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사거리에서 우회전하고, 몇 번 더 좁아진 도로를 돌아 도착한 곳은 한 허름한 맨션의 주차장이었다. 허름하다, 고 한 것은 여기까지 자신을 데려온 트레이너의 입장을 생각한 신중한 발언이었다. 칙칙한 페인트칠이 떨어지려고 부분부분 일어난 곳이 보이는 외벽을 보자마자 생각난 단어였다. 계단마다 고정해둔 색바랜 금속제 논슬립이 불안하게 들려 있는 외부 계단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어디선가 살림살이가 쏟아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트레이너는 204호라고 되어 있는 문을 열었다. 젠틸돈나는 이런 종류의 실내에 들어선 적이 없기에 예민한 우마무스메의 후각에 어떤 타격이 올지 조금 신경쓰였다. 그에게 실례가 되지 않아야 했다. 각오를 굳히고 보이지 않게 심호흡을 한 뒤 따라 들어왔다. 좁아터진 신발장 뒤로 철제 문이 불편한 소리와 함께 힘있게 닫혔다. 약간 곰팡이같은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녀가 각오했던 만큼 거슬리진 않았다. 은은하게 디퓨저 향이 났다.

“여기가 당신 집인가요?”

“뭐, 집이었지. 지금은 기숙사에 사니까.”

꽤 개방적인 집이라 느꼈다. 신발장과 집을 구분하는 있으나 마나 한 낮은 턱을 올라 양 옆의 화장실과 세탁실을 지나면 바로 거실 겸 침실이 나타나는 구조였다. 그 작은 공간을 무슨 새로 발견한 유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젠틸돈나는 몇 번이나 초조하게 두리번거렸다. 한쪽 구석에 있는 책상에는 그가 수험생이던 시절 썼을 너절한 트레이너 수험서와 노트 몇 권이 놓여 있었고, 옆의 작은 책꽂이에도 그랬다. 책꽂이 층마다 반 쯤 쓴 헤어왁스나 로션 따위가 알뜰하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단 좀 앉을래? 의자가 딱 두 개 뿐이지만.”

“나머지 하나는 어디 있죠?”

책상 옆 행어에 재킷을 걸어두고 나무 의자를 가리키는 트레이너의 질문에 되묻자 그는 손가락을 침대쪽으로 돌렸다.

“딱딱한 게 좋으면 이거. 푹신한 게 좋으면 저거.”

“침대는 의자가 아닌데요.”

“그렇게 생각하면 누워 있어도 돼.”

“의자에 앉을 게요.”

“좋아.”

책상에서 다섯 걸음 정도 걸어 냉장고에 도착한 트레이너가 문을 톡톡 쳤다.

“마실 거? 뭔가 필요해?”

“뭐가 있는지부터 묻는 게 적당하겠네요.”

“뭐든지 다 있어.”

그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은 젠틸돈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거든.”

“그러면 물로 할게요.”

“아아, 이런 w”

최대한 배려한 그녀의 말에 그는 킥킥 웃으며 행어로 돌아가 재킷을 챙겼다.

“딱 없는 걸 골랐네. 잠깐만 있어.”

“같이 가요.”

“이 녀석 나랑 잠시도 떨어지기 싫은 w”

곧바로 젠틸돈나가 의자에 딱 굳어버렸다. 근엄하게 부동자세로 앉은 그녀를 바라보며 걸어나가는 동안 그의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금방 온다는 말과 함께 철문이 불편한 마찰음을 내며 여닫히고, 철컥 하는 열쇠소리가 들리자마자 젠틸돈나는 자리에서 살짝 일어났다.  집을 더 자세히 둘러보고 싶었다.


자세히 볼 것도 없긴 했다. 어쩌면 그녀가 오기 전에, 혹은 트레이너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세간을 한 번 정리했을 지도 모르겠다. TV도 컴퓨터도 없다. 책꽂이에는 대충 스크랩한 신문 기사나 수험서, 노트필기가 전부였다. 노트 하나를 꺼내 적당히 넘겼다. 파란 유성볼펜으로 정리한 내용들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서명란에 휘갈긴 것이나, 태블릿 위에 펜슬로 적당히 찍찍 그어놓은 이외 그가 썼던 글을 본 적이 없단 걸 깨달았다.

‘생각보다 글씨가 깔끔하네.’

깔끔하다고 할까, 꼭 강박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운데 정렬’을 누르고 쓴 노트 같았다. 그나마 잘못 쓴 부분에 공문서처럼 두 줄을 그어 수정한 흔적이 인간성을 느끼게 했다. 젠틸돈나는 노트를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제자리라고 할까, 노트와 노트와 노트 사이에 그냥 꽂아두었다.

