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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 늘 있는 리코뾰이
카시모토 리코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트레센 학원의 대다수가 떠올리는 이미지란 냉정하고 엄격한 인상의 여성일 것이다. 조금 더 가까이서 겪어본 사람의 머리엔 저질 체력, 처참한 운동 능력이 떠오를 것이다. 거기서 조금 더 가까운 사람에게, 이제와서는 모두 꽤 낯선 표현이 되었다.
“저기, 공 좀 주워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바닥에 불규칙하게 튀기며 굴러오는 축구공을 발견한 카시모토 리코는 짧게 그를 제지하고 공을 향해 한 걸음을 뗐다. 그녀의 눈이 공을 따라 위아래로 짧게 움직였다. 적당한 순간 구두를 신은 발이 바닥을 향해 펴지면서 올려 차자, 가벼운 타격음과 함께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요.”
팔짱을 끼고 공의 궤적을 감상하는 그녀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로 보아 굉장히 흡족해하고 있을 것이다. 공이 처음 날아온 장소로부터 낙구 지점까지 수 미터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되받아 찰 수 있었다는 자체가 그녀에게는 하나의 성취였다.
“리코.”
“뭔가요.”
“안아도 돼요?”
처음과 끝을 지켜본 트레이너에게도 하나의 경이와 같은 성장으로 느껴졌다. 막 처음으로 걸음마를 뗀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감동이 있었다. 일상적인 허그조차도 허락을 구할 만큼 경이에 떠는 목소리가 리코는 싫지 않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등 뒤에서부터 감싸오는 팔에 그녀는 만족스러워했다.
“새삼스럽네요.” 그녀는 배 근처에 모여든 그의 손을 잡았다. “허그 정도는 말없이 하셔도 괜찮잖습니까.”
“감동적인 순간을 방해할까봐요.”
“감동적이긴 하네요.”
리코는 작게 웃으며, 그녀가 차준 공을 주워들고 뛰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원래 한 번에 할 수 없었는데 말이죠.”
“어디까지 강해지려고 그러세요?”
“저도 스스로의 성장세가 두렵습니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그의 품에 자리잡듯 기대 팔을 풀지 못하게 하고, 리코는 이 순간을 조금 더 만끽했다. 남들이 보면 코웃음을 칠 상황이 그녀에게는 커다란 한 걸음이었다. 그의 손등 위를 웃음소리만큼 부드러운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녀의 고개가 살짝 내려가는가 싶더니 손등에 검지손톱이 가볍게 찔러드는 느낌이 났다.
“당신과 맺어지고부터 일이 전부 잘 풀려요.”
“리코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거죠.”
“당신은 모든 사람을 담당 우마무스메처럼 대하시네요.”
“아마 담당을 리코보단 엄격하게 대할 거라 생각해요.”
그의 오른손이 재킷 안쪽으로 살짝 들어왔다. 리코의 허리, 벨트가 감긴 살짝 위쪽의 살을 장난처럼 건드리고 있다. 재킷에 가려져 있다곤 해도 엄연히 길에서, 금방이라도 안쪽으로 파고들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손등을 콱 꼬집었다. 대담한 행동을 벌주려는 건 아니었다. 주의를 끌려는 것이었다. 잔잔한 감동의 순간을 가져다준 사람에게 제대로 감사할 수 있도록.
“그런 뜻이 아니예요.” 그 증거로 리코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당신은 당신이 대하는 사람들을 성장시켜요.”
“사람은 다 성장하는걸요.”
“한계라고 생각했던 이상으로요.”
“어느 순간 한계라고 생각하는 대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됐겠죠. 자연스러운 노력이 쌓이면서요.”
“할 수 있을 거라 믿게 된 것도 당신 덕분일거예요.”
“온 세상이 증거를 가져다줘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죠. 리코가 그렇게 믿었다면, 그건 리코 덕분인 거예요.”
“그냥 평범하게 인정하시면 무슨 일이......” 까지 말하고 그녀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가 시간을 들여 입꼬리를 올렸다. 퍽 바보같은 대화다. 따지고 보면 그저 서로에게 공을 돌리고 감사할 뿐이다. 겸손은 트레이너들의 덕목일 뿐이다.
“하아, 아닙니다. 됐습니다.” 하고 가볍게 짜증을 내는 것도, 결국은 짜증이라기보단 주의를 끄는 목적이 되어버린다.
