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읏... 앗... 퍼피이..."

"시리우스..."

우리, 어쩌다가

"...쌀게."

"으응... 하읏..."

이렇게까지 된 걸까.
 



-



"시리우스... 잠시만 쉬고..."

"으응..."

뭔가 다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는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담배갑을 하나 챙겨 밖으로 나갔다.

"..."

방금 전까지 뜨겁게 몸을 겹쳤던 열기는 순식간에 식었고 그 빈자리는 공허함이 채우고 들어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건

0.02mm 짜리, 초박형 콘돔이 유일했지만 그런 얇은 막보다 훨씬 두꺼운 뭐라 말할 수 없는 거대한 거리감 같은 게 느껴졌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나,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걸까.

그와 섹스 하는 걸 후회하는 건 아니다. 그에게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는 것에 이상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가슴 한 켠이 꽉 막혀있는 듯한 이 느낌.

"...추워."

아직, 여름은 시작도 하지 않은 7월의 초여름 나는 알게 모르게 한기를 느껴 이불을 두르며 최대한 몸을 데워보려 했지만 그런 걸로 되는 게 아니었다.

"..."

이 추위는 바깥이 아닌, 가슴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




시리우스 심볼리, 아니 이젠 그냥 시리우스.

심볼리라는 세 글자를 위해 달려온 나날은 처절하게 부정당했다. 개선문 참패의 책임을 물어 날 없던 사람으로 만들려던 가문의 압박을

"제가 받겠습니다!"

그날, 그는 자신이 직접 받아주었다.

"어차피 저도 계약해지 하실 거 아닙니까? 받아야 하는 위약금, 퇴직금 다 안 받고 그냥 제 책임인 걸로 하고 넘어가주십쇼."

"..."

"시리우스에게 모든 걸 짊어지라기엔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닙니까."

이후로 난 가문에서 쫓겨나진 않았지만, 사실상 죽은 사람 취급이었으니 이거나 저거나 비참한 건 매한가지였다.

"네...? 휴양... 이요...?"

"그래, 원정 이후 많이 지쳤을텐데 조금 쉬는 건 어떤가 해서..."

"아... 그..."

"홋카이도 있는 별장도 최근에 리모델링이 끝났는데 거긴 어떠니?"

"..."

"조금, 쉬다 오는 게 좋지 않겠니?"

말은 좋게 들리지만, 의도가 뻔히 보였다. 어디 시골 조용한 곳에 내려가 다신 눈앞에 보이지 않게 쥐 죽은 듯 살라는, 아주 신사적인 협박.

"..."

나는 그 말을 듣곤 곧바로 방을 나섰다.

이제 내가 찾아갈 곳이라곤, 이 세상에 단 한 곳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네~ 나갑니..."

"...안녕."

"...너 여기에 왜."

"들어갈게."

"아니, 야!"

난, 그때처럼 일단 막무가내로 그에게 찾아가버렸다.

스스로 가문을 저버렸다. 날 찾지도 않는 걸 보면 그쪽에서도 혹 하나 떨어졌다고 좋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읏."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 속이 편치 못했다.

"시리우스, 괜찮아?"

"..."

춥다, 너무 추워.

"추워..."

단순히 함께 눕고, 품 속에 안기는 것만으로는 따스함을 느끼기 힘들었다.

"...열은 없네."

조금 더 깊이, 뭔가 더 확실하게, 온기를 느끼고 싶다.

"퍼피..."

난 그에게 안긴 채 애원하듯 속삭였다.

"...안아줘."

이미 꼭 껴안긴 상태에서, 더 안아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시리우스."

뭔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날 단순한 욕정과 욕구의 해소처로만 사용해도 좋았다.

"나아... 너무 추워..."

그래도 좋으니까, 제발 날 필요로 해줘.






"하아... 읏... 앗..."

첫 경험은, 야릇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과 감각의 혼합.

"하으... 앙... 퍼피이..."

"...시리우스."

뱃속이 울리고, 남자의 신음소리가 귓속을 간지럽혔다. 누군가에게 안겨 터질 듯이 뛰는 심장에선 오랜만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걸 느꼈지만

"..."

어딘가, 가슴 한 켠이 텅 비어있는 듯한 그 감각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에서, 둘 사이를 막는 0.02mm짜리 콘돔이 전부였지만 느껴지는 거리감은 그 이상이었다.

"읏... 흐우..."

"응... 하아..."





.

.

.




자랑할 건 아니지만, 그 이후로도 꽤 주기적으로 관계를 가졌다. 퍼피가 먼저 요구한 적은 없었다. 늘 내 쪽에서 먼저 한기를 호소하며 그에게 안겼고

그 마지막엔 늘 이도저도 아닌 불쾌하고 꿉꿉한 감정의 응어리만 가슴 속에 남은 채 서로 등을 돌려 잠을 청하는 나날만 늘어날 뿐이었다.

"미안, 조금 늦었네."

"아..."

진한 담배냄새, 최근들어 그는 관계가 끝나면 담배 피러 가는 경우가 늘어났다. 아마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다.

난 그가 들어온 것을 보고 꼭 붙들었던 이불을 살짝 풀었다.

"이젠 안 추워? 더 하고 싶어?"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친절한 말투와 함께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담겨 있었지만

"...괜찮아."

썩, 행복해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오늘은 괜찮아?"

"응... 조금은."

오후 5시, 주말이 되면 유독 바깥에 나가는 게 싫어져 거의 하루종일을 집에 그것도 침실에만 틀어박혀 살았고, 당연히 할 게 없으니

"저녁은... 오랜만에 맛있는 거라도 시켜먹을까?"

허구헌날 섹스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래..."

