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나지 않는다. 기운이 없다. 젠틸돈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리라. 어울리지 않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침 준비를 하고 트랙으로 체단실로 나간다. 지금까지 단련해오면서 여러 가지 무게추들을 들어봤지만 지금 자신의 몸처럼 무거운 것도 없었다.

트레이너는 말이 없어졌다. 젠틸돈나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은 뒤로, 아예 일 이외의 말은 꺼내지 않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 역시도 그에게 말을 걸기 껄끄러웠다. 물어본다고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고, 대화가 즐거울 것 같지도 않다. 골드십이 말하고 그녀가 우려했던 대로, 정말로 일거리를 대하는 태도가 되어버렸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당신도요.”

그러면서도 완전히 사무적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일을 하면서 동료의 눈치를 보는 경우야 있지만 이 정도까지 줄곧 의식하지는 않는다. 살피고, 조심하고, 피한다. 더 어색하고 답답하다. 차라리 냉정한 비즈니스 관계인 편이 나을 정도로 마음이 불편했다. 일과를 마치고 서로 더듬더듬 인사를 주고 받고 나면, 먼저 트레이너실에서 나가시라고 예의를 차리면서도 선뜻 나가지는 않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피곤할 텐데, 가서 쉬어.”

“......당신은, 돌아가지 않으시나요?”

“할 일이 있어.”

그가 야근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단 걸 계약하고 처음 알았다. 젠틸돈나는 책상에 얼굴을 감싸쥐고 앉아 무언가 생각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소파에 가 앉아버렸다. 한동안을 그를 쳐다보았다. 복잡미묘한 눈빛을 보내는 이외 무슨 일을 하려고 앉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관계의 저울이 그를 향해 심하게 기울어 있다는 것을 그도 알 것이다.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무언가 고치려고 한다면, 나서는 건 그가 되어야 한다. 그녀는 그걸 상기시켜 주려 했다. 아직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이 판단하고 나서주는 걸 기다리고 있다고. 자신이 흔들리면 당신이 잡아주지 않았냐고, 그 때처럼, 이번에도 그래줄 것을,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고 있다고, 시선을 보냈다.

“젠틸돈나.”

“네.”

“할 말 있어?”

“......없어요.”

“그러니......”

그의 손에, 노트북 화면에, 책에 가리워 보이지 않기라도 하는 걸까. 그러면 묻지라도 말 것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기대하게 만들고는 침묵해버린다. 지금 이 모습이 젠틸돈나답지 않은 것처럼, 트레이너 역시 그답지 않은 짓을 하고 있었다. 삐걱거리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지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인식했지만, 고치려고 첫 발을 떼지는 않는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젠틸돈나는 대답 없는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왔다. 내일도 오늘처럼 무거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억지로라도 쉬어야 했다. 아무리 무겁더라도 헤쳐나가면 될 일이다. 이런 일상에 붙어있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승리를 향한 열망 때문이었다. 젠틸돈나의 내면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리잡고 타오르는 승부욕, 근성, 최강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억척스럽게 상황을 견디게 만들었다.

그리고 트레이너의 존재가 주는 불편한 희망이 있다. 지금 어떻든 그는 그녀에게 트리플 티아라와 재팬컵, 두바이 시마 클래식까지 안겨준 사람이다. 그와 계약하고 G1 5개를 내리 이겼다. 그가 있으면 아무튼 이긴다. 그 기억이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이다. 그 뒤로 패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사이가 이렇게 어색한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나요?”

작은 소리로 닫힌 문에 대신 질문해본다. 문에 붙은 명패가 대답해줄 리는 없었다. 여러모로, 질문하는 쪽도 대답하는 쪽도 잘못하고 있었다. 머뭇머뭇 젠틸돈나는 기숙사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젠틸돈나.”

트레이너의 목소리에 젠틸돈나의 귀가 쫑긋거렸다. 뒤로 기울어지려는 귀의 움직임을 가리려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가 부르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뭔가 말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이 그 때일 거란 생각이 들자 피곤함이 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완전히 몸을 돌리지 않은 건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네.”

“내일은 휴식일로 하자. 하루 정도 쉬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그건.”