보통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흔히들 가질 법한 여가시간의 흔적은 없었다. 서랍 속에서 자유롭게 굴러다니는, 기름때 비슷한 걸로 반짝이는 쇠구슬 몇 개가 전부였다. 하다못해 소설도, 잡지도 없다. 침대 밑에는 옷장 대신으로 쓰는 서랍장이 있었다. 거기에도 잠옷이나 속옷, 제습제가 조금 있는 것이 전부였다.

트레이너 경력이 짧다지만 벌써 2년은 된 사람이다. 기숙사를 자주 사용했을 테니 집의 생활감이 적은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능한 한도 내에서 집을 깔끔하게 관리했다는 게 느껴졌다. 바닥이며 모서리 여기저기가 치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집에 부르려고...... 준비한 것 같은데.”

고개를 들어 슈퍼싱글 사이즈 침대를 바라보면서 젠틸돈나는 중얼거렸다. 한 명이 자는 침대에 베개가 왜 4개나 놓여 있는 걸까. 크기도 모양도 제멋대로인 것들을 집어들자 섬유유연제 향기 사이로 복잡하게 뒤얽힌 냄새들이 딸려왔다. 실제로 누군가 사용했다.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아.”

유독 너저분하지만 풍겨오는 향이 복잡하지 않은 한 베개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침대와 담요에서 비슷한 냄새가 났다. 어쩐지 익숙했다. 머뭇머뭇 제자리에 올려두자,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방 주인의 것이다. 젠틸돈나는 그 자리에 서서 베개에서 침대 발 끝까지를 시야에 두고 바라보았다. 키도 덩치도 큰 금발 남성이 편안한 차림을 하고 그 위에서 뒹굴거리는 모습을 생각했다. 어쩌면 글씨체처럼 침대 가운데에 정렬한 채로 미동도 없이 누워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눈이 옆의 베개들에 향하자, 거기서부터 무작위로 사람의 형상들이 뻗어나왔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우마무스메의 모습을 상상하자 젠틸돈나의 귀가 위협하듯이 누워버렸다. 자기 상상력을 저주할 만큼 실루엣들이 난잡하게 뒤엉킬 무렵, 그녀는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천천히 모서리를 짚고 올라와 엎드렸다. 자기 생각들을 몰아내려는 것처럼.

“......으.”

그러자 그의 체취가 훅 끼쳐왔다. 그의 침대에 엎드려 있으니 당연하다. 멋대로 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그녀의 꼬리가 담요를 문지르는 소리가 났다. 고요한 방 안에서 천이 꼬리에 스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하면 안되는 짓을 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굳어버렸다. 쿵쾅쿵쾅,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안에서부터 들렸다. 왜 그러는 거냐고, 이러지 말라고 생각해도 소용이 없다. 하지 말라면 더 하는 것처럼, 볼 부근이 조금 더워졌다. 어느새 그녀는 그의 베개까지 올라와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바깥 소리에 잠시 주의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없다. 금방 물을 사서 온다던 그가 돌아올 기색은 없다. 그녀는 그의 베개를 잠시 바라보다가, 머뭇머뭇 조금 더 편안하게 고개를 올려 기댔다. 조금 노곤해질 정도로 몸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문득 젠틸돈나의 정신이 맑아진 건 살짝 눈이 감기려던 다음이었다. 눈을 번쩍 뜨고 그녀는 색바랜 벽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뭘 생각했는데.’

‘너 진짜 귀엽네.’

갑자기 들려온 것 같은 소리에 그녀는 몸을 홱 일으켰다. 당연히 침대에는 아무도 없다. 소름이 끼쳤다. 멀리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일어나길 기다렸다는 듯한 타이밍에, 이 모든 게 사실은 그가 계획한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 왔어.”

“......그래요. 오셨네요.”

“거기선 ‘다녀오셨어요’라고 해 주면 좋잖아.”

“제가 왜요.”

봉투에서 시원한 물을 한 병 꺼내 던져주는 그에게 젠틸돈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물병 몇 개를 냉장고에 집어넣고 자기 몫의 인스턴트 커피를 꺼내느라 바빠서 그는 그걸 보지 못했다. 커피에 달린 빨대를 꼽아 한 모금 빨면서 그는 침대에 앉아 있는 젠틸돈나와 방의 풍경을 눈동자를 굴려 확인하고 웃었다.

“역시 푹신한 게 좋지?”