“리코, 화났어요?”
그가 달라붙어오는 데는 충분했다.
“안 났어요.”
“정말요?”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에는 예민한 주제에, 때로 그 내막까지는 제대로 살필 줄 모르는 바보. 그러나 지금은 그냥 바보로 괜찮다. 깊이 생각하는 대신 바로 반응해주는 것만으로 괜찮다. 그녀에게 변함없는 관심을 쏟는다는 사실이 안정감을 준다. 한결같다는 점을 재확인했을 때, 카시모토 리코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안 나긴 했는데......”
허리에 붙은 손을 떼어 양 손에 담아두고 리코는 작게 웃었다.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손바닥을 위로 드러내고, 엄지와 중지로 감쌌다.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오르내렸다.
“안나긴 했는데, 뭔가요?”
그는 위아래로 짜이듯 하는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물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다정한 스킨십으로 보이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 너머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가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리다 리코는 손끝을 손가락 사이에 꽉 쥐었다. 손가락 뼈의 윤곽을 타듯 힘있게 쓸어내리며 웃었다.
“당신에게 벌을 주긴 해야겠어요.”
“달게 받겠지만 살살 부탁드려요.”
“살살 주면 그게 벌인가요.”
리코의 검지와 중지가 가볍게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붓질을 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부드러운 손끝의 지문이 일으키는 간지러운 느낌 뒤로 잘 정돈된 손톱이 긁혔다. 그의 손바닥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다 보이진 않지만, 웃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할까요?”
손바닥을 향해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어 그녀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벌을 주려고 일찍 퇴근하는 건가요?”
그의 말에 리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손 안에서 앞뒤로 미끄러졌다. 잡아두려는 그의 손틈을 비집고, 손톱 끝이 손가락 마디를 찌르고 있었다. 쿡쿡, 쿡쿡, 규칙적인 리듬으로 집요하게.
“......늦게까지 기다리기 싫어요.”
“그런 거라면 힘내야겠네요.”
그가 리코의 손을 가볍게 잡아 끌었다. 슬슬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이목을 피해 조금 먼 곳으로 나온 만큼 휴식시간은 짧다. 처음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질질 끌려가다시피하던 그녀였지만 차에 탈 무렵엔 언제나의 업무용 정색을 갖추고 있었다. 그게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퇴근을 노려라도 보려면 6시간 정도의 일과가 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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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카시모토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자판기쪽에서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서던 후배 트레이너가 리코를 알아보고 인사해왔다. 후배의 뒤편, 캔커피를 마시면서 그녀 쪽을 바라보는 얼굴을 힐끗거리느라 반응이 조금 늦어버렸다. 캔커피는 마시지 말라고 LANE을 보내놨건만, 생각하면서 리코는 후배 손에 들린 태블릿으로 눈길을 돌렸다.
“뭔가 얘기가 잘 되지 않았습니까?”
“저 선배한테 질문할게 있었거든요. 이전 레이스 관련해서요. 그랬는데 괜찮다는 한 마디로 끝나버렸네요.”
화면이 제시되고서야 리코는 후배의 어깨 너머를 노려보는 것을 멈췄다. 투덜거리는 후배에게 어쩌면 자기 표정이 딱딱해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가볍게 팔짱을 끼고 입꼬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만들어보였다.
“어쩌면, 질문할 사람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깊은 속뜻이 아주 없는 말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후배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할 만한 재료가 없었던 것은 다행이다. 그렇게 깊이 따지는 성격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리코의 표정 연기가 뛰어났거나.
리코에게 같은 질문이 날아온 것을 볼 때, 속 편하게 해석해준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론 상관 없다. 다시는 그에게 질문하지 않을 테니까.
“캔커피는 마시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사주는 성의가 있는데 아깝잖아요.”
후배가 멀어진 뒤에야 리코는 신중하게 자판기 쪽으로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던 그는 손인사에 바로 추궁이 날아오자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시선은 피하는 주제에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불평을 늘어놓는 걸 보아 기가 죽은 건 아니다. 불쌍한 척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싫다. 리코는 100엔 동전을 두 개 집어넣어 똑같은 캔커피를 뽑아 그에게 내밀어 흔들었다.
“그건 이리 주십시오.”
“대체 이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무 의미가 없다면, 왜 새 것을 마다하고 헌 것을 드시죠?”
