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의 세계는 언제나 냉정하다.

그리고 그 승부에 불복하거나 그 결과에 화내는 것은 기수만이 아닌 일부 말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이런 승부욕은 언제나 좋은쪽으로든 나쁜쪽으로든 표출되곤 한다.


이 글의 주인공인 스노우바운드(Snowbound) 역시 이러한 승부욕의 화신이었다.






스노우 바운드의 품종은 우리 말붕이들에게 매우 친숙할 서러브레드다.

1958년 헤일 빅토리(Hail Victory)와 게이 알베나(Gay Alven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덕에 이름이 게이 빅(Gay Vic)이었다.......진짜다. 진짜 저딴 이름이다.

참고로 부마인 헤일 빅토리의 아버지가 블레임(Blenheim II)이라는 영국 출신 서러브레드다.








게이 빅은 서러브레드 답게 원래는 경주마였지만 성과는 나쁜 편이었다.

뛰기 싫어서 안뛰는게 아니었고 오히려 1등을 못하니까 성을 내는 그런 말이었다.

원래 마주도 이런 성격 때문에 얜 언젠가 승리한다고 믿었지만...





결국 경주마들의 영원한 고질병인 천지굴건염으로 경주마를 은퇴해야 했다.

발을 디딜때마다 통증을 느끼니 달리는건 고사하고 치료하더라도 재발 가능성이 높다보니 경주마는 앵간해선 은퇴수순을 밟는다.

결국 게이 빅은 5전 0승이라는 전적으로 경주마에서 은퇴를 하게 되었다.


그래도 마주가 착해선지 도축은 면했고 그냥 농장에서 있었는데, 

알고지내던 다른 마주가 쟨 승마용 말로 써먹을 재능이 눈속에 덮혀있는것과 마찬가지라고 사가서 케어한다.


1964년에 굴건염을 치료한 뒤 이름을 스노우 바운드로 바꾸고 농장에 찾아온 존 겔빈(John Galvin)에게 스노우바운드를 소개했다.

존 겔빈은 아일랜드와 미국 기수들의 의뢰를 받아 그들이 탈 재능있는 말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는데, 

당시엔 다음 올림픽을 대비하는 미국 승마 대표팀의 의뢰를 받고 있었다.


존은 스노우바운드에게 잠재된 재능을 알아보고 사들인 뒤 장애물 비월 대표선수가 탈 말을 발견했다며 대표팀으로 데려간다.






전에도 말했듯이 당시 사람들도 웜블러드가 승마에 더 유리하단 사실을 알고는 있었고 

이미 마장마술 분야는 60년대에 전문적인 승마기수를 태운 웜블러드가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 장애물 비월과 종합마술(크로스컨트리) 분야는 서러브레드 같은 핫블러드가 아직은 활약할 수 있었고,

대략 예전 글의 카리스마처럼 서러브레드는 장애물 비월에서 80년대 까진 경쟁력이 있었다.







(1971년 아헨)


그리고 스노우바운드와 같이 정상에 도달할 기수는 

아마추어 기수인 윌리엄 스테인크라우스(William Clark "Bill"Steinkraus,1925~2017)이었다.









(맨 좌측의 애늙은이처럼 보이는 사람이 윌리엄이다.)


일단 이 윌리엄이란 기수는 굳이 따지면 월가에서 돈을 벌던 사업가인 동시에 승마기수였다.


나름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교양있는 도련님이었는데 10살때 할아버지댁에 놀러갔다가 마굿간의 말을 탄게 시작이었다.

윌리엄은 말타는게 재밌었지만, 부모님은 아들이 로데오 하는 꼴은 죽어도 못보겠다고 대신 승마를 허락했다.

이 승마조차 공부성적을 일정 수준 이하로 떨구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으나 조건을 충족하고 승마를 계속 배울 수 있었다.


아버지 인맥이 좀 빵빵한덕에 미군 기병장교들한테 맨투맨 학습을 받은 결과 국제 호스쇼 대회에서 미성년자 부문에서 16살에 우승을 차지한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말타고 돈버는 꼴은 볼 수 없다고 공부성적이 괜찮다는걸 핑계로 예일대에 진학시킨다.