“꼭 주방용 스펀지같아요. 이런 침대는 경험한 적 없어요.”

“뭐, 앞으로도 이것저것 경험하게 될 거야 w”

재수없는 소리를 주워담으며 그는 나무 의자에 풀썩 앉아 커피를 쪽쪽 빨았다. 시선은 여전히 젠틸돈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힐끗 책꽂이를 확인하더니 그가 웃었다.

“봤구나?”

“......당신이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말했잖아. 너와 달리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다고 w”

“그리고 여기가 진짜 집 같지가 않았거든요.”

“우와아. 있는 집 녀석들은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실례되는 말을 하는 건지 w”

“그런 뜻이 아니예요!”

괜히 빈정거렸다가 다음 말까지 이상하게 왜곡되어버렸다. 또 본전도 못찾고 발끈해서 젠틸돈나는 그를 향해 짜증을 냈다. 볼을 부풀렸다가 집어넣는 동안 상기된 얼굴이 조금 진정되었다. 집을 둘러보면서 느꼈던 것들을 풀어놓는다.

“여기서 실제로 얼마나 생활했죠?”

“4년? 정도 되려나.”

“4년이나 지냈으면서, 공부와 잠 말고는 다른 활동을 한 흔적이 별로 없어서요. 집이라기보단, 공부방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야 뭐. 기숙사로 좀 옮겨가기도 했고. 실제로 공부 말고는 별로 한 게 없거든.”

“집 밖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안에선 별로 재미없는 사람이었나 보네요.”

“거 참. 성실해서 미안하구만 w”

장난스럽게 비아냥대는 소리에 트레이너가 다리를 꼬며 웃었다. 그런 모습에 여전히 싱글싱글 웃음을 보내면서, 젠틸돈나가 담에 오르는 고양이처럼 침대 위로 조금 더 올라가 편안히 다리를 뻗고 앉았다.

“아니면 제가 그렇게 느낄 수 있게 시간을 좀 주신 걸까요?”

“내게 시간이 있다면 나에 대한 오해를 푸는 데 쓰고 싶은데.”

“무슨 오해요?”

“뭐든지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속이 시커먼 남자라는 오해 말야.”

“모든 행동에는 의도가 있어요. 결과는 과정에서, 과정은 이치에서 나온다고 가르치신 건 당신이라고요.”

“아, 젠장 w”

그가 커피를 쭉 비우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즐겁게 웃고 있었다.

“내가 네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줬을 때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당신처럼 즐겁진 않았어요.”

“좋아. 그러면 물어보자. 내가 널 집에 부른 의도가 뭐라고 생각해?”

“속이 새카맣지만, 그런데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유겠죠.”

“그래. 네 화사한 오프숄더 너머로 비치는 새카만 속옷처럼 말야.”

“진짜 미쳤어요?”

인상을 가볍게 찌푸리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다. 젠틸돈나는 숨기듯 몸을 굽혀 침대 위에 엎드렸다. 꼭 뱀이나 고양이같은 움직임이었다. 편안하게 기대면서도 눈은 여전히 그를 향해 시선을 뻗고 있었다.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의도와 상관 없이 당신이 트레이너로서 당신 집에 가자고 하니까, 존중하는 의미에서 따라왔을 뿐이니까요.”

“그럼 내가 트레이너로서 하자고 하면 뭐든지 존중하는 의미에서 해줄 셈이냐고 w”

“여기서 당신의 의도를 보는 거예요. 뭘 하자고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근데 네 행동거지가 객관식이 아니고 단답형 문제처럼 보이는데 ww”

“그럼 답을 제출하세요. 모범생 씨.”

그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는 젠틸돈나와 달리, 조금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이다. 시험지를 제출하기 직전의 학생같은 표정, 그의 입술이 살짝 열리면서 이가 드러났다. 스, 혹은 즈, 츠, 하는 잇소리를 내기 직전의 입모양이다. 천천히 입이 떨어진다. 모음 ‘에’를 발음하기 위한 정도의 입모양이다. 젠틸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ㅡ”

“안 돼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이지.”

젠틸돈나는 매트리스에 팔꿈치를 대 조금 더 상체를 일으켰다. 훤히 드러난 어깨와 그 아래가 살짝 불편한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자세를 편안하게 하면서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여전히 의자 바로 앞에 서 있는 그를 보고 웃고 있다. 큰 걸음으로 8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를 눈으로 가늠한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문제는 마지막으로 넘기기로 했어요. 시험을 보도록 하죠. 여러 개의 문제가 있는 걸로.”

