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롱한 감각 속에 묻혀있던 건 언젠가의 기억이었다.


‘———수 있지?’

‘넌 나를 너무 얕보고 있어, 항상 말이야.’


나보다 작은 키에 무뚝뚝한 얼굴. 그러나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따금 미소를 짓는 모습이 반짝거렸다. 마치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에 생명이 깃든 것처럼.


‘기다릴 거야, 언제까지고.’


말도 안 된다며 너를 비웃어도 진지하게 다짐하는 네 모습에 얼굴이 달아올라 이 감정을 모른 체 할려고, 얼굴을 숨길려고 심술을 부렸다. 그 때마다 너는 이렇게 말했었지.


‘그 까짓거, 해주겠어. 내가 못할 거 같아?’


그 모습이 이렇게 지금까지도 꿈 속에서 종종 나올 정도니, 새삼 내가 얼마나 네게 빠져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런 생각도 깨어나면 잊어버리게 될 테지만 상관 없다. 이 꿈을 꾸는 날이면 다시 한 번 알게 되니까.


눈앞의 네가 새끼 손가락을 걸기 위해 내게 손을 뻗고 나도 그 약속에 응하려는 순간.


꿈이 무너지고, 차가운 돌의 벽이 시야를 덮었다. 아치형의 공간이 있었음에도 나는 그 벽을 넘어가지 못하고 부딪쳐 넘어졌다.


꿈이 무너지고, 현실이 찾아왔다.


익숙한 풍경이 아닌 바다 너머 어딘가에 있는, 첨탑이 있는 거리의 풍경이 찾아왔다.


꿈이 무너지고, 현실이 찾아왔다.


“널 버리고 간 나를, 너는 아직도 기다려 줄까?”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두고, 낯선 땅에 홀로 선 나의 의지도 놔버렸다.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다. 어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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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볼리가의 일등성, 사실은 초신성?

-심볼리 家 “해외 원정 실패에 대한 책임 없어…”

-가문과는 상관없다, 이번 일은 시리우스의 독단?

-이딴게 더비마? 시리우스, G3에서 처참한 패배…


가문의 조치 아래에 은밀하게 귀국한 뒤, 본가에 들리지 않고 곧바로 트레센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휴대폰을 켜자, 화면에는 온갖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도배된 인터넷이 눈에 들어왔다.


“윽…!”


급히 전원을 끄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곳에도 내가 시선을 둘 만한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나를 따라오고 있었고, 도시 곳곳에 있는 빌딩 외벽에 설치된 전광판에서는 나의 해외 경기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명 저들은 별 대단하지도 않은 성적을 거둔 내게 관심이 없을 터라고, 이성은 그리 말했지만 내 머리와 몸은 그들의 거짓된 시선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무관심이라고 했던가. 내겐 너무나 딱 맞는 말이었다. 크든 작든, 나는 관심 속에서 살아왔으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쥐고 트레센 학원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몰려있었던 건지, 운전기사가 내게 5번은 말했을 때서야 학원에 도착했다는 걸 알았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느껴진 시선에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이대로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움직이지 않는 몸을 재촉해 걸음을 옮겼다.


기억이 나진 않았으나 어떻게든 몸을 움직였을 때는 어째서인지 그의 트레이너실 앞에 도착했다. 원정을 나갈 때 계약해지까지 하면서 싸웠는데 왜 이곳에 서있는 건가? 지금의 내겐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문앞까지 왔다. 어서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문고리에 손을 올렸으나, 손잡이를 돌리지 못했다. 과연 대차게 그를 거절한 나를 그 사람이 받아줄까?


떨리는 손을 붙잡아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목석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시간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쓰레기들이…!”


감정이 과하게 실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알고 지냈던 10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조차 듣지 못했던, 처음 듣는 분노가 서린 목소리. 무엇이 그를 이렇게 화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망설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문을 뚫고 흘러나왔다.


