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가 모두 끝나고 학원 부지 전체가 슬슬 저녁 공기에 싸여 조용해지기 시작해지는 늦은 저녁,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트레이너가 문을 열어보니 젠틸돈나가 서 있었다. 분명 하루가 모두 끝나고 쉴 시간인데 교복을 입고 있었다. 조금 지친 듯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고 그녀가 물었다.

“잠시 들어가도 되나요?”

“네가 괜찮다면 나는 좋지. 어서 와.”

트레이너 기숙사에 담당이 찾아오는 경우는 아마 드물다. 그게 젠틸돈나라면 더욱 그렇다.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고민한 흔적인지, 신발을 벗고 천천히 방에 올라오는 순간까지도 표정이 번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잠시 고개를 돌려가며 살펴보니 이전에 찾아간 그의 방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소파와 TV를 비롯한 살림이 조금 더 있고, 몇 종류 크기가 다른 덤벨이 있고, 부엌에 요리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마 오늘은 아니었던 듯, 아무 냄새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마실 거 필요해?”

“괜찮아요. 금방 일어날 테니까.”

“평소라면 아쉽겠지만, 오늘은 조금 고마운걸. 피곤해서 슬슬 쉬려던 참이라.”

“흠.”

거실 소파로 안내받아 걷던 젠틸돈나는 눈동자만 움직여 살짝 열린 문틈 사이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불이 꺼진 방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화면을 켜고 말인가요?”

“뭐, 그렇지. 약간의 무드등이라고 할까. 혼자 자면 아무래도 외로울 때가 있으니까.”

전등이 아닌 다른 광원에서 나오는 듯한 약한 불빛, 그리고 미세한 백색 소음. 소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던 그녀는 잠시 뒤 마음을 굳힌 듯 문을 향해 걸었다. 트레이너의 몸이 잠시 움찔했지만 딱히 제지하려는 움직임은 없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것이라고, 젠틸돈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대로 문을 열자, 침대 아래쪽 일직선상에 작은 벽걸이 TV가 걸려있었다. TV와 침대 사이에 작은 협탁이 놓인 것으로 보아, 아마 침대 끝에 앉아서 보고 있었으리라. 오늘 있었던 타카라즈카 기념의 녹화영상이 4코너 부근에서 멈춰 있었다.

“패배를 곱씹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시는지?”

“네가 나오니까.”

“제 패배 말이죠.”

표정 없이 젠틸돈나는 조금 더 방 안쪽으로 들어왔다. 침실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침대 하나, 벽걸이 TV가 하나, TV 아래로 몸단장을 하는 데 쓰는 것으로 보이는 거울 달린 화장대가 하나,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작은 스탠드와 핸드폰, 작은 목재 알람시계가 놓인 협탁이 하나 더 있었다. 그녀는 침대 끝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스크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전후 맥락을 생생하게 기억하니 그다지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아직 문간에 서 있는 그에게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웃었다.

“뭐 하세요? 이리 오세요.”

“금방 일어날 거라더니, 더 있고 싶어졌어?”

“......네. 더 있고 싶어졌네요.”

그녀는 협탁 위 리모콘을 집어들어 레이스 장면을 뒤로 감았다. 한데 뒤엉키던 마군이 코너를 돌아 직선으로, 뒤로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젠틸돈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어쩐지 외로워졌거든요. 그러니 옆에 와서 앉으세요.”

“그런가 w 외로울 때는 옆자리보단 아랫자리에 앉는 게 도움이 될......”

젠틸돈나는 여전히 뒤로 감기는 레이스 흐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군이 부채꼴로 펼쳐져 게이트로 들어가버리고, 게이트 뒤로 튀어나와 몸을 푸는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천한 농담을 듣지 못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멋쩍어 트레이너는 말을 멈추고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농담을 포기하지 못하겠는지 다리가 맞닿을 정도 거리에 앉았음에도 젠틸돈나는 반응이 없었다.

“자, 타카라즈카 기념. 본마장 입장입니다.”

한신 경기장, 11라운드, G1 타카라즈카 기념. 상반기 일정을 마무리하는 그랑프리. 11번 젠틸돈나는 1번 인기, 10번 골드십은 그 뒤를 이어 2번 인기였다. 그 뒤로도 특기할 만한 이름들이 있었다. 빅토리아 마일을 우승해 드디어 2위의 저주를 끊어낸 비르시나, 가을 천황상 레코드 보유자 토센 조던, 직전 봄 천황상을 우승한 페노메노까지 G1 우마무스메만 다섯이 모인 경기. 팬 투표 1위 오르페브르가 출주를 회피한 아쉬움을 잊을 만한 라인업이리라.

“젠틸돈나.”