아침부터 열심히 몸을 뒤섞은 탓일까 조금 찌뿌둥한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내일은... 일단 속옷이라도 더 사러 갔다오고, 장도 같이 보러 가자."

"응."

"옷은... 가서 괜찮은 거 있으면 같이 사고... 어..."

나도 그렇게 트레이너도 그렇고, 너무 갑작스레 동거를 시작하게 되서 아직 부족한 게 많았다. 옷이나 생활용품도 제대로 못 챙겨와서 부족했고 식재료도 금방 동났으니 말이다.

"일단 저녁은..."

간단한 일정을 나누고 저녁 거리를 고르기 위해 그에게 찰싹 달라붙자마자

- 띵동.

초인종 소리가 적막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

"..."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혹시 서로 모르게 택배라도 시킨 걸까 싶어서 멀뚱멀뚱 눈빛을 교환해봤지만 아무리봐도 정말 모르겠다는 눈치였고

- 띵동

"ㅇ, 일단 내가 나가볼게."

다시금 울린 초인종에 그는 다급히 옷을 챙겨 입어 밖으로 나섰다. 나도 그를 따라 적당히 츄리닝 정도만 걸쳐 밖으로 나가보니

"아하하... 갑자기 찾아와서, 민폐 끼친 건 아닐까요."

"어... 아니... 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들이 서있었다.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네, 시리우스."

"...루돌프."

황제 나으리와

"실례하겠습니다. 선배님."

"어 그래, 들어와."

그 트레이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나도 퍼피도 영문을 알 수 없었기에 루돌프는 가볍게 웃고는 들고온 박스와 캐리어를 바닥에 내리며 말했다.

"여기 있을 거 같았는데, 있어서 다행이네."

"...이거."

내가 두고 온 옷가지들과 생활용품들.

"..."

왜, 왜 네가 이러는 거야. 대체 왜.

도저히, 표정관리가 안 됐다. 얼굴 근육이 일그러지는게 분명히 느껴졌다.

"으음... 보아하니, 둘 만의 시간을 우리가 조금 방해한 거 같은데 바로 떠나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아... 아니 굳이 어..."

퍼피는 부끄러운 건지 아직 이 상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서 얼타는 건지 모를 행동을 취했고, 어영부영 그들을 떠나보내려 하려 했다.

"...야."

"..."

그리고 난,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아니 묻고 싶었다.

"...가지마, 이딴 거나 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니잖아."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왜 나를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려는건지.

루돌프의 팔목을 꽉 붙잡고 그녀를 노려봤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가볍게 웃으며 자기 팔목을 붙든 내 손을 가볍게 잡으며.

"시리우스, 일단 이거부터 놓고..."

라며 그 가증스런 입을 놀렸고

"닥쳐!!"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주먹이라도 나가려던 상황에 퍼피는 날 뒤에서 와락 안더니.

"ㄱ, 그래...! 시간도 애매하니까... 그... 저녁이라도 먹고 가, 저녁이라도."

라며 이 험악한 상황을 억지로 진정시키려고 했고, 루돌프는 그 특유의 미소를 여전히 유지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

"..."

분위기가 묘해졌다. 나를 엿맥이려고 가져온 게 아니라 정말 챙겨주러 왔다는 해명을 듣고 조금 누그러들긴 했지만 그래도 좋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배달 온 초밥도 멀쩡히 들어갈 리가 없었다.

"...에이씨."

퍼피는 이런 답답한 분위기가 싫었던 건지 냅다 냉장고 쪽으로 발을 옮기더니.

"계속 이러지 말고, 우리 술이라도 마시자. 어때?"

라며 맥주들을 여러 개 꺼내어 우리 앞에 늘어놓았다.

"..."

"..."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우린 그 술판에 끼어들기로 했다.



"...선배님은 아직 복직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나? 뭐... 복직해야지? 아직은 행정 절차나 서류 처리할 게 있어서 좀 늦는거지 준비되는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으응~"

술 덕분인지 아니면 시간 덕인지 몰라도 조금씩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그저그런 사무적인 얘기였지만

"...그건 그렇고, 그거 반지. 커플링 맞지?"

"ㅇ, 예?"

"아니... 그..."

"변명하지 말고."

"...네."

조금 뜻밖의 이야기로 넘어가기도 했다.

"...담당이랑 사귀고, 난리구만 아주."

"...풉."

퍼피의 일침 아닌 일침에 루돌프 쪽은 둘 다 얼굴이 새빨개졌고, 난 그 모습에 비웃음을 섞은 코웃음을 한 방 보냈다.

"크흠... 흠."

그 외에도 조금 잡다한 얘기들이 오갔다. 중간중간 가문에 대한 얘기나 당주 후계 같은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루돌프는 그럴 때마다 헛기침과 함께 얼버무렸고

퍼피도 그에 대해선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의 연애사 같은 걸 조금 더 파고들긴 했지만 말이다. 난 굳이 그 대화에 끼어들진 않았다.

듣고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퍼피가 아닌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 상대가 루돌프라고 해도 말이다.






-







"으음..."

"술 약한 건 여전하구만."

"아하하... 트레이너 군? 괜찮아?"

"으응..."

루돌프네 트레이너가 생각보다 술이 약하다는 게 신기했다. 생긴 거만보면 술을 사발 째로 들이킬 거 같은 사람이 한두 캔 마시더니 뻗은 걸 난 멍하니 보고 있었고

"멀쩡히 돌아가긴 글렀네."

"뭐... 아니면 내가 업고 가서..."

"그냥 자고 가, 시간도 늦었고 여자 혼자서 얘 업고 가는 것도 그렇고."

"말은 고맙지만, 그래도..."