하지만 윌리엄은 1학년까지만 공부하다 부모님 몰래 군대에 지원넣고 

버마전선에서 124 기병연대에서 복무 후 전쟁 끝나고 돌아와서 49년에 예일대를 졸업했다.

(부모는 군대에 지원넣으면 자살할꺼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대하고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한테 혼났다고.)


그리고 님 아직 승마하면 대표팀 하쉴? 이라는 러브콜과 사업을 안이어받으면 의절이다 라는 협박에 

월화수목은 사업가, 금토일은 승마기수라는 괴이한 커리어를 쌓게 되었다.


쓰고보니까 죽창으로 찔러 마땅할 사람같은데 아무튼.






(드디어 스노우바운드의 사진이다)

일단 장애물 비월에 적합한 등과 어깨 그리고 놀라운 점프력은 다른 기수들도 매료시켰으나,

이녀석도 으래 다른 서러브레드가 그렇듯 성격이 좀 괴팍해서 겁이 나거나 소음이 나면 멀리 도망가고, 

기수의 지시를 납득하지 못하면 바로 로데오or기수낙마를 택하는 놈이었다.


그냥 말 다루는데 이골이 났던 윌리엄만 탈 수 있었다.


윌리엄이 아마추어긴 해도 52년 헬싱키 하계올림픽에서 단체 동메달, 60년 로마 하계올림픽에서 단체 은메달을 따왔던 1등공신이었고,

그동안 장애물 비월 대회에서의 수상 이력이 있고 팬 아메리칸 게임에서 59~63년 금메달을 따온 초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포드하이스키나 테오도레스쿠 등의 마장마술 명인들이 남긴 저술들을 틈틈히 독학해서 이런 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질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윌리엄은 스노우바운드를 스노우버거라는 애칭을 부를정도로 나름의 신뢰관계를 구축해서 보폭을 자유자재로 하는 재능을 개발해냈고,

스노우바운드는 소음은 싫어했지만 훈련이 끝나고 윌리엄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연주는 좋아하는등 나름 괜찮은 관계를 구축했다.

(나중엔 다른 장애물 승마 기수들도 말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도 열심히 훈련했으니 들을 자격은 있다며 윌리엄의 바이올린 연주는 대표팀의 일과가 되었다.)


윌리엄이 스노우바운드의 승부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실력있는 기수였던것이 주효했을지 모르지만,

스노우바운드의 승부욕은 윌리엄이 예상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대충 10초 부터 나오는 사건은 스노우바운드와 윌리엄의 현역 내내 터져나올 문제였고, 저 대회끝나고 다시 치료받는다.)


스노우바운드의 점프 능은 그 다리 상태에 과분할 정도의 수준이었고, 천지굴건염을 다시 발생시킬 수 있는 위험을 떠앉고 있었다.

윌리엄은 이를 방지하기위해 경마기수들과 같은 체중감량 뿐만이 아닌 

점수가 떨어지더라도 스노우바운드의 다리에 최대한 덜 부담가는 자세로 점프 후 착지를 연습을 시켰고, 처음에 스노우바운드는 연습한대로 착지했다.


하지만 장애물 비월 모의전에서 자신이 아닌 동료 말들인 산 루카스나 언터쳐블, 화이트 라이트가 점수가 더 높아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날이 며칠 지속되다보니,

윌리엄이 연습시킨 자세가 아닌 다른 말들처럼 원래의 점프 후 착지자세로 돌아왔다.


윌리엄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착지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세를 요구하면 스노우바운드는 짜증을 내고 로데오를 하거나 다른 말들을 습격했다.

다리통증 대신 패배vs다리통증을 받고 승리하기 중 후자를 고른거다.

경주마 시절의 승부욕은 승마로 종목이 바뀌었음에도 그대로였다. 


아무튼 이런 승부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윌리엄과 기수들은 스노우바운드를 라이언하트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 사자의 마음으로 인해 굴건염이 재발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대회하나를 뛸때마다 스노우바운드는 그 승리의 반동을 감내해야 했다.