“먼저 모습을 보였습니다. 10번 골드십, 평소와 똑같습니다. 한 번의 패전으로 그 반짝임은 퇴색하지 않습니다.”

“젠틸돈나.”

“손, 이리 주세요.”

어쩐지 불안한 것인지 몇 번 부르자 젠틸돈나가 허벅지 위에 왼손을 두며 말했다.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었다. 머뭇머뭇 오른손을 위로 올리자 감싸려는 것처럼 잡아왔다. 가는 손가락들이 사이사이 파고들어 잡는 느낌에 트레이너의 손도 오므라들었다. 무언가 확인하려는 것처럼 젠틸돈나는 손바닥을 조금 움직였다. 맞닿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무겁고 습한 느낌. 그녀가 꼬리를 한 번 휘둘렀다.

“긴장하고 계신가요? 땀이 나네요.”

“좀 더워져서.”

“그리고 11번! 천황상 우마무스메를 붙잡고 2관 우마무스메를 봉해 보이겠다! 젠틸돈나입니다.”

“......저도요.”

몇 번 힘차게 달려보이며 몸을 푸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젠틸돈나는 조금 더 힘주어 그의 손을 잡았다. 패배한 레이스를 다시 보는 것이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심기가 많이 불편한지 젠틸돈나는 조금 더 그에게 몸을 붙여 앉았다. 여러 우마무스메의 소개가 나오는 중간중간, 젠틸돈나와 골드십이 뭐라 대화하는 소리와, 골드십이 토센 조던에게 발차기를 날리는 장면이 튀어나왔다.

“마장 상태는 그럭저럭 괜찮다. 하지만 스피드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당신. 대답해 주세요. 만약 오늘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녀의 손 안에 느껴지는 미세한 움직임, 동요. 손가락이나 손바닥, 피부나 뼈가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의 피가 움직임을 달리한 것 같은, 심장이 조금 다른 페이스로 뛴 듯한 아주 작은 변화가 느껴진 것 같았다. 착각이라고 치부해도 괜찮을 그것에, 확인하듯 그에게 돌린 젠틸돈나의 눈에 깃드는 슬픔.

“당신은 그렇게 하고 싶은가요?”

“힘과 힘의 충돌! 올해의 타카라즈카 기념!”

그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입이 바짝 마르는지 입술을 몇 번 깨물었다. 무겁게 심호흡한 뒤에야 다시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 반응이 그녀의 표정을 조금 더 일그러지게 했다. 그가 잠긴 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고 싶어.”

“좋은 스타트다. 선행 싸움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실포트, 그리고 비르시나. 안쪽에서 이대로 선두를 차지할 것인가. 최외곽에서 골드십이 밀어붙이고 있다, 골드십이 밀어붙이고 있다!”

맨 앞의 우마무스메 둘이 치열한 선두 경합을 벌이는 바로 뒤로, 중단 게이트에서 좁혀들어와 인코스에 위치하는 젠틸돈나, 그리고 그 뒤에 페이스를 올려 바짝 추격하는 골드십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방에 대기하지 않고 중단에 위치해 젠틸돈나를 바짝 마크하듯 달리는 골드십의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잠시 정적에 빠진 한신 경기장. 골드십, 그 앞에 11번 젠틸돈나.”

다시 한 번 환성이 올랐을 때, 마군이 제 1커브를 돌기 시작했다. 길게 길게, 결국 선두 싸움에서 승리한 대도주 우마무스메를 선두로 최후미까지 대략 15~20마신 정도 되도록 늘어진 채로 중반을 맞이했다. 

“선두 실포트, 벌려나간다. 2위의 비르시나와의 차이는 7, 8마신. 3위는, 젠틸돈나. 젠틸돈나!”

침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양보하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충분히 익숙한, 혹은 아직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화면 속 상황은 굳이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경기장에서 우마무스메들이 내는 구르는 듯한 발소리, 그리고 바쁘게 상황을 전하는 해설의 말만 들렸다.

“4위 골드십이 몸을 붙이며 올라가려고 하는 3, 4코너의 중간이다.”

“다시 시작한다면, 제게 뭐라고 말하고 싶은가요?”

“응?”

골드십이 밀어붙여 젠틸돈나를 바짝 마크한 상황에 이르자 젠틸돈나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도 트레이너는 자기 말을 정하지 못한 듯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고, 젠틸돈나는 그런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4코너에서 곧 직선을 향해 온다!”

“미안해요. 좀 더 제대로 표현해 드릴게요.”

미소와 함께, 그녀 얼굴에 깃든 슬픔이 날아가버린 것 같았다.

“다시 시작했을 때, 제게 뭐라고 ‘명령’하고 싶으신가요?”

“아직 20마신 정도 차이가 있다, 선두 실포트!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뭐라고?”

“트레이너로서, 제게 뭐라고 명령하고 싶냐고 물었어요.”



