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한 저녁, 싸늘한 바깥 공기가 무색할 정도로 트레이너실 공기는 난방으로 훈훈했다. 블루머와 트레이닝 저지 차림의 젠틸돈나는 공손하게 양 손을 모으고 트레이너실 책상 앞에 서 있었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시간, 자율훈련을 하지 않기로 결정되었으니 그녀는 기숙사로 돌아가도 괜찮았다.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트레이너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방치하고 있다.

“......당신, 우리 얘기 좀 해요.”

“바빠.”

“뜨개질이나 하고 계시잖아요.”

겨우 말을 걸었는데도 이 모양이다. 젠틸돈나가 트리플 티아라를 달성한 날 선물로 주었던 핑크색 털실 모자 이후로 트레이너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뜨개질 삼매경이었다. 지금처럼 때로는 근무시간에도 뜨개질거리를 가져와서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었다. 분명 담당을 위한 일일텐데 담당이 원하지 않는 시간에도 이러는 건 그녀를 화나게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락부락 핏줄이 솟은 팔뚝을 씰룩거려가며 뜨개바늘을 세심하게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젠틸돈나는 어쩐지 화가 났다. 그럭저럭 형태를 갖춘 핑크색 스웨터가 완성되는 게 보이니 더욱 그랬다. 헌데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는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트레이너가 적반하장으로 표정을 구겨댔다.

“그래, 그러니까. 바쁘다고.”

“예, 알았어요. 당신께서 그렇다고 하시는데 그런 거겠죠. 저는 그저 당신의 담당 우마무스메일 뿐이고, 당신 하시는 일에 감히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도 없는 일개 계집이니까요.”

평온하면서도 원한과 원망이 꾹꾹 눌러담긴 말이었다. 벌써 1년 넘어가게 그를 대하면서 얻은 나름대로의 노하우였다. 그는 자신을 이르는 호칭이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굉장히 민감하다. 그런 주제에 여자는 굉장히 험하게 다루려고 한다. 남의 기분을 모르는 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알면서도 이런 식이니 더 악질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구성원 대부분이 여성인 트레센 학원에서 트레이너를 해먹고 살고 있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아무튼 스스로를 모욕하는 수준으로 자신을 한껏 낮춰 비아냥대면 그는 그녀에게 주목해준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삐졌냐?”

“예, 삐졌네요. 저는 계집이라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기 쉽고 속이 좁아서 별 같잖은 일을 두고두고 담아두고 짜증내는 존재니까요.”

“알았어알았어. 이거 참 곤란하구만 w 용건이 뭔데?”

주의를 끈 것은 좋았지만 우쭐해하는 꼴은 별로 보기 싫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마음 속에서 시뮬레이트했던 그대로다. 그가 뜨개질거리를 내려두고 책상에 다리를 척 올리는 것을 확인한 젠틸돈나는 팔짱을 꼈다.

“다음주 주말에 시간 있으신지요.”

“너랑 데이트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지 w”

“올해의 G1 축승식과, 연도대표 우마무스메 선정 기념식을 본가에서 열기로 했어요.”

추근거리는 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용건을 꺼내놓자 그가 화들짝 놀라 공손하게 고쳐 앉는다.

“뭐? 벌써 식을 올린다고?”

“하?”

“나야 괜찮은데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기왕이면 따뜻하고 침대가 푹신한 호텔이 있는 곳이 좋은데. 수영복도 구경해야 하니까 바다면 더 좋고 w”

“......저승으로 보내드릴 수는 있겠네요.”

“함께 가는 거면 나는 좋아 www”

슬슬 짜증이 나는지 팔짱을 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그녀를 보고 트레이너가 즐겁게 꺽꺽 웃어댔다. 웃음기 싹 빼고 생각해보면 ‘함께라면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어찌보면 굉장히 로맨틱한 말이다. 그런 멘트를 저렇게 거북하게 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젠틸돈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억지로 입꼬리를 살짝 올려 좋게좋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렇게까지 절 생각해주신다니 영광이네요.”

“근데 기왕 죽는 거면 한 번만 만져보고 죽으면 안 되나?”

“그렇게까지, 제 몸을 생각해 주신다니, 영광이네요......”

