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님 앤 루비, 한가운데의 앰비벌런트에게 추월당합니다.”

두바이 메이단 경기장에서 열린 G1 경기, 두바이 시마 클래식에 출주한 14명의 우마무스메가 남은 거리 500미터 표식을 지나 최종직선에 접어들고 있었다. 일찌감치 백스트레치에서 사고가 나 완전히 뒤쳐진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선두부터 최후미까지 3마신 정도의 차이를 두고 밀집해 있었다.

뒤엉키듯 진행된 레이스 흐름은 경기 전 기대받던 우마무스메들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이리시 2000 기니를 우승하고 브리더스컵 터프까지 제패한 1번 인기 우마무스메 매지션은 마군에 완전히 가로막혀 있었다. 지난 경기까지 보여줬던 이름 그대로 마법같은 스퍼트를 전혀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2번 인기인 젠틸돈나는 어떤가 하면, 시종 인코스를 달려온 탓에 마군의 호위를 받는 입장처럼 되어버렸다. 귀부인의 행렬에야 어울리는 풍경이지만 1착을 노리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좌우로 활로를 찾아 돌아다녔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선두의 두 우마무스메들은 노련했고, 몸을 비집어 넣어 열어 젖힐 정도의 틈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바깥쪽 코스에 3번 인기, 재작년 두바이 시마 클래식 우승자 시뤼스 데 제글이 달리고 있었다.

“시뤼스 데 제글, 바깥쪽에서 불쑥 올라왔습니다.”

남은 거리 300미터,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려는지 그녀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순간적으로 선두권의 우마무스메들과 나란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흘기던 젠틸돈나의 눈에, 그 주행 탓에 순간적으로 비어버린 바깥쪽이 들어왔다. 젠틸돈나는 깊이 생각하기 전에 그 틈을 향해 몸을 들이밀었다.

“젠틸돈나, 앞이 트인 곳에 들어서려 합니다. 진로를 변경해야 했습니다.”

바깥으로 진로를 틀면서 생기는 순간적인 속도 변화라거나, 몸의 밸런스라거나, 거리 손해 따위의 계산서는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치웠다기보다는 아예 기록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승리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모두가 골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생겨버린 틈, 일말의 가능성이 육박해오는 마군에 닫히기 전에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녀 역시도 승리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고, 이기려면 그렇게 해야만 했다.

“시뤼스 데 제글, 젠틸돈나에게 추월당했습니다!”

그 판단이 정답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굳이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작은 틈을 지나 아웃코스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보였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은 문을 지난다고 했던가, 좁은 문을 지나자 시야가 넓게 트였다. 길이 열렸다. 마군을 뒤로하고 골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그녀도 모두와 같이 골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힘껏 박차고 튀어나가자 100미터 표식이 선두 집단의 우마무스메와 함께 스쳐 지나갔다.

“재팬컵 우승 우마무스메가 선두로 돌진합니다!”

50미터 표식이 찾아왔을 때는, 넓은 길을 지나던 모든 우마무스메들이 그녀의 등에 닿지 않게 되어버렸다.

“후속을 떨쳐내며, 젠틸돈나가 두바이 시마 클래식을 우승합니다!”

작년 4월 초 오카상에서 승리한 이후 G1 5연승. 해가 넘어간 3월 30일인 오늘까지 근 1년 동안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 패배를 잊어버린 듯한 귀부인은 가벼운 걸음으로 달리며 펜스 너머의 사람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 패배는 잊었지만 피로는 잊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조금 뒤늦게 손을 들어 웃어보였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미소였다. 승자치고는 억지로 짓는 듯한 위화감도 있는 웃음이었다.

“2410미터 레이스였으니, 네가 지금까지 달렸던 어느 거리보다도 길긴 했네 w”

얼마 뒤 펜스를 넘어 들어온 그녀의 트레이너가 얼굴을 힐끗 살피고 내린 평에도 그녀는 눈을 몇 번 굴릴 뿐이었다. ‘됐으니까’하고 짧게 대답한 뒤로는 초조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피다가 그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대기실로 가요.”

“많이 피곤해?”

“......더 이상 말하지 마요.”