“바깥에서 골드십, 젠틸돈나!”

완만한 4코너를 지나 최종직선에 접어드는 국면, 바깥쪽에서 엄습해오는 3번 우마무스메까지 3강의 대결 구도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조금 논외의 존재다. 골드십이 투지를 불태우는 대상은 오로지 젠틸돈나였다. 금방이라도 부딪힐 정도의 거리에서,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인코스를 고집할 수도 있을 거야. 코스 상태가 썩 좋진 않으니 이기기 좋은 길은 아니겠지만.”

젠틸돈나의 눈에도 보이고 있었다. 인코스의 마장 상태가 좋지 않다. 앞의 대도주 우마무스메와 비르시나가 선점한 정도가 한계다. 필연적으로 그 둘을 제치려면 조금 더 바깥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골드십이 아슬아슬한 선에서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

“너같은 모범생은 알기 쉬워. 그리고 안다는 것은 장악한다는 것, 그렇지?”

처음부터 알고 노리고 있었다. 초반부터 바짝 붙어 마크한 것은, 이후까지도 그녀의 행동을 제약하겠다는 의도, 그리고 그를 위한 포석이었다. 젠틸돈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상관 없다. 어떤 제약을 받아도, 어떤 상황에 처해도, 어떤 상대를 만나도 오로지 부딪혀 돌파하면 그만이다. 힘 있는 달리기, 강하고 압도적인 힘만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그녀의 장점, 그녀의 무기, 그녀와 트레이너가 인정한 공통된 믿음이었다.

‘그렇다고 조신하게 달리지는 마라. 힘 있는 달리기가 네 장점이니까.’

“안다는 것과, 가로막는 것은 별개라는 것도 알려드릴게요.”

“해 봐, 고릴라.”

젠틸돈나의 말에 골드십도 따라 웃었다. 젠틸돈나는 자신있게 골드십이 파둔 함정에 뛰어들었다. 도전과 응전, 처음에 예견이라도 된 듯한 힘과 힘의 충돌, 둘의 거리가 로슈 한계를 넘었다. 스스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부서지는 쪽이 이 자리의 위성이 될 것이다. 

레이스는 심, 기, 각을 시험하는 자리. 다리로 대표되는 몸의 단련, 그 완성도. 레이스의 각 국면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두고 상황을 돌파하는 기술, 그리고 승리를 위해 정렬된 날카로운 마음, 승부근성 모두가 카드의 족보처럼 모여 최후의 순간 결판을 낸다. 둘의 조건은 비슷하다. 힘도 비슷하고 기술도 비슷하다. 골드십 쪽에서 그럴 마음을 먹은 이상 마음도 비슷하다.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같아서, 그럴 마음으로 가득찬 우마무스메들이 경합할 때, 그럼 무엇이 차이를 가르게 될까?

‘골드십에게 들이박지 마.’

믿음이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지 않고,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는 확신.

‘골드십에게 들이박지 마.’

함께 심기각을 단련하고, 나아갈 길을 정해 걸어나가며, 장점과 단점까지도 속속들이 알게 된 동반자가 보내는 믿음이다.

‘골드십에게 들이박지 마.’

마지막의 마지막, 젠틸돈나의 다리가 망설였다. 출주 직전에 던진 트레이너의 한 마디가 그녀를 흔들어놓았다. 공개된 모든 패의 숫자가 같았다. 단 하나 믿음을 빼고.

“아하.”

승리를 확신한 골드십이 미소지었다. 황금의 불침함은 그 이름대로 흔들리지 않았다. 짧게 웃는 소리가 순식간에 젠틸돈나에게서 멀어져갔다.

“바깥에서 골드십, 골드십! 골드십이 부활한다, 골드십이 부활한다!”

젠틸돈나는 그대로 튕겨나가 밀려났다.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졌다. 뒤늦게 따라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은 인코스 마장이었다. 달리도록 강요받은 순간 승리는 놓친 것이다. 눈 앞에 있던 승리를 사이에 두고 그녀 앞을 지나는 비르시나를 비롯한 많은 우마무스메들.

“힘이 다했다, 11번 젠틸돈나. 역시 10번 골드십!”

골 지점을 지나 유유히 속도를 죽이며 고개를 까딱거리는 골드십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송출되는 그 화면을 뒤로 하고, 젠틸돈나는 트레이너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한테 뭐라고 명령하고 싶냐고 물었어요. 트레이너.”

“......”

“대답하세요. 대답하라고.”

“......아마, 골드십에게 들이박지 말라고 하겠지. 그게 이길 수 있는 길이니까.”

“제가 이기는 길인가요, 아니면 당신이 이기는 길인가요?”

젠틸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난 트레이너는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둘은 같은 거잖아?”