“복상사도 괜찮고 w”

“진짜 미쳤어요?”

“www”

안 된다. 좋게좋게 생각할 수가 없다. 도무지 그럴 수가 없게 만든다. 그녀가 관대한 귀부인이 아니었다면 벌써 징계를 받아 직을 잃게 되었거나 경찰서에 끌려갔을 법한 수위의 발언들이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면서 큰 소리로 천박하게 웃어대는 그가 싫다. 그녀를, 특히 그녀의 몸을 농담거리로 쓰는 것 같아 수치심과 모멸감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완전히 미워할 수가 없다. 죽일 듯이 싫어할 수가 없다. 개인 대 개인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이 단순히 천박한 양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트레이너로서 그가 보여준 모습들이 그런 평가에 장작을 넣었다. 그 장작에 붙어 타오르는 불길은, 심의를 뜻하는 파란색을 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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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 전 재팬컵에서 젠틸돈나는 승리했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승리였다. 심의 끝에 코차이 판정이 났는데, 문제는 직선에서 벌어진 몸싸움이었다. 안쪽 코스를 달리고 있던 젠틸돈나와 그 앞의 도주 우마무스메 비트 블랙, 그리고 바깥쪽에서 접근해온 지난 시즌의 삼관 우마무스메 오르페브르가 삼각형을 이루며 달리고 있었다. 비트 블랙과 후속의 둘 사이 거리가 좁아지는 만큼, 젠틸돈나와 오르페브르 사이를, 오프페브르와 비트 블랙을 잇는 선분도 짧아지고 있었다. 점점 좁혀들어와 작아지는 삼각형 속에 젠틸돈나의 진로가 끼어 막혀버릴 처지였다.

“앞의 경합은, 앞의 경합은......!”

젠틸돈나가 거기서 내린 선택은 정면돌파였다. 몸이 거의 맞닿을 듯한 거리를 열어젖히듯이 비집고 튀어나오기로 했다. 지난 시즌의 트리플 크라운 우마무스메를 상대로, 이번 시즌의 트리플 티아라 우마무스메가 달려들었다. 달려들었다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다. 과감하고, 언뜻 무모하고, 무엇보다 거칠었다. 거친 힘싸움, 러프 플레이. 처음 대결이 성사되는 그 순간부터 이런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지만, 동시에 역시나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은 어떻게 됐는가? 안쪽에서 무려......”

아마 해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혹은 승부에 지나치게 몰입했던 것인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3착 우마무스메의 이름을 우렁차게 외치고 나서도 조금 뒤에서야 그가 정정했다.

“젠틸돈나가 해냈습니다!”

경기의 여파로 생겨난 논쟁들은 일단 제쳐두고, 잠시 뒤 그가 지나가듯 했던 말에 대부분의 팬들이 공감했을 것이다.

“엄청난 레이스였다......”


심의 결과 젠틸돈나는 강착을 면했다. 그녀가 러프 플레이를 한 것은 맞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발단은 바깥쪽에서 진로를 몰아가듯 사행해온 오르페브르 쪽의 잘못이 더 크다는 의견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는데 팬들 사이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쪽에서는 젠틸돈나 측에서 고의로 충돌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3관 이후 고질적인 저평가에서 벗어났다지만 젠틸돈나보다 오르페브르의 팬들이 많은 것은 당연했고, 떠들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고의로 충돌했다'는 간단한 설명에 이끌리기 쉬웠다. 심의가 끝나 결과가 확정된 전광판을 바라보며 관중석이 소란스러워졌다.

"마음대로 이야기하라 하세요. 공식적으로 결과가 확정되면, 굴복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제가 더 강했고, 그 결과 승리했다. 단지 그것 뿐인걸요."

인터뷰에서 쏟아진 질문들에 젠틸돈나는 기본적으로 시큰둥했다. 소란스러운 관중석을 한 번 힐끗거린 뒤로는 별다른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녀 옆에 앉은 트레이너도, 관중석 대신 그녀의 모습을 힐끗거렸을 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이번 시즌 언론 응대는 거의 전적으로 젠틸돈나의 몫이었다. 트레이너는 조용히 그녀의 옆에 앉아 몇몇 부족한 것들을 보완하는 정도 역할만을 담당했다. 그야말로 귀부인의 충실한 종복이었고, 그에게 질문해봤자 영양가 없는 답변만 돌아온다는 걸 대다수 기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에게 수많은 질문이 쏟아지고 그걸 일관된 무관심으로 튕겨내는 식으로 인터뷰가 진행되다 끝날 법한 흐름이었다.