(산 루카스와 그의 기수 프랑크 차폿.)


기수인 윌리엄은 이대로 가다간 올림픽전에 스노우바운드는 굴건염으로 탈락한다 판단,

윌리엄은 마주인 존과 대표팀의 감독과 상의하여 스노우바운드의 출전을 제한하는 대신 재활과 관리에 쓰는 시간을 더 늘렸다.

그리고 올림픽 출전 점수가 높게 걸려있는 월드컵 혹은 네이션스컵 규모의 큰 대회만을 스노우바운드를 타고 나가는 것으로 전략을 바꿧다.


물론 타국의 장애물 비월 기수들은 윌리엄과 스노우바운드를 상금만을 노리는 빅 게임 헌터라고 비판했다.


특히 그와 같은 팀 동료였던 프랑크와 산 루카스는 그와의 친분과 별개로 윌리엄과 스노우바운드의 그늘에 가려졌던 만큼,

그들과 제대로된 승부를 내지 못하는 것이 매우 불만족스러웠다고 했을정도였다.

윌리엄은 그날의 염증증세 만이 아닌 자신의 무게가 일정치를 넘었다는 이유로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더블린의 결승조차 포기할 정도로 스노우바운드의 관리에 철저했다.


그리고 이러한 윌리엄의 관리하에 

스노우바운드는 런던, 더블린, 아헨과 같은 네이션스컵 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최소한의 대회로 올림픽 출전 자격을 확정지었다.





1968년

멕시코시티 하계 올림픽.

그나마 다른 선수들에 비해 비행기를 타는 시간이 짧았으나,

장애물 비월이 치뤄질 승마 경기장은 산소가 부족한 해발 2,300 미터에 있었다.







근데 하필 경기장 근처로 높으신 손님들을 태운 헬리콥터가 착륙한덕에 소음으로 앵간한 말들은 광폭화 상태였는데

저번 도쿄올림픽 당시 난이도를 너무 완화했다고 장애물의 높이를 의외로 높게잡고 시간을 줄여버렸다.


그 덕에 84명의 선수중 윌리엄과 스노우바운드를 포함한 4명만이 제한 시간내에 들어왔고 

무실점자는 윌리엄과 스노우바운드, 영국의 마리안 코크스와 스트롤러 뿐이었다.

사람들은 15명이 아닌 이 4명중 3명이 메달의 주인공이며, 금메달은 스노우바운드와 스트롤러 둘 중 한마리로 좁힐 수 있었다.










(1:33 부터 중간에 뒷다리를 절뚝이는 것이 보인다.)


대망의 결승. 

사실상 영국과 미국 양국 기수간의 대결이자 스노우바운드와 스트롤러의 진검승부였다.

결국 경기도중 최악의 사태가 터져버리고 만다.

하지만 스노우바운드의 승리를 향한 집념 혹은 집착 때문인지 스노우바운드는 멈추진 않았다.

그 덕에 4점 감점으로 끝났다.










(스노우바운드랑 다르게 윌리엄의 표정이 좀 썩어있는데 저때 오만가지 생각 다하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 마리안과 스트롤러는 8점 감점.


비록 운이 따랐다고는 하나 스노우바운드는 10세의 나이에 하나의 업적을 달성하였다.

미국 최초의 장애물 비월 개인 금메달을 따오고 동시에 장애물 비월의 강자들을 배출해온 영국을 꿇렸다.

실패한 서러브레드가 가진 승리에 대한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기뻐해야할 윌리엄은 경기 후에 스노우바운드가 다리를 절뚝이는 것을 보고 겁을 먹었던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스노우바운드는 환자니까 다른 말을 타고 돌면 안되겠냐고 부탁까지 했고 바로 수의사를 수소문했다.

아무튼 스노우바운드는 중간중간 다리를 절뚝였고 그 덕에 메달 수상자들이 한바퀴 도는 이벤트는 느려졌다.



최소 파열 최대 골절인데 다음날 수의사의 진단결과 다행히 굴건염 재발이었다.