그 말과 동시에 젠틸돈나는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깍지가 풀린 순간 트레이너의 몸이 뒤로 날았다. 그녀의 손에 밀쳐져 그대로 중심을 잃고 벽에 등부터 충돌해버렸다.

“아니잖아요?”

“젠틸돈나ㅡ”

“부르지 마.”

젠틸돈나가 달려들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 그대로,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냉정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주저앉게 만들었다. 그대로 어깨를 잡아 바닥에 메다 꽂고, 침대 머리맡으로 걸어가 알람시계를 집어들었다.

“골드십이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몇몇 트레이너들은 커리어에 5번, 중요한 날을 반복할 수 있다고.”

그는 대답 대신 숨을 고르며 고통을 참는 소리를 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말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젠틸돈나의 입에 허탈한 웃음이 걸렸다. 뜨거운 분노, 차가운 배신감,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그저 공허하고 허탈한 느낌처럼 턱 걸린 숨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양 손이 알람시계를 집어들었다.

“헛소리라고 생각했죠.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젠틸돈나의 힘 탓에 그녀의 손에 눌린 것들은 압축되어버린다고.  하지만 그건 그녀가 힘조절을 의식하고, 완만하게 지속적으로 힘을 가하기 때문이다. 젠틸돈나의 손가락이 알람시계의 유리를 파고들었다. 빠드득대는 소리와 함께 목재 알람시계의 둥근 프레임이 뚫려 박살나고, 바늘이 일그러지고, 안의 메카니즘이 분해되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평범하게 그녀가 힘을 가하면, 물건은 부서진다. 학원에서 만들어 지급하는 특수한 시계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골드십이 그런 말도 하더군요. 당신의 방에 아침 6시로 맞춰진 목재 알람시계가 있을 것이고, 그 안에는 배터리가 없을 것이라고.”

투두둑, 젠틸돈나의 손 안에 있던 나머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배터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차갑게 웃었다.

“그 모든 것이 헛소리일 확률과, 제가 트레이너실 캐비넷에서도 본 적 있는 이 시계로, 당신이 실제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확률, 어느 쪽이 높다고 생각하시나요?”

“......후자가 압도적으로 높게 되겠군.”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갑작스러웠을 뿐 충격 자체는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다. 젠틸돈나는 힘조절을 강박적으로 주입받았다. 티아라에 도전하는 우마무스메들의 품격, 아가씨로 자라온 그녀의 기질, 그 모든 것이 사람을 해하기에는 너무 물렀다. 그럼에도 정강이가 아직 쑤시는지 그가 다리를 몇 번 까딱였다.

“내 지시가 역효과가 날 지도 모른단 생각은 했었어. 마지막까지 망설였지. 너는 때때로, 내 말에 너무 따르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젠틸돈나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 눈을 바라보고 트레이너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널 위해서야. 네가 이기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야.”

큰 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뺨을 때렸던 손바닥을 바라보면서, 젠틸돈나는 자꾸만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삭이려 이를 악물었다.

“날 위해서라고요?”

“그래.”

“정말 날 위해서였다면, 내게 그렇게 말하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었어요.”

그의 눈에 피어오르는 의문을 보고 젠틸돈나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와 더 문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팔을 잡아 앞으로 던져버렸다. 그 와중에 그녀의 팔이 문틀에 부딪혔지만 문틀이 부서질 뿐이었다. 침실 문을 넘어 거실 안쪽에 던져져 구르는 그에게 다시 걸으면서 젠틸돈나가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그런 게 있다는 걸 나한테 알리고,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먼저 상담했어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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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구타였다. 그가 자세를 잡고 일어나기 전에 다시 한 번 가해진 추가타에 중심을 잃고 쓰러진 그를 몇 번이나 걷어찼다. 젠틸돈나는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고 이마를 맞대왔다.

“우리 사이에, 그래도, 대등한 관계와 교류가 있다고 착각했어요. 당신이 날 그렇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다리를 걸어 쓰러트리고 젠틸돈나가 웃었다. 자신을 비웃는 듯한 소리였다.

“아니야. 당신은 날 장기말로 보고 있었을 뿐이야. 이렇게 대하고, 저렇게 대해서, 적절히 지시해 승리하게 만들고 당신의 능력을 증명할 도구 말야.”

“절대로 그런 게ㅡ”

다시 한 번 젠틸돈나가 그를 잡아 벽 쪽으로 내던졌다. 물건처럼 내던져져 바닥을 굴러 벽에 부딪힌 그를 향해 다가가면서 그녀가 어깨를 풀었다.

“당신은 당신 주위로 연막을 치고 절대 본심을 말해주지 않았지. 난 당신이 보여준 부분만을 본심이라고 착각하고 놀아났어.”

“......그게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은데.”

“후후. 뭐, 이제 알게 될 거야.”

