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한 아침이었다. 해외원정의 두 번째 시금석이 되는 타카라즈카 기념, 상반기 그랑프리 개최일에 걸맞는 멋진 시작이었다. 짧게 기지개를 켜 몸을 쭉 펴고, 일어나 밤새 쌓인 먼지를 씻어내고, 머리를 정돈하고 장식을 쓴다. 중요한 승부의 날, 붉은 승부복이 빠질 수 없다. 옷걸이에 걸려 주인을 기다리는 것을 잠시 멈춰 바라본다.

“......후후.”

머릿속을 시끄럽게 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없다. 얼굴이 비칠 듯 고요한 물 같은 마음이다. 몇 번 움직여보니 다리 상태도 괜찮다. 자신이 준비해왔던 만큼 상대 역시 이를 갈고 단련해왔을 테다. 육체의 완성도, 작전, 각오와 결의를 곧 부딪히게 된다. 그 모든 것들이 비슷할 때, 무엇으로 차이를 만들어낼까. 마침 전화가 울렸다.

“안녕히 주무셨는지요.”

“나와. 바로 출발할 거니까.”

“분부대로 하지요.”


한신 경기장, 11라운드, G1 타카라즈카 기념. 상반기 일정을 마무리하는 그랑프리. 11번 젠틸돈나는 1번 인기, 10번 골드십은 그 뒤를 이어 2번 인기였다. 그 뒤로도 특기할 만한 이름들이 있었다. 빅토리아 마일을 우승해 드디어 2위의 저주를 끊어낸 비르시나, 가을 천황상 레코드 보유자 토센 조던, 직전 봄 천황상을 우승한 페노메노까지 G1 우마무스메만 다섯이 모인 경기. 팬 투표 1위 오르페브르가 출주를 회피한 아쉬움을 잊을 만한 라인업이리라.

“아아, 보는 눈들이 없네. 당연히 내가 1번 인기여야 하는 거 아닌가.”

“눈은 모르겠지만 듣는 귀들은 있는 거죠. 그렇게 큰 소리로 짖어댔으니.”

하필 바로 옆 게이트다. 큰 소리로 불평하는 골드십을 젠틸돈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골드십은 그녀의 말에 화내는 대신 3번 게이트로 들어가려는 검은 우마무스메 쪽을 노려보았다.

“네가 겪어보질 않아서 그래. 저 새끼가 얼마나 짜증나는데.”

“그렇다고 게이트에서 시비를 걸고 싸우다가 출발이 늦나요?”

“출발이 늦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3번 게이트가 닫히기 직전까지 그 우마무스메의 등을 저주라도 하는 것처럼 노려보던 골드십은 바닥에 큰 소리로 침을 뱉었다. 굳이 침뱉은 것을 신발의 편자 부분으로 문지르면서 꼭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도착이 늦어서 문제지.”

“그렇게 지는 게 분한 사람이, 훈련을 그렇게 했다니.”

“고릴라, 지금 저 자식 편드는 거 아니지? 그래도 우리 같이 훈련한 사이잖아?”

“저라면 편들어주길 원하는 사람을 고릴라라고 모욕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네.”

10번 게이트의 문을 열면서 골드십이 환하게 웃었다. 꼭 자랑하는 것처럼 이를 드러내고, 인중 부근을 내밀어 넘실거렸다. 게이트의 문을 잡던 젠틸돈나의 표정이 구겨졌다.

“고릴라는 너와 달리 온순하지.”

“당신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마음에 드는 말이라곤 하나도 하질 않는군요.”

“그건 네가 날 싫어해서 그런 거야.”

게이트에 들어서서도 골드십은 나불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만큼 좌우사방이 자유롭게 뚫려 있는 게이트가 원망스러운 날도 없었다.

“내가 네 달리기도 싫어하고, 널 싸고드는 그 금발도 싫어하고, 내 선장이 금발하고 친하게 지내려는 것도 싫어하는 것처럼 말야.”

“그래요. 저는 당신이 싫어요. 그러니 좀 닥치세요. 좋아하는 게 있긴 한가요?”

“알았어, 진정 좀 해. 닥치라면서 질문을 하는 건 뭐람.”