"챙겨준 게 있으니까, 괜찮아. 얘는 일단... 읏챠..."

퍼피는 술에 뻗은 루돌프의 트레이너를 쇼파에 눕히고, 탁자를 간단히 정리하면서 말을 이었다.

"안방에서 둘이 같이 자도 괜찮지?"

"응, 난 괜찮다네."

"...하아, 그러시던가."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거절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




"후우... 개운해라."

"..."

루돌프와 같은 방을 쓰는 건, 아주 어릴 적 말고는 처음이었다. 어쩌면 그녀와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어본 적도 오랜만이었던 거 같기도 했다.

"...이렇게 있어본 적은, 오랜만이네."

"..."

"안 그래? 시리우스?"

최대한 무해하단 느낌으로 다가오는 루돌프였지만 이미 켜켜이 쌓인 거부감은 그녀를 받아들이길 원치 않았다.

"...왜 왔어, 여기는"

"왜 왔긴, 귀국했다는 데 안 볼 순 없잖아."

"...하아."

짜증난다. 이런 말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닌 거라는 걸 다 아는데 말이다.

"...가문에서는?"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고

"...듣고 싶어?"

"안 들어도 알 거 같아."

"그럼 굳이 말은 하지 않을게."

"쫓겨났겠지, 이제 심볼리라는 이름, 쓰지도 못할 거고."

"..."

그녀는 대답 대신 무언의 긍정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

"..."

덕분에 분위기는 아주 조용해졌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할 얘기는 없었다. 아니, 얘깃거린 많았지만 굳이 할 필요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왜 계속 말 안하고 있었어."

그리고 루돌프는 그 적막을 깨고 질문을 던졌다.

"...그냥."

난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고

"그런 거 같진 않던데."

"아이씨... 네가 신경 쓸 건 아냐."

루돌프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트레이너 군 때문인가?"

"뭐?"

"네가 부르는... 퍼피 군인가?"

"...함부러 그렇게 부르지마, 나 말곤... 그렇게 못 불러.

"아하하... 그래, 아무튼 트레이너 군 때문에 그렇게 입을 꾹 닫고 있는 거지?"

"...모르겠어."

퍼피, 트레이너. 그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대체 뭘까. 함께 사지를 헤쳐 나왔다는 전우애? 스승에게 지니는 존경심? 하, 퍽이나

나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딴 감정들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게 뭔지 속 터놓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그냥 다 내 잘못 같은데 억지로 자기가 책임지려는 그 모습에 진짜 뭐라해야할지 모르겠어."

"..."

"...그 사람한테 너무 미안하고 한편으론 괘씸하고 그리고 미칠 듯이 고맙고 그렇지만 미워서."

"..."

"...나, 어떡하지."

어린애도 아니고, 감정에 휘둘리기만 하는 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아무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은 추례한 내 본모습이었지만 한 번 내뱉으니 멈추지 않았다.

"가문에서 쫓겨나는 건 괜찮지만, 나 때문에 퍼피가 어디 다치거나 하면.. 그런 건 싫어..."

"그런 건... 없을 거야, 설령 늙은이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내가 막을게."

"..."

늙은이들, 루돌프 입에서 나온 것치곤 꽤 강한 표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다.

"...시리우스, 넌 그동안 마음이나 잘 정리해서 퍼피 군과 다시금 잘 해봐, 결국 네가 의지하고 있는 건 그 사람 뿐이니까."

"...그럴까."

"후훗, 퍼피 군은 부럽네, 난 시리우스한테 인정받으려고 애써도 맨날 무시만 당하던데."

"내가 언제...! 야 그리고 퍼피라고 부르지 말라고!"

"아하하..! 아얏! 아..! 때리지마!"






-






"후우..."

"으... 머리야..."

"어, 술 좀 깼냐?"

"아... 선배님..."

남자는, 담배 한 개비를 툭 건넸지만 상대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끊었어요, 루돌프가 피지 말래요."

"...잡혀사는구만."

도시의 반딧불이처럼, 담배 끝은 다른 불빛들과 함께 공명하듯 깜빡, 깜빡 하며 빛을 내다가 이내 스르륵 빛을 잃어갔고

"하아..."

희뿌연 연기로 흩어져 사그라질 뿐이었다.

"넌, 왜 왔냐."

그런 상황 속에서, 남자는 담배 하나를 더 꺼내 불을 피우며 말했다.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제자가 가는데 스승이 가만히 있을 순 없죠."

"..."

후배라는 놈이 말 한마디 지지 않는 걸 느낀 남자는 반지를 슬쩍 보곤

"제자랑 사귀는 게, 멀쩡한 스승의 행동은 아닌 것 같지만"

라며 아픈 곳을 건드렸고

"흠흠..."

이건 별 다른 반박을 못하고 헛기침만 하는 루돌프의 트레이너였다.

"하아..."

연인,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본 그는 희뿌연 연기를 내뱉곤 다시 담배를 꼬나물며.

"...야, 있잖아."

"네."

"...담당이랑, 섹스해본 적 있냐?"

꽤 폭탄같은 발언을 냅다 던졌다.

"이거 지금 성희롱..."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게... 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하는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서있자.

"그럼... 아... 아~"

뭔가 이해했다는 듯한 말투로 끄덕이는 후배였다.

"...선배님은 언제부터 그런 관계를..."

"얼마 안 됐어, 시리우스가 찾아오고 난 이후부터... 그냥... 뭐..."

"..."

"하... 이게 참..."

"그래도 뭐... 둘 다 성인이고 그... 사이만 좋으면 별 문제 없는 거 아닐까요?"

"그게 문제라고."

"?"

"...너도 심볼리 쪽이랑 엮였으니까 알 거 아냐, 그... 시리우스가 멀쩡한 상태는 아니란 걸."