착각일지도 모른단 생각은 있었다. 물어보고 확인하기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서 또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도 쉰다는 뜻이죠?”

“그래.”

“그럼, 저번처럼 식사라도 하러 가는 건가요?”

트레이너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녀의 말에 놀란 것 같았다. 착각이었나보다. 서로 껄끄럽고 지쳐 있는 상황, 떨어져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괜한 말을 했다고 마음이 시끄러워지는데, 그가 얼굴을 손으로 감싸쥐어 가렸다. 손바닥 틈으로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코와 목에서 규칙적으로 새는 바람 소리, 그러니까 웃음소리였다.

“아아, 진짜 귀엽네......”

“......”

상황이 상황이라 비웃는 것처럼도 들렸다. 동시에 기뻤다. 젠틸돈나는 여전히 고개만 그를 향해 돌리고 있었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부분, 그녀의 어깨 아래에서, 양 손가락이 부지런히 서로를 건드리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던 손을 치우자 거짓말처럼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지 말고, 아예 지금 먹으러 갈까?”

“......으음.”

젠틸돈나는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려 그에게 뒷모습만 보여준 채로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준비해서 나와. 나도 퇴근준비 하고 나올 테니까. 1시간 뒤에 보자.”

문이 다시 등 뒤에서 닫혔다. 젠틸돈나는 묘하게 몸을 씻어내리는 기쁨에 귀를 쫑긋거리다가, 불에 덴 것 같은 표정으로 문을 돌아보았다.

“무슨 준비?”



50분 뒤 젠틸돈나는 쭈뼛쭈뼛 본관 앞에 서서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꼬고 있었다. 기숙사에 돌아가 샤워를 하고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말한 ‘준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뭘 어떻게 하란 건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흘려들을 말은 아니라 느꼈다. 어깨라인이 드러나는 화사한 상의를 입은 건 그런 ‘준비’의 일환이었고, 아래로 검은 바지를 입은 건 혹시라도 지나치게 의식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기껏 편안한 플랫 슈즈를 신어놓고 발레리나처럼 한 발가락으로 짝다리를 짚고 서서 땅을 초조하게 긁고 있는데, 저쪽에서 달려오는 회색 머리의 우마무스메가 있었다.

“늦었어! 지각하겠어!”

식빵을 물고 허겁지겁 달려오던 그 우마무스메는, 모퉁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젠틸돈나에게로 멈출 기색 없이, 마치 들이받을 것처럼 육박해왔다. 바로 직전에야 그녀를 알아보고 감속했지만 때는 늦었다. 두 우마무스메의 어깨가 부딪혔다. 젠틸돈나의 발이 질질 끌리는 소리와 함께 뒤로 밀려났다.

“아으! 뭐야, 고릴라 너였냐?”

충돌의 여파로 땅에 떨어진 식빵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은 그 우마무스메가 팔짱을 끼고 젠틸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를 알아본 젠틸돈나의 표정도 구겨졌다.

“대체 어딜 보고 다니시는 건가요. 골드십.”

“앞인 게 당연하잖냐.”

“하아. 교내에서 뛰면 안되는 것도 잊으셨나요?”

“알았어, 범생이. 그치만 선장님이 부르는데 빨리 안가면 널판지행이란 말야.”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골드십이 그녀 옆쪽으로 걸어 지나가려 했다.

“분명 너희 금발이랑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급하게 취소되었다나.”

“저녁 약속? 저랑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답니다.”

“......사람 대하는 방식이 거치네, 금발 녀석.”

젠틸돈나의 복장을 위아래로 살피던 골드십이 아니꼽다는 듯 중얼거린 말에 젠틸돈나가 의문을 표하자 골드십이 인상을 찌푸렸다. 침이라도 뱉을 것 같았다. 트레이너가 자신에게 다음 일정을 얘기하지 않았단 사실은 일단 접어두고 젠틸돈나는 최대한 그를 감싸려 했다.

“담당 우마무스메의 권유가 우선이라고 판단한 거겠죠.”