그의 반응을 기다리기 싫다는 듯 먼저 돌아서서 나가던 젠틸돈나였지만, 몇 걸음 뒤에 멈춰서서 슬쩍 돌아보았다. 그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걸음을 뗐다가, 슬쩍 돌아보고, 뒤에 그가 있는 걸 보고 다시 걸었다. 부모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돌아보면서 걸음마에 나서는 불안한 어린아이같은 태도였다.


“......당신.”

대기실 문이 닫히고 한참이 지나서야 젠틸돈나는 그녀의 트레이너를 마주해 입을 열었다. 승리를 향한 집착과 승부의 열기가 싸늘하게 식어 미약한 한기까지 도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다. 말을 몇 번이나 고르고 있는지 입술이 움찔거렸다. 트레이너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시간이 이어지면서 젠틸돈나는 침을 한 번 삼켰다.

“가주님께서도 이번 결과를 기뻐하시겠죠. 이번 원정의 제안자셨으니.”

“기뻐하다 뿐이겠어. 벌써 집안이 뒤집어졌을 거야.”

“당신은 어때요? 당신도 기쁘신가요?”

“나?”

“네.”

별 걸 다 묻는다는 듯 트레이너는 턱을 들어 가볍게 웃었지만, 그다지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는지 젠틸돈나는 고개를 돌려 인상을 찌푸렸다.

“이 원정은 당신의 바람이기도 했으니까요.”

“그야 그렇지. 근데 승리가 기쁘지 않은 사람도 있나?”

“......제가, 당신의 바람을 이뤄드린 거라구요.”

뻐기는 투는 아니다. 자랑하는 투도 아니다. 프리스비를 물고 주인에게 돌아온 강아지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제대로 했다는 걸, 잘했다는 걸 확인받고 싶은 강아지. 국제 G1에서 막 승리한, 그것도 과감하고 빠른 판단과 강한 말각으로 강함을 과시하듯 승리한 귀부인에게 어울리는 말투도 눈빛도 아니었다. 아니지만 그게 지금 젠틸돈나가 고른 말이고 태도였다.

“그러니까, 포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젠틸돈나.”

“뭔가요.”

그의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어쩐지 불안하기만 했다.

“승리는 그 자체로 포상 아니야? 시험대를 통과하고 강함을 증명했다면 그 자체로 포상 아니야?”

“당신 말이......맞아요.”

정론이라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니라고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마지 못해 맞장구친 것에 가깝다. 작년 겨울 이후 그녀의 행동은 거의 이런 식이었다. 트레이너가 그녀의 편이라 좋다. 그가 함께 한다면 이긴다. 상대가 누구라도 문제 없다. 개선문 도전의 시금석이라고 가문과 함께 밀어붙인 탓에 마지 못해 선택한 두바이 원정에서도 이겼다.

그를 믿는다. 믿기 때문에 조금 더 거침이 없어진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칠 것이 생겨버린다. 자신이 생각보다 그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만큼, 오히려 전력으로 기대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그녀가 그를 믿고 기대는 만큼, 그가 그녀를 믿고 기댄다는 걸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문득 그가 떠날 수도 있겠단 가능성이 마음 속에서 제기된 이후로.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상을 원해요.”

이래서야 슈카상 직전까지 비르시나와 트레이너 사이를 의심하던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레이스를 하는 것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똑같은 것의 반복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그걸 납득하지 못한다. 오히려 같은 고민을 다시 하기 때문에, 이전처럼 순수하게 증명을 요구할 수가 없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걸 누구나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하면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혼자 번민하고 결론지으려 애썼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무언가 증거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 그런가.”

트레이너는 살짝 시선을 내리까는 그녀의 말에 미적지근하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온 그녀를 거절하지 않는다. 반 발짝 다가서서 조용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흡족해서인지 다른 무엇이 있는지 그녀는 모른다. 모른다는 게 그녀 최악의 문제였다. 말하자면 정보의 비대칭 상태다. 그가 보여준 모습이 지나치게 죽 끓듯이 변덕스러워서 명확한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정치적이고, 또 애매하다. 천박하고 고결한 양 극단을 왔다갔다하는 사람 상대로 고작 그런 평가밖에 할 수 없었다. 젠틸돈나는 다시 안개에 메아리를 바라며 요구했다.