“......방금 의미가 생겼네요.”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일그러트리며 그는 캔커피를 살짝 기울여 리코의 표정을 확인했다. 캔을 쥔 손가락에 가볍게 힘이 들어가 손끝이 말리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후배의 질문을 받으면서 어깨 너머로 보였던 리코의 표정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간 무표정한 얼굴을 향해 그가 캔커피를 든 손을 뻗었다.
“후배 트레이너한테 얻어먹고 얘기 좀 하는걸로 질투하는 건가요?”
“질투한 적 없습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캔을 잡기 직전, 가볍게 손이 뒤로 물러나 헛잡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묻는 듯한 눈을 향해 그의 손이 다시 나아오고, 절묘한 타이밍에 다시 물러났다.
“지금 리코 표정을 누가 보면 무섭다고 할 걸요?”
“평소랑 똑같습니다만.”
아마 리코의 말이 맞을 것이다. 표정을 굳히고 다니는 모습이 익숙한 그녀의 특성상, 이 정도로 찌푸린다고 이상함을 느낄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가 내민 캔을 잡겠다고 몇 번이나 시도하는 모습이, 그리고 그런 그녀를 슬금슬금 낚듯이 팔을 움직여 가까이 오게하는 그의 모습이 더 이상할 것이다.
“아까도 엄청 째려보던데요.”
“째려보지 않았, 아!”
세 번째 헛잡고 리코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상당히 기분이 언짢은지 그녀의 구둣발이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때렸다. 어깨가 들릴 정도로 깊이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그가 다시 내밀어온 캔을 무시하듯 자판기에 기대 말했다.
“하아. 마음대로 하십시오. 당신에게는 그냥 아무럴 것도 없는 일이었는데 제가 신경을 왜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트레이너는 절대로 당신에게 순수한 의도로 질문한 것이 아닐 테지만요.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아오하루 레이스를 들고 오는 저의란 뻔한 것일 테지만요. 하지만 당신께서 전혀 신경쓰지 않으신다니 저도 신경쓸 이유 따위는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하는 동안 리코는 그를 이따금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말에서 어떤 감정이나 의도를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다. 가볍게 마음을 거슬리게 하면서도, 그만큼 뱃속에서 살랑대는 느낌이 들게 했다. 그가 캔을 다시 내밀며 히죽거렸다.
“그러지 말고, 두 번 정도만 더 낚여주지 않을래요?”
“제가 왜......” 하고 항변하는 리코의 눈에도 아까까지는 쭉 뻗어야 했던 그의 팔이 살짝 구부러져 있단 정도는 보이고 있었다. 확실히 거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짜증이 나서 그런가, 설렌다기보단 바보같은 사실이었다. 여기서 굳이 이럴 필요도 없다. 야근하는 날도 아니고, 본관이 그렇게 한산한 시간도 아니다. 집에 돌아가면 그만이다. 시선과 카메라가 도는 곳에서 애들 장난같은 짓을 할 필요는 없다.
아니, 어쩌면 애들 장난같은 일이니 그의 흥미를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마시고, 네? 네? 두 번만, 두 번만.”
“정신 사납습니다. 얼굴 근처에서 흔들지 마십시오.”
리코의 코 근처까지 와서 빙빙 도는 캔을 피해 리코는 고개를 돌렸지만 캔이 따라왔다. 기껏 평온하게 가다듬은 숨이 흐트러지고,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그에게는 짜증을 참는 모습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100%는 아니다.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유치한 장난은 유치한 만큼 사람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렇기에 이기고 싶어진다.
“그러지 마시고, 두 번만 더 놀자니까요?”
“그만 하십시오.”
라고 말하는 리코의 눈은 아까부터 그의 손을 쫓고 있다. 애초에 트레이너들 역시 승부욕의 덩어리다. 그가 완전히 방심할 때를 노려, 팔이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홱 잡아챌 생각이었다. 홱 돌아가는 리코의 고개에 그가 세상 모르고 즐겁게 웃을 때 상황이 급변했다. 그녀의 손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의 손이 리코의 손아귀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빠져나왔다. 다급하게 속도를 낸 것이었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제동이 걸리면서, 캔의 내용물이 영향받는다. 찰랑거리면서 쏟아진 커피가 그의 손과 소매를 적셨다.
“어, 아. 이런.”