"아... 예, 뭐 그렇죠."

"유럽에서, 많이 약해졌어. 특히 정신적으로 많이 무너져내렸고, 난 최대한 버팀목이 되어주려고 노력했어."

"..."

"그런데... 이제 와선 잘 모르겠어."

"어떤 게..."

"...이게 맞는 건지 말이야, 그냥... 그냥 내 욕망 같은 걸 풀려고 시리우스를 쓰는 건 아닐까, 그저 '시리우스가 원하니까' 라는 알량한 변명으로 나 자신을 속여 넘기는 건 아닐까 하고..."

"..."

"그냥 내가 쓰레기 같이 느껴져."

"선배님."

"왜."

"...지금 몇 살이시죠?"

"나? 이제 스물 일곱이지, 근데 그건 갑자기 왜."

"아뇨 그냥, 너무 어른처럼 행동하시는 거 같아서요."

"뭐?"

"아직 이십 대 후반밖에 안 되셨으면서, 되게 모든 걸 책임지려 하시고 홀로 서기 하시는 거 솔직히 대단하다고 느끼지만 한 편으론 걱정되긴 해요."

"..."

"결국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대 살아가야 하는데, 너무 혼자 짊어지려는 그런 느낌이라서 말이죠."

"..."

"...뭐어, 제가 그렇게 느꼈을 뿐이니까요.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내일 출근해야 되서."

"...어, 그래라."

후배는 그 말만 남기고 하품을 하며 저벅저벅 집으로 돌아갔고.

"후으..."

남자는, 한동안 담배를 태우며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

.

.





"...좋은 아침."

"어... 아... 응, 좋은 아침..."

의외라는듯 동그랗게 뜬 눈동자로 그는 날 바라봤다. 6시, 평범한 사람 기준으로도 꽤 이른 시간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나왔다.

"어디 가?"

"운동 가는데, 아 혹시 시끄러웠나?"

"...아냐, 그냥 일어났어."

부시시한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혹여나 자기가 단잠에 방해라도 끼친 걸까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한 그를 난 지그시 바라보다가.

"...잠시만 기다려, 나도 같이 가자."

"응?"

"운동... 같이 나가자고."

오늘부터, 조금 바뀌기로 다짐했다.









"허억... 허어... 야...! 씹... 좀 천천히 뛰어...!"

"이정도면 뛴 것도 아닌데."

"하아... 하... 우마무스메랑 사람이랑 똑같냐?"

그는 어이 없다는 듯 거친 숨과 함께 나를 노려다보았다. 그리고 난 그 모습이 우습게 느껴져 피식 웃고 말았다.

"강아지 산책도 주인이 해야하는 의무니까, 잘 따라와야지 퍼피?"

"하... 씨..."

솔직히 말해서, 집 밖으로 나가는 게 싫었다. 그냥 이대로 퍼피만 제외하고 날 천천히 잊어갔으면 하는 마음만 있었다.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면, 마지막은 조금 걸을까?"

그렇기에 그에게 더욱 의존했었다. 잊혀지고 싶지만, 사라지고 싶진 않다.

당신에게만큼은 기억에 남고 싶었다. 이 몸을 쓰든, 혹은 극단적 선택을 하든 어떻게든 시리우스라는 존재를 그에게 담아놓고 싶었던 이기심

"그러자... 어차피 오늘은 헬스장 안 가는 날이니까."

내 본능을 채우기 위해 난 몸을 갈구했다. 서로 몸을 겹치는 그 짧은 순간, 아주 잠시 느껴지는 그 만족감을 위해 끝없이 요구했고

그런다고 해서 채워질 욕구 따위가 아니었다.

"...퍼피, 그럼 오랜만에."

그나마 조깅을 시작하고 난 뒤에는 꽤 괜찮아졌다. 우선 몸을 쓰니까 굳이 안해도 상쾌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조금은 건강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아, 그건."

"같이... 씻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예 요구를 안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으응... 읏... 하아..."

"...아프면 말해."

좋아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하앗... 응.. 퍼피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더 이상 그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정신적으로 건강해지려고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지만

"시리우스..."

"응... 츄으..."

여전히 가슴 속 한 켠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푸하..."

그럴 때면, 몸을 섞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끈적하게 입맞춤을 나눴다.

"하으... 윽..."

땀인지 샤워기에서 흐르는 뜨거운 물인지 분간되지 않을 액체가 서로의 몸을 끈적하게 만들었다.

"흐읏... 앗... 퍼피... 하읏..."

"..."

물방울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철퍽, 철퍽하는 살끼리 맞닿는 소리가 조금씩 섞여들었다.

"으응... 하으..."

이 순간만큼은 모든 걸 새하얗게 잊을 수 있었다. 그저 내 허리와 가슴을 붙들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끈덕지게 욕구를 녹여내는 수컷의 움직임에 따르기만 하면 됐다.

"하아... 아...! 응...!"

뱃속 깊은 곳을 꾹 꾹 누를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후들거렸다.

"...시리우스"

"응..."

"..."

몸을 섞을 때마다 보는 눈동자, 옅게 깔린 흥분감 아래로 보이는 눈빛은 살짝 죽어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숨도 거칠고, 허리도 끈적하게 움직이며 자지는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꿈틀거렸지만 눈동자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뭔가를 꾸역꾸역 참는 분위기란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하읍... 응... 츄하..."

언제나 질척하게 혀를 섞으며 사정을 잔뜩 받아냈다. 온몸에 힘이 빠질 정도로 몸은 만족스러운 관계를 가졌지만, 그 아찔한 육체의 고양감이 가라앉은 곳에선

언제나, 언제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가슴 한 켠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흐우..."