“네 태도가 문제지만, 뭐, 좋아.”

눈을 마주쳐 웃으면서 그가 대답했다. 체육 시험도 아닌데 몸을 가볍게 풀었다.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몸을 쭉 펴고 목을 까딱거렸다.

“시작해 봐.”

“왜 제 가문의 트라이얼에 참여하셨죠?”

“그것 말고 네 트레이너가 될 방법이 없으니까.”

“직접 절 스카우트하는 방법이 있었을 텐데요.”

“공식적인 수단으로 이루어지면, 굴복할 수밖에 없는 거거든.”

“......좋아요. 한 걸음 이쪽으로 오세요.”

자기가 이전에 했던 말을 돌려받아 불편한 얼굴로 젠틸돈나는 정답 선언을 했다. 다리를 한계까지 벌려 그녀에게 가까워지려는 그를 질책해 거리를 4분의 1로 줄이고 그녀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당신은 양아치인 척 하는 모범생인가요, 모범생인 척 하는 양아치인가요? 아니면 둘 다 가면일 뿐인가요?”

그가 바보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진짜야. 넌 연극을 보면서 저게 캐릭터인 척 하는 배우인지 배우인 척 하는 캐릭터인지 따지냐?”

“캐릭터는 진짜가 아니예요.”

“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진짜지. 메소드 연기라는 것도 있고. 캐스팅할 때는 사람의 인상, 사고 방식, 목소리 톤, 그 모든 것을 고려해서 캐릭터에 가까운 쪽으로 배역을 고른다고.”

“알았어요. 왜 두 모순된 역할을 연기ㅡ”

“연기가 아니라고.”

“......연출해서 절 혼란스럽게 만들었죠?”

그제서야 그가 가볍게 표정을 풀고 웃었다.

“그래야 네가 나한테 뭔가 숨겨진 게 있는 줄 아니까. 나한테 답이 있는 줄 알 테니까.”

“하?”

“아무것도 없었던 건 아냐. 실제로 난 널 이기게 할 자신이 있었지만, 경력 없는 초짜였으니 입증할 방법이 없었지. 그럼 어쩌겠어. 네가 날 믿고 달리도록 하고, 결과를 내고, 그걸로 과정을 정당화하는 거야.”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짓는 젠틸돈나를 향해 반 걸음을 떼면서 트레이너가 웃었다.

“뭐 말이 좋지만, 그냥 네 관심 좀 끌자고 그랬어. 성공한 사업가가 되려면 성공한 사업가처럼 입으면 되거든.”

“이 사기꾼, 절 이용했군요?”

“이용이라는 건 맞지 않네. 실제로 증명했을 뿐이지. G1 5승이란 영광을 차지한 건 너고.”

“당신도 G1 5승 트레이너잖아요. 날 이용해서 경력을 얻은 거잖아요.”

“G1 5승 트레이너가 아냐.”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젠틸돈나를 향해 나머지 반 걸음을 떼면서 그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달래듯이 그녀와 눈높이를 맞춰 쪼그려 앉아 말했다.

“젠틸돈나의 트레이너인 거지.”

“......뭐가 다른데요.”

“전적과는 상관 없어. 그냥, 네 트레이너인 게 나한테는 최고의 영광이고 기쁨이야.”

젠틸돈나가 이불을 살짝 들어올려 눈 아래를 가렸다. 이불 위로 쫑긋거리는 귀와 넘실거리는 꼬리가 보이니 의미는 없었다. 의외로 동글동글한 그녀의 눈이 거짓말을 어떻게든 찾아보려고 떨리다가 포기했다. 이불이 그녀의 손으로 말려들어 다시 내려갔다.

“이 거짓말쟁이. 안 속아요.”

“뭐, 이 부분은 입증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려나 w”

“저번이랑 똑같은 수작질이잖아요!”

“그치만 저번과는 다르지? 왜냐면 실제로 입증된 결과가 있잖아. 트레이너로서, 너에게 날 증명했잖아.”

“......”

젠틸돈나가 맥이 풀리는 듯 바짝 엎드려 입술을 삐죽거렸다. 굉장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화가 나진 않은 것 같았다.

“그치만 그 과정에서 그런 식으로 절 모욕할 필요는 없었다고 봐요. 당신이 정말 싫고 미웠다고요.”

“지금은 싫지도 않고 밉지도 않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에?”

“......지금까지도요. 그냥 좀 익숙해졌을 뿐이예요.”

“너무 그러지 말고!”

은근슬쩍 무릎을 꿇어 슬금슬금 그녀를 향해 다가가면서 트레이너가 낄낄댔다.