조금 망연한 얼굴로 뚝뚝 떨어지는 커피 방울을 바라보는 그를 향해 리코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도발을 할 거면 최소한 뒷일 정도는 생각해주십시오.”
“......리코야말로, 잡지도 못할 거면 뒷일 정도는 생각해줘야죠.”
적반하장으로 툴툴대는 목소리와 표정이 맞지 않는다. 입과 머리가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됐어요. 닦아주세요.”
하고 그가 말했을 때 리코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눈이 더욱 솔직한 법이고, 그의 눈이 그녀의 가슴께에 가 있는 걸 알았다. 그녀가 손수건을 넣어두는 포켓을 바라보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미리 생각한 뒷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이 끌어오려는 의도에만큼은 충실했다.
“화장실에서 스스로 닦으십시오.”
할 말은 끝났는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뚝뚝 떨어지는 것은 멈췄지만 여전히 피부와 옷의 섬유에 맺혀 스미는 캔커피를 방치하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같은 곳에 머물고 있다. 시선만으로 포켓에서 손수건을 뽑아낼 수는 없다. 그런데도 마치 그러려는 듯한 눈빛이다. 들어올리고, 집고, 잡아당기려 하는 듯한 열망이 눈빛을 조용히 일렁이게 하고 있었다.
“......진짜.” 리코로서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부응하듯이 손수건을 빼드는 수밖에 없었다. 으음, 하고 불편한 소리가 새어나왔을 때는 볼이 살짝 상기되었다. 그의 손에서 커피를 낚아채 옆에 두고 눈썹을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고집부리면 기분이 좀 나아집니까?”
“질문할 사람이 잘못됐어요, 리코.”
“지금 이 자판기 앞에 당신 말고 누가 있......”
리코는 순간 자신의 모습을 강하게 의식했다. 반 걸음만 떼면 발을 밟을 수도 있을 거리에서, 그의 소매를 붙잡고 손에 묻은 커피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있다. 손수건 아래, 캔의 차가움에 식어 매끈하게 느껴지는 그의 손바닥이 느껴진다.
이제와서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장소라면 그랬을 것이다. 멀리서 큰 소리로 떠드는 우마무스메들의 목소리에 리코의 신경이 곤두선다. 셔츠 소매 아래 가볍게 긴장한 팔근육과, 그 속으로 피의 흐름까지 알 것처럼 손 끝의 감각이 예민해진다.
그녀는 멋쩍게 손수건에 손가락을 눕혀 앞으로 천천히 밀었다. 그의 피부 위를 손수건이 미끄러지는 감각이 손끝에 울렸다. 얇은 면 손수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바닥이 맞닿고 있다. 의식한다는 건 의식 없이 하던 일에 필터를 씌운다. 원래 의미와 다소 동떨어진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리코.”
“예.”
“아무렇지도 않다고 고집부리면 기분이 좀 나아지던가요?”
“어떻게든 제 입에서 질투했다는 말이 듣고 싶으신가요?”
웃음기가 옅어진 그의 낮은 목소리도 그런 필터링을 부채질했다. 주위는 저녁시간 직후의 부산함으로 가볍게 들떠 있었는데, 그와 그녀 주위 공기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주위 노이즈를 거르고 서로의 목소리만 크게 들리게 만들었다.
“아뇨.”
그는 손등과 손가락을 닦는 손수건에 맞춰 팔을 움직였다. 짧게 부정한 다음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문장의 모양을 잡으려는 것처럼 입을 우물거렸다. 옅은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손수건과, 그걸 쥔 리코의 손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코가 굳이 고집부리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으면 좋겠어요.”
“......”
“질투는 귀엽지만, 가끔은 마음을 답답하게 하거든요.”
“저도 가끔은 답답합니다.”
“왜요?”
리코는 대답 대신 그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올려놨다. 커피는 이미 깨끗이 닦여 약간의 끈적함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손수건에 걸리는 약간의 저항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지만, 거슬리는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을 왕복하게 만들었다.
“어떨 때는 일 생각밖에 못하는 무뚝뚝한 여자다가도, 어떨 때는 이렇게 피곤하게 구는 것밖에 못하니까요.”
한탄한 것은 리코인데, 한숨을 쉰 것은 그였다. 그 점이 가끔 답답해요, 라는 그의 말에 리코의 고개가 조금 숙여졌고, 거기 변명하듯 그가 부연했다.