"트레이너 씨께서는 이번 몸싸움이 강착에 해당한다고 하는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게 강착이면 레이스가 성립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그랬으면 오르페브르도 강착이게요."

어쩌다 흘러들어온 질문에 트레이너가 잠시 생각하다 자세를 고쳐앉아 한 대답이었다. 뒷말이 앞에 앉은 기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어느 분의 의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재결위원께서 레이스를 잘 아셔서, 공정하게 심의해주신 게 다행이네요."

태도가 어쨌든 급발진에 가까운 언행이었다. 거의 항상 조용히 앉아있던 트레이너가 자신의 의견을 내세워 날을 세우는 상황이 젠틸돈나의 주의도 끌었다.

"당신."

"팬들이 인터넷 게시판에서 익명으로 할 법한 말을 의견이라고 내고 있잖아. 지금."

"팬들이 그랬나보죠. 그 정도 말도 못하나요?"

"더 좋은 얘깃거리가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려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트레이너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고집을 부리면 어찌할 바가 없다는 걸, 겪어온 그녀는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젠틸돈나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묘한 당혹감, 그리고 다소 물러나는 듯한 태도가 기자들의 눈에 보였다. 그런 눈들조차 자신에게 모으려는 듯 트레이너는 조금 더 언성을 높였다.

"작년의 트리플 크라운 우마무스메이며 현역 최강으로 이름이 높던 오르페브르와 올해의 트리플 티아라 우마무스메 젠틸돈나의 삼관 대결이라고 잔뜩 기대감을 부풀렸던 것도 당신들이지요. 그랬으면 그 대결의 승자인 젠틸돈나에게 초점을 두는 게 맞지 않나요? 하다못해 종반의 치열했던 경합이라도 말이죠."

젠틸돈나는 그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저 목소리 톤을 기억하고 있었다. 슈카상을 앞두고, 한 식당에서 지비에를 씹으면서 보였던 모습이다. 그때보다는 정중하지만, 여전히 공격적이다. 여전히 입도가 낮은 사포처럼 거칠었다. 꼿꼿하게 앉은 채 그는 여전히 기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푸아상과 개선문 원정을 치르고 돌아와서도 종반 타임 32초를 기록한 대단한 우마무스메를 반칙성 태클에 튕겨나가 패배한 불쌍한 피해자로 만드니 기쁘신가요? 그런 오르페브르에게 이길 길을 찾기 위해 분투한 젠틸돈나의 투지를 비열한 반칙으로 격하하니 기쁘신가요?"

"그런 게 아니라."

"1착 2착이 전부 강착이니 3착 우마무스메에게 가서 승리자 인터뷰를 하시면 될 일이지요?"

"자꾸 부풀려서 말씀하시는데요."

"그럼 뭔데? 이건 반칙이고 저건 반칙이 아니라고 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공식적인 결과는 인정하는데 이런 의견도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후자에 가깝겠네요."

"그럼 이런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냐? 누군지 모르겠지만 레이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라고."

젠틸돈나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옆자리에서 큰 소리로 열변을 토하는 자기 트레이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사람이 대체 왜 저러나 싶은 표정이었다. 몇몇 기자들도 그녀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만, 좋은 먹잇감을 찾았다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젠틸돈나에게 주목하고 있지 않았단 점이다.


"대체 왜 그런 식으로 말했어요? 그냥 내버려둬도 됐잖아요."

위닝 라이브를 마치고 대기실에 돌아와서야 젠틸돈나는 조용히 트레이너를 불렀다.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그녀의 눈을, 그는 그냥 똑바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진중해지면 항상 하는 행동이었다.

"제가 더 강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죠. 제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들대로 떠들게 두면 되는 거였어요. 당신이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었어요."

