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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인데 요약 이제 못함




불 꺼진 방, 아직 지난 행위의 흔적이 질척하게 남은 더블 베드 위 커다란 이불 양 끝을 쥐고 남녀는 자기쪽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린 무슨 사이인 걸까’ 하고 여자, 츠루기 료카는 물었다. 반대편의 트레이너가 돌아눕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도 한동안 그는 대답이 없었다. 물에 던진 돌이 파문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처럼, 그저 그것 뿐인 채로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료카는 꺼진 벽걸이 TV의 붉은 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와서 물어도 선뜻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대답하기 싫다고 해도 그녀로서는 할말이 없다. 하지만, 아마 그는 생각해보고 말을 골라서 답할 것이다. 엘피 덕분에 그의 생각은 꽤 많이 들을 수 있었으니까.



“오, 그렇다 이거죠. 고백은 누가 먼저?”

“뭐,”

어제 식사자리에서 엘피가 한 질문에 그는 고기 불판에서 고개를 돌렸다. 작게 올라간 입꼬리를 엘피에게서, 료카에게서 숨기려고 했을 것이다.

“내가 했지.”

“쿡......”

아직 생생한 기억이 료카를 웃어버리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깨지기 전의, 온전하게 남은 귀엽고 풋풋한 추억이었다.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드문 일이어서 엘피의 귀가 쫑긋거렸다.

“료카 씨?”

“아니. 나도 모르게, 미안해요. 그냥 그럴 것 같은 이미지가 있었거든요.”

“하긴, 트레이너니까요. 스카웃이든 고백이든 먼저 말 거는 데는 익숙하겠죠.”

“얌마. 나도 쉽게쉽게 말 걸고 다니는 게 아니거든.”

엘피의 팔을 툭 치면서 그가 항변했을 때, 료카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크게 웃을 뻔 했다. 다행히 엘피는 그녀 팔을 때린 못된 손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참내. 숙녀 팔을 서슴없이 툭툭 치면서 그렇게 말하면 누가 믿어줘요?”

“조심스럽게 치면 믿어줄 거냐?”

“암튼 엄청 좋아했단 건 알겠네요.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어요?”

“여러 가지 있었는데,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른스럽다? 꽤 여러 의미로 들리는데요?”

추궁하듯이 쿡쿡 찌르는 엘피의 손가락을 무시하면서 그는 맥주병을 집어들었다. 잔들을 채우고, 가볍게 부딪히고 쭉 비웠다. 계산대로 마시는 동안에는 그녀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후, 하고 살짝 내쉬자 편안해졌는지 그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보통 고등학생은, 뭐가 하고 싶고, 뭐가 되고 싶고, 어떤 목표가 있고, 그런 거 좀 막연하잖아.”

“아뇨? 왜 막연해요?”

소논 엘피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래서 우마무스메들은’ 하고 그는 장난스럽게 혀를 찼지만, 트레센 학원을 다니지 않는 보통 학생들은 그런 거라고 굳이 억지를 부리진 않기로 했다.

“그래, 적어도 나는 막연했어. 그냥 학교가 거기 있으니까 다니는 느낌이었달까.”

“야구부 했다면서요.”

“아니, 야구부 하면 여자들한테 인기라도 끌 수 있을까 해서.”

엘피의 얼굴이 굳으면서 의자를 살짝 빼 그와 거리를 두었다. 뭔가 웃어넘길 말을 찾으려다가 포기했는지 우와아, 하는 끓는 소리를 냈다.

“확 깨네요.”

“아무튼, 그 여자는 나랑 너무 달랐거든. 자기 꿈이 확실하고, 그걸 위해 세운 목표도 계획도 있었어.”

화로를 내려다보며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여자’가 얼마나 온화한 사람이었는지. 성실하고 착실한 사람이라 느꼈는지. 그런 부드러운 인상 속에 얼마나 불같은 열정을 품고 있었는지.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엘피는 이따금 료카를 힐끗거렸다. 무언가 비교하려는 충동이 있는 것처럼, 그에게서 료카에게로 눈을 돌렸다.

츠루기 료카는 가만히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작게 미소지으면서, 말없이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저 고기가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도 보였다.

“엄청 좋은 사람이었던 모양인데, 어쩌다 헤어졌어요?”