“네가 날 너무 좋아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거니까 ww”

“진짜 미쳤어요? 의자로 돌아가세요!”

“www”

벌컥 짜증을 내는 젠틸돈나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천장까지 치켜들고 꺽꺽 웃으면서 트레이너가 의자로 돌아갔다. 털썩 앉아 다리를 꼬고 즐거워했다. 책상을 검지손톱으로 건드려 톡톡거리는 소리를 내는 동안에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지 실실거렸다.

“보아하니 실패한 것 같지만.”

“제대로 성공했으니까 그만 하세요.”

“너무 그러지 말라고. 너희 가문이랑 계약할 때 스캔들 방지 조항이 있어서 조심했을 뿐이야.”

이제와서 가문 탓을 하는 것에 어이가 없기도 해서 젠틸돈나는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째려볼 뿐이었다.

“기가 막혀서. 더 이상한 쪽으로 소문이 날 여지가 있잖아요.”

“그쪽은 금지조항이 없더라고 ww”

“그야 정상적인 사람이면 알아서 자제하니까 그렇죠!”

“능력을 보기 급급해서 인성 검증을 제대로 안하는 트라이얼 시스템을 탓해.”

“트레센 학원의 채용 시스템도요......”

학원과 가문의 미래가 어둡다 느꼈다. 진심으로. 그러면서도 그에게 크게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의도가 어쨌건, 그의 행적이 어쨌건 결과적으로 그녀의 커리어는 제법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스캔들로 번질 거리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더욱 의문이 생기는 것이었다.

“스캔들 방지 조항을 조심했다면서, 오늘은 집에 데려 오셨네요.”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다니까. 그리고 네가 궁금해했던 부분을 좀 대답해주고 싶었어.”

“......꼭 집이 아니었어도 됐잖아요.”

“내가 처음으로 내 힘으로 마련한 집이거든. 내 얘기를 하기에 여기만한 곳도 없다고 생각했어.”

“흠.”

젠틸돈나는 마음이 편안했다. 짜증을 내고 웃고 하는 것과 별개로, 그의 침대에 엎드려있는 지금 몸도 마음도 편안했다. 가장 사적인 공간에 들어와 있는데도 불편함이 없어져 있었다. 그의 말에서, 눈에서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거짓이 아니네요. 어떻게든 납득시키려고 필사적으로 구는 모양새도 아니고.”

“그야, 거짓이 아니니까.”

“태도는 가끔 최악이지만, 진실되다는 건 알겠어요.”

“뭐, 그게 내 장점이거든.”

한참을 편안하게 엎드려 있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이상해요.”

젠틸돈나가 몸을 꿈틀거려 테이블에 두었던 가방을 자기 쪽으로 끌고 왔다. 이불을 들어 돌돌 감아 가방과 자신을 가리면서 그녀가 물었다.

“당신이 절 진실되게 대한다는 것만으로, 지금까지 의구심을 갖던 게 아무래도 좋게 느껴져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크게 상관없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까지 든다고요.”

“어쩌면 네가 바라던 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게 아닐 수도 있지.”

“그러면, 저는 당신의 관심이나 받고 싶어하는 강아지라도 된단 건가요?”

“스스로를 강아지라고 낮추지 않아도 돼. 퍼피쨩.”

“그만, 하세요.”

“뭐 어때.”

으르렁거리는 그녀를 달래듯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의자에 눕듯이 풀어져서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나도 네 관심을 끌고 싶어서 온갖 짓거리를 했는데 말야.”

“듣고 보니 그렇네요. 누가 누구한테 퍼피쨩이라고 하는지.”

“멍멍 w”

그의 목에서 튀어나온 강아지 소리가 왜 갑자기 자극적으로 느껴졌는지 모른다. 어쩌면 거의 처음으로 젠틸돈나가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두 사람이 찢어질 듯이 째지는 소리로 웃는 소리가 방음이 취약한 맨션 벽을 넘어 퍼져나갔다. 기분 좋게 웃고 조용해진 방 안이 어쩐지 어색해져 서로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그래요. 퍼피쨩. 이 젠틸돈나의 트레이너가 될 수 있어서 기쁘고 영광되다고 하셨죠?”

“그랬지.”

“제게 관심 받아서 기뻤나요?”

“기쁨이 불끈불끈 솟구치던걸.”

“기쁨에 그런 표현을 쓰지 말아주실래요?”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하냐. 시적 허용이라고 해 줘.”

“그래요. 시인 씨.”

