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나는 지도 모르고 아침이 밝아왔다. 젠틸돈나는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신경쓰였다. 이런저런 말로 그녀의 신경을 긁으려고 애썼던 골드십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녀의 담당 트레이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고 말고를 판단할 만큼 오래 지켜본 것은 아니지만, 병주 훈련 첫날부터 그녀의 트레이너를 붙들고 뭔가 떠들고 있었던 것이 짜증났다. 짜증나고 말고를 판단할 만큼 내용을 상세하게 들은 것도 아니긴 했지만, 내용과 상관 없이 그녀의 달리기를 지켜봐야 할 트레이너의 시선을 빼앗았다는 사실만으로 몹시 거슬렸다.

“그 여자는, 자기 담당의 달리기는 안중에도 없는 건가?”

무거운 몸을 씻고 나와 트레이너가 기다리고 있을 본관 건물까지 걸으며 젠틸돈나는 이를 갈았다. 중얼거리긴 했지만 분노의 원인을 인정하기 싫어 댄 핑계일 뿐,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골드십의 달리기가 안중에도 없는 건 젠틸돈나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골드십이 제대로 달릴 마음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럼 애초에 왜 병주를 하겠다고 설친 건지도 알 수 없다. 문득 이 훈련이 그녀의 트레이너 쪽에서 요청한 것이었단 점을 떠올렸다.

“그럼 그 사람은 왜 그쪽에 병주 훈련을 하자고 한 거지?”

그가 하는 행동엔 항상 의도가 있다. 문제는 그 의도가 뭐냐는 거다. 언제나처럼 그녀를 짜증나고 혼란스럽게 만드려는 것이었다면 대성공이다. 하지만 의미 없는 일정으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는 점에서는 트레이너 실격이다. 그녀로서는 그가 단지 시간을 낭비하기 위해 병주를 기획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트레이너가 아니니까. 그런 트레이너가 아니라고 믿으니까.

‘그건 네가 저 녀석에게 일거리라는 거야.’

“으으.”

그런데 왜 지금 광대의 헛소리라고 딱 잘라버렸던 그 말이 떠오르는지. 젠틸돈나는 슬슬 아파오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차피 곧 트레이너와 만날 텐데도 괜히 핸드폰을 꺼내  LANE을 열었다. 그와 연락한 대화창을 열어 내용을 쭉 올렸다. 슬라이드 두 번에 맨 처음 메시지에 닿을 만큼 대화창 스크롤은 짧았다. 그래, 알았어, 따위 단답으로, 전부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내용으로만 되어 있는 트레이너 쪽 말풍선들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 속의 광대가 다시 한 번 지껄였다.

‘그건 네가 저 녀석에게 일거리라는 거야.’

“아니야!”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꺼 주머니에 쑤셔넣고 젠틸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이를 세게 악물고 허공에다 말해도 반박이 되지 않는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행적들이 방금 말을 고스란히 반박하고 있었으므로. 자기 말과 마음에 고개를 젓는 짓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머리를 마구 저어 아프게 만들면서 젠틸돈나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광대의 모습이 일그러지면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광대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으라고, 귀부인.’

“일거리면 뭐 어떻다고? 어차피 그게 내가 바라는 거리감인데.”

괜히 발끈해서 그녀는 아무도 없는 복도 끝을 노려보았다. 트레이너실이 가까워오는 동안에도 그녀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중얼거렸고, 굳게 문 손잡이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잠긴 문을 억지로 열지 않으려 그녀는 세심하게 문고리를 잡아 돌려보았다. 잠겨있지 않았다. 트레이너실에 사람이 있으면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다시 말해 트레이너가 출근했음을 확인한 젠틸돈나는 두어 번 심호흡하고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섰다.


“당신한테 저는 그냥 일거리일 뿐인가요?”

“......뭐?”