"너는 그 일 전까지 인코스를 얌전하게 달렸을 뿐이야. 그런 와중에 진로가 좁아져버렸고, 거기서 네 선택은 옳았어. 선택한 대로 완벽하게 실행했지. 그리고 이겼어."

"그래요. 그게 전부예요. 그 상황에서 잔불이 일든 어쩌든, 거기 기름을 끼얹을 이유가 있었냐는 말이예요."

"관중석의 소리들, 듣고 있었지?"

그의 말에 젠틸돈나가 잠시 멈췄다. 확실히 신경쓰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인터뷰든 대화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신경쓰고 예민한 구석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조용한 물과 같지만, 평온한 수면 위에 돌이 떨어진다면 파문이 인다. 돌이 계속해서 떨어진다면 그 파문이 일으킨 떨림이 멈추지 않게 된다. 비르시나가 그녀의 인생에 끼어들었을 때도 그랬고, 2관 달성 이전까지 그녀를 저평가하는 시선에도 약간은 그랬을 것이다. 트레이너는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눈을 마주치면서, 그 안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엄청난 레이스를 해서 신승을 거뒀지. 힘들었지만, 분명히 승리였잖아. 하지만 승리하고도, 그런 대단한 승리를 하고도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면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었을까?"

"그냥 승자로서 떳떳하게 고개를 치켜드는 거요."

"나는 그게 최대한 오명을 함께 짊어지거나 빼앗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너와 나는 계약을 했고, 그건 내가 네 생각과 달리는 모든 방식들에 어느 정도 이상 동의했다는 뜻이야. 네 선택은 곧 내 선택이고, 당연히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도 함께 해야 해."

젠틸돈나의 귀가 좌우로 몇 번 쫑긋거렸다. 그의 말에 놀란 것처럼도 보였고, 뭐라 대답해야할 지 망설이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녀의 꼬리가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시선을 살짝 피했다가, 장난스럽게 쏘아보면서 웃었다.

"누구보다 절 모욕하길 좋아하시면서, 이런 일에는 또 책임감을 발휘하시는 건가요?"

"내가 널 개인적으로 모욕준 적은 많았겠지만 공개적으로 망신준 적이 없었단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어. 나한테 무슨 취급을 받고 무슨 얘기를 듣든, 트레이너실을 나와 패덕에 섰다면, 주로를 달린다면 너는 여왕이고 귀부인이야. 그게 옳아."

"으음......"

그가 정말로 공개적으로 망신준 적이 없었는지 괜히 생각해보게 되는 젠틸돈나를 바라보면서, 트레이너는 악문 이와 함께 불편한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녀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네가 바깥에서 나쁜 소리를 듣는 게,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아."

"마치 보통의, 담당을 아끼는 트레이너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가볍게 몸을 돌려 눈을 피했다. 여전히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분노할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를 위해 나서주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그 사실보다도, 그가 그렇게 판단한 마음이 그녀의 마음을 조금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그건 내가 계집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거든."

"......방금 그 말만 없었다면요."

훈훈한 마음에 즉시 찬물을 끼얹는 최악의 발언에 젠틸돈나가 표정을 싹 굳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트레이너는 한 발짝 더 그녀에게 다가와 머리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머리를 가볍게 좌우로 쓰는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마주쳐오는 미소, 아까의 공격성과 거친 면모가 사라진 웃음에 그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무튼 말야. 남들은 좋을 대로 떠들 거고, 너를 모욕하고 싶어하겠지만. 네게 그런 말을 하려면 내 얼굴을 먼저 짓밟고 가야 할 거야."

"그런 걸로 제가 기뻐할 거라 생각하셨다면 엄청난 오산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입에서 나온 말과 달리, 그녀의 행동은 그다지 오산도 아닌 것처럼도 보였다. 조용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표정, 아니 서 있는 그녀의 몸의 자세부터가 아까보다는 편안해보였다. 원치 않는 상황에 처했을 때, 확실한 아군이 있다는 걸 확인하면 긴장이 풀어지니까.

"내가 이런 걸로 네가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고 생각했다면 엄청난 오산이라고 말하고 싶네."

"제가 이런 걸로 당신이 제가 그런 걸로 제가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고 생각했다고 생각했다면......"