"하... 하아..."

"...감기 들겠다, 빨리 씻자."

우리 둘 사이엔 0.02mm짜리 콘돔이 유일했지만, 거리감은 그 이상이었다.









.

.

.






 

가까우면서도 한 없이 멀었다. 퍼피와의 관계는 그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에게 집착하는 것은 많이 호전됐다.

병원에 몇 번 간 것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퍼피도 성심성의껏 도와 훨씬 나아졌다고 스스로 느낄 정도였으니 말이다.

퍼피는 옛날의 그 싸가지 없는 부잣집 아가씨가 돌아왔다며 너털 웃음을 지으며 놀리기도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제멋대로 흘러 그는 다시금 트레이너로 복직했고 나는 치료와 함께 대학 준비를 하며 나름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매일 같이 혼자서 집 지키고, 공부하고 성적 맞춰보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간혹 맥주 한 잔 하면서 새 담당에 대한 얘기나 직장인의 한탄을 들어주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누구 때문에 커리어 말아먹어서 찾아주는 사람이 없다느니 아주 징징거리더만, 이젠 담당이 말을 안 듣는다고 징징거리네? 참 웃긴 강아지야 퍼피."

"흠흠... 멍멍~"

이렇게 장난치면서 놀리는 맛도 있었고 말이다. 서로 나름 바쁜 일과를 보내며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건 아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건 그렇고 재밌는 친구네, 그정도로 말 안 들을 줄은 몰랐는데."

"어휴...모르겠다. 시리우스 너도 최소한 내 말 듣는 척은 해줬는데."

"뭐, 애완견 말은 잘 들어줘야지."

"허, 이거 자기가 잘 들어준 척 하네? 막상 나한테 내기 져서 듣기로 한 거면서."

"내가 언제...!"

"기억 안나? 당구로 내가 개털었잖아."

"퍼피 주제에... 건방져?"

이런 식으로 술기운에 서로 티키타카를 주고 받는 것도 지금 아니면 못하니 잔뜩 즐기기로 했다.

"아니 그땐 내가 봐준..."

"아니죠? 진짜 진심으로 했는데 진 거죠?"

"다시 떠! 다시 해!"

"절대 안 해, 내가 이미 이겼는데? 그리고 몇 년 전인데..."

그렇게 옛날 얘기를 하면서 서서히, 분위기가 고조되며 투닥투닥 거릴 때면.

"엇."

"아."

늘, 상상치도 못한 터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아, 어, 미안..."

그는 내 가슴에 닿았던 손을 황급히 치우며, 얼마 남지도 않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늘 그렇지만 달아오른 분위기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건 너무 쉬웠고

"...야, 퍼피."

"아, 미안하다니까..."

"...오랜만에..."

"..."

술기운에, 슬쩍 유혹 아닌 유혹을 하기도 했다.



난 가끔 생각한다. 내가 그를 갈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에 비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훨씬 건강해졌지만 마음 속 한 켠이 비어있는 이 느낌은 왜 바뀌지 않는 걸까.

"..."

휑하다. 가슴 속 한 쪽이 차갑다는 감각이 들 정도로 공허감이 느껴지면, 난 그에게 관계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외로움을 지우기 위해서 그를 원하는 줄 알았다.

내 곁에 그가 계속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턴 그저 내 이기심 때문에 그를 갈구하는 줄 알았다.

그에게 느껴지던 모든 것들, 때론 괴롭히고픈 생각, 계속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욕심, 날 안아줬으면 하는 욕망. 그 모든 것들이

그를 너무 사랑하기에 원한다는 걸 깨닫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 미안. 시리우스."

"..."

"우리... 이런 관계 계속 가지고 그러는 거 조금..."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땐,

"..."

"살짝 애매... 하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어..."

난 이미 그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준 이후였을지도 모른다.

"아... 아하하... 그렇지."

"싫다는 게 아니라... 건강한 관계는 아니니까..."

"아냐, 아냐. 이해해 퍼피, 애완견이랑 그러는 건 미친년이니까."

그렇기에 애써 웃으면서 넘어간다. 지금으로선 그저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는 것도 고마워해야하는 입장이니 말이다.








-





"트레이너 쌤, 뭔 고민있어요?"

"어? 뭐가?"

"아니, 그저께부터 진짜 세상 근심 죄다 가진 표정이어서, 혹시? 뭐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요."

"...아냐, 뭐 별 일 없어."

"또 거짓말, 트레이너 쌤 거짓말 진짜 못하는 거 알죠?"

"아이, 진짜 없다니까..."

"여자 문제죠? 그쵸? 여자친구가 뭐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런 거 아니라고! 이상한 거 신경 쓰지 말고, 다음 트레이닝..."

"어차피 스테미너잖아요. 지금 우리 쓸 시간 아닌 것도 다 알아요~"

"..."

"방금 한 대 쥐어박고 싶다고 생각했죠?"

"열 대 쥐어박고 싶은데."

"뭐 비슷하네요. 아무튼, 트레이너 쌤 거짓말 진짜 못하니까 솔직해져요."

"..."

"그런 어설픈 거짓말이면, 상대도 슬프고 나도 슬프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그게 더 낫지 않을까요?"

"솔직... 하게..."








-




"퍼피."
저녁 조깅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익숙한 뒷통수가 보였다.

"차가! ㅁ, 뭐야 왜 여기 있어?"

"뭐긴, 운동 좀 다녀왔지."

"운동?"

"잠시 뛰고 왔어."

"으응..."

이후로는 아무런 대화 없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맡겼다. 머리를 비우려고 애써 뛰고왔건만 하필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원흉이 옆에 있으니 괜히 심란했다.

"..."