그녀의 문이 열리는 것에 맞춰 일어나 인사를 건네려는 듯 왼손을 번쩍 들고 흔들려던 트레이너의 표정이 이상하게 뒤틀려버렸다. 왼쪽 아래로 20도 정도 꺾여 그녀를 올려보듯 하려던 껄렁껄렁한 고개가 의문으로 그대로 갸웃거렸다. 외국어로 된 인삿말을 들은 것 같은 그의 얼굴을 향해, 문을 꽉 닫으면서 젠틸돈나가 조금 더 소리를 높였다.

“당신한테 저는 그냥 일거리일 뿐이었냐고요!”

“......”

대답 대신 그녀의 얼굴과 몸을 한참 동안 살피며 자리에 풀썩 앉던 그가 갑자기 꺽꺽대고 웃기 시작했다.

“www”

“뭐가 그렇게 웃기죠?”

“아니 w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웃긴 ww”

큰 소리로 웃으며 그가 오른쪽 팔을 왼손 검지로 가리켰다. 목에 찬 보조기 끈에 의지해 명치께에 힘없이 늘어진 오른팔 깁스가 젠틸돈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에 맞춰 트레이너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높고 거칠어졌다.

“네가 일거리면 이건 산업재해인 ww”

“......제가 그랬단 말씀인가요?”

쾅, 하고 트레이너의 커다란 왼손바닥이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깁스를 가리키면서 사납게 으르렁댔다.

“어제 너한테 맞아서 부러졌다고 임마! 어쩔 거야? 아앙?”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야 어제 심란해서 트레이너의 팔을 전에 없이 조금 강하게 쳐내긴 했다. 팍,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그의 몸이 조금 돌아가버렸던 것도 기억이 나긴 한다. 그가 ‘조금 아프다’고, 얼굴을 찌푸렸던 것도 기억이 나긴 한다. 하지만 부러질 정도였냐고 하면 절대 아니다. 힘조절에 능한 그녀다. 이전에 그에게 일부러 고통을 줄 때도 부러트리진 않았었다.

“하아? 지금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냐?”

“그렇잖아요? 어제 병주 끝나고도 두 시간을 자율 트레이닝을 더 하고, 정리랑 퇴근 준비까지 깔끔하게 했으면서?”

“어이어이, 참고 있었던 게 당연하잖냐! 나는 트레이너니까!”

답답하다는 얼굴로 책상을 마구 때리면서 트레이너가 언성을 높였다. 젠틸돈나는 그녀대로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와중에 트레이너라 고통을 참았다고 틈새 어필을 하는 것도 수상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분노를 표출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해요.”

어쨌거나 그의 팔을 때린 건 그녀 잘못이 맞으니까. 정말 부러진 건지는 확신을 못하겠지만 그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에게 생각이 있을 것이고,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으니까. 순순히 귀와 꼬리를 내려버렸다. 트레이너는 그 모습을 눈동자만 올려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언성을 높였다.

“미안하다고 하면 끝나는 줄 알아? 너 때문에 트레이너 직무수행도 일상생활도 어려워졌다고!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일상에 불편이야 생겼겠지만 트레이너 직무수행이 어려워졌단 건 순 억지로 들렸다. 애초에 어제는 팔이 부러진 고통을 참고 일했다 말해놓고서 이제와서 이러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는 젠틸돈나의 트레이너다. 최강을 자처하는 그녀의 트레이너라면, 고통은 디뎌 올라서야 하는 장애물이지 가로막는 벽이어서는 안 된다. 머릿속이 복잡한 생각들로 끓어올랐다가, 한 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녀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제가 할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할 게요.”

그게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일단 무조건 맞춰주는 것. 그런 그녀를 그는 잠시 더 바라보다가 가볍게 혀를 차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며 책상을 두드렸다.

“이 녀석 ww 왜 이렇게 쉬운 ww”

“......”

“일거리 하니까 생각났는데, 그럼 밤일거리라도 되어줄 거냐고 ww”

젠틸돈나는 이를 악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필요하시다면요.”