“상대가 단점이라 생각해도 저는 장점이라 생각한단 걸 납득시키기가 꽤 어렵거든요.”
동일한 것을 놓고 평가가 정 반대로 갈릴 수도 있다. 자기 단점마저 싫지 않게 여기게 되는 게 사랑이라고 하지만, 반대로 싫어하는 것을 칭찬받는 게 유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협의점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울적한 표정으로 리코는 대답했다. 손수건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꽉 쥐게 되었다.
“미안해요. 지금도 납득 못하겠어요.”
“근데 굳이 납득할 필요도 없긴 해요.”
그녀의 꼭 쥔 손을 따라하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이 슥 움직였다. 손목 힘줄 위를 눌러 스치는 느낌에 불에 덴 것처럼 리코의 몸이 놀라 펴졌다. 강아지의 턱을 건드리는 것처럼 손가락이 그녀의 손바닥 밑을 간질이는 느낌이 났다. 시선을 올리자 그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 너머를 보고 있었다.
“핸드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몰라도 쓰는 데는 지장이 전혀 없죠. 그게 자기 것이라는 소유권이나 주인의식, 뭐 그런 것만 있으면 되잖아요.”
“대체 어딜 보고 말씀하시는 건......”
그를 따라 뒤를 돌아봤다가 리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낯익은 우마무스메들의 모습이 저 멀리 들어왔다. 손을 빼려고 해도 어느새 손목을 잡혀 뺄 수가 없게 되었다. 뒤에서 그가 히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정도는 가지고 계시죠?”
“손 놔요. 빨리.”
“허둥대면 더 의심 받을 걸요.”
“이쪽 보고 있잖아요, 빨리 놔줘요.”
“그러니까 가지고 있죠? 소유권이나, 주인의식 같은 거.”
“이따 얘기해요, 이따가!”
“나는 가지고 있어요.”
손목을 꽉 죄는 느낌에 리코의 어깨가 굳었다. 그의 손에서 해방되었을 때 리코는 어색한 자세로 서서 욱신거리는 손목을 매만졌다. 옆에 둔 캔커피를 챙겨 그녀를 스쳐가면서 그는 작게 웃으며 이 사이로 속삭였다.
“주차장에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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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카시모토 리코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차에 올라탔다. 팀원들의 이런저런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며 투덜거렸다. 안전벨트를 매면서도 불안한 듯이 뒤를 돌아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오늘 두 번이나 당신에게 벌을 줘야겠다 생각했는데, 변론하실 거리가 있나요?”
“딱히요.” 흥얼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무슨 권리로 저한테 벌을 주시겠단 건지 그것만 이해하고 계시면 달게 받을게요.”
“당신의 소유자고 주인으로서요.”
“그런 거라면 뭐. 어쩔 수 없네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차가 주차장을 미끄러져 빠져나왔다.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그는 입이 귀에 걸렸다.
“왜 그렇게 신났죠? 주인을 섬기고 벌받는 게 취향에 맞으십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저도 오늘 약간은 주위에 자랑하기도 했으니 기쁘잖아요.”
리코로서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복기하게 된다. 스윗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듯한 말들에 반하는 그의 행동들이 재생된다. 뒤에서 안은 것도, 손목을 잡은 것도 전부, 소유당함을 말하는 입과 맞지 않는다. 자기 소유를 과시하는 듯한 행동들이었다.
“저한테 명분은 넘기고 실속은 당신이 다 챙겼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불쾌한 기분이 들진 않았다. 복잡한 기분을 무마시키는 데에는 열 마디 말보다도 한 번의 액션이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그가 자랑했다, 이런 사실 앞에서 그녀 자신이 자랑할 만한 사람인가 하는 의문은 의미를 잃으니까.
카시모토 리코는 공식적으로는 아직 화가 난 상태다. 하지만 몸은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기울어져, 내비게이션에 다른 목적지를 입력했다.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어라, 리코. 집으로 안 가게요?”
그의 허벅지 위에 손이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살금살금 부추기는 듯한 손길 뒤로 낮은 속삭임이 따라왔다.
“오늘은 좀 거칠게 놀아야겠네요.”