일단 본인은 태연했다고 하는데 동료였던 프랑크랑 모리스 및 다른 기수들의 증언은 좀 다르다.

술도 안마시던 사람이 위스키 병나발 불고 자신 때문에 스노우바운드가 죽는거면 어떡하냐고 동료 기수들한테 징징거렸다고 하는데 누굴 믿을진 알아서들 하고.

물론 이덕에 단체전 출전은 못했다.







(칼라 복원을 이상하게 해서 스노우바운드의 하얀 반점이 다 사라졌다.)

윌리엄과 존은 다행히 굴건염이었지만 재발 가능성도 있고 골절될지 모르는 만큼 스노우바운드를 은퇴시키자고 했지만, 

대표팀의 부탁으로 1년동안 재활 후 3년간 다른 말들의 스승 겸 선수로 남아있게 된다.


그덕에 플릿 애플, 슬루피, 메인 스프링이라는 다음 세대의 말들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비록 1972년 뮌휀에서 수상을 실패했지만 저 셋은 장애물 비월 단체전 은메달을 수상한다.


대표팀은 메인 스프링을 타라고 했는데 윌리엄이 곧죽어도 예비로 빠진 스노우바운드의 은퇴식은 이곳이어야 한다고 부탁했던거다.

스노우바운드는 그나마 한번 세계최정상의 자리에 올랐던 걸 아는지 이제서야 윌리엄이 가르쳤던 자세로 착지해줬다.


그리고 스노우바운드와 윌리엄은 1972년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했다.

스노우바운드는 마주인 존의 아일랜드 더블린의 마방으로 이동했지만....

정작 존이 윌리엄한테 후학들은? 스노우바운드 같은 말이 또 생기면? 이러는 통에 대표팀 승마감독이나 미국 승마협회 의장직 등 여러 관련일을 짬처리하게 된다.


그래도 나름 스노우바운드가 계속 눈에 밟혔는지 달마다 한두번은 스노우바운드가 있던 목장에 가서 직접 관리도 하고 산책도 시켜주고 그랬다.

그리고 스노우바운드가 장애물 비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도록 꾸준히 활동하는 등 여러모로 신경쓴 편이었다.


당시 윌리엄의 지인들이 내린 평가가 대략 이랬다.

'그는 미국인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르네상스인이고 신사였다. 이론가에 역사가이며, 완벽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언제나 이성적이며 박식했고 당당했다. 그러나 스노우바운드와의 추억 앞에서는 언제나 감성적이었고 죄인으로서 살았다.'



어찌되었든 나름 미련이 남았는지 여러 장애물 비월 관련 책을 저술하면서 말의 부상이나 그런 것에 대한 대응도 나름 꽤나 써놓았다.



1989년

스노우바운드는 더블린의 목장에서 윌리엄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승부욕을 태우던 라이온하트가 목적을 이루고 잠든 것이다.


그리고 16년 뒤인 2005년에 스노우바운드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뒤 윌리엄은 자신의 인생에서 말을 타고 가장 어려운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할 순간이 찾아온다면, 비록 가장 빠른말도 가장 강한 말도 아니겠지만 스노우바운드는 이를 넘을것이라며 스노우바운드의 승부욕에 나름의 찬사를 남겼다.




"말은 어리고 유치한 개인인 만큼 훌룡한 기수는 좋은 심리학자여야합니다. 

당신이 말들을 훈련시킬 때 말들은 당신이 만드는 환경에 반응합니다. 

당신은 부모, 관리자 및 교육자이며 부드럽게 혹은 무자비 하게 말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목표는 말이 당신과 함께 건물을 향해 달리면 건물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당신에 대한 말의 신뢰감과 자신감을 키우는 것입니다."

<윌리엄 스테인크라우스(William Clark "Bill"Steinkraus,1925~2017) 기승과 점프에 대한 고찰 中>







ps. 윌리엄은 스노우바운드 때문인진 모르지만 경마에서 말을 혹사시키는 것을 좋게 보진 않았다. 인터뷰에선 대놓고 '말은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무한한 사랑을 줘도 부족할 판에 때리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