“......아아.”

트레이너는 기뻐하는 건지 뭔지 모를 반응과 함께 의자를 반 바퀴 돌려버렸다. 창 밖을 바라보면서 히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까딱거렸다.

“뭐, 그래.”

젠틸돈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트레이너도 더 말하지 않았다. 창문도 문도 굳게 닫힌 둘만의 공간, 조용한 트레이너실에 적막이 흘렀다. 상쾌한 햇살에 걸맞지 않는 무거운 공기가 언제까지나 이어질 듯 하다가, 노크 소리와 함께 흩어져버렸다.

“젠틸돈나T, 있어? 들어간다?”

피곤한 듯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다시 아침 공기가 트레이너실에 들이쳤다. 어쩐지 얼굴이 살짝 탄 장발 여자와, 그녀가 이끄는 회색 장발의 우마무스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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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의욕 없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골드십은 오늘도 병주 훈련에 참여했다. 질질 끌려와서 그런 건지, 일정이 그래서 그런 건지, 아무튼 개근상은 타는 학생처럼 그라운드에 와서 몸을 풀고 달릴 준비를 한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히 출발이 늦어버린다.

젠틸돈나는 그런 그녀를 무시해버리기로 했다. 말이 병주지 혼자 달리는 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왕도적인 선행책에 따라 레이스에 임하는 젠틸돈나로서는 그 편이 차라리 낫다. 레이스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피하든 밀어내버리든 하고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면 그만이다. 그러면 다른 이들도 이긴다. 출발도 늦은 김에 뒤에서 설렁설렁 달릴 뿐인 회색머리 바보는 무시하면 된다.

“우호, 우호, 우호호!”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바로 옆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술을 바짝 오므려 고릴라같은 소리를 내면서 골드십이 그녀의 옆에 따라붙고 있었다. 이제 1코너를 지나고 있는 시점이다. 보통의 추입 우마무스메라면 여기까지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올라왔다는 건 그 바보같은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일까?

“추울 때는 드러밍! 간닷!”

“.......”

“우호홋! 우호호홋!”

“......적당히 하세요.”

귀까지 반대로 돌려가며 필사적으로 무시하던 젠틸돈나가 마침내 그녀를 째려봤을 때, 골드십은 양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기쁜 소리를 냈다.

“우호 ww”

골드십의 몸은 능수능란하게 코너를 돌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만 그대로 젠틸돈나를 향해 틀어졌다. 어딘지 기괴한 풍경이지만 젠틸돈나에게는 사소한 디테일일 뿐이다. 그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릴라 소리를 내가면서 도발을 일삼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만을 위해 이 훈련을 하는 듯한 골드십의 태도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런 부분은 골드십에게는 사소한 디테일일 뿐이다. 그녀의 웃음이 더욱 더 화사해졌다.

“어머. 드디어 이쪽을 봐 주었구나.”

“바라던 대로 해 드렸으니 제발 입 좀 다물고 진지하게 달려주시죠?”

“베에.”

골드십은 대답 대신 고개를 그대로 아래로 꺾으며 혀를 길게 뺐다. 그녀가 자주 선보이는 팬서비스 표정에 젠틸돈나는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폭력은 품격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천한 상대에게는 가끔 이런 게 유효하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조차 천한 것은 알지만, 그녀 주변에는 왜 이런 부류만 꼬이는 건지. 마음이 흐트러지는 사이 골드십은 천천히 속도를 올려 젠틸돈나를 앞질러가기 시작했다. 땅을 힘껏 박차며 골드십이 큰 소리로 외쳤다.

“걸려 들었어!”

‘이 타이밍에 승부를?’

