소한 것도 신경 써줄 정도로 섬세하신 분이라면 분명 믿고 맡길 수 있다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선택했어요."

의외였다. 사실 별 생각 없이 꺼낸 건데 그게 마침 러브가 좋아하는 과자였다니, 어쩌면 이런 게 운명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후로도 몇 분간 자잘한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연인 얘기가 나왔을 땐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둘 다 연애를 해본 경험이 없어 별 해프닝 없이 넘어갔으니 말이다.

"미안, 잠시 화장실 좀."

"네, 다녀오세요."

러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평소의 묘한 색기를 내비치는 모습도 좋지만 이런 식으로 무방비하게 귀여운 모습도 러브의 매력이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아니면 취기가 늦게 올라왔거나.

"그래서 말이죠..."

"응..."

화장실을 다녀오니 뭔가 정신이 더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술을 안 마신지도 꽤 됐으니 나도 모르게 술이 약해졌나보다.

"...괜찮으세요?"

"아... 응... 조금 취한 거 같...네..."

이상하다. 몸이 이상하다. 침이 쉴 새 없이 넘어가고 몸이 타오르는 것 처럼 뜨겁다. 열 같은 게 나는 느낌의 뜨거움이 아니었다. 그래, 굳이 설명하면...

"...발정 하셨나요?"

"ㅁ, 뭐...?"

"저는... 트레이너 씨라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시야는 흐려지고 감각만이 날카롭게 곤두서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거칠게 변한 숨과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육체의 흥분 그리고 눈빛

"...러브."

필사적으로 러브를 곁에서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가까이 다가왔다. 달콤하다, 러브에게서 이렇게 달콤한 향기가 났던가.

"...괜찮아요."

잔뜩 흥분한 물건을 손에 쥔 그녀는 야릇하게 미소를 지었다. 술 냄새와 출처를 알 수 없는 달콤한 냄새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어 놓는다.

"러브에게... 잔뜩 풀어주세요..."




.

.

.


 
"흐읏... 흣... 하아... 러브..."

"응... 네엣... 앗..."

"하아.. 러브으... 사랑해... 사랑해 러브..."

아찔하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유가 뭘까, 술? 러브의 매력?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너무 부드럽고 또 사랑스럽다. 작은 체구와 여리여리한 몸, 지금보다 더 강하게 안으면 부숴질 것 같은 이 연약함.

새하얀 피부가 흥분과 취기에 젖은 붉게 달아 오른 걸 볼 때마다 아찔한 자극으로 들어왔다.

"으읏... 앙... ㄷ, 당시인... 하앙..."

얼마 전까지, 아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미성년자였던, 내 제자는 이제 내 여자가 되어 품속에 안겼다.

"러브... 쌀겟...!"

"흣.. 네엣..."

정신을 잃을 정도로 끈적한 사정을 했다. 콘돔이 없었다면 그대로 임신시켰을지도 모를 정도로 길게 욕정을 뱉어냈다.

"흐앗... ㅇ, 아직 가는 중 인뎃... 흣..."

정신 차렸을 땐, 이미 본능에 잠식 당한 뒤였다. 사정이 채 끝나지도 않은 채로 계속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에게 부딪혔고 그 순간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서로에게 녹아날 뿐이었다.



.

.

.


"...안녕, 러브."

"후훗, 안녕하세요. 트레이너 씨."

그날 이후로, 러브... 아니 그녀와는 다신 예전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우린 틈만 나면 서로를 갈구하기 일쑤였고.

"으응.. 츄으... 하아..."

"...하고 싶어?"

"...제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시간과 공간이 나는대로 서로를 향한 애정을 거리낌없이 보여줬다.

"흐읏... 핫...! ㄱ, 기퍼엇.. 앙..."

"러브... 읏..."

등에는 손톱자국, 목과 쇄골에는 키스마크와 잇자국. 내가 그녀에게 나를 새기는 만큼 그녀도 나에게 그녀를 잔뜩 새기고 있었다.

상황이 이 꼴이니, 제대로 된 성적을 낼 리는 만무했다. 8착, 8착, 12착, 3착, 9착. 작년의 그 포스는 어디가고 내리막길만을 걷는 성적

"사랑해... 러브..."

"사랑해요.. 당신... 그 누구보다도..."

...하지만, 우린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으니까.





"...이제 콘돔도 다 떨어졌네."

"...당신."

러브는 달콤한 목소리로 귓바퀴를 살짝 씹으며 말을 흘렸다.

"생으로... 해주세요... 러브를... 임신시켜주세요..."

이젠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 성적, 레이스 그런 건 다 의미없어.
그냥 도망치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그녀와 함께 말이다.

매일 같이 해댔다. 트레이닝실은 예사에 깊게 사랑을 나누다가 예정 시간에 늦어 혼난 적도 있었지만 우린 멈출 생각이 없었다.

"하읏... 앙.. 뜨거..."

씨앗을 뿌리고 싶다. 이 여자가 내 아이를 배었으면 좋겠다. 그런 원초적인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

.

.


"...우웁... 욱..."

"러브 ㄱ, 괜찮아?"

"ㅇ, 응... 괜찮.. 읍..."

"선생님! 러브가...!"

몸이 뜨겁다. 쉴 새 없이 헛구역질이 나온다. 머리도 살짝 어지럽다.


"...여보세요? 네... 당신..."

...그렇지만 기쁘다.



그녀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찾아왔다. 둘 다 별 다른 얘길 하진 않았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산부인과를 들렀다.

"네, 임신 초기입니다. 헛구역질이나 두통은 입덧 증세니까 큰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

"보통은 몇 주 이내로 괜찮아지지만 계속 안 좋으면 그때 또 내원해서..."

러브가 임신했다. 분명, 내 씨앗일 것이다.

"..."

이 소식을 들은 바로 그때,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교육자' 로서 지을 법한 표정은 아니었을 거다.




.

.

.


그 동안 모아뒀던 돈과 자취방 그리고 상금을 처분하니 교외 한적한 동네의 집 하나 정도는 구하고도 남았다.

트레센에선 퇴직했지만 교육자 경력과 자격증 덕에 근처 초등학교의 부분 시간 교사로 취직했다.

트레이너에 비하면 변변찮은 벌이지만 모자라진 않았다.

"응... 어디 안 가니까... 후훗, 당신은 너무 급하다니까요."

어느새 러브의 배도 많이 부풀었다.

"러브..."

"앙... 의사 선생님이... 하으... 조심하라고 했는데에..."

"러브가 너무 좋아서, 참을 수 없는 걸."

"흐흥... 그래도 아기한테 안 좋으니까... 츄우..."

"응.. 츄읍..."

러브와 내가 맺은 사랑의 결실을 쓰다듬으며, 끈적하게 입을 맞췄다. 천천히 혀가 감기며 서로의 사랑을 보다 확실히 실감했다.

"...사랑해, 러브."

"저도 사랑해요, 당신."

사랑해.

사랑해요.

러브.

당신.




...영원히.





ㅡ ㅡ ㅡ


우우... 마부이... 라뷰쟝이랑 마구마구 아가 만들기 하구시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