“아니, 보통은 선약이 우선이라고 판단할 거라 생각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요.”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우선시된 당사자가 되니 마냥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밀 수가 없게 된다. 스스로가 교활하고 치사하단 생각은 들지만, 한편으로는 미묘한 우월감에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젠틸돈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골드십은 그녀 옆에서 물러나질 않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뭐야? 선약이 있고 그게 우선이지만, 네가 먼저라고 떼라도 썼냐?”

“저도 방금 알았어요. 억지 부리지 마세요.”

“그럼 그 금발 녀석이 쓰레기인 거잖냐. 약속을 한 시간 전에 취소한다니.”

“당신이 할 말인가요? 훈련 일정을 그라운드에서 즉석으로 바꾸는 주제에?”

“아앙? 나는 상관 없잖냐. 그거 피장파장의 오류라고.”

따지듯 젠틸돈나에게 고개를 들이밀던 골드십의 몸이 갑자기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쫙 펴졌다. 어느새 그녀의 등 뒤에 꼿꼿하게 편 손바닥을 들어올리는 키 크고 머리 긴 여자가 서 있었다. 기분이 많이 안 좋아보이는 골드십의 트레이너가 다시 한 번 담당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상관 있어. 쉽새끼야.”

“아파! 아프다고, 트레삣삐! 정말 이러기야? 네 편 들어주고 있는 거잖아?”

“말대답! 월권!”

“알았어! 그만! 그만 때려! 진짜로 아프다고!”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등을 내리쳐 골드십을 새우처럼 구부러트린 트레이너가 이번엔 젠틸돈나를 내려다보았다. 매일 밤 대체 뭘 하는지 눈 아래가 어두운 피곤한 인상이면서도, 눈만큼은 피로를 느끼지 않는지 칼날같았다. 젠틸돈나에게도 금방이라도 손을 댈 것 같은 매서운 눈길을 보내던 것도 잠깐이고, 놀라울 정도로 서글서글한 미소를 연출해보였다. 방금 본 눈빛이 거짓말이라 착각할 정도의 빠른 변화였다.

“난 정말 괜찮아. 젠틸돈나. 이 녀석이 뭐라고 말한 것도 신경쓰지 마.”

젠틸돈나는 그 미소에 여유 있고 당당한 미소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니까요.”

“~~ 군에 대해 나쁘게 말한 것도, 대신 사과 전해줘.”

“......~~ 군?”

젠틸돈나가 팔짱을 꼈다. 잠시 뒤에야 ~~ 라는 이름이 어디서 나왔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계약서 맨 하단, 서명하는 자리에 쓰여있던 몇 글자 중 뒷부분, 그러니까 이름이었다.

“응, ~~ 군. 몰랐는데 고등학교 동창이더라고. 솔직히 이런 데서 다시 만난다니 신기하잖아?”

“......”

젠틸돈나의 눈썹 각도가 좁아진다. 머릿속에 두 가지 가설이 세워지고 있었다. 몰랐는데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러면서도 이름을 서스럼없이 입에 올릴 만한 사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진술들을 융화하기 위한 가설이었다. 첫 번째, 트레이너가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했다. 두 번째, 저 여자가 멋대로 부르고 있다. 어느 쪽이든 젠틸돈나에게는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다.

“갑자기 약속을 취소해도 나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으니까. ~~ 군에게 무슨 생각이 있었겠지.”

“제 트레이너를 그렇게 허물없이 부르지 마시죠?”

“너한테는 트레이너지만 나한테는 친구니까 상관 없지 않을까?”

“요요! 꽤 하잖냐! 트레삐삐! 몰아붙여!”

졸지에 기싸움이 되어버린 자리, 옆에서 골드십이 박수를 쳐 가며 자기 트레이너를 응원했다. 서로를 향해 대놓고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금도 물러나지는 않고 있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세요. 골드십 트레이너 씨.”

“구분하고 있어. 젠틸돈나. 너처럼 말이야.”

배가 고프다며 담당을 끌고 떠나버리기 전, 골드십 트레이너가 마지막으로 싱긋 웃었다.

“너와 ~~ 군은 공적인 관계. 나랑 ~~ 군은 사적인 관계니까 말야.”