올 질문이 왔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료카의 눈썹과 시선이 살짝 위로 올라가 그를 향했다. 엘피는 아예 몸을 돌려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냐. 나는 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전부, 아니면 대부분.”

착 가라앉은 표정과 목소리였지만, 쥐어짜낸 대답은 아니었다. 갈고 깎듯이 생각해서 정제한 말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마 오래 전에 했을 법한, 맨들맨들하고 막힘 없는 대답이었다.

“여기까지야. 더 할 말이 없네.”

소논 엘피는 오른쪽 아래를 바라보면서 뭔가 생각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귀와 꼬리가 고민하는 머리를 대신해 일렁거렸다. 그의 바로 옆까지 온 그녀를 올려다보았을 때, 손이 위로 치켜올라가 있었다.

“왜 이렇게 무게 잡아요, 아저씨! 흐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피의 손바닥이 그의 등을 때렸다. 살짝 놀라 앞으로 몸을 빼고, 잠깐 점내의 시선이 그를 향해 쏠렸다.

“얌마, 아파.”

“괜찮잖아요! 다음에 잘 하면 되잖아요, 안 그런가요?”

그는 어깨를 몇 번 굽혔다 펴 가볍게 욱신거리는 등을 진정시키는 동안 엘피의 얼굴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쫑긋거리는 그녀의 귀, 빛나는 두 눈, 웃고 있는 얼굴에 비웃음 같은 감정은 묻어있지 않았다. 악의 없이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벼운 고통에 찌푸려졌던 그의 얼굴이 호흡과 함께 풀어졌다.

“남 얘기라고 쉽게 말하네, 이 녀석이.”

“아니, 뭐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솔직해지는 건 바보라도 할 수 있다구요.”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그를 향해 엘피는 이를 드러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전부 트레이너 씨 잘못도 아닐 거구요.”

“......아무튼 고맙다. 위로가 되긴 하네.”

입을 씰룩거리고 불판 쪽으로 시선을 옮기는 그를 엘피는 조금 더 몸을 기울여 바라보고, 괜히 큰 소리로 웃었다.

“뭐야, 울어도 돼요, 아저씨. 휴지 드릴까요?”

 

료카는 솔직히 말하면 대화의 뒷부분이 조금 불편했다. 그녀도 표정이 굳어있었다. 엘피의 말대로다. 전부 그의 잘못이라기에는 무리가 있다. 귀여운 추억 끝에 걸려 있는 것은, 그녀의 원죄이기도 했다.

그와 그녀가 무슨 사이냐니 바보같은 질문이다. 고 1 가을에 고백해서 사귀기 시작했고, 고 3이 되는 봄에 헤어졌다. 그걸로 끝인 사이고 몇 년이 지났다. 어쩌다 일터에서 다시 마주쳤을 뿐이다. 그녀 쪽에서 찼다는 걸 감안하면, 염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로서는 다시 물어야만 했다. 끝났어야 할 것들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그도 그렇게 여겼을 것이기에, 그녀로서는 그가 대답할 거란 확신이 있었다.

“헤어진 전 애인이지.”

돌아온 답은 그녀 생각보다 조금 더 건조한 대답이었다. 다른 평가가 들어있지 않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답변이었다. 슬금슬금 그녀 뒤편의 이불이 들썩이면서, 매트리스 위를 그가 움직여 왔다.

“고등학교 동창이고, 친구고, 같이 집에 돌아가던 귀가부였고.”

가까워온다. 그녀 등 뒤의 공기가 그의 체온으로 조금씩 따뜻해졌다.

“UAF 프로듀서와 협업중인 참가 트레이너.”

료카는 몸을 조금 움츠렸다. 그의 손이 허리에 감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지만, 그것 뿐이었다. 체온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거리를 두고, 그의 호흡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간질이고 있다. 생각했던 손이 오지 않자 그녀가 몸을 살짝 틀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 -- 군?”

“우리 사이는 그 모든 것이야. 하지만, 그 중 아무것도, 지금 우리를 설명할 수 없는 것 같아.”

“지금 우리?”

“있잖아, 료카.”