젠틸돈나는 절대 폭력을 쓰지 않는다. 그녀가 받아온 교육이기도 했고, 우마무스메로서 듣는 주의사항이기도 했고, 티아라에 걸맞는 행동거지이기도 했다. 이유를 굳이 하나 더 꼽자면.

“원한다면 반격해도 좋아. 이유야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극상을 일으킨 괘씸한 담당이니까.”

폭력은 야만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무 쉬운 방법이다. 폭력은 간단하게 상황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고, 당하는 자와 가하는 자 모두를 극한으로 몰아간다. 극한 상황에서 사람의 본질이 튀어나온다. 본바탕, 짙게 덧칠된 그 사람의 이미지 너머 자리잡은 밑그림을 드러낸다.

“당신이 그래도 본바탕은 신사라고 믿었던 내가 바보였지. 이 양아치.”

젠틸돈나가 몸을 일으키는 그의 다리를 다시 한 번 걷어차 쓰러트렸다. 어깨를 들어 벽에 몰아붙인 뒤 무자비하게 주먹을 꽂아댔다. 이따금 빗나간 주먹이 벽에서 못을 박는 듯한 소리가 나게 했다.

“당신과 대화로 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내가 멍청했다고.”

화가 끝까지 치밀어오르자 오히려 냉정했다. 나무 표적을 때리는 것처럼 침착하게 그의 몸에 주먹을 날렸다. 목인장으로 기술을 연마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의 몸은 이리저리 튀고, 거기 맞춰 그녀의 몸이 다시 타격을 가했다.

“사람이 무례해질 수 있는 게, 머리가 깨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지?”

“......젠틸돈ㅡ”

“어디 한 번 깨져 봐.”

그의 몸이 다시 한 번 날아 소파에 부딪혔다. 거실 이곳저곳을 그의 몸이 꼴사납게 날았다. 구르고 부딪히면서 쿵, 쿵, 하는 소음이 났다. 그가 이따금 고통에 내는 소리, 참기 위해 이를 악무는 소리만 들렸다. 여전히 그는 자신이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는지 반격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사람을 죽이려 할 리가 없고, 여전히 힘조절을 하고 있어 중대한 타격은 입히지 않을 것이라 믿는 모양이었다.

“화가 나지도 않나요? 당신의 수준에 최대한 맞춰주고 있어요. 당신이 반격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라고요.”

중대한 타격이야 입히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여지를 주려고 했다. 그의 본심이 듣고 싶었으니까. 그의 밑바닥을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이 없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순하게, 쓰러진 채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요.”

그녀가 그의 앞에 몸을 굽혀 앉았다. 그의 팔을 주먹으로 치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젠틸돈나가 살짝 웃었다.

“아픈가요?”

“......안 아프겠냐?”

그가 대답하듯이 따라 웃었다.

“뼈 맞았다. 진짜 그만 하자.”

“뼈를 때린 거예요.”

그녀가 반대쪽 어깨에 손을 올려 그의 몸을 고정하고 주먹을 들어올렸다.

“몇 번 맞아야 부러질까요?”

“부러져서 그만할 거라면, 세도 괜찮아.”

“하나.”

둔한 타격음과 함께 그가 몸을 벌컥이며 짧은 소리를 냈다. 꽤 많이 아픈지 이를 악물었다가, 풀어지듯이 웃었다.

“그래. 네가 왜 빡쳤는지 알겠고, 나도 빡친다. 존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둘.”

다시 한 번 같은 곳에 둔한 타격음, 억 하는 소리. 슬슬 감각이 마비되는지 그는 이번엔 이를 악물지 않았다.

“용서하기 많이 어렵지?”

“셋.”

여유 있어 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본격적인 위협이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끄으윽, 하는 소리를 길게 뺐다. 뭐라 얘기하기 전에 네 번째 주먹을 꽂았다.

“......중요한 레이스잖냐. 해외원정의 시금석이었다고.”

“다섯.”

“네 강함을 증명해야 했던 자리였다고. 그걸 망쳤어.”

“여섯!”

“내가 부족해서 망친 거라고!”

“일곱!”

“그 1착 자리에는 네가 있어야 했는데!”

“아니야!”

그녀가 그의 몸을 들어올려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던졌다. 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가 엎어져버렸다. 타격이 상당히 컸는지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쓰러져 신음할 뿐이었다. 그녀가 그의 발치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 자리의 주인은 골드십이예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네가......”

“제가 아니고, 골드십이었다고요. 골드십이 저보다 강했고, 그 결과 이겼어요. 그것 뿐이라고요.”

“......이 썅년이......”

어디서 솟구친 지 모르는 힘으로 그가 비틀비틀 일어났다. 휘청거리면서도 그를 노려보는 젠틸돈나를 향해 이글거리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건 잘못된 거라고. 바꿔야 하는 거라고.”