“당신의 그, 그러니까......크고 굵은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그게, 엉망진창으로......”

그의 미적지근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젠틸돈나는 최대한 머리를 쥐어 짜냈다. 가능한 한 천박하게 요구해서 그를 경박하게 웃게 만들려고 애썼다. 여전히 그는 웃지 않았다.

“머리를 어떻게 해 달라고? 잘라 달라고?”

“아뇨. 그러니까......엉망진창으로 헝클어트려주기를, 바라는 돈나아......”

‘www’ 하는 웃음소리가 젠틸돈나의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경박하고 천박하게 꺽꺽대는 소리, 귀부인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천한 소녀로 영락해버린 그녀를 비웃는 듯한 흡족한 목소리를 생각했다. 머리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 속에서 기대했다. 이 정도면 그가 만족해 주었을 것이라고, 기뻐해줄 것이라 여기고 기대했다. 그는 웃지 않았다. 조용히 몸을 낮춰 그녀와 눈을 마주쳐왔다. 손이 그녀의 볼에 와 닿았다.

“젠틸돈나.”

“......돈나아.”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하면 돼.”

기대를 비웃는 듯한 평범한 반응이었다. 그녀의 기대마저 읽히고 있는 듯한 대화였다. 그런데 왜 그는 아직도 웃고 있지 않을까?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태도는 진중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었을까? 그의 손 안에서 젠틸돈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요?”

“왜냐니. 그게 보통 네가 하는 방식이니까.”

천천히 볼을 풀어주는 듯한 손길에 젠틸돈나는 눈을 감았다. 따뜻함이 양 볼을 타고 흘렀다. 그제서야 그녀의 마음에 기쁨이 찾아왔다. 골 지점을 통과하고 나서도 한참을 뒤쳐져 오지 않던 감정이었다. 목 아래를 울리며 그녀가 머리를 앞으로 굽혔다. 얼굴과 목 주변이 훈훈해지는 만큼 마음이 스르르 풀어져 기대듯 하니, 한 손이 올라와 가벼운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젠틸돈나.”

“......네.”

“그렇게까지 말을 고르지 않아도 돼. 뭐든지 내게 말해도 돼.”

“고마워요.”

고마운 것은 진짜였다. 하지만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안에서 우선순위가 역전되어버린 지금, 관계의 무게추는 완전히 기울었다. 힘의 평형이 깨져버렸다. 확신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 뭐든지 사양하지 않고 말해달란 말은 순수하게 믿기 어려운 것이다. 윗사람이 볶음밥을 골라버린 상황에, 아무거나 주문하라는 말에 선뜻 다른 메뉴를 고를 만한 아랫사람도 별로 없다. 오히려 시험처럼 여겨지게 된다. 뭐든지라는 말에 맞지 않게 신중하게 고르게 되어버린다. 아무거나라는 말이 도리어 함정이 되어버린다.

“젠틸돈나.”

“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나를 믿는다면, 아니, 믿지 않는대도 그렇게 해 줘.”

보통 눈을 보고 있으면 알게 된다. 사람의 마음과 기분, 진실됨이 보인다. 젠틸돈나도 그런 식으로 여러 사람을 읽어 왔다. 가끔 헛다리를 짚긴 했지만 그의 눈을 통해서도 읽어 왔다. 거짓이 느껴지진 않는다. 언제나처럼 올곧은 눈빛이었다. 그녀는 잠시 더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새끼손가락이 그녀의 눈 앞으로 올라왔다.

“약속하는 거지?”

“약속해요.”

젠틸돈나는 그를 믿었다. 80이나 90 정도. 다시 말해 100이 아니란 것이다. 남은 부분은 믿고 싶다는 마음으로 채우며 손가락을 걸었다. 이어진 손가락이 고리를 만드는 느낌에 그녀가 살짝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탓에, 그제서야 그가 미소지은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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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틸돈나와 그녀의 트레이너는 그 다음날 비행기로 즉시 귀국했다. 가문의 행정적 미스였는지 다른 무엇이 개입했는지 원정 내내 둘은 같은 방을 썼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

“이제 겨우 편안히 자겠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저랑 한 방에서 지낸 게 그렇게 불편했나요?”