빠른 타이밍에 스퍼트를 걸어 상대를 말려죽이고 자신은 유유히 승리를 거두는 방식이 골드십의 특기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이제 첫 코너를 지나자마자 승부를 거는 형태의 레이스는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 그런 게 성립할 리가 없다. 당연히 헛짓거리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젠틸돈나는 굳이 따라가지 않았다. 대도주를 대처하는 연습 정도로 생각하고 꿋꿋하게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쓰자, 아니나다를까 최종직선 부근에서 골드십이 천천히 실속하기 시작했다. 턱 아래에 닿을 정도로 혀를 길게 빼고 숨을 마구 몰아쉬고 있었다.

“......기름, 기름이 없다......”

서서히 침몰해가는 황금함을 뒤로 하고 젠틸돈나는 스퍼트를 가했다. 이런 바보같은 훈련은 그만두고 돌아가서 장기라도 두는 게 낫다 싶었다. 그녀가 쏜살같이 직선을 지나 골 지점을 통과하는 사이, 골드십은 아예 포기하고 최종직선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먼 발치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골드십의 트레이너가 달려와 답답해하며 가슴을 쳐댔다.

“아오, 쉽새끼야! 오늘은 제대로 뛰기로 했잖아!”

“트레이너 씨, 그런 말투는 아가씨로서는 어떨까 싶습니다만......”

“뭐, 쉽새끼야?”

지치고 슬픈 표정으로 반문하는 골드십을 무시하고 트레이너는 연신 걸쭉한 욕을 뽑아댔다. 그러자 마치 투혼을 주입받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뱃사람으로서는 합격점이지! 너도 가슴을 치는 걸 보니 고릴라단에 합류하기로 했구나?”

“언제 고릴라 벗어나서 사람 될래, 이 쉽새끼야!”

“우호! 우호호!”

한심한 듀오에게 힐끗 눈길을 줘 스쳐지나 젠틸돈나는 기다리고 있던 자신의 트레이너에게 다가와 섰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트랙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드십 트레이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도 보였다. 젠틸돈나가 몇 번 헛기침을 하자 그제서야 그가 눈길을 돌려 웃었다.

“타임도 좋고, 페이스 유지도 좋았어. 잘 달렸어.”

“당연한 일이죠.”

“너무 잘 달렸어.”

“그래요. 더 칭찬해도 좋아요.”

“지나치게 잘 달렸어.”

“그건 칭찬처럼 들리지 않네요.”

농담처럼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젠틸돈나의 머리 위에 그의 왼손이 올라왔다. 귀를 살포시 내리누르듯 머리 위를 전반적으로 쓰다듬는 동안, 그녀의 눈이 감기는 걸 확인하고 그는 웃음을 거둬 표정을 굳혔다. 그가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칭찬이 아니니까.”

“뭐라고요?”

“......별 것 아냐. 내가 신경쓸 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한 젠틸돈나에게 다시 싱긋 웃어보이며 그가 발치에서 물병을 둘 들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가서 쟤한테도 물 한 병 베풀어 줘. 바보같이 달렸으니 목이 마르겠지.”

“관대하기도 하셔라.”

“너만을 위한 특별한 물도 여러 병 있어 w”

“......제발 마지막에 한 마디씩 붙이는 것 좀 그만 두세요.”

낚아채듯 물병을 빼앗아 멀어지는 젠틸돈나의 뒷모습과, 여전히 팔짝팔짝 뛰는 골드십에게 힘들어하는 그녀의 트레이너를 바라보고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후아! 역시 열심히 달린 뒤에 마시는 물은 각별하구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고릴라?”

“......그래요. 힘내서 달리다니 장하네요. 고루 우라라.”

“으히히.”

골드십이 물병을 쭉 비워 바닥에 던져버리자 그녀의 트레이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걸 주워들었다. 히죽거리며 아예 잔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눕자, 트레이너는 젠틸돈나 쪽을 돌아보면서 울먹이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애를 담당했어야 했는데......”

젠틸돈나는 골드십의 트레이너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둘 사이의 조용한 교감을 방해하려는 듯 곧 골드십이 떼쓰는 것처럼 앵앵대는 소리가 바닥에서 울려나왔다.