거칠게 논다는 말은 둘 사이에 언제나 일방적인 말이었다. 실제로 거칠어야 했던 것은 언제나 그였고,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쪽도 항상 그였다. 카시모토 리코의 특수한 사정 덕에, 과격한 운동은 하는 것이기 보다는 보는 것이고, 견디는 것이었으니까.
“읍, 우읍.”
샤워실로 이어지는 짧은 통로 한켠에 마련된 세면대, 그 옆 작은 공간에 리코가 올라 앉았다. 위치선정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거기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끄러운 것들이 안으로 밀려들어오면, 그게 부드럽든 거칠든 감싸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그녀의 한계였다.
거울에 가볍게 기대 리코는 천장을 향해 간헐적인 소리를 냈다. 아까 그가 손을 잡았을 때, 손톱이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는지가 생각났다. 그녀의 손목을 건드렸을 때, 손가락이 어느 정도 구부러졌었는지를 기억해냈다. 과거의 일이 어떻게 현재로 이어지는지, 벽을 가볍게 긁는 듯한 압박감에 그녀는 발을 초조하게 꼼지락거렸다.
“으우ㅡ! 어윽......”
별로 예쁜 소리는 아니었다. 그녀의 목에서 났지만 그녀가 낸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상은 악기가 연주자가 불면 소리가 나는 것처럼, 앞뒤로 움직여 누르는 손가락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소리였다.
조율이 안된 악기처럼, 그가 조정하는 템포와 세기에 맞게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동안, 그녀의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났다. 빠져나간다고 해야 할까, 뽑혀나간 것 같았다. 여전히 시선은 천장에 머물러 있다. 아까 그녀가 닦았던 것 같은, 약간 끈적하게 젖은 손가락들이 시야에서 왔다갔다 했다.
“하으, 으으.”
“리코, 괜찮아요?”
“으응.”
아직 멀쩡하다는 뜻을 보이려고 리코는 손을 들어 그의 손을 붙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일단 손을 닦아야겠다, 깨끗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입에 집어넣는 행동이 아이나 다름 없다는 것도, 그렇게 보일지 모른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입에 들어오니 혀에 찌르는 듯한 맛이 감돌았을 뿐, 여전히 무엇인지 판단이 서진 않았다. 애초에 맛을 보려고 혀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축축한 소리와 함께 검지가 빠져나가려는 걸 붙잡아 끌어당기고서야 눈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 그녀의 마음에 불을 붙여, 조금 더 해야겠다는 장난기가 된다. 입술 위를 밀려고 올라온 엄지까지 머금어 짜내듯이 빨았다. 반대쪽 손이 허리를 돌아 꼬리뼈를 건드리고 있었다.
“푸우아. 멀쩡한데요?”
“아까부터 손이 멈췄길래, 좀 위험한가 싶어서요.”
“아직 시작도 안했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이예요. 괜찮아요?”
“확인할 방법은 딱 하나 뿐이네요.”
선반을 짚고 있던 리코의 오른손이 올라와 배꼽 옆을 쿡 찍고 내려갔다. 아침에 커튼을 여는 것처럼 닫힌 손가락이 열리면, 길이 드러나고, V자로 벌어진 손가락은 진행 방향을 보여주는 화살표가 된다.
이쪽에 길이 있어, 눈빛으로 신호하자 주도권이 넘어왔다. 그녀의 신호를 거역할 정도로 그는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뜨끈하고 무거운 느낌이 그녀가 제시한 화살표에 맞춰 올라오고, 쓸어내리듯이 맞춰오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으응.”
흡족해하는 소리에 작은 웃음이 돌아왔다. 왜 웃냐는 듯 올려다보면서 리코는 그의 표정을 찬찬히 살핀다. 연결되는 첫 순간에, 익숙하지만 매번 생소하게 다가오는 느낌에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둘 다 긴장되는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풀어지는 것처럼 길게 탄식했다.
“베개가 있는 편이 좋겠는데요.”
몇 번을 흔들리고 나서 리코가 내린 결론이었다.
한 번 붙은 불을 끄는 건 바보같은 짓이다. 하지만 불을 이어보겠다고 얼마든지 대가를 치르는 것도 바보같은 짓이다. 적어도 외부의 누군가가 본다면, 세면대에서 침대까지 가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거리를 힘겹게 기는 네발 짐승의 모습은 우스웠을 것이다. 걷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지 다리들의 보조도 높이도 맞지 않았다.
“진짜, 생각보다 엄청 불편한데. 다음부턴 그냥 평범하게 가도록 하죠.”