“불편하긴 했지 w 침대에 선을 긋고 여기는 넘어오지 말라느니, 자기보다 절대 늦게 잠들지 말라느니 어찌나 속박을 하는지.”

젠틸돈나의 본가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둘 다 긴장이 좀 풀린 모양이었다. 여느 때의 관계로 돌아온 것처럼도 보였다. 젠틸돈나가 히죽거리는 그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그렇게 규칙을 정하지 않았으면 당신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을 테니끼요.”

“모른다면서 왜 그렇게 아는 것처럼 규칙을 정했대? w”

“당신 속이 뻔히 보이니까요.”

최근 그녀가 한 말들 중 가장 거짓말이었다. 그 거짓말에 똑같은 거짓말로 응대해주기로 했는지 그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래그래 w 나는 규칙을 어길 줄 모르는 신사니까, 아주 유효한 대응이었어.”

“그게 그렇게 되나요?”

“난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니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짓이기도 하지만 말야 w”

“그야 당신같은 사람들은 법이 없으면 살판이 나겠죠.”

“그래서 내가 너한테 손 댔냐고. 결과적으로.”

결과적으로 아무 일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불가항력적으로, 원정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약간의 어리광과 접촉이 있긴 했지만 일선을 넘는 일은 없었다. 불건전한 터치도 전혀 없었다. 그러니 그가 이토록 우쭐댈 수 있는 것이다. 조금 가증스럽지만 동시에 그가 자신의 직업에 발휘하는 프로정신이 고맙기도 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개인으로서의 그와 별개로, 트레이너로서의 그는 100% 믿을 만 했다.

“그래요. 모든 게 제 기우였네요.”

“기우였어, 기대였어? ww”

“기우라고 했어요. 트레이너 님.”

“정말 눈꼽만한 기대도 없었어?”

“......없었어요.”

“가차 없구만 w 나는 엄청나게 기대했는데 말이지 ww”

시트에 등을 묻듯이 기대면서 그가 편안하게 웃었다. 피곤하긴 했는지 슬슬 눈이 감기는 모양이었다.

“그건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대화의 분위기 때문인지, 편안한 웃음에 덩달아 안심이 됐는지 젠틸돈나도 가볍게 입꼬리를 웃었다. 대화가 멈추고 차가 도로를 가로지르는 조용한 주행음과 진동만이 남았을 때, 젠틸돈나도 어느새 그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슬슬 다음 레이스 계획을 짜자고 말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본가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학원에 돌아온 젠틸돈나 진영의 다음 레이스는 당연하게도 타카라즈카 기념이었다. 더 큰 목표인 개선문상 도전을 위한 첫 시험대로 두바이 원정을 통과했으니, 국내에서 일종의 상식처럼 통하는 두 번째 무대를 밟아볼 필요가 생긴 것이다. 해외 경험도 경험이지만, 국내의 다른 시니어급 우마무스메와 경쟁하는 경험을 쌓는 것도 좋다.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잠시 앉아 기다릴 것을 권한 트레이너의 말에 따라 소파에 앉아 있던 젠틸돈나의 귀가 쫑긋거렸다. 바깥 복도에서부터 들려오는 한 사람과 우마무스메 한 명의 발자국 소리였다.

“복귀 첫날부터 병주훈련인가요?”

“내가 요청했어. 슬슬 대면할 때도 된 것 같아서.”

“대면?”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트레이너실 문손잡이가 마구 절그럭거렸다. 잠긴 문을 어떻게든 열려는 것처럼 하는 난폭한 움직임 뒤, 복도에서 질색팔색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크를 해, 노크를!”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 뭐든지 기선제압이 중요한 거라고! 노크같은 걸 해서 상대 기를 살려주기라도 하란 거냐?”

“예의를 차리는 게 어떻게 기를 살려주는 거야.”

“해적선이 선전포고하는 거 봤냐고, 아앙? 바다에선 대포가 인사인 법이라고!”

“여긴 바다도 아니고 우린 해적선도 아니야.”