“트레이너!”

“윽, 시리우스? 언제 귀국한 거야? 아니, 그전에 왜 여길 온 거야?“


순간, 극도로 불안해진 마음이 자극이 되어 기어코 문 너머로 발을 내딛어 그를 불렀다. 아아, 결국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구나.


부서진 책상과 주먹에서 피가 흐르는 트레이너.


초췌한 몰골과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따라 눈물이 흐르는 나.


전혀 분위기가 없는 상황이지만 지금의 내게 어울리는 재회였다.

 

허나, 그와의 재회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만약 그도 나와의 재회를 바라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둘 모두가 만족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것이었겠지.


그가, 혹은 내가, 바라는 것이 어느 쪽이었던 간에 그의 눈동자는 당황과 읽지 못할 감정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꽤 잘 지낸 모양인 줄 알았는데… 나 때문에 아닌 것 같네.”

“왜 온 거야? 이미 계약은 해지 했을텐데, 한쪽이 일방적으로.”


차갑다.


차갑고 딱딱한 말투. 그것이 귀를 선명하게, 매섭게 때린다. 


“…다고.”

“뭐?“


그 뿐이었다면 내가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기다리겠다고, 네가 말했잖아!”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는데. 애초에 너는 내 말을 1도 듣지도 않고 나한테 계약 해지 서류를 들이밀고 도장이나 찍으라는 식으로 나왔으면서 기다리긴 뭘 기다려.”


밀어내는듯한 말투, 그렇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따스하고 부드럽다. 내가 몸을 던지면 안아줄 것만 같은 그런 색의 목소리다.


지긋이 바라보는, 반쯤 감긴 눈은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온 얼굴과 어울려 관심도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그 눈동자에 담긴 상냥함만 아니라면.


외적으로는 날 밀어내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나를 수용하고 있다. 어느 쪽이 진심일까.


“날 내칠거면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 자꾸 헷갈리잖아. 혹시 모른다고, 내가 기대하게 만들잖아… 나를, 괴롭게 만들잖아…”


시야가 뿌옇게 변하고 가장자리가 울렁인다. 그의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든 내게는 보이질 않으니 한결 낫다. 그렇지만 얼굴이 보이질 않으니 그 배는 더 괴롭다.


처참히 무너진 나를, 너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 날을 아직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이렇게 매달리게 만들어버린 그 날의 기억을 나처럼 간직하고 있을까?


“차라리 여지를 주지 말고 당장 내 앞에서 떠나가 줘… 너도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하란 말이야…!”

“아직도 내가 너한테 매여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건 큰 오산이야. 내가 못할 거 같아?”


눈물이 떨어지고 시야가 개인다. 떨궜던 고개를 들어 네 얼굴을 바라본다. 또 다시 꿈을 꾸는 걸까? 꿈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꿈이라면 넌 분명히 그 다음에 해주겠다고 말하겠지. 그런 건 듣고 싶지 않다. 내가 듣고 싶은 건,


“그 까짓거, 아무 것도 아니야. 네 말대로 해주겠어.”

“아…”

“내 행동 때문에 헷갈려? 그럼 분명히 말할게. 네 말대로 눈앞에서 사라져 준다고.“


시간이 멈춘것 같다. 되풀이 되는 것 같다. 입을 연 그 순간 속에 갇힌 듯이, 같은 말이 귀에 계속해서 맴돈다.


옷자락이라도 잡으려 손을 뻗지만 넌 잡히지 않는다. 내가 뻗은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내 뒤로, 문을 향해 움직인다.


“트레이너, 가지———,”

“…로열 오크상 3착, 축하해.”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허공을 바라본다. 아무도 없다. 남은 건 계속 흐르는 눈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얼마나 더 허공을 쳐다본 채로 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중간에 문이 열렸지만, 이곳에 남은 잔향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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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볼리 저택에 도착했다. 끝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내 방으로 가지 않고 정원으로 향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왔었던 장소. 아름드리나무, 지금은 거목으로 변해가는 나무가 있고, 원목 탁자와 의자가 놓여진 장소.