그러면서도 젠틸돈나는 뱀의 똬리처럼 둘둘 말린 이불 밖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어 그에게 눈짓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당신, 영업비밀을 다 발설하셨는데 괜찮아요?”

“날 그런 얄팍한 사람으로 알면 곤란하지.”

“정말요? 벌써 당신에 대해 다 알게된 것 같아서, 솔직히 말하면 슬슬 지루해지는데요.”

메지로 라모누라도 된 것처럼, 그녀는 하품을 했다. 시시해 죽겠다는 듯한 늘어지는 하품을, 과시하듯이. 이불이 조금 느슨해지면서 뒤늦게 손이 튀어나와 그녀의 입을 가렸다.

“더 할 얘기가 없으면 집에 가도 괜찮을 정도로요.”

“그래? 아쉽네. 데려다 줄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재킷을 챙기려고 일어나려는 그의 말을 단호하게 일축하고, 젠틸돈나가 매서운 눈빛을 보내 다시 자리에 앉혔다.

“게다가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았는걸요. 허락없이 움직이지 마세요.”

“그렇게 권위적으로 굴면 몸의 일부가 내 의지랑 상관없이 움직이게 될 지도 모른다고 w”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기 전에 조용히 하세요.”

스멀스멀 기분나쁘게 올라가던 그의 입꼬리가 그녀의 단호한 말에 올곧은 직선으로 변해버렸다. 그가 불만스럽게 팔짱을 꼈다.

“그럴 지도 모른단 얘기였어. 실제로 그랬단 게 아니라.”

“아무튼, 몇 가지 더 확인하고 싶으니 성실하고 진실되게 대답하세요. 골드십 트레이너 씨를 어떻게 생각하시죠?”

“존나 쌔끈하다고 생각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이 튀어나오자 젠틸돈나는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

“뭐, 왜. 성실하고 진실되게 대답했어. 그 정도 생각은 할 수 있잖아.”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젠틸돈나는 그를 한참동안 노려봤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다. 어쨌건 거짓말을 하는 것보단 낫다고 스스로 안심시키고 그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그녀가 다음 질문을 한다.

“그녀와 어떤 관계죠?”

“아무 사이도 아냐. 고등학교 동창이란 것만 빼면.”

“어떤 관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나요?”

“그다지. 가끔 얘기하는 동료 정도로 충분해.”

“그렇게 존......매력적이라고 생각하시면서도요?”

“빨간색 람보르기니 쿤타치가 존나 쌔끈하다고 생각하지만, 차에다가 박고 싶지는 않은 거랑 똑같아.”

“말을, 좀, 골라서, 하세요.”

가감없이 쏟아져나오는 천박한 언어들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젠틸돈나는 그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오게 했다. 그녀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제가 당신을 싫어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언어를 사용하셨단 건 알지만요.”

“이거이거 w 이제 뭘로 호감도를 깎아야 하나 w”

“하던 대로만 하시면 충분해요. 다음으로, 골드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정답이예요. 두 걸음 앞으로 오세요.”

어느새 절반 정도를 성큼성큼 지나, 발을 힘껏 디뎌 점프하면 침대에 착지할 수 있을 정도 거리가 되었다. 젠틸돈나는 여전히 몸에 이불을 감은 채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부쩍 가까워져, 높은 곳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가 부담스러운지 그녀가 시선을 살짝 피했다.

“솔직히, 아직 좀 자신 없어요. 지금은 그렇지만, 당신 때문에, 혹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상황 때문에 앞으로도 흔들리겠죠. 그때 당신이 절 피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없어요. 저번처럼 소리지르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죠.”

“젠틸돈나.”

“용서해놓고 계속 말해서 미안해요. 그치만, 굉장히 마음 아팠어요.”

“나도 가끔은 자신이 없어. 어떤 방법으로도 네가 날 믿게 만들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가 천천히 다리를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오늘 하루 자주 마주쳐서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여전히 올곧고 맑은 눈이었다. 어쩌면, 그가 처음으로 ‘자신 없다’는 표현을 입에 올렸기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솔직히 그때 너한테 소리치는 건 완전히 부적절했어. 따지자면 잘못은 나한테 있었지. 네가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알았는데.”

“......”

“그냥 나한테 화가 난 것도 있었어. 난 누가 날 못 믿는 것도 싫어하지만, 예스맨도 싫어하거든. 근데 네가 그 둘 다가 되어버렸으니 말야. 나 때문에.”

“당신은 절 고분고분한 계집으로 만드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요.”