“아이, 아이, 맴! 오랴앗!”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난폭한 발길질로 트레이너실 문이 열렸다. 되는 대로 냅다 걷어찬 것치고는 얌전하게 문고리만 고장나 돌아간 것이 신기한 점이었다. 열린 사이로 선글라스를 끼고 뚜벅뚜벅 걸어들어온 것은 학원 저지를 입은 키 크고 당당한 체구의 회색머리 우마무스메였다. 머리에 쓴 헤드기어 옆쪽에 손을 대고 무언가 통신을 하는 것처럼 귀를 기울이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선글라스를 벗어 집어넣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요. 소녀 골드십, 지금 당도했사와요.”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온 주제에 트레이너와 젠틸돈나를 향해 다소곳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건네는 동안, 그녀의 뒤를 따라 여성 하나가 들어왔다. 어쩐지 굉장히 피곤해보이는 장발 여성이었다. 트레이너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미안미안. 이 녀석,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그런 녀석이라.”

“다 이해해. 우리 사이에 무슨.”

“너한테 한 말 아니야.”

어깨에 자연스럽게 턱을 올리고 사과를 받아들이는 골드십을 향해 여자는 인상을 굳혔다. 우리가 필요하긴 하냐는 듯 바라보는 젠틸돈나와 트레이너를 향해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튼 잘 부탁해. 마침 나 혼자서는 좀 벅차기도 했고.”

“진짜냐...... 친척한테 애 맡기는 부모같은 말이잖냐. 그거.”

젠틸돈나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골드십과 그녀의 트레이너에게 다가갔다. 조용히 팔짱을 끼고, 회색머리의 방문자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끼고 돌아본 골드십이 이를 드러내 웃었다.

“여여여, 고릴-돈나! 축승식 때 만나고 몇 년 만이지?”


골드십, 젠틸돈나와 같은 시기에 데뷔한 말하자면 동기. 트리플 크라운 노선에 도전한 터라 클래식급에서는 만날 일이 없었고, 젠틸돈나가 연도대표 우마무스메를 수상해버리는 바람에 조금 빛이 바래버린 감도 있지만 남긴 임팩트만큼은 그녀 이상인, 돌풍의 주인공이었다. 클래식 사츠키상과 킷카상을 승리하고 그 해에 아리마 기념에 출주해 우승해버린 파천황. 제멋대로인 성격 탓에 조타가 듣지 않는 배라는 평가도 받지만, 배라고 하면 그녀의 별명은 역시 황금의 불침함 쪽이 유명했다. 그리고 젠틸돈나에게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였다.

둘의 첫 만남은 굳이 따지면 최악이었다. 골드십의 말대로 축승식이 열리던 날이 둘의 첫 대면이었다. 그날따라 가문의 사무처리가 엉망이었고, 축승식의 주인공 중 하나인 트레이너에게 멀쩡한 방이 아니라 창고로 쓰던 1층의 구석진 방이 배정되어버렸었다. 집의 영애라는 사실도 잊고 얼른 달려들어가 문을 열었을 때였다.

“당신!”

“여, 젠틸돈나. 오늘도 귀엽네 w”

고용인들이 쓰는 온갖 잡동사니를 담은 귤 상자만이 유일한 집기인 방 구석에 던져 놓은 캐리어 위에 앉아 뜨개질을 하던 트레이너가 그녀를 맞이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캐리어 옆 귤상자에 골드십은 앉아있었다. 고요하게 눈을 감고, 손가락만을 움직여 루빅스 큐브를 맞추고 있었다.

“......저기, 그 우마무스메는?”

“몰라, 먼저 와 있었어. 아는 사람 아니야?”

“전혀요.”

그때는 골드십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헤드기어도 쓰고 있지 않았고, 격식 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무엇보다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 별 이상한 우마무스메도 다 있다 싶은 정도 느낌이었다. 남의 집까지 와서 뜨개질이나 하는 트레이너도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새삼스러운 정보도 아니었으니까. 그들의 대화를 듣고도 골드십은 아무 말 없이 큐브를 맞추다가 벌떡 일어나 소리 없는 스탭으로 샤샤샥 다가왔었다.

“당신이 젠틸돈나 님이시겠군요.”

“아, 예.”