“왜요?”

“왜냐면, 최강은 너고.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면 이겼을 테니까.”

“......아직도 모르네요.”

젠틸돈나가 주먹을 들어 망치처럼 그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몇 번이나 내지르면서 휘청거리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잘못도, 당신의 실수도, 그 모든 것이 시험받는 그게 레이스예요. 그렇게 시험받은 그게 나예요.”

“......아니야.”

젠틸돈나의 주먹이 막혔다.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고개를 몇 번이나 저어 부정했다.

“내가, 내가 바꿀 수 있어.”

“당신이 바꾸려는 건 당신의 실수 뿐이예요.”

“그 결과 네가 이길 수 있다고.”

“만약에 당신이 실수하지 않았는데도 패배했다면, 당신은 결과를 바꾸려고 했을까요?”

“당연한 거 아니냐?”

그녀의 주먹을 홱 밀어 떨치면서 그가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그게 바로 저번 경기였는데.”

젠틸돈나의 안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대로 그에게 밀어붙여 파고들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에게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있다는 건 때때로 느끼곤 했다. 그게 지금 생생하게 튀어나오자, 그녀는 심하게 모욕받았다 느꼈다. 자제력을 조금 잃었던 것 같다. 잠시 블랙아웃이 있은 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녀는 다시 한 번 쓰러진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당신, 살아 있나요?”

“......그래.”

“잘 들으세요. 당신의 본심을 막 알았거든요.”

젠틸돈나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교복 리본을 잡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장기말처럼 생각하는 거군요. 절 당신 손 아래 두고 싶은 거군요. 명령하면 의심 없이 충실하게 따르는 개처럼 말이죠.”

웃음소리와 함께 스윽 하고,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가벼운 소리와 함께 엎어진 그의 앞에 교복 상의가 너풀거리며 떨어졌다. 뒤이어 치마가, 멜빵으로 고정하는 이너가 떨어져내렸다.

“절 복종시키려고 했죠? 당신 앞에 배를 까고 누워, 충실하게 당신의 뜻을 요구하는 개로 만드는 게 당신의 이치인 거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브래지어가 떨어지고, 젠틸돈나가 다리 한 쪽을 잠시 들어올렸다. 마지막 속옷 조각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굴렀다. 그녀는 여전히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일어나서 제 배를 건드린다면 그렇게 해 드리죠. 귀부인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게요. 당신이 시간을 돌리면서까지 이루려고 했던 목적을 기꺼이 들어드리겠다고요.”

“.......”

“당신 앞에 알몸이 되어 배를 까고 있다고요. 해 봐요. 당신이 바라던 게 바로 앞에 무방비하게 놓여 있다고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괴로운 듯한 소리를 냈다. 몸의 일부분이 경련하고 있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동작이었다. 젠틸돈나는 10초를 천천히 셌다. 여전히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옷을 다시 주워드는 동안에도, 여전히.

“제가 옷을 다 입으면, 기회는 끝이예요. 덧붙여 당신과도 끝이예요. 계약을 해지할 거예요.”

아마 타격이 많이 큰 모양이다. 그의 사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몸을 일으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천천히 그녀의 옷이 제 자리를 찾아갈 무렵, 갑자기 노크 소리와 함께 벨소리가 들려왔다.

“~~ 트레이너 씨, 계세요? 괜찮으신가요? 문 좀 열어 보세요!”

여자의 큰 목소리에 젠틸돈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야카와 타즈나가 문을 두드리며 트레이너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소란을 피운 모양이었다. 주위의 누군가가 통보를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일단 소파 뒤에 숨어 옷을 입으면서 쓰러진 트레이너 쪽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라면 타즈나 씨가 문을 따고 들어올 것이다. 쓰러진 트레이너와 자신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러면 그 뒤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부지런히 생각했다.

“~~ 트레이너 씨, 문 좀 열어보세요! 하야카와 타즈나입니다!”

젠틸돈나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타즈나 씨의 노크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무렵, 갑자기 읏차,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트레이너가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잡아 열고 있었다.

“타즈나 씨. 무슨 일이신가요?”

“아, 괜찮으시군요. 아니, 괜찮지 않으신가요? 얼굴에 상처가 있는데요.”

“아아, 좀 바보같은 일이 있었어요.”

트레이너는 평범하게 타즈나 씨를 응대했다. 일방적인 구타와 폭행 따위는 없었다는 듯 대답하는 그를 타즈나 씨는 의혹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말로요? 안에서 물건이 쏟아지고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는데요. 부서지는 소리도요.”

“뭐, 오늘 G1에서 패배했으니까요. 좀 화가 많이 났거든요.”

“여자 목소리도 들렸다는데요.”