그녀가 신경질을 내자 골드십이 놀란 척 움츠러들었다. 그것마저 도발로 보여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지만, 겨우 주위가 조용해졌다. 애써 평온하려는 젠틸돈나의 호흡이 음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골드십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가볍게 몸을 움직이고, 그녀답지 않게 정석적인 스타트 자세를 취했다. 나름 젠틸돈나를 배려한다고 마지막 말은 조금 더 소리를 낮췄다.

“싫어하는 놈들 엿 먹이는 거. 그거 하나는 엄청나게 좋아하지.”
 
슬슬 젠틸돈나의 신경이 예민해지고 있던 차, 게이트가 바로 열린 것은 다행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가 초반 위치 경쟁에 합류하면서 그녀는 머리를 식히려고 애썼다.

“자, 일단은 선행 싸움. 비르시나가 나갔습니다. 빅토리아 마일에서 연패의 사슬을 끊은 비르시나. 그리고 G1 6승이 걸려있습니다. 젠틸돈나.”

기껏 산뜻하게 시작한 하루다. 고작 우마무스메 하나 때문에 망치기에는 오늘 경기가 너무 중요했다. 해외 원정이 걸려 있다. 최강의 증명이 다시 한 번 걸려 있다. 클래식 3관 노선을 탔던 동기와 처음 맞붙는 것이다. 그 동기 중 최유력 우마무스메가 골드십이라는 게 굉장히 유감스러웠지만, 그렇기 때문에 질 수 없다.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아니 떠날 수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와 골드십은 상극이었다. 재미라는 이름으로 온갖 민폐를 끼치고 다니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기단련을 성실히 하지 않는다. 싫다. 그러니 골드십에게 지는 건 더욱 싫다.

“어엇? 여기서 골드십이 단숨에 올라왔다!”

한편 자석의 반대극은 서로에게 이끌린다. 마치 그렇게 된 것처럼 골드십이 후방에서부터 속도를 마구 올리고 있었다. 4위 젠틸돈나의 뒤에 삼각형을 그리며 형성된 마군 바깥을 뛰어넘듯 미끄러져 그녀의 옆에까지 와서 섰다. 후방에 대기할 것이란 당초 예상을 박살내는 움직임이었다.

“안녕, 모범생. 오늘도 질리지도 않고 4위 쯤에서 선행 중이구나.”

“골드십?”

“네가 그렇게 하기로 정한 거냐? 아니면 금발 녀석이 너한테 그러라고 시키든?”

또 이상한 소리를 했다. 선행책은 젠틸돈나의 오랜 방식이었다. 안정적으로 리드하고 압도적으로 이기는 선행의 왕도, 견본같은 레이스 운영이 그녀의 장점이었다. 그녀도 트레이너도 그렇게 여겼고, 그 방식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전 계속 이렇게 달렸어요. 이렇게 달릴 때 제가 제일 강하니까요.”

“강한 건 모르겠지만, 재미없는 건 확실하네.”

“그러는 당신은, 트레이너 씨가 그러라고 시키던가요?”

그 말에 골드십이 환하게 웃었다. 치열한 레이스 초반, 그 치열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는 한 축에서 나오지 않을 법한 표정이었다.

“응!”

“나 자신이 우마무스메의 방해가 되는 만큼, 그녀의 기분을 믿고 솔직하게 달리게 하고 싶다. 골드십의 트레이너가 이렇게 말했었죠. 오늘의 레이스 포인트.”

해설이 나름 정제된 표현으로 말했지만 실제로 트레이너가 한 말은 ‘네 맘대로 해라’였다. 기분대로,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달리라는 주문. 그 말만 떼어놓고 보면 포기나 다름없었다. 다시 한 번, 젠틸돈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당신을 여기까지 질질 끌고 와놓고, 마지막으로 시킨 게 그거라고요?”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나. 귀부인. 그렇게 고생해서 질질 끌고 왔으니까, 비로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변덕스러운 담당의 기분, 그만큼 변덕스러운 스케줄과 사생활 속에 자신을 희생하고 피곤에 찌들어가면서도,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골드십의 트레이너가 담당을 보고 있었던 만큼, 골드십 역시 그녀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레이스는, 준비하는 과정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레이스에 임하는 마음 역시, 준비 과정의 마음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럴 기분이 된 고루시쨩은 무적이라고!”

“......좋은 도발이예요, 당신.”