그가 고개를 세게 저어 부정했다. 기분이 많이 심란한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약간 네 기를 꺾어놓으려고 했을 뿐이야. 네가 너무 강해서 타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예전에 내가 네 예전 트레이너를 가지고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음. 담당한테 잡혀 사는 예스맨이라고 했죠.”

“그런 거라고. 난 트레이너한테 잡혀 사는 예스맨도 싫어. 혼자 힘으로는 이길 수 없어. 너도 너 혼자서는 이길 수 없지만, 나도 나 혼자서는 이길 수 없으니까.”

“......당신이 있으면 이길 수 있어요.”

그녀의 대답에 그가 픽 웃었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느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네가 있으면 이길 수 있어. 트레이너로서의 나를 존중한다면, 아니라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말 좀 해 달라고.”

“그럼 말투부터 좀 바꿔요.”

“트레이너로서의 나한테 말하라고. 개인으로서의 나 말고.”

“나누지 말라면서요!”

발끈해서 젠틸돈나가 덮은 이불이 벌컥였다. 그 안에서 뭔가 상자같은 것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아차 싶은 표정으로 눈을 아래로 굴리던 젠틸돈나가, 멋쩍게 살짝 웃었다.

“아무튼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알겠어요. 나름 생각해서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도요.”

“알아주니 고맙네.”

“다음으로 하나만 물을게요. 이것만 맞추면, 그......”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침대까지 와서, 앉아도 돼요.”

“오오, 그거 기대되는데. 난 준비 됐어. 빨리 물어봐.”

“......마일 레이스를 3종류 말해 보세요.”

그가 너무 쉽다는 듯이 껄껄 웃고 막힘 없이 입을 열었다.

“마일 챔피언십, 빅토리아 마일, 아리마 기념.”

젠틸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굳어버렸다. 자기 귀를 의심하는 것처럼 되묻자 다시 한 번 똑같은 내용이 되돌아왔다. 그녀는 눈을 둥글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아리마 기념의 경주 정보는?”

“2500미터, 나카야마 경기장, 우회전.”

“마일 레이스를 세 종류 말해 보세요.”

“마일 챔피언십, 빅토리아 마일, 아리마 기념.”

“어째서?”

그녀가 초조하게 베개가 있는 머리맡과 그의 얼굴, 그의 뒤편으로 보이는 싱크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다, 다음 문제예요. 1+1은?”

“비르시나.”

젠틸돈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자포자기한 것처럼 눈을 감았다.

“저, 정답이예요. 이리 오셔서 앉으세요.”

“www”

그가 여유 있게 와서 침대에 걸터 앉았다. 착잡한 얼굴로 그녀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불 속에서 꼬리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문제예요. 아까 미뤄뒀던 문제요.”

“내가 널 집으로 초대한 의도 말이지.”

“네. 어째서였나요?”

그가 흐음, 하고 이불 밖으로 빼꼼 눈과 귀만 내밀고 있는 젠틸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호기심, 기대, 불안감이 얽힌 표정을 살피면서 그는 가볍게 웃었다.

“제대로 정답을 말하려면, 일단 문제 출제자의 의도를 알아야겠는데 말야.”

“......”

젠틸돈나가 머뭇머뭇 이불에서 손을 빼냈다. 그제서야 그녀의 손에 들린, 구겨진 종이팩이 보였다. 담배갑 정도 사이즈였지만, 담배 대신 다른 것이 개별포장되어 들어있는 상자를 천천히 내보이면서 그녀가 얼굴을 숨겼다.

“당신 침대에서는 당신 냄새가 나요.”

“와, 정말 대단한걸. 사과에서 사과 냄새가 난다는 것도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있는 베개들에선 많은 사람들의 냄새가 섞여 나는데, 침대와 이불에선 그러지 않았거든요.”

“흠. 그래서?”

“제 생각에 당신은 누군가 자기 침대에 올라와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가 씩 웃었지만 이불로 눈을 가리고 있는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잘 알잖아.”

“그치만 제가 들어가 있는 걸로는 뭐라 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오늘 식사를 할 테니 준비하라고 했던 것, 절 집에 초대한 것, 그런 것들을 종합했을 때, 아마도 여기까지 준비하라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제 결론이예요.”

“......솔직히 놀랐어.”

“......역시 그런가요.”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을 잡자, 젠틸돈나의 손가락이 감전된 것처럼 쭉 펴져 황급히 이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녀에게 받은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불 속에서 이번에는 조금 낮고 단호한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에게 제가, 그냥 스쳐가는 계집이라면. 한 번 불장난 해보고 싶은 그런 여자였다면. 3년 적당히 경력 쌓고, 재밌게 놀고 마는 그런 존재라면. 아까 조금 구겨버렸지만 남은 걸 사용한다는 조건 하에서...... 하셔도 돼요. 마음대로. 원하시는 대로.”