“야, 포기하라고~. 자루에 담기던 그 순간부터 네 커리어와 운명은 결정난 거니까.”

“알아. 아는데 나는 그런 상상도 못 해보냐?”

“고루고루별의 법률은 그런 불경한 상상에 벌금을 매기느니라~.”

“벌금 낼 테니까 지금은 상상하게 냅둬.”

젠틸돈나에게 미련이 남는 것처럼 골드십 트레이너는 몇 바퀴나 그녀의 주위를 돌며 이리저리 마체를 확인했다. 그 골드십의 옆에 있어서 몰랐지만 그녀가 생각보다 키가 컸다. 감탄하는 소리와 한숨 소리를 여러 번 흘리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젠틸돈나와 마주치는 그녀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어쩜 이렇게 얌전할까. 귀부인이라더니 별명 그대로네.”

“귀가 그 귀가 아니야, 트레이너.”

“저 새끼는 별명이 배면서 가만히 정박해있는 꼬라지를 못 보는데.”

“뭐? 게이트 심사부터 다시 받자고?”

골드십 트레이너가 몸을 가볍게 떨었다. 진짜로 정박해있으면 더 큰 곤란을 당한다. 전부 다 농담이었다고 굽신거리며 헤헤 웃는 그녀를 보고 바닥에 드러누운 골드십도 따라 웃었다.

“역시 너도 날 만나고 인생이 좀 즐거워졌지?”

“응, 그럼그럼. 여기 얼마나 더 정박해 계실 건가요, 골-든 불침함 선생님?”

“뭐, 가볍게 40일 정도 머무를까 생각 중인데.”

“예. 편안히 계시다 오세요. 저는 다음 해도를 그리고 있을 테니까, 적당히 하고 선장실로 와라.”

“아이아이.”

천천히 멀어지는 골드십 트레이너의 뒷모습을 젠틸돈나는 고개만 살짝 돌려 바라보았다. 상상이라고 하니, 괜히 그녀가 자신을 담당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었다.

“젠틀한 분이네요.”

“젠틀은 무슨. 젠틸한 사람이지.”

자리에 누워 잠이라도 청하려는 듯 골드십은 편안히 눈을 감고 젠틸돈나의 말을 가볍게 일축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마음에 드는 말이었는지 혼자 히죽대다가,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저래봬도 뜨겁게 활활 타오를 자리를 찾아다니는 놈이라고. 괜히 불침함의 선장님이겠어?”

“그런가요.”

“저 녀석도 그렇지만 나도 저 녀석을 만나고 인생이 좀 더 즐거워졌거든......”

“트레이너 분은 별로 즐거워보이지 않던데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내가 그렇게 믿으니까.”

“대체 무슨 근거로요?”

뻔뻔한 말에 젠틸돈나는 기가 차서 팔짱을 껴버렸다. 골드십의 대답이 상상이 가는 것처럼 미리 끊어버리듯 덧붙였다.

“어차피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거겠지만요.”

“잘 알잖아.”

입술을 푸르르 떨어가면서 골드십은 편안하게 웃었다.

“내가 믿고 싶으니까 그렇게 믿는 거야. 다른 근거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근거도 없이 맹목적으로 말이죠.”

“근거가 없다고는 안 했거든.”

짧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눈을 떠 젠틸돈나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안에서 이글거리는 듯한 시선이었다. 젠틸돈나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믿고 싶다는 결론으로 끌어온 근거겠죠.”

“날 단순한 광대로 믿고 싶은 너처럼 말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거겠죠.”

“뭐, 그래...... 아무튼 믿고 싶다는 마음은 중요하단 말이지.”

어느새 40일이 지났는지 골드십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잔디를 털어내고 몸을 좌우로 움직여 풀어준 그녀가 기지개를 켰다. 헤드기어를 고쳐 쓴 그녀가 젠틸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그녀 뒤편의, 그녀의 트레이너를 향해서.