젠틸돈나는 그런 골드십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녀에게 그럴 마음이라는 건 언제나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열이 펄펄 끓든 승리를 위해, 강함을 위해 먹어야 할 마음이었다. 누가 시키고 비위를 맞춰줘서 얻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안에서 끓어올라야 하는 것이다. 골드십의 말에 치켜올라가는 그녀의 입꼬리처럼, 그녀의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더 타오를 수는 있지만 타고 있지 않을 수는 없는 마음이었다.

“박살내 드릴게요.”

골드십은 골드십대로, 그 말에 씩 웃을 뿐이었다. 도발에 반응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눈에 깃든 불꽃은 같다.  달려서 상대를 이기는 것. 자유로운 파천황도 끝끝내 놓아버리지는 못한 우마무스메의 숙명이 그녀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해 봐. 고릴라.”


3코너에서 4코너로 넘어가는 완만한 커브, 여전히 선두는 비르시나, 그 뒤로 페임 게임. 그 뒤로 카렌 미로틱을 앞에 두고 젠틸돈나와 골드십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모범적인 형태로 인코스를 타 커브를 통과하던 젠틸돈나로서는 직선 승부를 위해 바깥으로 빠져나갈 필요가 있었다. 골드십이 거기까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마무스메 하나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듯 말 듯한 애매한 틈이 젠틸돈나의 아웃코스 방향으로 벌어져 있다. 직선에 들어서자마자 파고들지 않으면, 어쩌면 스퍼트를 시작한 골드십 뒤편의 바깥쪽 우마무스메 둘에게 가로막힐 위험도 있었다.

승부를 걸어온 것이라 느꼈다. 해보란 듯한 도발이라 느꼈다. 한편으로 저번 재팬컵 이후로 그녀에게 쏟아졌던 악담들을 젠틸돈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조금은 의식하게 되는 악역영애라는 별명, 평가들. 운명이 장난질을 하는 건지, 이렇게 빨리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젠틸돈나는 괜히 복잡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타이밍을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부딪혀야 해.’

승리하고도 찬사 대신 비난을 듣는 것이 내키진 않지만, 그렇다고 승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길을 내야만 한다. 두바이 때처럼 부딪히지 않고 통과한다면 그걸로도 좋지만, 여의치 않다면 들이 받아서라도 길을 낼 것이다. 그 앞에는 골드십이라는 벽이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자, 서서히, 서서히 골드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었다. 기다리지 않았다. 황금함은 기다리는 대신 전속전진을 택했다. 이제 4코너를 돌고 있는 시점에서 빠른 타이밍의 스퍼트, 젠틸돈나가 타이밍을 잡는 사이 속도가 붙은 골드십이 선두권의 두 우마무스메를 향해 빠르게 가까워져갔다. 빠른 상황 변화에 젠틸돈나가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골드십은 멀어져가고, 벌어졌던 틈은 닫히려 하고 있었다. 문득, 골드십의 고개가 살짝 뒤를 향해 돌아간 것도 같았다.

“힘 말고 머리를 쓰라고, 모범생.”

그렇게 말한 것도 같았다. 젠틸돈나는 이를 악물고 틈을 비집으려 했지만, 이미 두 우마무스메가 그녀의 진로에 서버린 뒤였다.

“자, 4코너에서 직선, 선두는 아직 비르시나인가. 여기서 골드십이 부활하는가? 어떤가? 오늘 이곳은 어떤가?”

젠틸돈나는 완벽하게 앞이 봉쇄되었다. 비르시나와 바깥쪽의 두 우마무스메 탓에 비집고 나갈 틈이 없어져버렸다. 머리도 힘도 쓸 여지가 없어져버렸다. 반면 골드십은 자유롭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너른 바다같은 직선에서 그녀를 가로막을 암초는 존재하지 않았다. 젠틸돈나의 등줄기를 타고 불길한 느낌이 서늘하게 흘렀다. 엄습하는 불안감, 막을 수 없을 듯한 패배의 예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질 수 없다. 그러고 싶지 않다. 젠틸돈나는 거리 손해를 감수하고 바깥쪽으로 크게 돌았다. 뚫어버릴 수 없는 벽을 돌아 어떻게든 도망치는 골드십을 추격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황금함은 유유히 골을 향해 달려나갈 뿐이었다.