방의 어둠 속에서 어렴풋한 서로의 실루엣만이 보였다. 그럼에도 눈이 마주친 듯한 했다.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없는 탓인지 슬픈 느낌이 들었다. 슬픔, 츠루기 료카가 예상했던 많은 반응 중에 가장 마지막에 떠올린 감정이었다.

“오늘, 널 꼭 안고 싶었어. 엄청나게.”

“-- 군?”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베개와 이불이 가볍게 버석거릴 정도로 그가 떨고 있었다. 다시 만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모습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료카는 거기 이끌리듯 몸을 돌려 누웠다. 조금 가까이 하려 했지만 그녀가 들어온 만큼 그가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하지만, 순전히 내 욕심때문에 널 쓰려고 안은 게 아니야.”

“알아, 알고 있어.”

“나는 네가 전 여친이라 안은 게 아니야. 우리 사이 때문에 안은 게 아니야. 전혀, 아니야.”

“그럼 왜?”

“......네가 츠루기 료카라서.”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들이 방의 어둠 속을 오갔다. 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긴장된 숨소리가 서로를 향해 빨라졌다. 그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 료카의 몸이 움찔였다.

“네가 츠루기 료카라서 안은 거야.”

“-- 군.”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지금 얘기할 수 없는 것 같아. 우리 사이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끼어 있어서, 정작 서로를 제대로 볼 수도 없어. 제대로 안을 수도 없어.”

이제 말문이 막힌 건 그녀 쪽이었다. 그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는 걸 알았지만, 알았다는 사실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주진 않았다. 적어도 지금 그는 그녀의 생각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었다. 그게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을 뛰게 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녀로서는 나쁜 의미를 더 크게 느껴야 했다.

“......그렇게 느꼈어?”

그녀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자기 생각을 읽혀버린 것 같아서.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눈에 내가 비치는 느낌이 없었어. 더 먼 곳을 보고 있었지. 무엇인지는 모르겠고, 어디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어.”

“.......-- 군, 변했구나.”

“보고 듣고 판단하는 게 내 일이라서.”

“그랬지. 후후.”

“하지만 잘 모르겠어. 그럼 대체 왜 엘피를 자꾸 신경쓰면서 행동하고, 내가 가지 말라고 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는지. 막상 날 제대로 보지도 않으면서 왜 날 흔드는 건지. 솔직히 말하면 이해가 안 돼.”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심장이 꺼림직한 느낌을 받아 조여졌다. 기분 나쁘게 쿵쾅거렸다.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명확했다. 그는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어했다. 보고 듣고 판단하고 싶어했다.

“너도 들려줬으면 해, 료카. 네 솔직한 생각을 나는 하나도 듣지 못했어.”

하지만 그래서인가, 지금 그가 가까이 있다는 실감이 강했다.

“-- 군. 나 조금 추워.”

버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 쪽의 이불이 살짝 걷혀 올라갔다. 상체부터 천천히 일으켜 침대를 빠져나온 그녀가 몇 걸음 뒤에 그를 돌아보았다. 살짝 돌아간 몸에서 드러나는 실루엣이 그의 눈에 가득 담겼다.

“같이, 씻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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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에 천천히 차오르는 물을 그가 바라보는 동안, 그녀는 양 손가락을 겹쳐 모아 입을 가리고 서 있었다. 이따금 그의 몸을 힐끗거렸다. 입가를 바라볼 때 ‘뭔가 말해주지 않으려나’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이렇게나 보면 눈치 챈다. 그의 고개가 그녀를 향했다.

“왜?”

“-- 군이 했던 말,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한 말이 좀 많은데. 어떤 거?”

“비밀.”

그녀가 작은 비닐포장을 뜯어 기울였다. 상쾌한 소리와 함께 배스 솔트가 욕조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투명했던 욕조물이 은은하게 라벤더색으로 물들었다.

“아무것도 안 넣는게 좋았을까?”

“좁지는 않을까 걱정이네.”

“-- 군, 몸이 좀 커졌지.”

그는 대답 대신 료카의 몸을 슬쩍 보았다. 무슨 뜻이냐고 그녀가 눈썹을 찌푸리길 기다려 그는 말을 돌렸다.

“그래도 살짝 좁은 정도가 괜찮으려나.”

“......응.”