“천 가지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고 싶지 않다면 증거가 아니게 되거든.”

“그만큼 확고한 증거가 아니었나보죠.”

“그게 확고한지 아닌지 결정하는 것도 눈이 아니란 말야, 고릴라. 마음으로 느끼는 거라고.”

“시인이 따로 없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젠틸돈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더 해보라는 듯 골드십에게 몸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디 더 해 보시죠? 네 자신이 되어라, 감정에 충실해라,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뭐 이런 말들. 약자들을 얼러줄 때 쓰는 말들이요.”

“뭐, 눈에 보이는 건 실제로 다가 아니야.”

검지로 과장되게 입꼬리를 당겨올려 웃는 골드십, 그녀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트레이너까지를 바라보서야 젠틸돈나의 인상이 구겨졌다.

“또 저 사람을 물고 늘어지나요? 당신이 대체 뭘 안다고 그러는 거죠?”

“저런저런.”

키득키득 웃으면서 골드십이 젠틸돈나의 이마에 살짝 머리를 부딪혔다.

“진정해.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에 좀 솔직해져 봐.”

약자들을 얼러주는 말이 그대로 돌아와 얼굴을 붉히는 젠틸돈나에게서 몸을 떼 머리 뒤에 양 손을 맞물려 허공에 눕듯이 하면서 골드십은 길게 하품하는 소리를 냈다. 자신의 트레이너가 기다리고 있을 본관 출입구를 향해 발을 떼면서 그녀가 중얼댔다.

“나도 매 순간순간 내 자신에게 솔직하게 살고 있단 말이지.”

“짐승처럼 말이죠.”

“그래. 짐승처럼 말야. 나를 즐겁게 해준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고.”

벌써 골드십은 젠틸돈나를 스쳐 지나가, 어느새 뒷머리와 그 위에 얹힌 양 손만이 젠틸돈나의 눈에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아까보다 확연하게 차분해진 소리의 톤으로, 그녀의 표정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니었다. 슬쩍, 자신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젠틸돈나의 트레이너 쪽으로 입만 올려 웃으면서 골드십이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나도 우마무스메거든.”

“......툴툴대면서도 훈련에 나오는 이유는 그거?”

“스스로 좀 생각하고 그래라. 뇌근육도 단련 안하면 풀어진다고.”

느긋한 페이스로, 수평선 너머로 나아가는 배처럼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젠틸돈나는 대화를 곱씹었다. 황금의 배가 사라진 수평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거기 떠 있는 건 또 다른 금색의 부표. 짝다리를 짚고 슬슬 뿌리부터 다시 염색해야 하는 금발을 긁적이고 있는 그녀의 트레이너. 젠틸돈나는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작은 소리로 물어보았다.

“당신도 그런가요?”

솔직하지만 들리지는 않는 소리였다. 그러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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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

하루 일과가 끝나고 슬슬 칼퇴근할 준비를 하는 트레이너를 젠틸돈나가 불러세웠다. 호기심과 그의 기분 사이에서 저울질해 신중하게 고른 질문이 그녀의 입술을 떠났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죠? 확실하게, 정확하게 말해 주세요.”

“어째서?”

“당신을 믿고 싶으니까요.”

“흐.”

그가 가볍게 웃었다. 소리가 되지 못한 웃음이 목을 울리지도 못하고 새어 나왔다. 꼭 탄식하는 것 같았다.

“난 누가 날 못 믿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 그걸 아니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그가 눈을 감고, 천천히 앞머리를 손으로 잡아 뒤로 넘겼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가 뭔가 깊이 고민하는 것처럼 천천히, 뒤통수까지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심호흡을 했다. 책상 위에 잠시 가방을 올려두고 그 옆에 걸터앉았다. 