마음이 편안해지자 시시한 농담까지 나와버린다. 답지 않게 말이 꼬여 잠시 말을 멈췄던 젠틸돈나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려 그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 으르렁대는 척을 했다.

"그럼 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는데요?"

그가 그녀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가슴팍을 쿡 찌르려고 했다. 긴장이 풀려 하마터면 경계하지 못하고 놓칠 뻔 했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팍 쳐내자 그가 벌컥 짜증을 냈다.

"내 말 듣긴 했냐? 네가 밖에서 욕 먹는게 싫고, 당연히 함께 책임을 지겠다고, 그것 뿐이야."

"그러니까, 그런 걸로 제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어떤 머저리가 상대 반응을 따져가면서 자기 행동을 정하냐? 우선 내 생각에 맞는 행동을 하고, 그 뒤에 반응을 따지지."

"......당신 말이 맞아요."

그 말에 그가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입만큼이나 크게 양 팔을 벌리면서, 이제서야 인정하는 거냐고 묻는 듯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기쁘지?"

"제 말은 그게......"

그녀도 이제 어떤 말이 맞다 하려 했는지 따지고 싶지 않았다. 따질 기분이 아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기분 나쁜 낯섦은 아니었다. 그야 낯익은 모습 쪽이 훨씬 기분 나쁘니까. 그런 모습은 지금 온데간데 없다. 여전히 넓고 관대한 품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조금만 앞으로 가면 닿을 정도 거리에서, 정중하게도 더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멈춰 서 있었다. 젠틸돈나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그의 반응을 따지기 전에, 그녀의 생각에 충실하게 행동했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조금 더 기울어졌다.

“기뻐요. 당신이 제 편이 되어주셔서요. 트레이너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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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너는 그날의 난동에 가까운 발언들로 1주일 자격정지라는 경고성 징계를 받았다. 졸지에 악역 영애라는 딱지가 붙어버린 젠틸돈나도 젠틸돈나지만, 그 막후에서 암약하는 암흑쇼군 정도의 이미지를 얻어버린 것은 덤이었다. 어떻게 보면 의도대로 된 것이고, 딸려온 결과들에 비하면 싼 값이었다.

“장난은 그만하고 제대로 답해주세요. 저로서도 어떻게든 당신을 초대하려 했지만 바쁜 사정이 있어서 G1 축승식에 불참하게 되었다고 전하는 게 편하니까요.”

“그럼 반드시 참석해야 하잖아?”

“그럼 반드시 참석하시겠다 말씀하셨다고 전할게요.”

확답을 얻은 젠틸돈나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에게 품은 복합적인 감정들이야 그냥 감정들이고, 함께 달려왔기에 1년 동안 4번이나 승리할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이견이 없다. 발로 까준 호두만으로 충분히 기뻐하는 그고, 어제도 까줬지만 역시 공개적으로 표창할 필요가 있다 여겼다. 실력이 있다면 확실히 우대하는 게 그녀로서 마음이 편안했으니까.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자니 트레이너가 대뜸 호통을 쳤다.

“그럼 당연히 참석하지! 네가 나 없었으면 어디 이렇게까지 이길 수 있었겠냐? 커리어 전패 우마무스메 데려다가 왕관 씌워준 게 난데 축승식의 주인공이 참석을 안할 수가 없잖아?”

“그래요. 당신 말씀이 다 맞아요. 어차피 안된다고 하셔도 강제로 데려가려고 했어요.”

“거절을 할 걸 그랬네~ w”

“당신이 싫어하는 게 별로 없는 줄은 알지만,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것도 좋아하실까요?”

싱긋 웃으며 건넨 말에 트레이너가 고개를 젖혀가며 웃었다. 큰 소리로 웃던 그가 책상 위에 뛰어 올라섰다. 꼭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쪼그려 앉아 그녀를 향해 혀를 낼름거렸다.

“나는 준비 됐어 ww 그러는 너는 날 개처럼 끌고갈 자신이 있고?”

“쉽지 않네요. 악역은 익숙해도 우마무스메로서의 평판이 있어서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해 달라고 w”

“아직 1주일 남았잖아요.”