“기분을 달래는 데는 꼭 필요하죠.”

“정말 괜찮은 거 맞으시죠?”

“그럼요. 이제 조용할 겁니다. 제 기분도 풀렸고.”

몇 번이나 끈질기게 확인하던 타즈나 씨는, 트레이너에게 정중하게 주의를 주고 복도를 벗어났다. 문을 닫은 트레이너가 몸을 쭉 펴 기지개를 켜고, 소파 뒤를 향해 실실 웃었다.

“기분은 다 풀렸냐? 옷도 다 입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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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너와 젠틸돈나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말이 없었다. 어색했다. 그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녀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외부 충격이 오고 나자 행동이 조심스러워진 것도 있고, 오히려 이성적으로 변한 것도 있었다. 자신이 냉정한 상태라 여겼지만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용케 움직일 수 있었네요.”

“이 정도 맷집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

“누구한테서요?”

“우리 엄마한테서.”

기분이 좋은지 그가 킥킥 웃었다. 조심스러운 듯 과감한 듯 그녀를 향해 돌아앉아, 소파에 팔을 올려 젠틸돈나의 목 뒤에 두었다.

“엄마에 비하면 네 주먹은, 뭐 계집애 앙탈이지.”

“그런 것 치고는 많이 아파보이던데요.”

“계집애 앙탈이라도, 주먹은 주먹이니까.”

한바탕 쏟아내고 나자 조금 후련해지기라도 한 건지, 젠틸돈나는 그의 말에 웃을 여유까지 생겼다. 그가 조금 더 가까이 앉으면서 물었다.

“이제 다시 제대로 얘기할 수 있겠어? 나도 반성 좀 했는데.”

“당신이 뭘 잘못했는지 제대로 반성한다면요.”

“그래, 좋아. 내게 아버지가 계신데.”

“......네, 그래요. 물론 그렇겠죠.”

“왜 거기서 놀라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젠틸돈나에게 그가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그녀는 그가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려도 거절하지 않았다.

“갑자기 집안 얘기를 하니까 놀라서 그랬을 뿐이예요. 그래서?”

“자기 손에 모든 걸 쥐고 판을 짜고 통제하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엄청나게 기분 나빠하고.”

“당신이네요.”

“나는 그게 엄청나게 싫었는데. 나도 그 사람한테는 장기말이었거든.”

“그치만 당신이네요.”

“그래. 보고 자란게 그렇다보니 방법론 면에서 약간 닮았던 모양이야.”

“약간?”

“어쩌면 보통 이상으로. 하지만 확실히 난 달라.”

“어떻게 다른데요?”

그가 완만하고 넓은 곡선을 그려 웃었다.

“나는 잘못한 걸 고칠 줄 알지. 그리고, 미안해.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손을 흥, 하는 소리로 쳐내고 젠틸돈나는 팔짱을 꼈다. 하지만 좋은 징조였다. 그녀가 그에게 이야기할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녀를 내버려두고 혼자 중요한 결정을 했던 것을, 그저 무지함으로 치부하고 새로 대화할 준비를 갖출 수 있었으니까.

대화가 조금 길어졌다. 냉장고에서 당근 주스를 한 병씩 꺼내 나눠마시면서 둘은 담아두었던 것들을 서로에게 풀어놓았다. 확실히 폭력보다 대화는 어렵지만, 더 섬세한 방법이었다.

“그냥 널 이기게 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본심을 털어놓고 그가 인상을 팍 쓰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잖아. 골드십한테 지는 건 더 싫었다고.”

“저도 골드십한테 지는 건 더 싫어요. 하지만 이번엔 그녀 편을 들어야겠네요.”

생각할 시간을 줄 겸 젠틸돈나가 몇 마디를 더했다.

“골드십은 그만한 강함을 보였어요. 그 결과 이겼어요. 마땅한 존중을 보여야 하죠. 그걸 앗아가는 건 골드십을 모욕하는 거고, 또 저를 모욕하는 거예요.”

“......너를 모욕한다는 점은 동의할 수 없는데.”

“레이스의 과정은 준비과정과 떼어놓을 수 없어요. 결과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것들을 놓고 시험한 결과 골드십이 승리했고, 제가 패배했어요. 그 승리가 지금까지의 골드십인 것처럼, 그 패배 역시도 저예요. 둘은 달라 보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의 다른 면이니까요.”

“음.”

“골드십에게서 승리를 앗아가는 게 내키지 않는다면, 제게서 패배를 앗아가지 마세요.”

결의에 찬 눈이었다. 강함을 추구하는 그녀, 최강을 입증하길 원하는 젠틸돈나, 그 자리에 자신이 없더라도 마땅히 강자에게 존중을 표현하길 원하는 귀부인이 있었다. 남에게 엄격한 만큼,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하다. 자신의 패배에도 엄격하다. 그녀의 눈 속에서 답을 찾았는지 트레이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후회되는 것도 같았다.