“날 믿고 싶으면, 더더욱 그런 걸 물어보면 안되는데.”

“숨길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뭐. 알았어. 궁금한 점을 말해.”

“골드십 씨와 계속해서 병주 일정을 잡은 이유가 뭔가요?”

“가장 큰 적이 될 거고, 제일 마음에 안 들어서.”

“골드십 씨의 트레이너 분과는 아무 관계가 없나요?”

“딱히 없지.”

“그럼 어제는 왜 그랬나요? 제 트레이닝도 보지 않을 만큼 중요한 얘기를 하고 계신 것 같던데.”

트레이너는 그 말에 젠틸돈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불안과 불만으로 떨리는 커다란 눈동자를 살피고 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피식 웃어버릴 만큼 여유를 찾은 모양이었다.

“아니, 걔가 지 담당 욕을 하더라고.”

“그래서 당신도 같이 욕했나요?”

“아니. 그냥 듣고 웃었어. 네 칭찬도 좀 할까 싶었는데 그만 뒀지.”

“무슨 칭찬이요?”

“그, 있잖냐.”

그의 시선이 뱀처럼 젠틸돈나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미끈하게 기어다니는 듯한 눈길에 젠틸돈나가 소름이 끼쳐 팔로 상체를 가리며 짜증을 냈다.

“성칭찬은 칭찬이 아닙니다......”

“그래서 안했다고 ww”

“......하.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네요. 내 자신이 바보 같아요.”

“......그러게.”

자괴감에 석연치 않아하는 젠틸돈나와는 별개로 트레이너는 어쩐지 편안해보이는 표정으로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기색을 캐치한 그녀가 가볍게 몸을 부딪혀오며 웃었다.

“확실히 알았어요. 당신은 여자한테 껄떡거리는 양아치가 아니란 걸요.”

“......어이어이 w”

“이상하게도 저한테만 그런다는 사실도요.”

“정말 학습이 빠른걸 w”

“그러면서도 실제로 손을 대지는 않았죠.”

“뭐......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젠틸돈나가 어느새 그를 슬금슬금 벽에 밀어붙인 다음이었다. 꾹꾹 몸을 붙여 어리광을 부리면서, 퇴로를 차단하고 눈을 마주쳐왔다. 싱긋 웃는 얼굴에서 고개를 돌리는 트레이너를 향해 그녀가 차분하게 물었다.

“그 사정을 알고 싶은 거예요. 트레이너 씨.”

“어이어이 w 사정을 알고 싶다니ㅡ”

“진지하게 말씀해 주셔야 할 거예요.”

여전히 싱긋 웃는 얼굴로 그를 더 벽에 바짝 밀어붙여 말을 끊어버렸다. 젠틸돈나는 그를 향해 가볍게 볼을 부풀려 토라진 척을 했다.

“저기, 나 환자니까 조금만 공간을ㅡ”

“그만.”

이미 어리광의 단계를 살짝 넘어선 압박에 슬금슬금 불편한 표정으로 여전히 퇴로를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꿈틀거리는 트레이너를 젠틸돈나가 단호하게 멈춰세웠다.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벽에 가볍게 눌러 붙이면서 물었다.

“왜 그랬을까요? 슬슬 제대로 결론짓고 싶거든요. 나한테만 거칠게 대하고, 온갖 수치심을 안겨주고, 하지만 실제로는 선을 넘지는 않고 오히려 신사적으로 대하는 이유가 뭔지. 때때로 튀어나오는 공격적인 발언들은 뭔지. 당신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말예요.”

“그게 날 믿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당연하죠. 확고한 증거를 원해요.”

“......아직 부족했구나.”

“그래요. 아직 부족해요. 당신이 말해준 수많은 것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난 흔들리고 있다고요.”