어째서 여길 왔을까, 에 대한 의문은 쉬웠다. 언제나 여길 왔으니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붉은 빛이 빠지는 선과 검푸른빛으로 변해가는 선이 섞인 채로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네가 먼저 트레이너가 된다면 기다릴 수 있냐니. 도대체 무슨 바보같은 소리를…”


원정 이후, 나는 중상에서 이기지 못했다.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오늘도 GIII 경기에서 졌다.


그런 주제에 누굴보고 기다리라는 걸까. 어렸을 때는 몰랐겠지. 자신이 이렇게까지 떨어질 거라고는.


어째서 그때 그런 말을 꺼냈었던가.


그는 하나에 집중을 잘하는 편이었으나 오랫동안 하나에 묶여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인내심은 평균보다 조금 아래. 그랬기에 그런 말을 꺼냈었다.


그런 주제에 승부욕은 강했고, 똑같이 승부욕이 강했던 나와 승부내기를 많이 했었다. 그래서 그는 얕보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나는 그를 놀리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이번엔 달라! 네가 얼마나 늦어도 난———’


원목 탁자 위에 엎어져 눈을 감는다.


“기다릴 거야.”


기억 속의 말을 끝맺는다.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나는 들려온 목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거야. 기다리고 있어.”

“트레이너.”

“난 네 트레이너가 아니지만 말이지. 역시 여기 올 줄 알고 있었어. 경기 잘 봤어.”


여전히 무표정으로 말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그리고 그 뒤에 들려온 말에 나지막이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중상에서 이기는 모습을 볼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설마했는데 그가 나를 비웃을 줄은 몰랐다. 이제껏 무시하면 무시했지, 비웃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난 이미 지는 별이야. 새로이 태어나는 신성을 어떤 수로 이겨? 그보다 내 앞에서 사라져 준다는 말, 거짓말이었어?”


대답은 없었다. 대신 무표정한 얼굴 위에 미소가 덧씌워졌다.


“못 하겠더라.”

“…거 봐. 내가 못할 거라고 했잖아.”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 말을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목소리가 떨리는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


“비웃으러 온 거면, 실컷 비웃어. 적어도 마지막은 조용하지 않았으면 하니까.”

“비웃지 않았어.”

“그럼 뭐하러 온 건데?”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이 올려졌다.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두 개의 칸 중에 하나만이 채워진 어떠한 서류.


“…이게 무슨 짓이야?”


내 손에는 볼펜이 쥐어졌다.


“못 기다리겠어. 네가 지고만 있는 걸 보니까 참을 수가 없었다.”


투박하고 커다란 남자의 손이 내 손 위에 포개어지고, 그 손에 이끌리는대로 손을 움직인다.


어떠한 서류의 빈 칸은 사라졌다. 두 칸 모두가 곡선덩어리로 채워졌다.


“그러니까, 네가 이길 수 있을 때까지야.”

“못 기다리겠다면서.”

“내가 못할 거 같아?”


용건을 끝낸 손은 곧바로 매정하게 떨어졌다. 나는 볼펜을 탁자 위에 그대로 놔두었다.


“아니.”

“그럼———”


빌어먹을 자식의 멱살을 잡아 이쪽으로 끌고 온다. 그리고 거리를 좁혀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를 잔디 위로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탄다.


“더 이상은 못 참아.”

”너…”


할 수 있냐는 눈이 나를 쳐다본다.


“내가 못할 거 같아? 천만에.”


너무 오래 기다렸을 뿐이야.




“여전히 잘난 듯한 상판으로, 날 얕보지 말란 말이야. 개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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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삼촌 생일 기념 괴문서

당일에 쓰기 시작했는데 현생이 바빠서 이제야 완성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