정중한 인사에 젠틸돈나가 따라 인사하자, 그녀는 덕담인지 악담인지 모를 소리를 늘어놨었다.

“좋은 트레이너 님을 만나셨네요. 말하자면 행성들이 일렬로 늘어서는 듯한 느낌의.”

“네?”

“두 분의 이인삼각을 기대하겠습니다. 앞으로 더 크고 강한 시련이 있을 테니까요. 운명과도 같은 파도가 닥쳐왔을 때......”

큐브를 맞추던 손과 함께 말이 멈췄었다. 큐브를 젠틸돈나에게 내밀면서 그녀가 눈을 떴다. 어딘지 낯익은 보라색 눈이었다. 시종 조각상처럼 수평선을 그리던 그녀의 입이 올라간 것도 같았다.

“그 유대감도 시험받을 테니까요.”

“......”

6개의 면이 정렬된 루빅스 큐브를 젠틸돈나가 손 안에서 이리저리 돌려보는 동안, 골드십은 트레이너를 향해 합장을 하고 자리를 떴었다. 사실 그것만이었다면 그저 기이한 체험이었을 뿐, 나쁜 점은 없었을 테지만 트레이너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한참을 멀어져가는 우마무스메의 뒷모습을 살피던 그가 작은 소리로 한 말을 그녀의 귀가 놓치지 않았다.

“존나 늘씬한 거 봐. 쌔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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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너가 자신 이외의 이성에게 처음으로 천박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것만이었다면 그저 기분나쁜 체험이었을 뿐, 최악이라고까지 표현할 이유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 트레이너가 찾아와 ‘골드십이었어......’하고 울적해하기도 했고. 하지만 과거는 현재의 기분과 체험에 기반해 해석되는 경우가 잦고, 그에 비례해 첫 만남의 인상이 나빠져만 가고 있었다.

“당신, 제대로 할 마음이 없는 거군요?”

“아앙? 어쩔 수 없잖냐. 아무리 진지한 마음으로 기다려도 내가 출발 타이밍을 정하는 게 아닌 이상, 정확한 타이밍에 스타트할 수는 없는 거라고.”

쌔끈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골드십은 피지컬적으로 우수했다. 특별한 부상도 없고 발이 약한 것도 아니다. 옆에서 달려보면 땅을 박차는 박력을 느낄 수 있고, 거기서 상대의 힘도 대략적으로 유추된다. 골드십은 강하다. 젠틸돈나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헌데 그 안의 소프트웨어가 하자가 있다. 병주 때마다 스타트가 늦는다. 게이트가 열렸을 때 아주 기지개를 켜고 있던 적도 있었다. 젠틸돈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만 집중해도 제대로 된 타이밍을 잡을 수 있을 텐데. 이해할 수 없네요.”

골드십도 조금도 지지않고 인상을 구긴다. 이쪽은 이쪽대로 젠틸돈나를 이해하지 못한단 표정이었다.

“그러는 너는 풍기위원장이냐? 범생이냐? 네가 말하는 진지함이라는 건 매일 쳇바퀴 도는 일상을 그저 반복한다는 것이냐?”

“강하다는 건 흔들리지 않는단 거예요. 어떤 경우에도 관철하는 왕도가 있는 것이라고요.”

“왕도라는 게 왕 지루한 도돌이표같은 거냐고. 요즘은 왕도 재미 없으면 쫓겨나는 세상인데.”

“하아. 머리가 아프네요. 그러는 당신은 뭣때문에 그런 재미없는 레이스를 계속 하시나요?”

“레이스가 재미없단 게 아냐. 너처럼 달리는 게 재미가 없단 거지.”

“어떻게 달리는 게 재밌는 건지요?”

“자유롭게.”

젠틸돈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싸울 마음이 없는 상대와 훈련하는 것만큼 진빠지는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시간을 낭비하는 느낌이다. 그럴 능력이 있을 터인데도 발휘하지 않는 상대라면 모욕감까지 든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단 것이다.

“그렇게 자유롭고 싶으시면 레이스를 하는 게 아니라 다른......”