여유있는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골드십 트레이너와, 어째선지 혀를 쭉 내려 조롱하는 제스처를 보내는 그녀의 담당을 노려보면서 젠틸돈나는 이를 악물었다. 일방적으로 쏘이기만 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귀를 한계까지 눕히고 분노를 삭이려 해도 잘 되지 않아서, 어느새 뒤에 와서 선 트레이너에게 잔뜩 화난 얼굴을 보여주고 말았다.

“오래 기다렸어?”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요? 골드십 트레이너 씨와?”

“실제로 아무 사이도 아니야.”

“저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요? ~~ 군이라고, 그렇게 친하게 부르던데요?”

“~~ 군?”

트레이너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아,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랬지, 그랬지. 그게 그렇게 질투났어?”

“질투가 아니예요.”

젠틸돈나가 한층 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의 말을 신뢰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니까 하는 말이예요.”

“그냥 호칭일 뿐이잖아. 젠틸돈나.”

“당신은!”

젠틸돈나가 더 참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외쳤다.

“내가 지나가는 말로 종복이라고 했다고 한 달도 넘게 삐져있던 사람이라고요!”

“......이것 참. 말이 많으면 문제가 되네.”

허리에 손을 얹고 시선을 피해 뭔가 생각하던 그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그녀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그럼 너도 ~~ 군이라고 부르지 그래. 이 참에.”

그의 손을 탁, 쳐내면서 젠틸돈나가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어림도 없네요.”

“참~나 w 어쩌잔 건지 w”

그녀에게 팔을 밀린 기세로 그대로 돌아서면서 트레이너가 웃었다. 걷기 시작한 그의 뒤를 말없이 쫓으면서 젠틸돈나는 그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정말로 어쩌잔 걸까? 자신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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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틸돈나.”

“뭔가요.”

“아직 삐졌어?”

“삐지지 않았어요.”

“그럼, 출발하기 전에 퀴즈를 하나 낼까?”

안전벨트를 매면서, 트레이너는 조수석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젠틸돈나에게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오늘 나는 너와 뭘 먹으러 가자고 할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지 말고. 우리가 그래도 긴 시간 함께 했는데, 너도 날 어느 정도 파악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젠틸돈나는 그 말에 잠시 조용해졌다. 입술 앞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살짝 위를 올려다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말대로였다. 그래도 일년 반을 함께 했다. 그는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그가 무엇을 할지 예상되는 부분도 있었다. 주로 나쁜 쪽이었지만. 한껏 머리를 굴린 젠틸돈나가 그를 살짝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런 자리에선 절 당황시키려고 은근히 괜찮은 곳을 고르죠?”

“음음. 시작이 좋은데.”

“먹으면서 뭔가 저에게 교훈을 주려고 할 테고요.”

“잘 알잖아.”

“그런 거라면, 저는 모르고 당신은 아는 오마카세 스시야를 하나쯤 잡아두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아닌가요?”

맞장구에 어느새 의기양양해져서 회심의 답변을 보내자, 그가 제법이라는 듯 활짝 웃어보였다.

“오오, 주방장한테 다 맡기듯이 나한테 맡겨라, 이런 건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후후.”

웃는 얼굴을 보자 따라 웃게 된다. 눈을 바라보고 웃으면서, 트레이너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깨를 살짝 풀고 기지개를 켜는 그에게 젠틸돈나가 물었다.

“어떤가요? 맞췄나요?”

“바로 공개하면 재미가 없을 텐데?”

“바로 공개한 다음, 천천히 따라가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뭐, 그런가.”

그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내비게이션에 주소 하나를 찍었다. 적당히 예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히라가나 이름이 떠올랐다. 보여주듯이 하면서 트레이너가 젠틸돈나의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 올렸다.

“정답이야. 꽤 하잖냐.”

“우후후.”

앞머리로 장난치는 그의 손가락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젠틸돈나가 웃었다. 제대로 맞췄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얼마만에 느끼는 가벼운 기분인지 몰랐다.

“생각보다 제가 당신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그렇다니까.”

“아니면, 이것 역시도 당신의 설계라고 해야 할까요?”

“내가 설계했고, 네가 그걸 맞췄지. 맞출 거라 믿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면서 그가 조금 더 손을 대담하게 얼굴 쪽으로 움직였다. 볼을 건드리는 감각에 젠틸돈나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가, 게슴츠레 노려보듯이 했다.