“그런가. 그런 문제를 상의도 안하고 정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한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소파에 기대 웃었다.

“내가 정말 씨발놈처럼 느껴지는걸.”

“말을 가려서 하세요.”

“개새끼처럼 느껴지는걸.”

“그래요. 그 정도면 적당해요.”

포기한 듯 웃으면서 젠틸돈나는 그의 팔을 들어 어깨 위에 다시 올려주었다. 가볍게 당기는 움직임에 몸을 맡겨 가까이 붙어 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리저리 확인했다.

“괜찮아요? 심하게 다치진 않았어요?”

“뭐, 난 괜찮아. 오히려 이제 믿겠지?”

“뭘요?”

“네가 뭘 해도 내가 그다지 화내지 않는다는 거.”

문득 조금 더 일찍 그에게 자기 뜻을 내세웠다면 어땠을까 싶은 말이었다. 그가 예스맨을 싫어한다는 건 진심인 것 같았다. 이런저런 미련이 남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도 미혹이 될 뿐이다.

“앞으로는 더 잘할게요.”

“그래. 아쉽지만 뭐, 앞으로 잘 하라고.”

“그리고, 미안해요. 좀 맞으면 당신이 술술 풀어놓을 줄 알았어요.”

“아마 그랬으면 날 더 못 믿었을 거야. 극한 상황에서 사람은, 상황을 모면하는 데에만 집중하거든.”

“그 말도 맞네요.”

“내가 굳이 상황을 모면하려 하지 않았단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표정은 홀가분하게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진중한 느낌을 주는 눈빛이 싫지 않았다.

“쉬운 해법을 찾지 않았다는 것도.”

“고마워요.”

“네 배에 손대지 않았단 것도.”

“그거 말인데요.”

젠틸돈나가 그를 향해 체중을 조금 더 실었다. 취약한 상태에 있는 그의 몸이 밀려 소파에 누워버리고, 그녀가 그 위에 엎드려 서서히 기어올랐다.

“솔직히 이번에, 트레이너로서의 당신은 최악이었어요.”

“그래. 인정할게.”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당신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그런가, 그런가.”

“옷을 다 입으면, 계약 해지가 되어버리니까.”

그녀가 조금 더 기어올라와, 교복 리본의 매듭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만 살짝 풀 수 있게 해드릴 게요.”

그의 손이 그녀가 이끄는 대로 올라와 리본의 매듭을 반쯤 당겨 흐트러트렸다. 이걸로 옷을 다 입은 것이 아니게 되니, 계약 해지는 당연무효다. 매듭도 조금 풀렸고, 둘 사이의 감정도 조금은 풀렸을 것이다. 앞으로 둘의 관계가 어떻게 매듭지어질 지는, 다시 둘에게 달렸다. 친밀하게 몸을 붙여 소파에 기대, 마주보고 웃던 중 젠틸돈나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엉덩이 만지지 마세요! 진짜 미쳤어요?”

“아, 왜!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 w”

버럭 소리를 높여 짜증을 내는 그녀의 얼굴을 양 손을 올려 감싸주면서 트레이너가 이를 드러내 웃었다. 그녀는 그녀대로 언성을 높여 반론했다.

“나쁘지 않았다고요! 좋았다는 것과는 한참 멀어요!”

“그런가아......”

기죽은 척 트레이너는 슬픈 강아지같은 표정을 지었다. 부쩍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태도가 크게 나쁘지 않았다.  젠틸돈나는 볼을 크게 부풀렸다.

“그렇게 인상 구기지 마세요. 당신은 바보같이 웃는 게 훨씬 보기 좋아요.”

“그런가, 알았어 w”

부풀린 볼을 손가락으로 눌러 바람을 빼 주는 그의 양손 위에 그녀도 손을 포개두었다. 히죽히죽 웃으며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자신도 슬슬 제정신을 잃어가는구나, 이 남자와 비슷해져가는구나, 한탄인지 모를 생각을 하면서도 젠틸돈나는 굳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데요. 지금 하세요.”

“www”

“지금 당장.”

“좋았다는 말은 나중에 하게 해줄게 w”

“정말......”

귀를 쫑긋거리면서 젠틸돈나가 그의 가슴에 편안하게 기댔다.

“당신 정말 싫어요.”

“ww 아, 거기는 좀 아픈데, 다른 데로 가 줘.”

즐겁게 꺽꺽 웃는 것도 부담이 가는데 무게추까지 얹는게 불편한지 뒤척이는 그를 막는 것처럼, 젠틸돈나는 볼을 더 꾹 힘주어 눌렀다.

“당신 정말 싫어요!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