말해놓고 보니 축승회가 열리는 주는 크리스마스가 껴있는 주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어떤 이벤트도 함께 챙긴 적 없는 둘이었지만, 어쩌면 이번 크리스마스는 조금 다르려나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의 감정 변화가 혼란스러우면서도, 젠틸돈나는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것보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그런 거라도 괜찮아요?”

“그런 거라니......네가 창피해하는 모습만큼 맛깔나는 반찬이 또 없는데.”

책상에서 내려와 선 트레이너가 몇 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것 치고는 별 미련이 없는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정도 끝났고, 그녀의 용건도 끝났으니 슬슬 칼퇴근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재킷을 옷걸이에서 빼려는데,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그의 등에 붙었다. 꾸욱, 하고 강조하듯 상체를 기대 누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어디 가요?”

“얘기 끝난 거 아냐? 집에 가려고 그러지.”

“아직 안 끝났어요.”

가만히 있으라는 듯 몇 번 더 꾹꾹 눌러, 젠틸돈나가 그를 옷걸이가 못질된 벽으로 가볍게 밀어붙였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폭력에 밀려 벽을 짚으면서도 트레이너는 놀란 기색도 없다. 이것도 재팬컵 이후 딸려온 결과물이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아 많이 예민해지면, 그녀는 그걸 어리광부리는 걸로 풀게 되었다. 어리광이나 애교 따위란 강함과 실력을 중시하는 그녀에게 절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약함을 가장하는 행동이니까.

“돈나돈나아.”

그럼에도 해버리고 만다. 원래라면 자신보다 한참은 약한 인간 남성에게, 약자가 강자에게 아양떨어 보호를 요구하듯이, 목소리 톤을 높여 교태를 부린다. 자신을 고릴라니 오니부인이니 경원시하지 않고, 철구처럼 될까봐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보호하고 지켜야할 대상인 것처럼 대해주는 그에게.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흡족해진 만큼 달라붙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마음도 조금은 흡족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흐흐 웃는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좀 더 돈나랑 놀아돈나.”

“젠틸돈나.”

“젠틸돈나 아니돈나! 돈나는 돈나돈나.”

그녀가 주먹으로 그의 어깨죽지를 콩콩 때렸다. 물론 세심하게 힘조절을 했다지만 누군가 보았다면 경악할 만한 장면이었다. 만의 하나라도 잘못되면 어깨죽지가 어떻게 될 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당사자인 트레이너는 그저 웃으면서 돌아설 뿐이다. 아예 가슴팍을 때리라는 듯 돌아설 뿐이었다. 실수가 있다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웃으며 뛰어드는 것도 모자라 아예 부채질을 한다.

“어허, 젠틸돈나.”

“도돈나!”

떨지도 움찔거리지도 않는다. 이게 연기인지 아닌지는 그녀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지만, 이쯤되면 진심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마치 계집, 아니 인간 여성을 다루는 듯한 태도에 일말의 의심도 사라져버린다. 마음이 의심과 경계로 조여지지 않으니 가벼워져서, 실수할까봐 긴장하지 않으니 오히려 조절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풀어진 마음이 그녀의 행동을 조금 더 대담하게 했다. 살짝 체중을 실어 기대면서, 그녀의 팔이 그의 허리를 빙 둘러 감쌌다.

“......아.”

하지 않으려 했던 행동이었다. 조금 두려웠다. 지금까지 굳이 꾹꾹 누르는 정도에서 멈췄던 것은, 혹시라도 그를 유골함 사이즈로 압축시켜버리지 않을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버렸다. 젠틸돈나는 완전히 그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건 그녀의 몸만이 아닌, 현상의 단순한 기술이 아닌, 이면의 심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표상이었다.

문득 다른 두려움이 그녀를 덮쳐왔다. 여기서 그가 몸을 뒤로 빼려 한다면, 그녀는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게 될 지도 모른단 것이. 허리에 팔을 빙 둘러 감은 그녀와 달리, 그의 팔이 아직도 아래로 늘어져 멈춰있는 게 보였다는 것이. 그럼에도 자신이 넘어온 선을 되돌아가 다시 똑바로 설 수 있을 지 100%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허그는 따뜻하지만 상대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그의 품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표정을 확인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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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직전의 인터미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