“어제도 그렇게 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미안. 머리에 피가 좀 몰렸었어.”

“제가 그럴 만한 말을 했던 기억은 없는데......”

“이기는 데 크게 중요하지 않잖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젠틸돈나는 볼을 매만지는 그의 손으로 시선을 내려, 엄지를 발견하고 가볍게 물었다. 그녀 기준의 가볍게가 조금 아팠는지 손을 뒤로 살짝 빼는 그에게 토라진 시선을 보냈다.

“제겐 중요한 문제였어요.”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싶더라고. 날 용서해줄래?”

“용서고 뭐고 없지만요......”

아프게 했던 곳을 달래주려는 것처럼 그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 하는 거 봐서요.”


사실 볼 것도 없었다. 부드럽게 앞으로 출발하는 차의 진동부터가 어쩐지 마음을 들뜨게 했다. 세심하게 생각해서 준비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신호에 조금 걸리긴 했지만 막힘없이 도착하자, 적당히 프라이빗하게 나눠진 룸으로 안내받았다. 전채 격으로 녹아 없어질 것처럼 부드러운 사시미를 입 안에 굴리듯 씹으면서 젠틸돈나는 간만에 행복해했다. 맛있다. 이 시간도 공간도 맛있다. 입 안의 온도도 입 밖의 온도도 맛있었다.

“젠틸돈나.”

“예. 말씀하세요.”

“아까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한 게 있었어.”

“뭔가요.”

괜한 말에 좋은 흐름이 흔들려버릴 것 같았다. 조금 불안하게 눈동자를 들어올리자 트레이너가 머리를 가볍게 긁적였다.

“너한테 교훈을 주려고 불러온 건 아니었어.”

“아?”

“애초에 선생질이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라 생각해. 나는.”

잔을 살짝 기울여 입 안을 축이는 동안, 그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짜 선생이었다면, 널 이렇게까지 짓밟을 필요도 없었겠지.”

“짓밟는다?”

“어찌나 네 기를 죽여놨는지 말야.”

“안 그런데요?”

일단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찔리는 구석이 많았다. 해가 바뀌고 시니어 시즌 내내 젠틸돈나가 한 일은 그의 눈치를 보고,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 애쓴 것 뿐이었다. 자기 의견을 강하게 세우려다가도, 그가 맞불을 놓듯이 반응하면 움츠러들곤 했다. 젠틸돈나는 괜히 젓가락으로 참치 대뱃살이 앉아있던 흔적이 남은 접시를 깨작였다.

“......당신이 저와 함께하는 게, 그렇게 당연하지가 않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왜?”

“작년까지야 제가 당신을 몇 번이나 해고했지만요. 이제 시니어 시즌이고, 당신은 몰라도 제 평판은 별로 좋지 않아요. 악덕영애 소리나 듣고 있는 상황에서, 당신이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마음 먹는다면, 저는 그대로 은퇴하게 될 지도 모르죠.”

그러는 사이 접시들이 지나가고, 스시가 담긴 접시들이 올라왔다. 성게가 아낌없이 뿌려지다시피 한 접시를 내려다보면서, 젠틸돈나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어요. 당신은 크게 계약 상태에 연연해하지 않으니까. 확실히 아는 건 당신이 절 계집 취급하고 희롱하고, 제가 어리광을 부리는 걸 좋아한다는 것.”

“이것 참.”

연어알 군함을 앞에 두고도 식욕이 떨어지는지, 그는 접시를 젠틸돈나 쪽으로 밀어주었다.

“넌 너무 복잡해.”

“당신이 할 말인가요?”

“단순하게 생각해. 내가 왜 널 희롱하고, 네가 어리광부리는 걸 좋아하는지. 거긴 무슨 의도도 목적도 없어.”

그가 혀를 찼다. 그녀가 자기 음식을 받아 입에 넣는걸 바라보면서, 그녀 입 안에서 터지는 연어알이라도 상상하는 것처럼 웃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그녀가 음식을 삼키는 것까지 확인하고 말했다.