툭 던지고 돌아서서 트레이너에게 물과 수건이라도 받아 앉아 쉬려던 젠틸돈나가 말을 멈춰버렸다. 멀리 스탠드 쪽에서 분명 그녀의 주행을 지켜보고 있어야 할 트레이너가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것은 무릎 위에 태블릿을 켜놓고 스탠드에 앉은 골드십의 트레이너.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 내용이 들리진 않지만 분위기만 봐도 화기애애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그녀의 어깨에 함부로 턱을 올려두고 골드십이 키득키득 웃었다.

“제대로 할 마음이 없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 같은데?”

“......”

어깨 위에 올라 앉은 머리를 치울 생각도 못하고 트레이너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젠틸돈나의 화를 돋우려는 것처럼 골드십은 나불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럴 만도 하지.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네 트레이너는 굳이 따지면 나랑 비슷한 사람이거든.”

“......하? 당신이 뭘 안다고 함부로 떠들죠?”

“엥? 그럼 넌 뭘 안다고 화내는 거야?”

“그건......”

젠틸돈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막상 그를 설명하려고 하니 한 어구 정도로 정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는 천박한 양아치일까, 고결한 신사일까, 공격적인 컨트롤 프릭일까, 여자를 계집으로 낮춰부르는 가부장적인 남자일까, 전부 아닐 수도, 전부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이라고 하자니 골드십의 말을 인정하는 것도 같다. 골드십은 아예 혀까지 길게 빼서 낼름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맞으면 맞다, 틀리면 틀리다. 아니면 서술형으로 길게 설명하면 될 일이잖아? 왜 화만 내고 있지?”

“......적어도 자기 일에는 충실한 사람이예요. 당신과는 달라요. 진짜 프로라고요.”

“고릴돈나.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뭔가요?”

골드십이 몸을 곧게 펴 이를 드러내 웃었다. 아까와는 달리, 조금 악의가 묻은 듯한 웃음이었다. 젠틸돈나를 내려다보면서, 그녀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건 네가 저 녀석한테 일거리라는 거야.”

젠틸돈나의 손이 다른 어떤 감정적인 반응보다 빨리 골드십을 향해 날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가로막혀 멈춰버렸다. 가로막혀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손들을 바라보면서 골드십은 고개를 까딱여 웃었다.

“한 가지 말해줄까? 일감을 대하는 정도 마음가짐으로는 날 절대 못 이겨. 아니.”

그녀가 눈짓으로 뒤편의 자기 트레이너를 가리켰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뿌리쳐 자신을 노려보는 젠틸돈나의 시선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우리는 절대 못 이겨.”

“......하마터면 진지하게 들을 뻔 했네요. 이 광대가.”

“광대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으라고, 귀부인.”

골드십이 검지를 쭉 펴 자기 눈 밑에서부터 내려그어 눈물이 흐르는 듯한 모양을 연출했다.

“익살의 가면 아래 광대들은 항상 권력자들을 찔러왔으니까 말야.”

말을 마치고 홱 돌아서서 스탠드를 향해 총총 뛰어가는 골드십에게서는, 방금 전까지의 기세등등함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었다.

“트레삣삐! 오늘 병주훈련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도록 할까? 슬슬 낚시철이 다가오는 느낌인데 말이지!”

“......젠틸돈나.”

손사래를 치며 질색을 하는 골드십 트레이너를 뒤로 하고 젠틸돈나의 트레이너가 담당 앞에 와 섰다. 갈 곳 잃은 분노와 분함으로 얼굴이 상기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그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왜 그렇게 인상을 구기고 있어? 귀여운 얼굴 망가지게ㅡ”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팔이 홱 돌아갔다. 젠틸돈나가 머리 위에 올라오려는 그의 손을 쳐낸 다음이었다. 팔과 함께 그의 몸이 조금 돌아가버릴 정도로, 전에 없이 강한 임팩트였다. 트레이너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건 조금 아픈걸.”

“......”

젠틸돈나는 자신이 강하게 뿌리쳐버린 트레이너의 팔과, 골드십에게 질질 끌려 어딘가로 사라져가는 담당 트레이너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머릿속도 마음속도 복잡했다. 표정이 풀어지질 않았다. 무엇보다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녀가 멈춰있는 동안에도 타카라즈카 기념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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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