“굉장하다, 경이적이다, 골드십! 트레이너의 믿음대로 경주했다, 그 결과가 나온다!”

관중석에서 축포처럼 종이조각들이 흩날렸다. 젠틸돈나가 겨우 바깥쪽을 타 넘었을 때의 일이었다.

“골드십, 그랑프리 달성! 압도적인 강함을 선보였습니다!”

3과 1/2마신 차 하고도 목만큼 차이가 났다. 골드십 1착, 젠틸돈나 3착. 턱 끝까지 찬 숨을 고르면서 그녀는 방금까지 일어난 일을 생각했다. 졌다. 그냥 진 것도 아니고 완봉당했다. 힘싸움도 없었고, 속도 싸움도 없었다. 흐름마저 주도한 듯한 골드십에게, 그녀와 똑같은 방식의 달리기로 패배했다. 이 레이스의 왕은, 지배자는, 가장 강한 자는 골드십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꿈인 것처럼 현실감이 희미했다. 꿈이라면 악몽이겠지만, 악몽같은 무겁고 축축한, 늘어지는 느낌도 없었다. 그냥,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단지 주위가 많이 시끄러웠다. 소란스러운 관중석의 말소리가 머릿속을 울려 지끈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관중석 부근을 살폈다. 저 멀리서 골드십 트레이너가 미소를 띄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트레이너를 찾으려 했다.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무언가가 가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낮인데도 어둡게 내려앉은 장막같은 것이.



“......으음.”

어둡게 내려앉은 것이 이불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보다 조금 앞서,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소리가 전화 소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젠틸돈나는 몸을 뒤척여 머리맡의 핸드폰을 집어 가져왔다.

“잘 잤어, 젠틸돈나?”

“......”

그렇게 찾던 트레이너의 목소리에 그녀는 잠시 굳었다. 아직 잠기운이 남은 탓인지 낯설게 들렸다.

“으음.”

“오, 느낌 좋은데 w”

“......음?”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ww”

뒤척이는 동안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찌르는 듯한 웃음소리에 젠틸돈나의 귀가 반응했다. 그리고 약간의 딜레이 후, 완벽하고 신속하게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벌떡 일어나는 통에 전화기가 침대에서 떨어졌다.

“지금 몇 시죠? 제가 얼마나 잔 건가요?”

“아침 7시야. 적당히 준비하고 나와. 같이 밥먹고 가서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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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개운하지만은 않은 아침이었다. 해외원정의 두 번째 시금석이 되는 타카라즈카 기념, 상반기 그랑프리 개최일에 맞지 않는 구질구질한 시작이었다. 짧게 기지개를 켜 몸을 쭉 펴고, 일어나 밤새 쌓인 먼지를 씻어내고, 머리를 정돈했다. 중요한 승부의 날, 붉은 승부복이 빠질 수 없다. 옷걸이에 걸려 주인을 기다리는 것을 잠시 멈춰 바라본다.

“......아아, 시끄러, 시끄러.”

헤드기어를 쓰고 혀를 쭉 내밀자 머릿속을 시끄럽게 하던 것들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파문이 이는 마음에 거울처럼 비치는 것은 갈색 머리를 한 자기 자신의 모습, 그러면 안된다는 말을 귀에 달고 살았던 어린 자신. 손을 흔들어주자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회색 머리가 된다. 그렇지, 그렇지. 굳이 열정과 목표에 귀신들릴 필요 없다. 그런 것 없어도 자신은 강하다. 적당히 즐겁게 살아도 이길 수 있다. 회색 머리를 한 자신은 물 속에 가라앉아 이를 빠득빠득 가는 한 우마무스메를 바라보고 있다.

“잘 잤니. 고릴라.”

자신은 우마무스메니까 아무래도 고릴라는 좀 무섭다. 그러니 굳이 부딪히지 않았다. 적당히 부딪힐 것이란 환상만 심어주었다. 어찌나 난폭한지. 그 호전성이 만들어낸 함정에 빠져 침몰하는 모습은 볼만 했다. 하지만 물에 비친다는 건, 손이 서서히 바깥으로 튀어나오고 있다는 건, 아직 그녀를 밀어 건져내려는 자가 있다는 것. 고릴라의 아래에서 싸구려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뭐, 그래. 운명을 받아들이기란 참 힘든 일이지.”