“그냥 꼴리니까 희롱하는 거고, 귀여우니까 좋아하는 거야.”

젠틸돈나가 몇 번 기침을 했다. 황급히 물을 마시고 그를 노려보았다.

“입에 뭐가 들어있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냥 그런 거야. 네가 하는 생각의 절반 이상은, 내가 하지 않는 생각들이야.”

“그럼 대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요?”

그는 대답 대신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걸로 충분했는지 젠틸돈나는 식탁보 아래로 몸을 숨겨버렸다. 단지 이번에는 그가 꺽꺽대고 웃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편안하게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기댔다. 눈을 마주치면서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널 이기게 만들 거야. 역사에 남을 우마무스메로 만들 거야.”

눈매가 누그러지면서도 젠틸돈나는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을 쏘아보냈다.

“그렇게 말해도 몸을 들진 않을 거예요.”

“그 편이 나한테도 편해.”



“맛있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별 말씀을.”

다시 차에 올라타면서, 젠틸돈나는 재킷을 요구했다. 어깨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았다고 자책하면서 그의 재킷으로 몸을 최대한 덮고 안전벨트를 맸다. 그 꼴을 보고 그가 피식 웃어버렸다.

“뭐, 그렇게 경계하지 말고.”

“이쪽 보지 말아요.”

“예, 예. 다음 퀴즈 나갑니다.”

그가 내비게이션의 검색창을 띄워두고 입으로 북소리를 넀다.

“다음으로 나는 뭘 하자고 할까?”

“솔직히 생각나는 건 몇 군데 있지만, 오답이길 바라고 있어요.”

“오, 흥미진진한데.”

“그치만 말하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을 거죠?”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야 그런 거겠지.”

“......그럼 빨리 출발해요. 통금시간 전에 돌아가야 하니까.”

또 장난스럽게 그녀에게 기울어지려는 그의 몸을 밀어내면서 젠틸돈나가 내비게이션 화면을 쿡 찔렀다. 중앙 트레센 학원을 입력하는 그녀의 머리 위에 그의 손이 올라왔다.

“그렇게 쓰다듬어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요.”

“아니. 이건 포상이야.”

“웬?”

“이번에도 맞췄거든.”

젠틸돈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튀어나온 말은 조금 달랐다.

“진짜로요? 이게 끝이라고요?”

“응. 끝인데.”

“......그럴 리가 없어.”

몇 번이나 고개를 저으면서 젠틸돈나는 자신이 입력한 내용을 전부 지우고 자리에 푹 기대 앉아버렸다.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려버리고 팔짱을 꼈다. 얼굴이 후끈거리는지 창문을 여는 그녀를 아랑곳않고 트레이너는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서서히 멀어지는 스시야, 그리고 서서히 이정표에서 보이는 중앙 트레센 학원의 이름을 발견하고 젠틸돈나가 뭐가 중얼거렸다.

“들리게 말을 해.”

“됐어요.”

“......이것 참. 젠틸돈나야.”

그녀쪽 창문을 멋대로 닫아버리면서 트레이너가 불렀다. 창에 비친 자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은지 다시 고개를 돌려오는 그녀에게 그가 물었다.

“다음 퀴즈야.”

“뭔가요.”

“너 나 좋아하냐?”

안전벨트가 튀어오를 만큼 젠틸돈나가 놀라 몸을 벌컥거렸다. 미간에 주름을 잡아가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거든요? 트레이너로서의 당신은 존중하지만, 당신 개인은 여전히 혐오스러워요.”

“그러니까, 넌 참 복잡하다는 거야.”

사거리에 멈춰서서 그가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딱 나눠서 이쪽은 존중하고 저쪽은 싫어하고. 그러면서도 이렇게 대하면 일거리로 여긴다고 싫어하고. 저렇게 대하면 껄떡거린다고 싫어하고."

"......"

서로 말없이 이 길에서 저 길로 걸어가는 보행자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둘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보행자들의 무리가 슬슬 차도를 벗어나고 신호가 곧 바뀔 무렵, 트레이너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할까. 트레이너로서 말하는데, 우리 집에 갈래?"

젠틸돈나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안전벨트를 손으로 꼭 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