다행히 심하게 좁진 않았다. 튀어나온 무릎이 약간 시린 정도였다. 어디에 어떻게, 하는 의문은 별로 없었다. 그가 먼저 들어가고, 사이에 그녀가 들어와 앉는다.

욕실의 불빛이 아까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 해 줬다. 그녀의 어깨가 얼마나 가녀린지, 살짝 젖은 머리카락 아래 귀가 얼마나 붉어져 있는지.

“따뜻하네.”

조용히 즐거워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 안에서 얼마나 울리는지. 그게 그를 얼마나 부채질하는지.

가만히 몸을 붙였을 때 그녀는 저항하는 대신 몸에 힘을 풀어 기댔다. 품안에 녹아서 쏙 들어갈 것처럼 있었다.

“-- 군, 조금만 더 꽉 안아줄래?”

거절할 이유도 방법도 없다. 온몸을 팔 안에 감아 당겼다. 어깨 위에 턱이 올라올 정도의 거리가 흡족한지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 군이 느껴지는 거, 좋네. -- 군도 좋아?”

“응, 좋아.”

“그리고, -- 군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도, 조금 좋을 지도.”

“무슨 뜻이야?”

표정을 보려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도 머리카락에 가로막혔다. 보게 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쿨하게 헤어졌다고 말했었잖아.”

“그랬지.”

“아니었던 것 같아.”

라벤더색 수면이 조용히 일렁거린다. 그녀의 눈도 비슷한 빛을 하고 있을까. 보게 해주지 않는다. 사실은, 이란 말을 하기가 그녀는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았다.

“내 솔직한 생각들은 몰라줬으면 했어. 몰라줬으면 하는 것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것보다 많아서.”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다면, 그것만 말해줘.”

“......너무 외로웠어.”

그녀의 팔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번엔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손을 움직여 천천히 배를 타고 올라오게 했다. 어깨 너머로 보이는 도드라진 곡선들, 수면에 떠 있는 섬들 아래, 손바닥에 와닿는 부드러움에 그가 숨을 멈췄다.

“-- 군이 가까이 있을 때, 나는 어느 때보다도 외로웠어.”

그녀는 그녀대로 자신이 끌어온 손길을 선명하게 하려 몸을 모았다. 굳어있는 그의 손 대신, 물처럼 넘실거렸다.

“엘피가......”

갑자기 그녀는 목에 걸린 것처럼 말을 멈추고 비워내듯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엘피한테도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왜 -- 군은 엘피가 그렇게까지 붙는데, 그런 가까운 거리를 허락해주고 있는 거야?”

“엘피랑 친하게 지내서 쓸쓸했다는 거야?”

“그러면 안되는 건데 견딜 수가 없어서. 도저히 차분해질 수가 없어서.”

이상하지, 하고 끝맺는 그녀의 목소리에 가득한 자괴감이 그를 이끌었다. 그녀의 몸을 들어올리려 했다. 그녀는 작게 신음했지만 딸려나가진 않았다. 끈질기게 그녀를 돌려놓으려 하는 동안 말했다.

“쿨하게 헤어진 거 아니냐고 물었을 때, 나는 네가 잘 지내고 있다 생각했어.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고도 생각했어.”

“분명 잘 지내고 있었어. 그런데.”

“너랑 달리 나는 전혀 잘 지내지 못했었거든.”

“......미안해. -- 군.”

“지금 나는 괜찮아. 궁금한 건 왜 네가 못 지내고 있느냐야.”

“우리 사이가아.”

“왜 네가 차놓고 이제와서 힘들어하는 건지, 다른 남자를 만난 것도 아니고, 잘 지내는 것도 아니고.”

“응, 으응!”

그의 손 안에서 료카가 몸을 잔뜩 움츠렸다. 머리카락 끝이 잠길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수면에 대고 거친 숨을 뱉었다. 밀어올리고 쓸어내리는 작은 손짓에 파도쳤다. 그녀가 파도칠 때마다 물이 크게 흔들렸다. 작은 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는게 부끄러운지 그녀는 이를 악물었지만, 억누른 소리가 크게 울리기만 했다.

그는 약간 화가 난 것처럼도 보였다. 벌주는 것처럼 꼬집자 료카의 몸이 튀었다.