헐떡거리는 사이사이 좌절감에 낑낑대는 리코의 목소리에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다음에도 또 이러려고요?”
“상황이 그렇게 흐르면 어쩔 수 없죠.”
돌아누우려는 리코의 배를 붙들어 압박하고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흐에, 하는 소리로 의문을 표했을 때는, 이미 그가 압박할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편안하게 배를 깔고 엎드리고도, 리코는 한동안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부짖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허리 아래로 발 끝까지 천장을 향해 이따금 들리곤 했다.
리코가 잃었던 주도권을 다시 찾은 건, 끝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어떻게 하냐고 묻는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밀었다. 잡는 것이 아니고 미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알려줘야 했다. 잠시 구르고서야 그녀는 의도했던 대로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아주 신나게 즐기셨네요, 당신.”
“아마 저보다는 리코가ㅡ.”
몸을 앞으로 한껏 기울여 리코가 쏘아보자 그는 곧 ‘아닙니다’하고 움츠러들었다. 아래에 깔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걱정이나 긴장이 반이라는 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긴장을 털어내려는 듯, 혹은 벌의 시작을 알리려는 것처럼 리코는 손바닥으로 그의 양 볼을 소리나게 때려 잡았다. 임팩트 순간 입술에서 새어나온 바보같은 소리에 그녀가 웃었다.
“혼 좀 나야겠네여어......”
마지막 음절이 삐져나오는 혀에 흐지부지되었다. 그의 말도 뭉개져 숨소리 반, 목소리 반인 의미 없는 소리가 되어버렸다. 동시에 가볍게, 위로 끌어올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아래로 부드럽게 내려올 때, 배가 붙는 소리가 났다. 다시 위로, 아래로, 위로, 아래로, 그의 위를 가볍게 눌러 압박한 실루엣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생소한 일이었다. 둘 다 그렇게 느꼈다. 그런 만큼 어설펐지만, 둘 사이 일어난 어설픈 일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기묘한 흥분을 불러왔다. 리코는 눈을 감고, 그의 팔에 체중을 실어 기대오면서 맛보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불규칙적인 엇박이 될 만큼 몰두해 있었다. 처음 타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그저 기분에 휩쓸려 무작정 세게 두드리는 것처럼, 점점 내려치는 움직임이 격해져갔다.
내리누르는 힘의 반동으로 딸려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압도했다. 팔을 눌리고 있는 것도, 몸을 눌리고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카시모토 리코가 그를 거칠게 대하고 있었다. 아찔하게 허리가 들리는 느낌에 그가 목을 울리자 그녀가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저, 아래, 보여요?”
“......네?”
“저 아래, 보여요? 한 번 봐요.”
좌우로 살살 흔들리는 사이로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빠르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드러났다가 삼켜졌다. 더 자세히 보라고 주의를 끌려는 듯이 강하게 찍는 반동으로 그녀가 몸을 조금 더 일으켰다.
“제대로 보고 있어요?”
그녀의 손이 이번에는 표지판인 것처럼 배꼽 주위에 몰려들었다. 다시 한 번 화살표 모양이 된다.
“당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겠어요?”
그의 고갯짓에 따라 화살표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다. 리코는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괴로워하면서도, 멈추지는 않았다. 오히려 점점 페이스가 올라가고 있었다.
“어디를 긁고 있는지, 어디에 닿고 있는지 알겠어요?”
카시모토 리코는 성장했다. 한계를 뛰어넘었다. 견디는 이상으로 강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그녀를 강하게 만들어준 사람에게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항상 기뻤다. 견뎌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지금은, 자진해서 도구가 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를 능동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질문 속에서 명확해진 목적지에, 자력으로 데려다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끄덕이기를 기다려서 리코는 다시 몸을 앞으로 기대왔다. 한편으로는 더 중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지탱하고 붙잡을 것이 필요했다. 잡고 싶었다.
꽉 잡고 나자, 안정감이 그녀의 온몸에 흘렀다. 이 앞으로 어떤 일이 있든 그녀를 지켜줄 것이다. 맞서 나아가게 해줄 것이다.
그러니 그 역시 불안해하길 원치는 않는다. 눈을 질끈 감자 눈물이 털려 떨어졌다. 카시모토 리코는 일말의 꺼림직함까지 불식시키려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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