서서히 얼굴에서 다시 웃음기가 사라지는 트레이너와 마찬가지로, 젠틸돈나 역시 조금 절박한 얼굴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결단을 내야할 자리라 여겼다. 나름의 승부처로 변해 있었다. 골드십이나 그녀의 트레이너에게, 아니 앞으로 나타나는 많은 상대들에게 하나하나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결판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트레이너는 복잡한 얼굴로 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약간 체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덮어놓고 믿는 건?”

“있을 수 없어요.”

“내가 그냥 덮어놓고 믿으라고 명령하고 지시한다면?”

젠틸돈나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그를 막는 손을 떼지는 않았다. 조금 슬픈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지 말아달라고, 자신에게 증거를 달라고 눈빛으로 요구했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줄 수 있는 증거는 없어.”

“왜 그랬는지 말해주면 되는 거잖아요?”

“내가 아무리 세세하게 말해줘도, 어차피 너는 못 믿어.”

“왜 그렇게 단정지어요?”

“왜냐면......”

그가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 고기를 씹을 때 보였던 것처럼, 까드득거리는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세게 악물었다가,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면전에 대고 외쳤다.

“네가 그것밖에 안 되는 계집이고, 그게 내 마음에 존나게 안 들어서 그렇다! 됐어?”

젠틸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이런 식으로 소리치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녀에게 벽에 몰린 상황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더 악에 받쳐서 포효하듯 하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떼 버렸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홱 밀쳐 떼어버리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하란 거냐? 꼬박 일 년 반을 날 믿으라고 가르쳤는데 그거 하나를 못하고 있으면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더 해?”

“당신이 왜 그랬는지, 그러니까, 그 부분만 조금, 어떻게, 말씀을......”

“해, 주면, 네가, 믿겠냐고!”

깁스를 찬 손으로 냅다 캐비넷을 후려치자 요란한 금속음이 메아리치면서 문이 벌컥 열려버렸다. 서류 몇 장과, 알람시계처럼 생긴 물건 하나가 안에서 굴러 떨어졌다. 시계가 캐비넷 안에 왜 있는지 젠틸돈나로서는 의문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그가 몹시 화가 났다는 사실에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어떤 종류의 위해를 가할 까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와의 관계가 완전히 어긋나버릴 가능성이 그녀를 굳어버리게 했다. 기세가 완전히 꺾이게 했다.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그 중에서 그녀는 항변이라는 것을 일단 지워버렸다. 천천히 귀를 늘어트리고 한 발짝 물러나는 그녀를 보고 그는 팔까지 떨릴 정도로 치민 분노를 삭이다가 손을 휘휘 저었다.

“조신하게 내 지시에만 따르면 돼. 알아?”

“......그럴게요. 주제넘게 굴어서 미안해요.”

완전히 풀이 죽어서 작게 대답하는 젠틸돈나를 바라보면서, 트레이너는 시계를 집어들어 캐비넷에 다시 돌려두었다. 잠시 한숨을 쉬며 시계를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을 때, 그녀는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젠틸돈나.”

“......네.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이기게 만들 거야.”

“......믿어요. 믿고 있을 게요.”

천천히 그녀가 나가고 조심스럽게 문이 닫혔다. 그는 얼굴을 감싸쥐고 한참을 거기 서 있었다.

“길이 너무 잘 들어 버렸구나.”

굳어 서서 고장난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던 그가 책상에 오른팔 깁스를 세게 내리쳤다.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쾅쾅 내리찍었다. 깁스가 부서져 뜯겨나갈 때까지.

그리고 젠틸돈나는 문 바깥에 서서 내리치는 소리들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의 심기를 몹시 거슬렀다는 두려움, 그리고 조금은 예기했던 배신감이 그녀의 마음을 물들이고 있었다.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말을 고르지 말고 뭐든 얘기해 달라고, 그렇게 약속까지 해놓고 막상 얘기하니 화를 내는 그에게 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믿는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믿을 수 있을까? 실망과 의문을 먹고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강한 마음이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작은 균열이 생긴 댐처럼, 그녀의 볼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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