“왜 이제와서 사과하는지 궁금하거든.”

“-- 군, 꼬집으면 시러어.”

“널 생각할 때 항상 나는 죄인이었는데.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왜 네가 사과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야.”

“응, 미안, 읏, 미아내애.”

애매하게 차단된 시야가 손 아래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단단히 솟고, 피가 몰려 부풀어오른 감촉을 붙잡게 했다. 붉어지고 상기되는 것조차 만져지는 것 같았다. 수없이 몸을 맞대고 겹쳤던 밤과 낮 속에서 남은 것들이리라.

“여기가 그렇게 외로웠어?”

“-- 군이 내 몸에 남긴 자국이야. 흉터야.  -- 군이 가까이 있으면 욱신거려.”

익숙해진 물의 온도보다, 손 안의 불덩어리가 새삼스럽게 뜨거웠다. 츠루기 료카는 몸을 배배 꼬면서 새어나오는 소리들에 필사적으로 항의하듯이 말했다.

“-- 군도 외로웠잖아. 그래서 내가 가지 말라고 했을 때, 다가와준 거잖아.”

“그런 줄 알았어. 끓어 넘치는 것 같아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 그냥 두고갈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어.”

“좋아, -- 군. 더......”

“줄곧 생각했어. 네가 왜 그랬을지.”

“나, 나도, 그랬, 아으.”

“하지만 중요한 건 네 마음이나 생각이 아니더라고.”

“에에......”

갑자기 그의 손이 멈췄다.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빙글빙글 돌던 것이, 사이에 두고 굴리던 것이 사라졌다. 찌르는 듯한 느낌이 사라져서 어쩐지 허전했다. 갑자기 조용해진 욕실처럼.

“-- 군, 왜 멈췄어......?”

“중요한 건 내 마음이었지.”

그런 만큼 그녀의 말을 묻어버릴 정도로 그의 목소리가 더 꽉 들어찰 수 있었다.

“네가 아니라 날 돌아봤을 때, 거기 있는 건 죄인이 아니었어. 그저 네게 용서받길 원해서 전부 내 탓으로 몰아갔던 예전의 나였지. 그런 내가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이 뭐였을 것 같아?”

“......가지 말라고, 붙잡아주길 원했을 것 같아.”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오늘 가지 말라고 했어.”

그녀의 허리에 다시 손이 올라왔을 때, 츠루기 료카는 이번에는 주저앉으려 하지 않았다. 들어올리는 손에 이끌려 몸을 돌렸다. 끌어당기기 전에 팔을 쭉 뻗어 그의 목에 감고, 늘어지듯이 안겨 기대왔다. 품에 얼굴을 묻었을 때, 그가 등을 토닥여주었다.

“내 말이 맞아?”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품에 입술을 부비고, 몇 번 열었다 닫았다. 가볍게 빠는 소리가 났다. 그가 그걸 내려다보았지만, 그녀의 눈은 따라 올라오지 않았다. 여전히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가지 말라고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어?”

“......기뻤어.”

“네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런데 왜 아직도 외롭고, 아직도 우리 사이를 궁금해한 건지 잘 모르겠어.”

나 진짜 열심히 했는데, 하고 덧붙인 말에 료카는 쿡쿡 웃었다. 자기도 안다고, 그의 목으로 올라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쪽, 쪽, 느릿한 소리가 쓰다듬듯이 귀를 찔렀지만 그는 간지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부르는 소리에도 그녀는 목에 얼굴을 묻고 열중해 있었다.

“그 이유는, 몰라줬으면 하는 부분이야?”

“......응.”

“곤란하네. 우리가 정말로 쿨하게 헤어지려면, 그걸 알아야 할텐데.”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그가 한 말에 료카가 멈칫했다. 가만히 굳어있었다. 목에 와닿는 숨의 간격이 좁아지고 있었다. 침묵을 깨려는 것처럼 그가 다음 말을 툭 던졌다.

“난 이제 그만하고 싶거든.”

등이 추워지는지 그녀가 가볍게 떨었다. 그대로 물속으로 미끄러져 잠겼다. 손을 물 아래로 내렸다. 그의 허벅지 위를 조심스럽게 문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안쪽, 사이로 들어오려는 손은 그가 막았다. 료카는 저항했지만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 때의 널 정말 좋아했어. 츠루기 료카. 아꼈어. 누구보다 예쁘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그래.”