"..."

어쩌다가, 이런 사이까지 될 걸까. 첫 G1을 딸 때만 해도 둘도 없는 사이였다. 유럽에선 난 이 사람 없인 살 수 없을 정도로 몰려있었다.

지금도, 그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하아..."

"하아..."

이 놈의 엘리베이터는 또 왜 이렇게 느린지 무심코 한숨을 내뱉자.

"..."

우연의 일치인지 그도 꽤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뭔 놈의 한숨을 그렇게 깊게 해, 땅 꺼질라."

"그냥... 뭐... 생각이 많아져서."

"생각? 왜, 새 담당이 속 썩여?"

"...글쎄다."

"허... 꽤 독한 녀석을 만났나보네, 퍼피?"

"...너만하겠냐."

"뭐?"

"됐어, 애들 얘긴 아니니까. 그냥 개인적인 생각이야 개인적인."

"..."

그는 아무 말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이전보단 옅어졌지만 그래도 확실히 느껴지는 담배 냄새가 그 움직임을 따라 퍼졌고

"흐음..."

뭔지는 몰라도, 그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

.

.





그렇게 날은 꽤 속절없이 흘렀다. 심볼리라는 이름을 떼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도 어느정도 익숙해졌을 무렵이었으나.

"..."

여전히, 그에 대한 마음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 많이 오네."

때 늦은 가을비에 그저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현듯 현관으로 나가봤다.

"하... 이것봐라."

출근 배웅해줄 때 우산을 안 챙긴 것 같더니만, 역시나 신발장엔 주인 잃은 우산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비에 홀딱 젖은 채로 오는 퍼피를 보는 맛도 있겠지만 주인으로서 강아지를 추위에 떨게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나참, 이런 것까지 챙겨줘야 하고."

빗속을 헤치고 앞으로 익숙한듯, 어색한 거리를 걸어나갔다. 비가 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몇 년만에 오는 거라 그런지는 몰라도, 트레센으로 가는 길은 설명하기 힘든 어색함이 느껴졌다.

"저긴 아직도 안 망했네."

종종 들렀던 식당, 카페, 노래방 같은 곳이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며 즐거웠던 옛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저긴... 뭐, 내가 있을 때도 장사는 잘 안 됐으니..."

나름 애착을 가졌던 가게가 임대를 내놓고 있는 모습에 묘한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다.

퇴근하는 정장들 사이, 하나 둘 보이는 트레센 교복. 지금 보니 꽤 촌스러운 디자인인데 저 땐 저걸 어떻게 입고 다녔을까 싶었다.

점점 우마무스메들이 늘어나는 걸 보니, 어느새 트레센에 가까워졌구나 라는 걸 감각적으로 느낄 즈음.

"저기있네."

정문에서 비가 내리는 하늘만 멍하니 바보같이 보고 있는 우마무스메와 트레이너 하나, 아무리 봐도 퍼피가 분명했다.

"난 뛰어가면 되니까, 자. 이거 챙겨 가."

"쌤 그러다 감기 걸려요?"

"네가 감기 걸리며 레이스 못 나가잖아, 빨리 들어가기나 해."

"저 진짜 가요? 나중에 울고불고 쫓아오시면 안되요?"

"후딱 가기나 해 임마."

"네에~ 그럼 내일 봐요! 우산 고마워요!"

"..."

안 챙겨간 줄 알았는데 작은 우산을 자기 담당에게 넘겨주곤 이제 어쩌지 하는 표정으로 하늘만 보는 그를 보며, 피식 웃으며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뭐해, 퍼피."

"어 뭐야, 여긴 어떻게..."

"딱 봐도 우산 안 챙겨 갔을 거 같아서 왔지."

"오! 고마워~ 웬 일이야, 이런 선행을 다 하고."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만 늘어놓고 있어."  

"...근데, 다른 우산은?"

"뭐가?"

"우산, 네가 쓰고 온 거 밖에 있는 거 아냐?"

"같이 쓰고 가면 되잖아, 부끄러운 거야 퍼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네가 불편해할까봐."

"..."

이 거리감, 뭘까.





"방금 전에 걔, 새로 담당한다는 애야?"

"어... 응, 맞아."

때 늦은 가을비, 그렇게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함.

꼭, 우리 둘 같은 애매한 질척임을 지닌 날씨에 서로 할 말 마저도 빗속에 흘리려고만 하는 듯한 분위기에 누구도 먼저 말을 잇지 못했다.

"..."

평범한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소녀 같은 마음 절반, 그를 더 이상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는 죄책감 절반.

두근거림은 곧 죄악이었고, 가슴을 후벼파는 듯 했지만 그냥 내가 참고 넘어가면 될 일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으면 했다.

"...시리우스."

"ㅇ, 어?"

"최근, 우리 대화 좀 안 하지 않았어?"

"아... 뭐, 그렇지."

먼저 잡아준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이 애매한 추위를 녹여주는 체온이 혈관을 따라 조금씩 퍼져나갔다.

"...어쩔 수 없지, 당신은 다시 트레이너로 살고 있고 난 대학 준비 중이니까. 그냥 타이밍이 잘 안 맞은..."

원론적인 얘기, 그럴싸한 대답으로 이 상황을 넘어가고 싶다. 따스함을 원하지만 더 이상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

"그런 거 말고."

말도, 그리고 손도 나 스스로 먼저 놓으며 조심스레 빠져나가려는 상황에 그는 더 강하게 날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우리 뭔가 예전같지가 않아서."

"아하하... 퍼피, 예전같지 않다니, 그럼 내가 또 매일매일 늦게까지 자고 백수처럼 살길 원한다는 거야?"

"..."