출제자의 의도는 완곡한 형태의 거절이었다. 그러면서도 조건부의 승낙이었다. 복잡한 단서와 조건이 붙은 유혹, 유혹이지만 동시에 시험이기도 했다. 당신에게 젠틸돈나의 트레이너라는 직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까지를 의미하는지 묻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젠틸돈나가 숨은 언덕같은 이불을 향해 물었다.

“정말로?”

“네.”

출제자의 의도는 혼란스러웠다. 그가 원하는 것을 일단 넘겨 짚었지만 그렇게 가정했다. 원하는 것을 주고 싶으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주고 싶으면서도, 아직은 때가 아닌 것도 같았다.

“원하신다면. 절대 비밀로 할게요. 앞으로 당신 발목을 잡을 일도 없을 거고요.”

“으음, 뭐.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긴 하네.”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릴 때 피어오르는 불편한 감정들 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은 수치심 속에서 젠틸돈나의 감정이 다시 한 번 정제된다. 확신이 없던 가운데, 혹은 연막을 쳐서 가려버렸던 가운데, 그녀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익이라는 건 굉장히 달콤한 것이다.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도 이익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나름대로 최악의 경우를 각오한 것이다.

뜨거운 머릿속에서 새빨간 쇳물처럼 명확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적어도 그건 확실했다. 최악의 경우로 빠지더라도, 그에게 그 정도는 허락해줄 마음도 있는 거라고. 그녀 자신에게, 그 정도 마음은 있는 거라고. 그리고 아마 절반 이상, 혹은 거기 더해 믿고 싶은 마음을 더해 80% 정도, 그가 현명한 선택을 하리란 확신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불편한 침묵이 길어져 젠틸돈나가 바깥 상황이 궁금해질 무렵, 뭔가 휙 날아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짝, 하고 종이 상자가 벽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찢어지는 듯한 웃음소리.

“wwwwwwwwwwwww”

놀란 그녀가 이불을 들추자, 침대에 앉아 상자를 던져버리고 비어버린 손으로 얼굴을 짚고 꺽꺽 웃어대는 트레이너가 보였다.

“이 녀석 정조관념이 왜 이런 wwwwwwwwwww”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 찬물이 되어 끼얹어졌다. 과열되었던 그녀의 마음이 식어버린다. 차갑게 식자, 그녀의 확신이 담금질한 쇠처럼 단단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숨이 넘어갈 듯 웃다가 겨우 진정해 벌개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갸루랑 얘기하는 줄 알았네. 진심.”

“......당신이라면 제대로 대답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뭐, 그럼! 그런 조건을 걸었는데 내가 덥썩 받을 리가 없잖아. 안심해도 좋아, 젠틸돈나!”

확실히 안심이 되었다. 많은 소득이 있었고, 그 중에서 기쁨과 안심이 가장 컸다. 오랜만이다. 그에게 어리광부리고 싶어졌다. 그녀가 천천히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그에게 무릎으로 다가갔다. 몸을 붙여 자세를 편안하게 하면서, 허리에 감기는 그의 팔에 꼬리를 가볍게 감으면서 미소지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가 하는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들으나마나 그녀를 수치스럽게 하겠지만, 신사답게 행동한 직후 그렇게 말해봤자 짖는 소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

“너랑 할 때는 저런 건 안 쓸 예정이니까 ww”

아니었다. 젠틸돈나는 그를 신경질적으로 홱 밀어 침대에서 떨어트렸다. 우당탕 소리를 배경삼아 눈을 감고 그녀가 빽 소리쳤다.

“진짜 미쳤어요? 당신 진짜 싫어요!”

“어우, 이거거든 www 좀 더 나한테 반항하라고 w”

“당신 정말 싫어요!”

카랑카랑하니 독기가 살아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트레이너는 목적이 달성된 것을 느꼈다. 어쨌거나 젠틸돈나도 소기의 목적을 이뤘으니 과정이야 어쨌건, 트레이너를 바닥에 고정시켜 두면 편안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독 신뢰를 얻기 위해 품위를 바쳐야 하는 귀부인 진영의 하루가 다시 가고 있었다. 아무튼 불미스러운 일도 없었고, 그럭저럭 궤도에 올랐으니 앞으로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







뾰이각이란 달콤한 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