“-- 군, 더 말하지 말아줘.”

“그게 지금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

“가지 말......”

입술이 맞닿는 느낌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더 말을 하지 못하게 부드럽게 막는 것이더라도, 그녀의 눈이 감기기에 충분했다. 다시 떨어지고 물소리가 났다. 그가 나가버린 욕조의 물이 철렁거렸다. 갑자기 넓어진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료카는 고개를 홱 돌렸다.

“-- 군, 어디 가.”

“슬슬 피곤해져서. 아직 추우면 조금 더 있어도 돼. 멀리 가진 않으니까.”

“우리 아직 얘기가.”

“우리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어.”

욕조에 기댄 료카가 바라보는 동안 그는 수건을 꺼내 머리와 몸을 적당히 말렸다. 가운 하나를 걸치는 동안 그녀에게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우리라고 하면 듣기는 좋지만, 그런 애매한 말에 매달리고 있으니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끝. 알았지?”

“그러지 마, -- 군.”

료카가 몸을 일으켰다. 욕조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는 욕실 문을 열고 돌아보았다. 짧은 말로 단정지었다.

“우리가 아니라, 나랑 너.”

욕실 문이 닫혔다. 급히 수건을 가져다 몸의 물기를 털어내던 료카였지만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다. 생각할수록 손이 점점 느려졌다.



“-- 군. 귀엽지 않게 됐어.”

“나이를 먹어서 그래.”

“이런 식으로 말장난하는 사람 아니었는데.”

이불 속에 편안하게 누워 있는 그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료카가 투덜댔다. 실상 말장난에 가깝게 말하는 것은 그녀였지만. 그는 이불을 들어올려주며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장난이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떠보면서, 슬금슬금 페이스에 휘말리게 하는 사람 아니었는데.”

“누구한테 배웠어.”

“......가르쳐준 적 없는데.”

편안하게 눕자 그녀 위로 기다렸다는 듯이 이불이 덮혀 왔다. 다시 같은 위치로 돌아왔다. 둘은 어디로 가게 될까. 사이에 무엇이 남게 될까. 어떻게 되는 걸까. 의문은 여전했지만, 이전처럼 료카의 시선을 끌진 않았다.

“저기 -- 군, 불 좀 켜주지 않을래?”

“왜? 잘 거 아냐?”

“얼굴 보고 싶으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 선선히 스탠드를 켜 주었다. 그제서야 서로의 맨얼굴이 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갈 만큼 어쩐지 흡족했다. 츠루기 료카는 이불을 살짝 들춰보고 속삭였다.

“-- 군, 나랑 -- 군 사이에 아무 것도 없는데.”

“......그렇지.”

“와서......”

으응, 하고 료카는 고개를 젓더니 슬금슬금 이불 속을 움직여 왔다.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 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말로 시작했다.

“나 -- 군한테 안기고 싶어.”

“......시작이 좋은걸.”

카펫처럼 깔려오는 팔 위로 료카의 고개가 폴짝 올라왔다. 카펫이 다시 돌돌 말렸다. 그녀 뒤에 남겨진 것들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앞에 그와 마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피식 웃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전엔 이렇게 능수능란한 사람이 아니ㅡ”

츠루기 료카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후아아......”

황급히 틀어막으려고 그의 가슴팍에 입을 들이밀자, 뜨거운 숨이 가운을 타고 전해졌다. 눈물로 촉촉해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그가 웃었다.

“이제 좀 졸려?”

“......신기하네.”

그녀가 손을 슬금슬금 내려, 가운 자락 아래로 집어넣었다. 아직 욕실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형태를 따라 위아래로 슥슥 움직이자 그가 움찔거렸다. 정량적인 지표로 보자면, 아직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는 그를 괴롭히고 싶었다.

“......아니다. 잘래.”

정성적인 지표로 보자면, 굳이 신경쓸 이유가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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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성 뾰이물로 기획했는데 이유 만들고 이유 꼬고 관계 꼬고 기분 꼬고 이건 마치 비유하자면 AV를 찍으면서 배우보다 세트장에 공을 들이는 상황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