애써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가슴팍을 툭툭 치며 농담하듯 넘겼지만, 이번만큼은 넘기기 쉽지 않아보였다.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

서로 한 번씩, 침묵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침묵이 이어지려는 찰나, 그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유럽 원정이 끝나고, 계약도 만료 됐을 때. 솔직히 난 걱정이 앞섰어. 아직 힘든 사람을 그딴 식으로 대하는 가문에 던져 놓는 게 맞나 싶었지."

"..."

"그래서, 막상 네가 찾아왔을 땐 걱정도 됐지만 속으로는 좋기도 했어. 널 조금 더 잘 보살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퍼피..."

"...네가 관계를 원하고 이어지길 원하는 것도 아무 말 없이 받아줬어, 그때 난 그게 널 위한 거라고 굳게 믿었으니까."

"..."

"근데... 있잖아, 그게 어쩌면 너를 더 상처입히는 것만 같고 내 욕구만을 위해 시리우스를 쓰는 것 같았어."

"그런 게 아냐...! 난 퍼피 네가..."

"...시리우스."

"응..."

싫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이 감정의 솟구침이 싫다.

"아무튼, 그래서... 멀어지려고 했던 거 같아."

"당신..."

추운듯, 후덥지근한 이 애매모호한 날씨. 이도저도 아니게 흔들리는 우리 둘.

"아하하... 이런 모습, 별로 보여주고 싶진 않았는데."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애써 없던 일로 만들려는 듯한 그의 모습이 싫다.

"나도 흔들리면, 네가 의지할 사람이 또 줄어드니까. 그냥...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해서 좀 멀어진 거 같다고, 뭐 그런 얘기야."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하고 이대로 멀어지려고 하는 나의 모습도 너무 싫다.

"자, 이제 들어가자."

싫어. 이대로는 싫어.

우산을 접고, 집 앞 현관에서 손을 뻗으며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이 너무 보기 싫어서, 나는 냅다 비 내리는 바깥으로 그를 잡아 끌곤

"ㅇ, 왜 이래!"

"..."

그대로, 입을 맞췄다.

끝도 없이 도망쳤다. 가문에서 유럽으로 떠나라는 압박에서 난 맞서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쫓겨났다.

그곳에서도 난 도망치는 거 말곤 할 수 없었다. 레이스의 결과에서, 쓰레기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나에 대한 평가들에게서

돌아와서도, 냅다 가문에서 사라지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난 바보같이, 도망치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늘 함께 있어주고, 내가 흔들릴 때 누구보다도 소중히 내 곁을 지켜주며, 힘들 때마다 곁을 내주던 그에게서도 도망가려던 걸 깨닫고는.

이젠, 도망같은 걸 하지 않기로 했다.

"...시리우스, 이거..."

"...의지하라고!"

"응?"

"힘들 땐... 나한테라도 의지하고... 털어놓고... 그러라고! 바보 같은 놈아!"

"..."

"이젠... 도망가기 싫어..."

"시리우스..."

감정이 요동친다. 뭐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하고 싶었던 말들을 마구 내뱉었다.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남고 싶단 말이야..."

"..."

"당신한테... 윽... 더 이상... 흑... 상처 주기 싫단 말이야..."

안 될 거란 걸 알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한 결과일까.

"...사랑해, 사랑해. 퍼피."

이 구애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그리고 그에게 상처로 남을 것도 알면서도, 난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꼭 안길 뿐이었다.

고개를 들기 싫었다. 이 흉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냥 이대로 비에 녹아 사라졌으면 했다.

꾸역꾸역 고개를 들어 올리려는 그의 손에 저항하려던 힘마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올리자.

"읍..."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시리우스."

"ㅇ, 응..."

"미안해."

"...괜찮아."

"그리고... 사랑해."

"...뭐?"

"...나도 너무 늦게 내 마음을 알았나봐."

"..."

"나도... 이젠 시리우스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트레이너."

"...사랑해, 시리우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도저도 아닌 날씨.

축축하고 끈적하게 비가 내리는 가을, 가슴 속에 들어있던 세찬 한기는 그 날에 맞췄던 입맞춤과 함께

"으응... 푸하..."

천천히, 녹아내렸다.






-





기껏 우산을 챙겨주러 갔건만, 둘 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을 면하지 못했다. 머리도 옷도 축축하게 젖은 채 몸에 들러붙은 옷을 떼어내듯 겨우 벗어내야 했다.

"밖에 샤워실 써, 난 안에 거 쓸게."

그는 뭔가 배려하겠다는 말투로 말했지만.

"...같이 씻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응... 츄으... 하아..."

"시리우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그냥 자연스레 서로에게 입을 맞췄고 몸을 어루만졌다.

"읏..."

"..."

아무 말 없이 끈적하게 몸을 쓰다듬는 손, 평소였으면 어딘가 차갑게 식어있었을 눈동자에서 오늘따라 질척한 욕구가 보이는 듯 했다.

"퍼피... 살짝 거칠엇..."

이전에 느꼈던 것과는 다른 감각이 몸을 타고 흘러들었다.

"하읏... 앗..."

골반부터 허리로 천천히 쓸어오르듯, 손가락 끝에 힘을 주며 내 몸의 감각을 손에 새겨 넣고 있었다.

살짝 무게를 바쳐주듯 아랫가슴에 손을 올리고 이내 감싸안는 듯한 느낌으로 가슴 전체를 조금 강하게 쥐었다.

"흣..."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왔다. 분명 몸을 겹친 것 수도 없이 많았것만, 이렇게까지 흥분된 적은 처음이었다.

"츄읍... 하아... 흡..."