골드십은 멍청하게 빼 놓았던 혀를 집어넣었다. 핸드폰을 꺼내 걸자, 4번의 착신음 뒤 피곤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잤어? 한 2시간 정도?”

“......되감았구나. ~~ 군.”

어딘지 슬픈 듯한 목소리에 골드십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뒤이어 한숨과 함께 이어진 대답에 그녀는 바보같은 년, 이라 말하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뭐, 이해는 해. 자기 담당을 이기게 해주고 싶은 거겠지.”

“이해하지 말라고, 트레삣삐.”

슬슬 불쾌해져야 정상인 거라고, 골드십은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의 운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가망없는 마음을 자꾸 보여주겠다고 그의 트레이너실 근처를 맴도는 그녀처럼. 스스로 별 생각을 다 한다 싶을 쯤, 전화기 너머에서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꼭 웃는 것도 같은 소리였다.

“이해는 하지만 양해한다곤 한 적 없어.”

“바로 그거라고, 선장 양반! 그래서, 다음 작전은?”

“몰라. 네 맘대로 해.”

“정말? 무서운 고릴라가 들이받아서 데굴데굴 구를 수도 있다고?”

“그러고 싶으면 그러던가.”

과장해서 겁먹은 척 말해도 요지부동이다. 골드십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진짜 겁먹어서는 아니다. 그보다는 희열이다. 자신을 다루는 법을 잘 아는 상대에게서 얻는 희열로, 황금함이 기름을 잔뜩 주유하고 닻을 올렸다. 싸울 줄 아는 선원을 데리고 있다면, 때로는 방치야말로 믿음이고, 무전술이야말로 전술인 법이다.

“좋았어! 고루시쨩한테 맡겨달라고! 다 생각이 있으니까!”

“운전도 네가 해 주면 안되냐.”

“게이트 심사하러 가자고?”

“됐다. 그냥 해본 말이야. 바로 출발할 테니 나와.”

“분부대로 합죠. 선장님.”

심드렁한 답변에 저번과 똑같이 답하고 나자 통화 종료 알림으로 화면이 깜빡였다.

“쯧, 캐릭터 겹치는 건 딱 질색인데.”

통화 화면이 깜빡이다 꺼지고 나타난, 어느 바다에서 트레이너와 찍은 사진을 잠시 바라보고 골드십은 전원을 꺼 주머니에 넣었다.



“젠틸돈나.”

“......네, 당신.”

패덕으로 나가겠다고 인사를 나눈 뒤였다. 트레이너가 대기실 문을 열고 있는 젠틸돈나를 불러세웠다. 어쩐지 진정되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살짝 열린 문고리를 잡고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싱긋 미소지었다.

“많이 불안하신가요?”

“아니.”

“그런 것 치고는 많이 초조해 보이시네요.”

“아니 w 그렇다기보단, 그냥......”

혀를 쭉 빼 신나게 웃으려던 그가 표정을 싹 굳혔다.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됐어. 그냥, 그러니까.”

젠틸돈나는 문을 다시 닫았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 양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꼭 아이를 어르는 것 같은 손길에 트레이너가 조금 불쾌해했지만 아랑곳않고 미소를 보여주었다.

“괜찮아요. 절 믿고 기다리고 계세요. 승리를 가져다 드릴 테니까.”

“......그래. 고마워.”

마주 미소짓는 것을 확인하고 , 젠틸돈나는 다시 돌아섰다. 대기실 문을 향해 걷는 등을 바라보며 그가 단추를 하나 풀었다가, 포기한 듯 다시 잠갔다. 그녀가 문 손잡이를 돌렸을 때, 그는 다시 그녀를 불렀다.

“네, 당신. 이제 정말 가봐야 하니까, 짧게 부탁드려요.”

“......골드십한테 들이박지 마.”

그가 입을 감싸쥐고 작게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크게 확신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초조하고, 걱정에 쌓여 있는 모습이었다. 젠틸돈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당신.”


통로를 지나 관중들이 환성을 올리는 패덕에 나가자, 골드십이 이미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관중들에게 정중한 인사를 보내는 젠틸돈나의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큰 소리로 불평을 쏟고 있었다.

"아아, 여전히 보는 눈들이 없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