앞으로는 쏟아지는 샤워기의 물세레, 뒤로는 이미 착 달라붙어 더울 정도로 체온을 전달해줬기에 달아오른 몸은 진정할 줄을 몰랐고, 난 그에게 포옥 안기며 입을 맞췄다.

"하읍... 하... 응핫..."

퍼피의 팔뚝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놓치지 않으려는듯 날 꽉 붙든 팔뚝은 흉악할 정도로 혈관과 근육이 올라와 있었다.

"아... 퍼피..."

나도 모르게 그의 다리에 꼬리를 감았다. 귀는 자연스레 앞으로 접혔다.

"시리우스..."

엉덩이에 닿는 자지는 이미 한계라는 듯 잔뜩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는 여태 느껴본 적 없는 거친 숨소리를 연신 내뱉으며 나를 질척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

머릿속이 몽롱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았다.

"퍼피..."

서로 마주보고, 조심스레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두근, 두근하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지긋이 눈을 맞췄다. 처음에는 제멋대로 뛰던 심장이 어느 샌가 서로 맥박을 맞춰 하나처럼 뛰는 것 같았다.

"사랑해..."

그러면서도 눈동자는 점점 더, 이성이 흐릿해져 가는 걸 우린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응..."

다시금 천천히 입을 맞췄다. 가볍게 입술끼리 맞닿은 곳에서 자연스레 서로의 혀를 원하듯 야릇하게 섞여들었다. 끈적하게 뒤섞인 혀는 놓을 생각이 없이 묶여있었고

"푸하..."

거의 숨이 막혀갈 때쯤, 겨우 입을 뗄 뿐이었다.

"...빨리 씻자."

"응... 좋아."







.

.

.



"후..."

"..."

어떤 표현이 맞을까, 그래 평소에 늘 퍼피, 퍼피 하고 다녔으니 굳이 짐승으로 비유하자면.

"...꿀꺽."

먹잇감을 노리는 한 마리 맹수가 당장 내 눈앞에 서있었다.

아니지, 정확히는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시리우스..."

"ㅇ, 응..."

"아프면... 말해?"

솔직히, 아프다해도 안 멈출 것 같았다. 터질 것 같이 흥분한 자지는 배 위에서 꿈틀거리며 욕망을 잔뜩 분출하고 있었다.

"읏... 하으..."

천천히 뱃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콘돔도 안 끼고 서로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상태로.

"하아.... 앗... 퍼피..."

안 쪽을 가득 채울 정도로 가득 찬 자지에 가볍게 절정 끄트머리에 닿았다. 이런 감각을 많이 느껴봤지만, 오늘 느껴지는 만족감은 난생 처음이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 이 말을 전하려고 얼마나 많은 날을 혼자 가슴앓이 했던걸까.

"너무 사랑해... 당신..."

이렇게나, 한없이 가볍게 전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시리우스... 하아... 시리우스..."

"응... 흣... 하윽..."

두꺼운 양 손으로 골반을 잡아 자기 쪽을 쭉 끌어당겼다. 허리는 공중에 살짝 뜬 상태로 그의 움직임에 맞춰 뱃속을 꾹 꾹 누를 때마다 달콤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앗... 앙..."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모양을 내게 새기려는 듯 끈덕지고 질척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읏... 하... 아읏..."

들리는 거라곤 여자의 야릇한 신음소리와 남자의 끈적한 숨소리가 전부인 조용한 침실.

"시리우스 조금만 허리 들어봐."

"ㅇ, 이렇게...?"

"응.. 여기에..."

허리 아래에 베개를 깔아주며 그는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힘들면, 말해?"

"...죽을 때까지 해줘."

몸이 조금 편해진만큼, 관계는 더 끈적해졌다. 그는 제멋대로 허리를 놀리며 점차 뱃속을 긁어내듯 괴롭혔다.

"흣... 앗..."

입구만 살살 긁으며 애달프게 괴롭혔다가, 깊은 곳까지 꾹 꾹 누르며 잔뜩 흥분감을 집어넣기도 했다.

"으응... 퍼피이... 앗..."

"하아... 시리우스..."

느릿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사랑을 욱여넣었다. 이미 질척하게 녹아내린 몸과 마음은 그를 원하고 있었다.

"해줘..."

"...사랑해."

천천히 입을 맞췄다. 뱃속에 꿀꺽꿀꺽 들어오는 정액을 천천히 느꼈다.

"응..."

이마를 맞추고, 코를 닿고 쇄골에 가볍게 흔적을 남겼다.

"시리우스."

"응..."

"...아직, 안 잘거지?"

"퍼피이... 주인보다 먼저 잠드는 강아지는 없겠지?"






-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십니까?"

"음... 글쎄요."

"야!"

하객석이 한바탕 웃음으로 떠들썩해졌다. 신랑이라는 사람이 첫 질문부터 저렇게 대답을 하니 당연할 수밖에.

"아하하... 당연히 함께할 것을 맹세하죠."

"하아... 진짜."

어쩜, 난 이 사람에게 빠졌을까.

"흠흠... 그런 신부는 남편과 앞으로도 행복하게 지낼 것을 맹세하십니까?"

"...으음, 글쎄요. 잘 다뤄주는 거면 모를까."

"허허..."

하객석이 다시 떠들썩해졌다. 서로 한 번씩 장난을 주고 받은 뒤 늘 그랬던 것 처럼 피식하고 웃음을 나눴다.

"...사랑해, 시리우스."

"사랑해, 당신."

사랑해.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내 삶의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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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많이 늦었음 ㅈㅅ ㅎㅎ; 중간에 스토리를 계속 갈아엎고 다시 쓰고 해서 좀 맘에 안들게 나온듯.
다음에 더 잘해볾,,, 시간되면... 다음에는 루돌프로 쓸까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